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1:1-2
(1)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
(디모데전서 1:1-2)
디모데 전 · 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디모데란 이름은 바울의 서신 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데 디모데는 소아시아 루스드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희랍 사람으로 젊어서 죽은 듯하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종교적 교육을 받으며 자란 견실하고 유대교 적 신앙이 독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바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한 청년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만년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며 그 후에는 순회 전도 사업도 한바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낸 것은 주후 63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의 특색은 디도 서와 함께 목회 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들이 맡은 교회를 어떻게 목양 하느냐,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대한 교훈이 그 주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이 주장하는 사도 직
바울은 언제나 그의 서신 서두에 강조하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 직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디모데에게 다른 서신보다 사도 직분에 대하여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복음의 사역 자로 활동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에 대한 소명 의식을 뚜렷하게 심어 주기 위한 것으로 보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을 구주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소망이신
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 직분이 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도 직분이 자기가 원해서 취한 것도 아니며 자기의 사명 의식에서 가진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기의 학식의 소산이거나 어떤 사람의 권유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의 사명감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명령을 따라 사명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의 불가피성과 사명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2 \ 1:1-2
(1) 명령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에 좌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은 뭐라 해도 명령을 받은 것은 자기니 자신은 그 직분을 포기할 수 없으며 등한히 할 수도 없으며 누구의 권유로라도 그 직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2) 명령을 받았다는 말에는 명령을 받은 바울의 사명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받았으니 다만 하나님께, 오직 예수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될 것을 사명으로 각오한 바울의 결심을 볼 수 있습니다.
(3) 이 같은 바울의 표현은 교회에서 받는 모든 직분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은 것입니다. 명령으로 받았으니 그 직분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직분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처럼 수건에 싸서 땅에 묻어 두는 일로 책망을 듣지 않도록 직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명령에 대한 책임은 회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 않겠다고 물러선다고 물러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받지 않겠다고 던져 버린다고 던져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준 그 달란트를 어떻게 했느냐고 반드시 물으시는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므로 맡은 자의 책임을 모두 감당해야 합니다.
잘하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칭찬을 듣게 됩니다. 이 칭찬은 장차 받을 상급과도 연관이 됩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직분에 대한 책임은 지극히 적은 일에까지 미칩니다. 그리고 그 칭찬 역시 지극히 적은 일부터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못하거나 고의적으로 회피하면 주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됩니다. ‘악하고 나태한 종’이란 불명예스런 책망을 듣게 되고 거기에 해당되는 문책을 받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으로 이끌고 양육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전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을 큰그릇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은 대단히 보람이 있고 상급 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교회의 직분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받았다고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영광스럽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 1:3-7
(2) 경계의 목적
(디모데전서 1:3-7)
3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마게도냐로 갈 때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2년간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디모데를 데리고 그레데 섬을 지나 에베소까지 왔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마게도냐로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무르게 한 것은 에베소 교회에 진리에서 떠난 거짓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거짓 선생들이 에베소 교회에서 한 일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전하는 일들로 이 일이 계속 교회에 만연되어 영적으로 혼미해지면 안될 것이기 때문에 디모데를 그곳에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1. 다른 교훈
바울은 디모에게게 이르기를 교회에서 다른 교훈 등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지 말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세 가지 잘못된 교훈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교훈, 두 번째는 신화, 세 번째는 끝없는 족보 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란 6절에서 밝혀 주는 대로 율법을 가미한 복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일이 기껏 복음을 전파하면 그곳에 유대인의 선생들이 나타나 이 다른 복음을 뿌려 놓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이들에 의해 곤욕을 치렀으며 이들에 대해 가장 심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들을 전하는 교훈을 왜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이들은 복음을 전하되 율법을 가미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격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다만 복음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들은 다시 율법적인 생활을 하여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교회에서 그럴듯하게 받아 드려졌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은 복음의 진리를 잘못 깨닫게 하여 복음을 율법의 뜻을 이루는 하나의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구원의 도리를 흐려 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교훈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4 \ 1:3-7
디모데에게 이런 다른 교훈이 에베소 교회에 번지지 못하도록 경계시킨 것입니다.
