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은 디펜스 코리아에 김추성님이 쓰신 글입니다. 재미있게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
과달카날 전투
11.산타크루즈 해전
(이 해전의 일본측 명칭은 '남태평양 해전'입니다.)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일본군 대부대와 핸더슨 비행장의 미해병대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던 1942년 10월 18일,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군 사령관 Robert L. Ghomley 중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당시 태평양 지역의 미군장병들에게 대단히 신망이 높던 William F. 'Bull' Halsey 중장을 임명했습니다.
곰리 중장의 해임은 사보 섬 해전의 책임을 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발단은 사보 섬 해전이었지만..
1942년 9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니미츠, 킹, 포레스탈의 3자회담에서 사보 섬 해전의 책임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분석 결과 패전의 책임을 특정한 누구에게 묻기가 곤란하다는 것이 니미츠 제독의 결론이었습니다.(실제로 사보 섬 해전 당시 현장 지휘관이었던 Richmond Kelly Turner소장은 사보 섬 해전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계속 전투임무에 머물러 있었고 1944년 3월 7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했죠.)
다만 그 때부터 당시 미함대 사령관이었던 킹 제독은 곰리 제독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곰리 제독이 해임된 직접적인 이유는 오히려 사보 섬 해전 이후에 그가 보여준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니미츠 제독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니미츠 제독은 9월 28일부터 시작된 남부태평양군에 대한 시찰여행 중 곰리 제독이 보여준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과 과달카날에 미해병대가 상륙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시찰 한 번 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매우 실망했죠.
그리고 다음날 직접 과달카날 섬에 날아간 니미츠 제독은 밴디그래프트 소장 이하 미해병대가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투지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을 보고는 큰 감명을 받았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과달카날 전투를 직접 관장해야 하는 남태평양군 사령관에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곰리 제독을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사령부로 돌아가자 10월 15일, 참모들과의 회의를 거쳐 곰리 제독의 해임을 결정하고 당시 Frank Jack Fletcher 중장의 후임으로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하러 남태평양으로 가고있던 핼시 제독에게 예정된 과달카날 시찰을 중단하고 즉시 남태평양군 사령부가 있던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로 직행하라고 명령합니다.(그때까지 남태평양 지역의 항모기동부대를 지휘하던 플래쳐 중장은 기함인 항모 사라토가가 8월 31일 일본 잠수함 I-26의 어뢰를 맞아 3개월간의 수리를 요하는 피해를 입었을 때 가벼운 부상을 입어 미본토에 휴가를 가는 형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임으로 Thomas Kinkaid 소장이 임시로 항모기동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 사령관 자리에 핼시 제독이 취임하러 가던 중에 갑자기 곰리 제독의 후임으로 남태평양군 사령관이 되어 버린거죠. 따라서 킨케이드 제독은 항모기동부대 사령관직에 계속하여 눌러앉아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핼시 제독이 누메아에 도착한 10월 18일, 니미츠 제독은 곰리 제독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핼시 제독을 남태평양군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핼시 제독이 곰리 제독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과달카날 섬의 해병대들은 말라리아에 걸려 야전병원에 누워있던 환자들까지 전부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 장병들이 핼시 제독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편, 진주만에서는 10월 16일, 한달여만에 급히 수리를 마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고속전함 사우스다코타호와 함께 출항하여 남태평양으로 향합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3발의 폭탄을 맞고 겨우 살아남은 엔터프라이즈는 9월 10일 절뚝거리면서 진주만에 입항했습니다.
당시 엔터프라이즈의 수리에는 최소한 3개월이 걸린다는 진단이 나왔으나 이미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되어 3개월의 수리를 요하는 손상을 입었던 항모 Yorktown을 불과 72시간만에 수리하여 미드웨이 해전에 내보냈던 경험이 있는 진주만의 해군 공창에서는 과달카날 섬의 정세가 급박해지자 하루 24시간 내내 수리작업에 피치를 올려 5주일만에 엔터프라이즈가 다시 전열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한 거죠.(이 때 엔터프라이즈는 구형의 1.1인치 대공포들을 신형의 40mm Bofors 대공포 16문으로 교체했습니다.)
