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1(신172) /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장~16장까지 다락방 강화에 보면 근심이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옵니다.
16:6절에는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근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근심이 태산 같은데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제자의 대표격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정부장인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책임 목자는 떠나고 대표는 세 번 부인하고 재정부 실무자는 책임 목자를 팔아먹습니다.
이런 모임에 소속되어 있는데 어떻게 근심이 안 생기겠습니까?
더 큰 근심은 제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보상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처자식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미래에 대해서 근심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근심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근심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장래 문제로 근심합니다. 학과 공부나 자녀나 장래 일로 인하여 근심이 됩니다. 취업, 건강, 직장일, 노후 문제로 근심이 됩니다.
우리가 근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에는 빌리브(belief)나 트러스트(trust)로 번역됩니다. 빌리브는 안 보이지만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트러스트는 그를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근심에 쌓여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장래를 맡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로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하는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6:32)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관심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빌리브 할 수 있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트레스트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육신을 입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고 질병을 아십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것도 아시고 외로움을 아시고 소외감을 아십니다. 나의 취업 문제로 걱정하는 것을 아십니다.
가정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아십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도마의 의심도 아시고 빌립의 부정적인 사고도 아십니다.
가룟유다의 이기심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아시고 그들을 연약함과 죄악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든 근심을 아시고 책임져주시니 예수님을 믿고 맡기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육신을 가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은 것처럼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요한복음 15:4~5(신174) / 내 안에 거하라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농부는 포도나무에 지주대를 세우고 나무들 사이를 철사로 연결하여 줄을 쳐놓습니다.
가지는 그곳에 뻗어나가서 열매를 맺습니다. 한 송이에 150개 정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포도나무요, 제자(우리)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포도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맺을 수는 있지만 그 열매는 참 포도가 아닙니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첩 하갈을 얻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맺은 열매 이스마엘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에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은 바로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 맺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반복하여 딱 한 가지만을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포도나무 비유에 거하라는 말이 7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거하는 것은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포도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끊임없이 교제해야 합니다.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말씀과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쳐도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질병의 시험, 사업 실패의 시험, 학과 공부의 실패가 있어도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봄바람이 불어오고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주님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를 떠나면 가지는 말라서 비틀어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머니와 태아가 탯줄로 연결된 것과 같습니다. 탯줄이 끊어지면 태아는 죽음입니다.
성도가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때부터 죽습니다. 아무것도 안 됩니다. 주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열매 없음을 탓하기 전에 주 안에 거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5:16(174) / 우리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심이라고 하십니다.
16a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셨고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을 먼저 찾아 회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시며 찾아오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오셔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양치는 모세를 먼저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고기 잡는 베드르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낳은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낳은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주도적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식은 먼저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선택한 것은 특별히 더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고르셨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성경에는 택하셨다는 말을 골랐다는 말로 나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다 부르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우리를 골라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받은 것은 큰 은혜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후에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사 43:1)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이 선택하신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장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물 가운데 지날 때나 불 가운데 지날 때나 지금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보호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6b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목적은 첫째,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열매 맺게 도와주십니다. 해, 구름, 비, 바람, 산소, 질소....열매 맺는데 필수 요건입니다.
우리가 세상 풍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붙잡아주십니다.
사랑의 열매, 순종의 열매, 감사의 열매, 공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어 삶이 변화되게 하시고 마침내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열매가 항상 있도록 축복하십니다.
둘째,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택한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받는다는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여 약속하십니다.
우리 택함 받은 자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의 특권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예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무엇입니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내 욕심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응답하여 주십니다.
히브리서 11:6(365) / 믿음으로 사는 삶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어느 엄마가 세 살 된 어린아이에게 시편 23편을 암송시켰습니다.
아이는 첫 부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리로다"라고 자꾸 틀리게 암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성구 암송을 바로 잡아 주다가, 자신이 삶 속에서는 성경을 딸처럼 읽고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지만, 내게는 부족한 것도 참 많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사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삼상 17:33-37을 보면, 다윗과 사울 왕의 다른 점이 나옵니다. 쉬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삼상 17:33)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다. 너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지만, 골리앗은 젊었을 때부터 싸움을 많이 해 온 뛰어난 군인이다.”