다음에 신화에 대한 경계의 말도 당부했습니다. 신화란 그 당시 올바른 성경적 교훈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확대시켜 신화적인 이야기를 꾸며 그럴듯하게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전설적 이야기를 가미하여 흥미를 갖게 한다던가 어떤 성경적 인물에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성경에 적용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성경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끝없는 족보란 족보에 관계된 이야기에 중점을 두어 교회에서 시끄럽게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자신들의 지파나 조상에 관한 족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이런 일에 흥미를 가지고 착념하므로 복음의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복음적 진리를 알려는 순수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어려운 문제만 골라서 목회자에게 따져 묻는 식으로 답변에 곤경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난 문제는 하나의 비유적 해석이기 때문에 정확한 답변으로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같은 일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경계의 목적
목회자가 경계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세 가지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청결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청결은 회개로 이룹니다. 죄가 마음에 거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선한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보거나 범하면 양심이 민감하게 활동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양심을 따라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결코 하나님의 교훈과 모순됨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진리에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에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이 이런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목회자는 양 무리들을 잘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5 \ 1:8-11
(3) 율법의 바른 해석
(디모데전서 1:8-11)
복음이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은 율법과 복음이 대립되거나 상반되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며 따르는 자가 율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용하고 있기 때문임을 바울은 이곳에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1. 율법은 선한 것이다.
율법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율법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책임인 것입니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다 선한 것입니다.
② 율법은 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인간들은 도저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③ 율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율법은 일획 일점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율법이 정죄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폐기되거나 변한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너무 거룩하고 의롭고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 율법을 지키는 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우리를 정죄 하므로 우리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롬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같은 사실에 대하여 롬7:22절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율법과 복음의 상호관계
6 \ 1:8-11
바울은 9절 이하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상호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알 것은 이것이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바울이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정의해 보려는 서론인 것입니다.
① 바울이 하는 말은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이란 법을 거역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기 위해 존속하는 것입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온전히 이룬 것이며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옳은 사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의를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롬8: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 받은 사람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인들만을 정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입니까?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란 사실, 자기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과 복음은 모순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복음이 있게 되었고 복음이 있으므로 율법이 더욱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없어도 복음이 존재할 수 없고 복음이 없어도 율법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율법이 능히 어떤 누구도 구원에 이루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율법이 법으로 적용될 사람은 그리스도를 거역함으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거역했기 때문에 부득불 율법의 정죄를 받아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교훈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라고 했습니다.
7 \ 1:12-14
(4) 넘치는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4)
바울은 13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모든 일에 능하게 하신 일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자기는 훼방 자였으며 핍박 자였으며 포행 자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어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된 일에 대하여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그 풍성함을 찬양했습니다.
1. 바울이 긍휼을 입은 이유
13절에서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솔직히 고백한 대로 자기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을 만한 위인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했던 자요, 그리스도인 들을 핍박했던 자요, 그리스도인 들에게 포행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리어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믿지 아니했을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이 말은 알지 못하고 한 일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특별히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긍휼 하심을 받는 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이 회개했을 때에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행한 죄와 모르고 행한 죄를 둘 다 똑같이 간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눅12:47절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에도 심판에도 이 원리는 반드시 적용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도 고의적으로 범죄 하는 행위를 삼가야 합니다. 받는 징계나 심판이 더욱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특히 선생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 ‘선생 된 우리가 더욱 큰 심판을 받는 줄 알라’는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의 감사
바울은 자기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충성 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분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충성된 일꾼의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8 \ 1:12-14
누가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누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인가?
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커야 그가 받치는 충성도 진실하고 참된 것이 됩니다.
② 자기의 삶에 목적을 주님께 두지 않고는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철두철미하게 그의 삶 자체를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고후5:14절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일꾼으로 그의 평생을 보냈습니다.