진주만을 출항하여 계속 남진한 엔터프라이즈호 중심의 제 16기동부대는 10월 23일,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와 Espiritu Santo 섬 동쪽에서 만나 킨케이드 소장의 지휘 하에 제 61기동부대를 형성하여 트럭 섬에서 남진 중인 일본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Santa Cruz 섬의 북방으로 이동합니다.
당시 제 16기동부대는 항모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전함 사우스다코타, 중순양함 포틀랜드, 대공경순양함 San Juan, 그리고 8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 17기동부대는 항모 호넷을 중심으로 중순양함 펜사콜라, 노스 햄프턴, 대공경순양함 San Diego, Juneau, 그리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61기동부대는 항모 2척, 전함 1척, 중순양함 3척, 대공경순양함 3척, 그리고 구축함 1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죠.
함재기는 합계 169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과달카날 섬에서의 일본군의 3차 공세를 지원하고 한편 그것을 저지하러 나올 미항모기동부대를 격파할 임무를 띠고 트럭 섬에서 남하 중이던 일본 함대는 나구모 주이찌 중장 지휘하의 제 3함대와 곤도 노부다께 중장이 지휘하는 제 2함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총지휘권은 곤도 제독이 쥐고 있었죠.)
나구모 제독의 제 3함대는 다시 2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나구모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공격부대(항모 쇼가꾸, 즈이가꾸, 경항모 즈이호, 중순양함 1척, 구축함 8척)와 아베 소장이 지휘하는 전위부대(전함 히에이, 기리시마,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8척)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곤도 제독의 제3함대는 경항모 준요,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죠.
합계 정규항모 2척, 경항모 2척, 전함 2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4척으로 이루어져 미함대보다 훨씬 우세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함재기 수도 212대로 미함대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함대의 배치는 가장 선두에 제2함대, 거기서 130km후방에 아베 제독이 지휘하는 제3함대 전위부대, 거기서 다시 100km 후방에 나구모 제독의 제3함대 주력부대가 자리잡고 있었죠.
태평양의 전 함대 세력을 집결시킨 듯한 미일 양국의 대함대가 시시각각으로 거리를 좁혀가고 있던 10월 25일 정오가 약간 지난 시각, 에스피리투산토 섬을 이륙한 Aubrey Fitch 소장 휘하의 PBY Catalina 비행정이 제 61기동부대로부터 북서쪽으로 600km떨어진 해상에서 25노트의 속력으로 남동쪽으로 항진하고 있던 일본 항모기동부대를 발견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일본 항모기동부대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2시간 30분 동안 항진한 후 엔터프라이즈는 12대의 Dauntless 급강하 폭격기에게 수색폭격의 임무를 주어 360km전방까지 날려보냈고, 한 시간 후인 오후 3시 30분에는 일본항모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 채로 12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6대의 Avenger 뇌격기, 그리고 11대의 Wildcat 전투기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수색폭격'이란 225kg 짜리 소형폭탄을 장착한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을 2대씩 짝지어서 일정지역을 수색하도록 내보내는 것입니다.(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는 공격임무에서는 450kg짜리 대형폭탄을 달고 출격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2대씩 짝지어서 책임지역을 수색하다가 적을 만나면 모함에 위치를 보고한 후에 폭격을 가하고 이탈하여 귀환합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수색 중이던 수색폭격기들이 보고된 위치로 몰려들어 적함대에 폭격을 가하고는 역시 이탈하여 귀환합니다.
그러고 나면 이번엔 적함대의 위치를 확인한 모함에서 발진한 제1파 공격대가 적함대를 공격하게 되죠.
한편, 모함에 돌아온 수색폭격기들은 이번에는 450kg짜리 폭탄을 달고 제2파 공격대로서 적함대를 공격하러 다시 출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폭격기가 항속거리가 꽤 길고(1770km) 비록 속력은 느리지만(시속 394km) 맷집이 비교적 좋은데다 방어화력도 그렇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서(기수에 12.7mm기관총 2정, 후방석에 7.62mm기관총 2정) 비록 속력과 기동성은 발군이지만 비교적 화력이 약하고 맷집 또한 형편없는 일본군의 A6M2 제로전투기와의 대결에서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함대를 발견했을 경우 기습적으로 폭격을 가하고 전속력으로 이탈하는 전법을 쓰면 호위전투기 없이도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던 거죠.
