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KS 창립10주년 기념』 기고칼럼(2)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 혜경 김준선생
김 규 석
1. 새마을교육의 정신적 기조 동광원과 귀일원 정신
김준은 1926년 전남 영광에서 김명섭 장로와 조교촌 권사의 둘째 아들로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다. 그는 철이 들면서 우리집은 잘사는데 왜 다른 집은 굶주리며 가난하게 살까? 하는 의문과 불공평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부모님 몰래 쌀과 밥을 훔쳐다 굶고 있는 가정에 가져다주고, 마루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밥상을 마다하고 마당의 멍석에서 머슴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이리농림학교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에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어느 주일날 종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곳이 재매교회(현 신안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들은 설교는 과거 어느 교회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순수하고 차원 높은 진리의 말씀이었다. 설교가 끝난 후 말씀하신 분을 뵙고 싶은 마음에서 찾아가니 막 점심상을 받고 있었다. 그 밥상을 보는 순간, 아! 이 분이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실한 성직자구나! 하는 감동과 함께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바로 동광원 정인세이다.
그 후 부터 방림동 밤나무골에 드나들며 동광원 사람들의 신앙 생활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 곳이 바로 이곳이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후 이현필, 유영모 등과 함께 성경 말씀과 인생에 대하여 논 하면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삶의 가치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데 두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1955년 교수직을 버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똥통을 지고 농사를 지으며 동광원 고아들을 교육시키면서 1959년까지 생활하였다. 동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근검절약, 협동과 자급자족 생활을 습득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은사인 유달영 교수의 추천으로 1960년대 초 재건 국민운동에 참여 하여 경상북도 지부장을 맡고, 그 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원장과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새마을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주역이 되었다.
김준은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실천 방법은 동광원의 정신과 생활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남에게 피해 주거나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동광원의 정신과 삶이 내가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펼친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과 실천운동의 근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인만의 저서 「임자, 막걸리 한잔 하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새마을 연수원장 김준도 과로로 쇠약해졌다. 김원장에게 보약 좀 보내줘, 내가 보내더란 말은 하지 말고. 박정희 대통령이 보약을 챙겨준 김준에게는 새마을운동이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를 사람들은 “새마을 교주(敎主)라고 불렀다” 김준은 동광원과 인연을 맺은 이래로 항상 가족으로서 동광원과 귀일원을 왕래해 왔으며, 1994년부터 2012년까지 귀일원의 이사로 활동 하였다.
2. 새마을교육의 모태 복음농민의숙
1970년대 우리나라의 조국근대화 과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정신운동이 있다.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이 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의 역할이 아주 크다고 하겠다.
특히, 새마을운동사에서 전북 순창군 복흥면과는 뗄 수 없는 인물이 김준이다.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장으로서 새마을운동을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이끌었고,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역임한 김준은 이리농림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1949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한 그는 1951년부터는 갓 출범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임학(林學)을 가르치게 되지만, 교수 임용 3년만에 교수직을 떠나게 된다.
당시 한국의 산야는 전쟁을 겪으면서 황폐해져 있었고, 국가의 근간인 농촌(농업이 산업의 8할)은 몹시도 피폐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덴마크를 전쟁의 폐허에서 푸르게 일으킨 「달가스」를 흠모하며 ‘오직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가 일어설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국립대학교의 교수직을 과감히 버리고 농촌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경찰로부터는 빨갱이 취급을 받기도 하였다. 대학 강단을 떠나 대전, 이리(지금의 익산), 함평 등지의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복음농민운동’을 하던 선생이 전북 순창군 복흥면 답동으로 들어온 때는 1959년 이른 봄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답동으로 오게 된 동기를 살펴보자. 당시 가맛골에는 「평심원」이라고 하는 결핵환자 요양소가 있었다. 이곳을 이끌어가던 사람들은 광주에서 활동하던 순수한 기독교 신앙인들이었다. 이들 중에 광주 동부교회의 목사인 백영흠 씨가 있었는데, 백 목사는 답동에 예배당을 세우고 얼마 동안 전도활동을 하던 중 김준을 만나게 된다.
농민운동을 하면서도 공동생활체를 꿈꾸던 그는 가맛골 산주(백석기 집사)의 양해와 백 목사의 권유를 받고 답동과 가맛골을 무대로 꿈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함께 온 사람들은 그를 따르던 대전농림학원 출신 청년들과 전남 영광에서 따라온 청년 등 십여 인이었다.