③ 다음에 누구든지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전심전력하며 그 사명을 다 이루지 않고는 충성된 자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 것으로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지극히 적은 일이라고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14절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도 컸으며 너무나도 풍성했다고 했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믿음도 풍성했으며 사랑도 풍성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믿음과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넘치도록 풍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넘치는 주님의 선물을 잘 받아서 우리 생활 가운데 축복으로 충만히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 1:15
(5) 죄인 중에 괴수
(디모데전서 1:15)
바울은 15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이 바울의 선언은 그 후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일에 인용되었으며 그리스도 앞에 나온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연합 계를 의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죄로 연결시키면서 두 가지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힘차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 오셨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미쁘신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처럼 감탄하고 감격스러운 심정을 억누르지 못한 표현으로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입니까?
(1) 예수님은 거룩하신 창조주가 되시며 인간에게 친히 율법을 주신 분이시며 눈에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나 모두 그 분이 창조하셨으며 그 분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도 그의 말씀으로 온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며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같은 죄인들이 그런 분 앞에 나갈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그 일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뤄진 것은 그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서 죄인과 더불어 잡수셨고 죄인과 말씀을 나누셨으며 죄인을 위로해 주셨고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분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구하려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죄인을 찾으십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자기가 참으로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죄인이지만 자신이 죄인 인줄 모르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연결시킬 수 없는 죄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죄인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명백히 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의지합니다. 양심을 따라 의롭게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자신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사실을 깨댣고 10 \ 1:15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죄인은 바로 이 같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이 같은 죄인을 찾으시는 이유는 그들을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한 세리의 기도를 비유적으로 대조시키신 교훈의 말씀은 한 세리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마음을 찢으며 자신의 죄를 자복 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죄인을 그 죄에서 건져 내사 그리스도의 의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무화과나무 옷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가죽 옷을 입히셨습니다. 탕자는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좋은 옷을 내다 입히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허물 가운데서 살아온 옛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이제 새 사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는 사람만이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죄인을 불러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죄인을 불러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2.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라
둘째로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했던 죄인었지만 알지 못하고 했으므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베냐민 파요, 유대 교인이며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 열심 있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이 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위대한 사도의 반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가리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든 죄인 중에 괴수로 여기며 가슴을 친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누구나 자신의 심령과 마음을 살펴보면 우리의 입에서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적인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아름다운 심정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차 바울처럼 보람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 \ 1:16
(6) 바울로 본을 보이신 하나님
(디모데전서 1:16)
바울은 16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이유에 대하여 두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일체 오래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러한 일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1.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
바울은 그리스도의 훼방 자요 포행 자였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의 긍휼 하심을 입은 것은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벧후 3 : 8, 9절에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그의 긍휼 하심을 나타내신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시는 목적에 대하여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그 죄악 중에서 죽는 것을 결코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는 사람의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죄인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재기 불능한 이런 죄인이었던 자기를 하나의 모델 케이스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거나 자비나 긍휼을 얻을 기회조차 없이 죄를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이미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2. 바울에게 보이신 본
우리는 여기서 바울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인의 심판이 당장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심판 받을 12 \ 1:16
죄인에게조차 심판을 미루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범했을 경우,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이 급속히 내리지 않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일을 이해하셨다 거나 하나님이 못 보신 척 봐 주신다 거나 하나님이 내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도 용서치 아니하십니다. 또 모르는 척 넘어가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우리들 스스로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면서 오랜 기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하나님은 길이 참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곧 속히 죄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을 뿐 아니라 더욱 형통하는 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죄악 중에 형통하는 경우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잠 23 : 17절에서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했습니다. 시 73편에서 아삽은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실족할 번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73 : 1 - 12, 16 - 19.
세상에서 악인들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은 한 가지 죄를 더 추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기리 참으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심판을 잊으신 것도, 심판에서 제외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형통하는 생활은 결코 그리스도인 들이 부러워할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길이 참으심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이루게 되지만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심판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긍휼과 사랑을 깨달아 속히 회개하여 더욱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3 \ 1: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