사실 나구모 제독은 자신의 함대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침로를 변경하여 북상해버려 엔터프라이즈를 출발한 제 10비행대의 항공기들은 일본함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Air Group 10은 당시 엔터프라이즈에 실려있던 항공대입니다.)
게다가 이 항공기들은 모함에 해가 진 후에 돌아오게 되어 야간착함을 해야만 했는데 조종사들의 경험이 부족하여 선두기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나머지 항공기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착륙했으나 결국 돈틀레스 폭격기 3대와 아벤저 뇌격기 3대가 불시착하여 승무원 중 Frank Miller대위가 사망하는 손실을 입었죠.
26일 0시 11분, 에스피리투산토의 기지를 출발한 카탈리나 수상기가 제 61기동부대의 북방 480km지점에서 다시 나구모 제독의 항모기동부대를 발견하고 3시간 동안 따라다니다가 항모 즈이가꾸 부근에 어뢰를 떨어뜨리고 달아납니다.(당시 수색활동을 하던 카탈리나 수상기들은 어뢰를 한 발 싣고 다니다가 적함대를 만나면 뇌격을 가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례였죠.)
이 어뢰는 명중하지 않았지만 이로써 자신의 함대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구모 제독은 다시 변침하여 북상합니다.
그러면서 미함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남쪽으로 Kate뇌격기에 수색임무를 주어 파견합니다.
한편 누메아의 남태평양군 사령부에서 적함대 발견의 소식은 들은 핼시 제독은 즉시 제61기동부대의 킨케이드 제독에게 'ATTACK-REPEAT-ATTACK' 이라고 단 3단어로만 이루어진 그 유명한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사실 이 카탈리나 수상기는 적함대 발견 사실을 누메아의 남태평양군 사령부에만 보고하고 제 61기동부대에는 보고하지 않았죠
. 따라서 카탈리나 수상기의 정찰보고내용이 제 61기동부대의 킨케이드 제독에게 도착했을 때 는 이미 엔터프라이즈가 보유한 거의 모든 돈틀레스 폭격기가 수색폭격의 임무를 띠고 출격한 다음이었습니다.
즉 10월 26일 아침 6시 5분에 엔터프라이즈는 자신이 보유한 거의 모든 돈틀레스 폭격기를 2대로 나누어서 수색폭격임무를 주어 출격시켰던 거죠.
수색폭격기들이 엔터프라이즈에서 140km쯤 떨어진 지점을 지날 때 2대의 돈틀레스 폭격기는 미함대 쪽으로 접근하는 1대의 일본군 케이트 뇌격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서로 상대방 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냥 지나쳤죠.
두 함대의 수색기들이 서로 엇갈려 지나친 얼마 후 Vivian W. Welch 대위와 Bruce A. McGraw 중위가 몰던 2대의 돈틀레스 폭격기들이 2대의 전함과 1대의 순양함, 그리고 다수의 구축함들을 발견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바로 아베 제독의 전위함대였습니다.
웰치 대위의 보고가 있은 지 20분 후에 제 10수색비행대장인 James R. Lee와 그의 요기인 William E. Johnson 소위의 돈틀레스 폭격기 2대가 제 61기동함대의 서북방 360km지점에서 정규항모 2척을 거느린 나구모 제독의 주력부대를 발견했습니다.(사실 이 주력부대 내에는 경항모 즈이호도 있었으나 리가 발견하지 못한 거죠.)
그들은 즉각 적항모 발견 사실을 모함에 보고하고 폭격을 가하려고 했으나 그 때 제로 전투기 8대가 급상승해서 공격해오는 바람에 폭격에 실패하고 그냥 달아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달려드는 제로 전투기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그 중 3대를 격추시킵니다.
한편 주변 해상에서 수색을 하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의 제 10수색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폭격기들이 리의 보고를 듣고 곧 일본함대의 상공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Stockton Strong대위와 그의 요기 Charles Irvine소위가 조종하는 두 대의 돈틀레스 폭격기가 일본함대 상공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30분, 고도 4,000m에서 태양을 등지고 가장 이상적인 폭격위치를 점한 두 폭격기의 바로 아랫쪽에는 일본함대의 경항모 즈이호가 항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함대의 제로 전투기들은 한꺼번에 몰려든 돈틀레스 폭격기들을 쫓아다니느라고 다른 곳에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두 대의 급강하 폭격기는 즈이호를 겨냥하여 그대로 급강하하면서 각각 1 발씩의 225kg짜리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그 때의 고도가 450m, 마치 교범에 따라 시범을 보이는 듯한 완벽한 폭격이었습니다.