김준이 복흥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조림사업이었다. 서두에서 거론한 대로 당시의 산은 대부분 천둥 벌거숭이었다. 전쟁의 폐해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흉년으로 생활이 궁핍해진 농민들이 장작으로 내다 팔기 위해 굵은 나무들을 마구 베어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발과 홍수가 해마다 반복되면서 흉년으로 이어졌다.
그는 고향의 재산을 일부 정리한 자금으로 소나무, 삼나무, 편백나무, 은단풍나무 등의 묘목을 구입하여 가맛골과 답동 인근의 산에 심고 가꾸었다. 그때 심어진 나무들은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량이 자라고 있다.
두번째로 한 일은 임학과 교수들과 공동으로 오리나무 육종 개량연구를 하는 한편, 특용작물 재배와 낙농이었다. 집 부근에는 포도밭을 조성하는 한편, 버섯포를 만들고 종균을 이용하여 느타리와 표교버섯을 재배하였다. 낙농사업으로는 양봉을 들여오고, 비육우를 사육하였으며, 우량품종의 돼지를 들여와 새끼를 번식시켜 주변 농가에 공급하고, 샤넨 종種 젖양을 들여와 길렀다. 채밀기에 나오는 꿀은 광주 등지에 팔아서 생필품 구입자금으로 사용하고, 양유는 구성원들의 영양을 보충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아주 혁신적인 분야들로써 당시 우리나라의 농촌, 특히 복흥이라는 분지 안에서는 전혀 보지도 못했고, 생각지도 못할 매우 앞선 모습들이었다.
세 번째로 한 일은 주민들과의 대화였다. 당시 주민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들어와서 보지도 못한 일들을 벌이는 데에서 오는 반감과 경계심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전도하며 수요일과 일요일 밤이면 예배시간을 갖고, 끝난 후에는 농사에 필요한 의견들을 주고받곤 하였다.
복음농민의숙의 핵심 사업중 하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가르친 일이었다. 처음에는 김준과 함께 온 몇몇 청년들이 예배가 끝난 뒤에 청소년들을 모아서 영어, 수학, 새로운 농사법 등을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았다. 소문이 돌자 얼마 가지 않아서 배우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원근에서 모여들어 결국 김준의 주관으로 중학의 정규과목 대부분을 가르치게 된다. 교재는 광주서중학교에서 헌책을 모아 보내주었다. 숙식을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 속에 교수법은 신진 농법을 위주로 한 실습과 이론이 반복되고, 기독교 신앙이 가미된 수업이었다. 또한, 학생들의 근면성과 체력을 키우기 위하여 새벽 4시면 구성원 모두가 일어나 새벽달리기와 냉수마찰로 하루의 첫 일과를 시작했다.
당시에 한국에서 발행되는 유력한 월간지로 『사상계』가 있었는데, 이 잡지사에서 선생의 공동체와 학생들에 관하여 취재를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까지 이름 없이 운영되던 학숙에 붙여진 이름이 『복음농민의숙 福音農民義塾』이며, 여기에 관한 특집기사가 『사상계』<1959년 11월호>에 소개된 바 있다.
이후, 의숙은 1962년 봄까지 운영되고, 김준은 1962년 여름에 복흥을 떠나게 된다. 가맛골 산주가 5․16 후 가맛골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아 사업에 투자하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투자한 사업이 실패로 끝나면서 가맛골이 채권자에게 양도되어 부득이 가맛골에서 벌이던 일들을 접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또 하나의 일이 선생을 부르고 있었다. 5․16 후에 출범한 「재건국민운동」을 이끌던 유달영 박사의 추천으로 「재건국민운동」에의 동참을 하게된다. 이런 두 가지 일로 김준은 복흥을 떠나게 되지만, 「재건국민운동」에의 동참은 선생이 훗날 새마을운동을 이끌어가게 되는 단초가 된다.
김준의 복흥 생활은 삼년 남짓이었으나, 산간 오지(奧地) 복흥으로서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이웃 주민들에게는 말보다 행동으로 계몽의 길을 걸었고, 농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답동과 가맛골에서의 공동체 생활 삼년은 김준 자신으로서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새마을운동을 이끄는 데에 원동력이 되었고, 새마을교육의 큰 틀을 짜는 데에도 복음농민의숙이 밑그림이 되었다고도 했다.
