전남 구례 송정~경남 하동 가탄
지리산둘레길 송정~가탄은 경계를 무너뜨리는 길이다. 산이 강이며, 마을이 숲이다. 이 길 위에 서면 굽이굽이 산이 섬진강으로 쏟아진다. 새벽 강은 물안개를 피어 올리며 산에게 안부를 전한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길은 구례 피아골, 하동 쌍계를 넘나든다. 구례 외곡의 피아골과 하동 화개천이 섬진강에서 만나 속살을 부대낀다. 황장산, 불무장등, 지리의 남부능선들이 골을 만들어 놓았다.
그 골짜기마다 사람이 살고 있다. 날마다 퇴락해가는 산촌이지만 아직도 그 맥을 이어간다. 이 길에는 지리산에서 해방을 꿈꾼 남부군, 왜구의 침탈을 굳건히 지킨 의병들의 최후가 서려 있다.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숲길과 숨어 있던 마을이 모습을 보여 주길 반복하는 이 길에서 가족, 마을, 사회, 나라의 참모습을 그려본다.
‘지리산둘레길’에서는 섬진강의 다양한 모습을 즐길 수 있다. 들과 마을을 안고 흐르는 섬진강. 그저 산 그림자로 흐르는 강. 송정~기촌~가탄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에서 목아재를 만나기 직전 숲 가꾸기를 한 능선이 있다. 그곳에서 여느 강과는 다른 섬진강만의 특색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강을 사이에 두고 백운산과 지리산 줄기가 서로를 뽐내며 섬진강 물속으로 뛰어든다. 눈앞에는 화개와 구례·광양으로 이어지는 남도대교와 마을들의 모습과, 저 멀리 남해 앞바다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아련하다. 섬진강은 협곡의 산지하천이다. 강을 사이에 둔 마을이 토목공사를 하거나 개발행위를 할 때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미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나마 주변에 공장이 없어 어렵사리 깨끗함을 유지해 왔기에 더 아련하고 애틋한 강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피아골로 알려진 연곡사계곡. 단풍으로 이름이 높다. 해마다 가을이면 단풍제가 열린다. 피아골로 드는 초입이 기촌마을. ‘행주 기씨가 처음 정착해 기씨촌이라 칭했는데 기씨가 중기마을 조동으로 옮겨가고 다른 성씨들이 입주해 기촌(奇村)으로 불렀다.’
지자체마다 유행처럼 마을 이야기를 하고, 이 시대의 지상과업으로 마을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대부분 시설에만 치중하고 역사나 문화를 정리하는 곳은 드물다. 마을회관에는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자리 잡고 있고, 마을 앞 계곡에는 솔숲이 잘 가꿔져 있다. 솔숲의 모습이 제비를 닮았다 해서 골 안 전체를 연곡(鷰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계곡 가까운 벼랑과 인근 사면을 절개한 곳에 펜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위태로워 보인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방향으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법하마을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르마(법, 진리)를 좇아 깨달음을 얻는 것. 문자대로 해석하면 법하(法下)는 법을 받은 곳이다. 옛날 법하마을 위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로 가는 둘레길은 황장산 능선을 사이에 두고 구례와 하동으로 행정구역이 나뉜다. 이곳에 ‘어안동’이 있다.
몇 가구가 자립할 정도로 분지가 넓다. 이제는 마을이 사라졌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법하마을이다. 이름의 인연일까! 법하마을에는 화개초등학교가, 바로 옆 가탄마을 초입에는 화개중학교가 있어 배움의 법을 전하고 있다. 진리의 말씀이 세대를 이어가듯 아이들이 꿈을 키워가는 마을학교들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기를….
19번국도에서 1km 정도 마을로 향하는 큰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주차장이 송정마을 둘레길 시작점이다. 송정은 안한수내, 한수내로 불리며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과 도로 주변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집들을 모두 일컫는 이름이다. 이국적인 펜션을 뒤로하고 숲에 드니 반송이 벤치와 함께 ‘가족 소풍’을 나선 우릴 반긴다. 그림 그리는 일을 평생수행으로 택한 이화백과 그의 아내, 그리고 사회운동으로 뼛골을 삭이다 인생 2기를 준비하는 벗, 실속 없이 이런저런 행사로 바쁜 나와 아내. 늘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산다. 가족들이 손잡고 걷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벤치에서 잠시 쉬는 동안 이야기꽃이 핀다. 반송이 자리를 잘 잡았다. 오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길을 ‘송정 반송길’이라 부르기로 했다.
숲길이 이어진다. 길섶에 동백꽃 같은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그 아래 무수히 떨어진 꽃이 눈길을 끈다. 산목련만큼이나 빛깔이 곱다. 올해는 산을 걷다 보면 유달리 노각나무꽃이 눈에 많이 띈다. 덕분에 둘레길에서 꽃을 보는 즐거움이 한여름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두 나무인줄 알았는데 길게 무리를 이루거나 홀로 피어 꽃망울 앞 다투며 터뜨린다. 노각나무는 사슴뿔처럼 수피가 미끄럽고 얼룩무늬가 있다. 10년 이상 자라야 꽃을 피운다고 한다.
스스로 묻는다. 10년이란 시간을 공들여 살아봤는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 봄부터 울고… 7년을 기다려 꽃을 피우는 얼레지… 여기, 10년을 기다려 비로소 꽃을 피우는 노각나무…. 그저 말 없이 길 옆을 지키고 있다.
섬진강 래프팅 60×47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강은 산을 따라 휘감아 돈다. 구례~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국도는 꽃길과 물길로 유명하다. 봄맞이 상춘객의 눈을 호사시킨 벚꽃의 화려함이 꽃비로 사라진 한여름, 물길을 따라 유유자적해 본다. 숲길, 하늘길, 물길 넓고 너른 공간 어디에나 길이 날 것 같지만 새도 나는 곳이 따로 있고, 물고기도 제 길을 찾아다닌다. 길을 찾는 수단은 세월에 따라 달라진다. 섬진강 물길은 한때 물산의 중요 이동 통로였다. 하구부터 곡성까지 배가 다녔었단다. 그 내력이야 짐작할 뿐이지만 화개나루까지 배가 드나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섬진강 댐으로 수량이 적어졌지만 구례 간전교에서 화개까지 래프팅이 무난하다. 가족 소풍을 기념하기 위해 섬진강 래프팅을 했다. 지리산이 너른 품을 열어 강과 하늘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품어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