두 개의 폭탄은 정확하게 즈이호의 비행갑판을 직격, 직경 15m에 달하는 큰 구멍을 만들면서 즈이호에게 이후 9개월 간의 수리를 요하는 대손상을 입혔습니다.
만약에 당시 투하된 폭탄이 450kg짜리 대형폭탄이었거나 또는 즈이호의 함재기들이 전부 이륙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마 즈이호는 그대로 침몰했을 겁니다. (이 때 즈이호의 함재기들은 이미 미항모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모함을 떠난 후였습니다.)
이렇게 자로 잰 듯한 멋진 폭격을 선보인 직후, 스트롱 대위와 어빈 소위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제로 전투기들의 추격을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주해야만 했습니다.(이 때 양 폭격기의 후방사수였던 C. H. Garlow와 E. P. Williams는 꽁무니에 따라붙었던 제로 전투기들을 한 대씩 격추했습니다.)
제 10수색폭격대는 경항모 즈이호에 2발, 구축함 1척에 1발의 명중탄을 기록하고 10여대의 희생을 치르고는 16대가 엔터프라이즈에 무사히 귀환합니다.
(공격당하고 있는 일본 경항모 즈이호)
한편 그 날 오전 7시 40분, 항모 쇼가꾸를 떠난 수색기가 일본함대에서 320km떨어진 지짐에서 행동하고 있던 호넷 중심의 제 17기동부대를 발견했습니다.
나구모 제독은 8시 18분, 69대로 편성된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한편 29대로 편성된 미함대의 제1차 공격대가 William 'Gus' Widhelm대위의 지휘 하에 항모 호넷의 비행갑판을 떠난 시각은 오전 8시 40분, 일본군보다 20분 정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오전 9시에는 엔터프라이즈에서 남아있던 모든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들을(3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와 9대의 아벤저 뇌격기) 8대의 와일드 캣 전투기의 호위 하에 제2차 공격대를 편성하여 일본함대를 향하여 출격시켰는데 이 공격대는 호넷의 공격대와 합류하지 않고 따로 목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9시 20분에는 다시 호넷에서 25대로 편성된 제3차 공격대가 일본함대를 향해 떠났죠.
총 3파에 걸쳐 휘하의 함재기들을 일본함대의 공격에 내보낸 제61기동함대는 일본군의 공습에 대비했습니다.
제 16기동함대와 제 17기동함대는 서로 15km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대공원형진을 형성했고 상공에는 38대의 직위전투기를 배치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공격대는 100km쯤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군의 공격대와 만났습니다.
James Flatley소령이 지휘하던 미군 공격대는 일본군 공격대와 교전하여 제로 전투기 4대를 격추하였으나 아벤저 뇌격기 3대를 잃었고 다른 아벤저 한 대는 손상을 입고 모함으로 되돌아갑니다.
양비행대의 교전이 끝난 얼마 뒤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서북쪽 70km의 거리에서 일본군의 공격대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제61기동함대의 직위전투기 와일드 캣 38대는 엔터프라이즈의 신출내기 항공통제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이 장교는 직위전투기들을 항모로부터 너무 가까운 거리에 또한 너무 낮은 고도에 배치해두는 바람에 일본기들이 쉽게 항공모함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오전 9시 55분, 호넷에서 발진한 직위전투기인 와일드 캣 4대가 최초로 2대의 일본군 폭격기를 격추했을 때는 이미 일본기들이 호넷의 전방 30km까지 접근해 있었습니다.
2분 뒤인 9시 57분,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Albert D. Pollock대위와 Steve G. Nona소위가 각각 1대씩의 일본군 폭격기를 격추했습니다. 이 때 엔터프라이즈는 마침 바로 곁에까지 접근했던 스콜 속으로 들어가 버림으로써 일본군의 공격은 호넷에 집중되었습니다.
