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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자료 스크랩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의 역사와 애환
운영자 추천 0 조회 115 13.08.15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의 역사와 애환
 




애국가 부르기 운동
조선 내부에서 국가國歌제정의 움직임은 각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활발히 진행되고 서구 문물과 접촉하며 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고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뒤10여 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서재필이었다. 그는 1896년부터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해 법치에 따른 민주주의와 민권의식을 배양해 자주자강의 독립된 국가건설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독립신문』발행 초기부터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즉 각종 애국가류를 게재하였다. 1896년 4월부터 1899년 6월까지 『독립신문』에는 32편의 애국가류의 가사가 소개되고 있고 가사가 없는 것까지 합하면 36편이 넘을 정도이다.

또한 『독립신문』에 각종 애국가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례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1896년 9월 22일자 『독립신문』논설을 통해 각종 공공장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주창하였다. 애국가를 만들기 위해 조선 정부의 학부學部에서 애국가 제정위원회를 조직해 학생들로 하여금 매일 국기에 경례함과 동시에 애국가를 부르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한 국민의례 운동의 제안은 단순히 제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협회를 비롯해 일반 민간에서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행사 때 초청된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조선가>, <독립가>, <진보가>를 불렀고, 또 다른 초청 학교의 학생들은 <애국의 노래>를 불렀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조선개국기원절 축하행사 때 역시 배재학당 학생들이 ‘오백여년 우리 황실 만세무궁도우소서’라는 축수가逐壽歌를 불렀다.

『독립신문』을 통해 확산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공립신보』, 『신한민보』등의 신문과 각종 학회지 등으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애국시가들이 <애국가>, <국민가>, <독립가>, <계몽가>, <진보가>, <찬미가>, <대한가>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905~6년경 이런 애국시가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일명 『애국창가집』으로 편찬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제정과 보급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 민간을 중심으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이 추진될 때 조선정부는 1897년 10월 근대적인 자주국가임을 만방에 선포하기 위해 국가國家의 명칭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새로 성립된 대한제국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각종 제도를 개혁하였다. 아울러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민영환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제권 강화의 명분으로 1900년 12월 29일 칙령 59호 ‘군악대 설치건’을 반포하고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한 후 군악 교육을 지도할 경험 많은 교사로 독일 영사 바이페르트Weipert의 주선을 받아 독일인 에케레트Franz Eckert를 초빙하였다.

에케레트는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새로 신설된 군악대에서 음악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황실과 정부 행사에는 물론이고 시민을 위한 음악 연주도 시도하며 한국사회에 서양음악의 이해를 고조시켰다. 대한제국 정부는 서울에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에 나선 에케르트에게 대한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국가’작곡을의뢰하였다. 정부가 내세운 작곡 지침은 먼저 각국의 국가 음악을 참고하되 우리의 음악인 궁상각치우에 바탕을 둔 애국가를 작곡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기존에 알려진 고종황제 탄신일(1901. 9. 7)이 아닌 1902년 1월 황실의 신년 하례식 때 초연된 것으로 추측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7년 7월 1일자로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발간하였고 동년 8월 15일 에케르트의 애국가를 공식 국가로 제정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는 그동안 민간층에서 불리던 각종 애국가류를 하나로 통합한 의미를 갖고 있다. 대한제국 학부는 『대한제국 애국가』악보를 각 학교에 보급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지시하였고, 외부外部는 각 조약국에 국가 제정을 통보하고 악보를 보급하였다.



일제의 금지와 새로운 애국가의 탄생
그런데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정부의 지시와 의도대로 크게 확산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내용으로 보면 첫째로 가사가 한문투로 되어 있어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대한매일신보(1908. 7. 10)』는 한문투의 가사가 노래 부르기 어려우니 쉽게 개량해줄것을 제안하였다. 둘째로는 곡조가 부르기 어려웠다. 이는 우리의 전통 음악인 아악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전통 민요의 영향 때문이었다. 요컨대 에케르트가 헐버트H. B. Hulbert가 채록했던 ‘바람이 분다(Korean Vocal Music, The Kprean Repository, February 1896)’라는 민요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전통 민요가락을 서양음악으로 전이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담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 외부적 요인으로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애국창가’를‘불량창가’로 간주하고 부르지 못하게 단속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모든 애국가류의 소개를 일체 금하였다. 더구나 일제는 한국인들이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통해 국권회복과 독립을 꿈꿀 수 있다고 우려하고 금지곡으로 엄격히 단속하였다. 대신 일제는 일본 창가로 된 『신편 창가집』을 발간(1914. 3. 15)해 기미가요를 비롯한 일본식 노래를 강요하였다.

이처럼 가사나 곡조에서 부르기 어려웠던 점, 일제의 금지곡 조치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
제국 애국가의 보급과 확산을 막았다. 그런데 이런 제 요인보다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시세의 변화였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를 보면 '상제上帝난 우리황제皇帝를 도우소셔 / 만수무강萬壽無疆하샤

해옥수海屋壽를 산山갓치 삿으소셔/위권威權이 환영瀛에 치샤/ 아천만세於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하소서 /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셔'라고 하며 국가보다 황제의 안위와 복록만ㅇ르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전근대적인 가사 내용은 국망 이후 독립운동으로 국민주권의 근대적인 민주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1899년 6월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라는 <무궁화가>와 작사 미상으로 오늘날의 애국가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추어 애국가로서 더 많이 보급되었다. 그러다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금의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를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애국가로 정착하였다. 다행히 곡조는 1935년 11월 안익태에 의해 오늘의 애국가 곡조로 새로 작곡되었다. 그 후 미주 한인들의 요청을 받은 중경의 임시정부가 1940년 12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새 애국가로 승인해 줌으로써 가사와 곡조는 현재의 애국가 형태로 거듭났다.

나라의 상징물인 국가의 제정과 확립 과정을 볼 때 대한제국 애국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였지만 원치 않은 국망과 격변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녹아 들어간 새로운 애국가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국가로 부르는 현재의 애국가는 인위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수난과 역경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소중히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월간 문화재 사랑(Vol 103) 2013년 06월호..........
글.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사진. 문화재청, 독립기념관, 안익태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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