(삼상 17:34) 그러나 다윗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왕의 종인 저는 내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양을 물어 가면,
(35) 저는 그놈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그놈이 저를 공격하면, 저는 그놈의 턱을 잡고 때려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삼상36) 왕의 종인 저는 사자와 곰도 죽였습니다. 믿지 않은 블레셋 사람인 골리앗도 제가 죽인 사자나 곰과 같은 꼴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욕했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37) 여호와께서는 나를 사자와 곰에게서 구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이 블레셋 사람으로부터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사울 왕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사람이 경험과 지식과 무기로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은 상대가 안 된다고 다윗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의 믿음대로 이기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높은 사람, 돈 많은 사람을 믿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못 믿고 삽니다.
믿음이란 영적 감각입니다. 어거지가 아닙니다.
육체에 시각, 청각, 촉각이 있듯이, 영에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살아야지 경험과 감각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경험, 지식, 의지로 사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 말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없습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실체,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사람을 믿고 살았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침묵하신 이유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돈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판단하고 살았던 것이 죄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한 주간, 믿는다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서 이기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33:29(구318) / 가장 행복한 사람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사람들의 소원은 행복입니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행복은 인간 실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인생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이가 상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돌보다는 밥이 많다며 껄껄껄 웃는 사람이며, 밥이 타거나 질어 아내가 미안해할 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대범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소유해야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셋째는 정신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는 약간의 재산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 설문조사의 결과처럼 생생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한 사람이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행복의 근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시기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런데 왜 신명기 저자는 행복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은 죄로부터 시작됩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양심의 번민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고독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두려움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죄책감과 가난, 부끄러움이 왔습니다.
그래서 죄 문제 해결 없이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만왕의 왕이자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26절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와 29절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를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행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하며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시며 낮의 해가 상치 않도록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지키고 보호해주십니다. 영원하신 팔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라가 정치와 경제가 어지럽습니다. 힘써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권, 어느 권력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경험해 왔습니다.
오직 우리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28:20 /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영국의 한 큰 회사가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내었습니다.
수도 런던에서 출발해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까지 왕복으로 가장 빨리 갔다 오는 방법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워낙 큰상을 내걸었기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로, 어떤 사람은 고속열차를 타고 가다가 택시를 탄다거나, 어떤 사람은 승용차로 지름길로 갔다 오면 가장 빨리 다녀올 수 있다면서 별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일등상을 탄 사람은 이런 대답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갔다 오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최고의 복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함께하시면 가장 평안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임재의식, Coram Deo’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임재 의식을 통해 나는 내 생각과 영혼 속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서도 살아난 것도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3:19~30).
세 친구들을 풀무불 속에서 나오게 한 후 느부갓네살이 전국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분이 천사를 보내 그분의 종들을 구해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자기 몸을 바치면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절하지 않았다.
(단 3:29) 그러므로 이제 나는 선포한다. 어느 민족이나 나라나 어떤 언어로 말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함부로 대항해 말을 하는 사람은 몸을 토막 내고 그의 집을 거름 더미로 만들 것이다. 자기를 믿는 사람을 이렇게 구해 낼 수 있는 신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후 왕은 바벨론 지방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벼슬을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요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큰일을 하셨던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73:23~28을 보면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28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로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막아주는 것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로다””라고 간증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가장 복된 자입니다.
함께 하심이 곧 구원이요, 능력이요, 사랑이요, 평안입니다.
주님이 늘 회사와 사장과 직원들에게 함께하시는 되기를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아멘.
호세아 6:1~2(구1262) /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라는 것은 초청이고 돌아가자는 것은 부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오라,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오라는 것은 떠나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고 돌아간다는 것은 떠났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치료해 주시고 싸매어 주신다는 것이 1절의 약속입니다. 회복을 의미하지요.
창세기 3장에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이 두려운 나머지 숨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이 떠나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순간 불안과 절망과 질병과 고통이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고치려면 병원으로부터 도망칠 것이 아니라 명의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영원한 치료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돌아가는 행위를 가리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2절 말씀은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호3:1-2)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좇지 아니하고, 도리어 바알이라고 하는 우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쾌락을 따랐습니다. 영적 간음죄를 지으므로 고통과 어려움이 온 것입니다. 회복의 방법은 돌아오는 길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남편인 마귀를 좇고, 우상을 좇고, 죄를 범하고, 쾌락을 추구함으로 결국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하는 것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야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찢으셨지만 도로 싸매어 주시고, 치셨으나, 도로 낫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용서해주시고 크신 긍휼로 싸매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바로 본문에 기록된 내용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것, 그보다도 쓰리고 아프고 고통스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 회복의 축복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고 살며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