얻어맞고 있는 호넷
미군의 와일드 캣 들이 필사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일본기들을 요격하는 동안 22대의 아이찌D3A 'Val' 급강하폭격기와 18대의 Kate 뇌격기의 동시공격이 실시되었습니다.(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의 목표접근고도 차이를 이용한 이러한 동시공격을 호넷이 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처음 두 대의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들은 빗나갔으나 세 번째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이 호넷의 우현비행갑판 후부에 명중했습니다.
이어서 공격중대장 중 한 명인 세끼 대위가 불타는 애기와 함께 함교 부근의 비행갑판에 자폭하여 50kg짜리 폭탄의 폭발과 함께 불타는 항공유가 함교를 덮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2대의 케이트 뇌격기가 호넷의 후방에서 어뢰를 발사하여 함체 중앙에 각각 4.5 x 9m짜리 구멍 두 개를 뚫었고 그 곳으로부터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와 보일러실과 전방기관실을 침수시켰습니다. 이어서 3대의 Val 급강하폭격기가 전방 비행갑판에 잇달아 폭탄을 명중시켰고, 불타는 폭격기 한 대가 다시 전방 포탑에 자폭하여 전방 엘리베이터까지 파괴했습니다.
호넷은 순식간에 비행갑판의 앞쪽 절반이 화염에 휩싸이며 수분 내에 동력과 전투능력을 동시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호넷에 대한 일본기들의 잇단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구축함 Morris와 Russel이 원형진을 벗어나 호넷의 바로 옆에까지 접근하여 꼬리를 물고 호넷에게 달려드는 일본기들에게 대공포화를 쏘아댔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때 시간이 10시 20분, 호넷이 화염에 휩싸여 불타는 모습은 15km떨어져 스콜 속에 숨어있다가 방금 빠져나온 엔터프라이즈의 함상에서도 똑똑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호넷을 공격하고 돌아가던 일본기 중 한 대가 스콜에서 방금 빠져나온 엔터프라이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즉시 나구모 제독에게 그들이 모르고 있던 미군의 두 번째 항모의 존재를 알렸고 이 보고를 접한 나구모 제독은 즉각 엔터프라이즈를 향하여 또다른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한편 호넷을 떠난 미군의 제1차공격대는 도중에 아베제독의 전위부대를 발견했으나 무시하고 계속 전진하여 나구모의 주력부대 상공에 도착합니다.
그 때 시간이 오전 10시 30분, 즉각 반격에 나선 제로 전투기들과 20분간에 걸친 공중전을 치러 3대의 돈틀레스 폭격기를 잃고(이 때 공격대장 위드헬름 소령도 격추됩니다.) 몇 대의 제로 전투기들을 격추한 제1차공격대는 현장에서 항모 쇼가꾸와 이미 피격되어 연기를 내뿜고 있던 경항모 즈이호를 발견하죠.
이미 피격된 즈이호를 무시하고 나구모 제독의 제독의 기함인 쇼가꾸를 향하여 11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가 공격을 개시, 3발의 450kg폭탄들을 명중시킵니다.
쇼가꾸는 즉각 화염에 휩싸이며 모든 기능을 상실했지만 다행히 함체 내에 항공기가 없었고 연료파이프가 완전히 비어 있었기 때문에 침몰만은 면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제 2차공격대는 중간에 일본군의 공격대와 교전한 덕분에 안 그래도 빈약한 공격력에서 4대의 뇌격기가 다시 격추되거나 모함으로 되돌아가 버려 공격력이 더욱 약화되었습니다..(급강하 폭격기 3대, 뇌격기 5대, 호위전투기8대)
게다가 일본기와의 공중전에서 연료를 소모한 호위전투기들이 연료가 모자라서 나구모의 주력부대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만난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에 포함되어 있던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에게 폭격과 뇌격을 가합니다.
하지만 단 한 발의 명중탄도 기록하지 못합니다.
한편 오전 9시 20분에 호넷을 떠난 J. J. Lynch대위 지휘하의 제3차공격대는 중간에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발견하자 그만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눈앞의 적에 이끌려서 공격하고 맙니다.
그 결과 이 공격대의 전과라고는 중순양함 치쿠마에게 2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대파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한편 10시 20분, 스콜에서 빠져나온 엔터프라이즈는 10시 30분부터 자신이 날려보냈던 수색폭격기들과 자신과 호넷의 직위전투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James Thomas소령이 인솔하는 제 4차공격대를 발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격대는 결국 출격하지 못합니다.
오전 11시, 나구모 제독이 날려보낸 공격대가 습격해 온 것입니다.
레이더에 나타난 일본기들이 이미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을 깨닫자 엔터프라이즈는 즉시 제 4차공격대의 발진을 취소하고 방어태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신출내기 항공통제관이 직위전투기들의 위치를 황당하게 배치하는 바람에 미군기의 요격은 실패하고 말았죠.
게다가 이 친구가 한 술 더 떠서 적기의 위치를 두루뭉실하게 전투기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즉 원래 '적기 몇 대, 모함을 기준으로 방위OOO도, 거리 OOkm, 고도 OOOOm' 뭐 이런 식으로 불러줘야 하는데 이 친구는 그냥 '적기 전방 30km(기준이 뭔지도 말하지 않고)'뭐 이런 식으로 불러줬다는군요. 따라서 오전 11시 15분, 엔터프라이즈의 견시가 일본군의 Val 폭격기를 직접 육안으로 확인할 때까지 미군의 직위전투기들은 단 한 대의 일본기도 격추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엔터프라이즈 공격은 역사상 가장 치열한 항공기 대 대공포화의 대결이 되어버렸죠.
중앙에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1km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치하고 그 주변을 중순양함 포틀랜드,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 및 8척의 구축함으로 둥글게 둘러싸는 대공원형진을 형성한 제16기동함대는 함대상공에 날아든 30대 이상의 일본군 항공기에 대하여 대공포화를 겨눈 채 훈련받은 대로 발포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발포명령이 떨어졌고 엄청난 대공화력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실전 테스트를 거친 대공원형진의 대공포화는 지극히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16문의 신형 40mm보포스 기관포를 새로 장비한 엔터프라이즈와 24문의 보포스 기관포에다가 사격통제용 레이더까지 장비한 사우스다코타는 그야말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 분전 중인 항모 엔터프라이즈)
이 전투에서 절반 이상인 15대 이상의 일본기들이 격추되었지만 일본기들은 엔터프라이즈를 겨냥하여 20발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고, 2발의 명중탄과 1발의 지근탄을 기록했습니다.
최초의 명중탄은 11시 17분, 엔터프라이즈의 전방 비행갑판에 명중했으나 천만다행으로 다시 튀어오르면서 공중에서 폭발했습니다.
이 폭탄은 엔터프라이즈의 함체에 160개 이상의 구멍을 내고, 갑판에 주기되어 있던 한 대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를 파괴했으며 그 폭격기의 후방좌석에서 기총을 사격 중이던 한 명을 전사시켰습니다.
몇 초 후 두 번째 명중탄이 전방 엘리베이터 부근에 명중하여 격납고 안에서 폭발, 항공기 7대를 파괴하고 손상관리팀과 의료팀을 포함한 40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죠.
2분 후 이번에는 우현 바로 바깥쪽에서 지근탄이 터져서 현측 장갑을 찢어발기고 연료탱크 2개를 파괴했습니다.(다행히 비어 있었습니다.)
이 때 생긴 폭풍으로 격납고에 있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한 대가 좌현까지 날아갔고, 또다른 한 대는 튕겨올라 비행갑판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바로 밑에 있던 대공포 진지에 거꾸로 쳐박혔습니다.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엔터프라이즈는 속도와 전투능력을 유지했고, 대공포화도 11시 20분에 발사중지명령이 내릴 때까지 계속 불을 뿜고 있었습니다.
불과 5분간의 전투에서 일본기의 공격을 비교적 적은 피해로 막아내면서 15기 이상의 일본기를 격추한 제16기동부대는 딱 15분 동안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11시 35분, 무라따 시게하루 소령이 이끄는 16대의 케이트 뇌격기로 이루어진 제 2차공격대가 내습해 왔습니다.
이번의 공격에서는 일단의 직위전투기를 이끌고 있던 Stanley 'Swede' Vejtasa대위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일차 공습에서 엔터프라이즈에 폭격을 가하고 이탈하는 Val 폭격기 2대를 격추한 베타자 대위는 즉시 4,000m로 고도를 올려 마침 엔터프라이즈에 접근하고 있던 제2차 공격대의 케이트 뇌격기들을 기동부대 전방 15km지점에서 덮쳤습니다.
베타자 대위와 그의 요기인 Dave Harris대위는 일본군의 케이트 뇌격기를 위쪽에서 반복하여 공격하는 전법으로 탄환이 다 떨어져서 귀환할 때까지 6기를 격추했습니다.(그 날 베타자 대위는 단 한 번의 출격에서 혼자서 무려 7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진기록을 수립했습니다. 5대의 적기만 격추해도 에이스 호칭을 붙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전투기들이 3대를 더 격추해서 이제 7대가 남은 케이트 뇌격기들이 엔터프라이즈를 노리고 달려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상처를 입고 추락 직전에 있던 한 대의 케이트 뇌격기가 발사한 어뢰 한발이 구축함 Smith의 함수에 명중하여 28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화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유능하고 재치가 번뜩이는 이 구축함의 장교들은 화재가 발생한 구축함을 끌고 27노트의 속도로 고속항진 중인 전함 사우스다코타 바로 옆에 다가가서는 사우스다코타가 일으키는 파도를 뒤집어씀으로써 순식간에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 몇 분 후 이 구축함은 다시 대공포화를 난사하면서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오전 11시 44분, 살아남은 케이트 뇌격기 중의 2대가 엔터프라이즈의 좌우에서 동시에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인 Osborne Hardis대령은 교묘한 조함술로 2발의 어뢰를 모두 피하는데 성공했습니다.(그 중의 한 발은 바로 10m옆으로 비껴갔다고 합니다.)
나머지 5대의 뇌격기 중 4대는 압도적인 대공포화에 의해 어뢰를 발사하기도 전에 격추되어 버렸죠.
나머지 한 대가 가까스로 어뢰를 발사했으나 엔터프라이즈는 이것 역시 간단히 회피해 버렸습니다.
오전 11시 59분, 여전히 건재한 엔터프라이즈는 자신과 호넷의 함재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대가 착륙하자마자 다시 함대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제 2함대의 경항모 준요를 떠난 일본군의 제3차 공격대는 야마구찌 마세오 대위의 지휘 하에 18대의 발 급강하폭격기와 호위를 맡은 12대의 제로 전투기로 이루어져 오후 12시 20분, 제16기동함대의 상공에 쇄도했죠.
또다시 사우스다코타와 엔터프라이즈의 보포스 기관포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순식간에 야마구찌 대위의 탑승기를 포함한 4대의 발 급강하폭격기가 격추되었습니다.
일본기들은 엔터프라이즈에 1발의 지근탄을 기록했고 전함 사우스다코타의 1번 포탑에 1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죠.
또다른 폭탄이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의 갑판을 꿰뚫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불발탄이었습니다.
오후 12시 35분, 15대의 발 급강하폭격기의 세력으로 다시 내습한 일본군의 제 4차 공격대를 무난하게 막아낸 엔터프라이즈는 항공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넷과 자신의 함재기를 모두 수용해야만 했고 게다가 전방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엔터프라이즈는 전투기, 급강하폭격기, 뇌격기의 순서로 함재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죠.
금방 격납고가 꽉 찼고 갑판 위에 항공기들이 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수용한 항공기 숫자가 적정 숫자인 85대를 넘어가자 갑판 위의 공간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여 그 이후에 착륙한 10대 정도의 뇌격기는 4개의 어레스팅 기어 중 1번과 2번의 2개 밖에 사용하지 못했죠.
드디어 마지막 항공기까지 수용하자 95대의 항공기를 가득 싣게 된 엔터프라이즈는 적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한 상태가 되었고 이 상태로는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킨케이드 제독은 드디어 26일 오후 2시, 제16기동부대에게 남쪽으로 변침하여 전장을 이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측의 곤도 제독과 아베 제독은 자신들의 우세한 수상함 세력을 이용하여 야전을 감행할 결심을 하고 전속력으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제17기동부대는 호넷을 살리기 위하여 눈물 겨운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축함 모리스와 러셀의 도움으로 겨우 화재를 진압한 호넷은 엔터프라이즈가 일본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동안 중순양함 노스 햄프턴으로 견인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2번의 실패를 거친 후에 오후 3시경, 드디어 노스 햄프턴이 3노트의 속력으로 호넷을 견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호넷의 승무원들은 보일러 세 개의 가동을 재개했고 오후 4시경에는 함정내부의 전력을 재가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후 4시 20분, 경항모 준요를 떠난 15대 규모의 공격대가 내습했습니다.
놀란 노스 햄프턴은 급히 견인색(밧줄)을 끊고 공습에 대비했습니다.
이 공격대는 호넷의 우현에 1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기관실을 침수시키고 배를 우측으로 14도 기울게 만들었습니다.
오후 4시 40분에 내습한 소규모의 발 폭격기 편대의 공격은 무사히 넘겼으나 호넷의 경사도는 18도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점에서 호넷의 함장인 Mason대령은 퇴함명령을 내렸고 이후 몇 시간 동안 주변의 함정으로 승무원들을 옮겨 실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일본군은 소규모의 공습을 계속했으나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한편 호넷의 절망적인 상태에 관하여 보고를 받은 핼시 제독은 일본군이 호넷을 도꾜만에 끌고 가서 구경거리로 삼지 못하도록 격침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구축함 Mustin과 Anderson이 호넷을 향하여 그들이 가진 어뢰16발을 모두 발사했으나 3발 밖에 명중되지 않았고 이어서 5인치 포탄 400발을 발사했으나 역시 격침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강력한 일본군의 수상함대가 추격 중이라는 것을 알게된 제17기동부대의 잔여함정들은 호넷의 격침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했습니다.
그날밤 10시 30분, 미함대를 추격하던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가 모든 기능을 상실한 채 아직도 떠있는 호넷을 발견했습니다.
일본군은 견인을 시도해 보았으나 호넷의 파손 정도가 너무 심해 견인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구축함에서 4발의 어뢰를 쏘아 호넷을 격침했습니다.
그 때 시간이 1942년 10월 27일 오전 1시 35분..
지난 4월 18일, 초전의 승리에 기고만장해 있던 일본의 수도 도꾜를 공습해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던 역전의 항모 호넷의 최후였습니다.
그리고 27일 오후, 곤도 제독이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변침, 북상함으로써 산타크루즈 해전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견인중인 호넷.)
이 해전에서 미해군은 항공모함 호넷과 구축함 Porter가 격침되었고,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중파되고 전함 사우스다코타, 경순양함 산 후앙, 그리고 구축함 스미스가 소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 일본해군은 격침된 함정은 없었고 항모 쇼가꾸와 경항모 즈이호, 그리고 중순양함 치꾸마가 대파되었고 구축함 4척이 중파 또는 소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쌍방의 전과를 놓고 볼 때 이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는 일본해군이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죠.
다만 항공기의 손실은 미해군이 74대, 일본해군이 92대로 일본군이 더 많았고 항공기 승무원 중 전사자도 미해군이 33명인데 비해 일본해군은 70명으로 2배 이상 많았죠.
아직까지는 일본해군이 보유한 제로 전투기의 성능이 미해군의 와일드 캣 전투기의 성능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대략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숙련된 조종사를 많이 상실한 일본해군이 드디어 조종사들의 기량에서 미해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 때부터 조종사의 기량면에서 미해군에게 밀리기 시작한 일본해군은 1943년 초 속력 및 상승력, 방어력, 화력등 기동성을 제외하고는 공중전에 필요한 능력의 모든 면에서 제로 전투기를 압도하는 성능을 가진 미해군의 신예 전투기 F6F Hell Cat이 실전배치되기 시작하자, 공중전에서는 완전히 일방적으로 미해군에게 학살당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둘째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첫 선을 보인 대공원형진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이죠.
특히 24문의 40mm 보포스 기관포와 사격통제 레이더를 갖춘 전함 사우스다코타는 대공사격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여 10월 26일, 혼자서 무려 26대의 일본기를 격추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이 해전에서의 일본군 항공기 손실의 1/4이상을 혼자 격추한 셈이죠.)
대활약을 펼친 미 전함 사우스다코타
한편 이러한 항공기와 조종사의 엄청난 손실을 견디지 못한 일본해군은 이후로는 함대항공전을 회피함으로써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전 때까지 2년 반동안 함대항공전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