당시 복흥에서는 국민(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한다 하여도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극히 적었다. 이럴 때에『복음농민의숙』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커다란 행운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의숙을 나온 사람들은 일부는 검정고시를 거쳐 상급학교엘 진학하여 공직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있고, 이곳에서의 교육을 생업에 이용하여 축산이나 작물재배를 해온 사람들도 있다. 졸업생 상당수가 사회의 동량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준은 개인적인 욕심은 추호도 없는 분이었다. 농심(農心)을 알고, 오로지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 전체가 잘 산다고 믿었던 분이다. 혜인(惠仁) 국희종이 나환자촌 건설의 꿈을 접고 복흥에 오게 된 것도 김준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김준의 호는 혜경(惠耕)이요, 국희종의 호는 혜인(惠仁)이다. 국희종이 복흥으로 오기로 작정하면서 서로 호를 지어 나누어 갖게 되는데, 김준은 은혜로 밭을 갈고, 국희종은 은혜로 의술을 펼치자는 뜻이 들어있다.
복흥이 어두울 때 횃불을 높이 들어 밝혔던 분,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살게 된다고 믿었던 분,
복흥과 인연이 깊어 복흥을 잊지 못하는 혜경(惠耕) 김준(金準)은 새마을운동으로 민족중흥의 기틀을 놓았던 분이다.
3.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준의 리더십
김준은 새마을운동의 중심에 서서 농촌지도자의 리더십 육성을 통하여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성공에 크게 기여 하였다. 새마을지도자 교육훈련에서 그는 스스로 행동하는 실천적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기독교는 그의 행동 지향적 실천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수는 행(行)치 않고는 말한 일이 없는 것으로 안다. 제자의 발을 씻어 주면서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더 높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기독교 자선단체 동광원에서의 수련은 실천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강화 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실천성은 농촌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그의 열정은 불과 같았다. “교관은 학벌보다는 농촌운동에 대한 애착과 농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몸공(功)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그는 교관요원 선발에서도 실천적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설득보다는 행동, 말의 선전보다는 행위의 사실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실천성은 그의 리더십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새마을교육의 성과에 기여하였다. 그의 언행일치는 새마을운동이전에도 나타난다.
가맛골에서 복음농민의숙을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을 때 그는 실천을 통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하였다. 동과원에서 고아들과 생활할 때 자신이 먼저 실천하여 고아들이 의심을 버리고 믿고 따르도록 하였다.
김준은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信), 즉 믿음이라고 믿었다. 언행이 일치하면 믿음이 생기고 불일치하면 불신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의 실천성은 새마을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깊은 잠에 빠져있던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요인 이었다. 그는 실천성을 자신뿐만 아니라 교관들에게도 강조 하였다. 그는 “왜 새마을운동에 전국민이 절대적 호응을 했느냐 하면 과거는 말만 앞설 뿐 실천이 없었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실천,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솔선수범한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핵심은 생활, 즉 교육입니다”라고 했다.
“새마을은 몸 공을 드리는 것입니다. 대학교육? 실력? 박사? 천만에 말씀입니다. 무한한 부모의 정(情) 그 원리가 바로 공(功)입니다. 그 원리가 새마을교육의 원리입니다. 교관들이 무한히 몸 공을 쏟을 때 새마을교육은 산 교육이 됩니다.”
그는 교관요원의 뛰어난 성과는 높은 물질적 유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주로 그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신념과 성취동기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 하였다. 그는 일선 새마을지도자들에게도 봉사성과 실천성을 교육하였다. 새마을지도자가 마을에서 리더십을 행사하려면 스스로 모범성과 실천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고 이를 가르쳤다. 그는 새마을지도자에 대한 보수제공을 반대 하면서 봉사성을 강조 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인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새마을지도자는 자기희생적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행동과 관념의 일치에 대한 강조는 새마을교육의 성공에 기여하였다.
새마을교육을 회고하면서 김준은 “새마을교육은 농촌과 도시, 농민과 상공인 간, 공무원과 국민 간, 지역과 계층 및 직종 간에 국민화합으로 승화시키고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선도적 역량집결의 구심체라고 생각”한다고 하며 새마을교육의 국민통합의 기여를 강조 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중심에 서서 김준이 보여 주었던 실천적 리더십은 농촌변화에 기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으로는 우선 근대화를 언급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농촌 근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을 이야기하게 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짧은 기간 동안 농촌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환경개선사업과 소득증대사업을 통해 농촌의 삶의 질을 개선하였고, 농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과 용기를 주었다.
이 같은 성과의 요인은 새마을운동이 관념과 이론이 아닌 행동과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마을운동을 평가하면 우리는 또 자연스럽게 김준을 떠올린다. 김준의 순수성과 열정은 농촌개발의 주역이었던 새마을지도자들뿐만 아니라 1970년대 농촌사회의 변화를 목격한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지금도 김준은 ‘새마을지도자의 지도자’로 혹은 ‘새마을운동의 교주’로 불리고 있다.
참고자료
1.귀일원 60년사
2.복흥면지 2011년호
3.전환시대의 행정가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준 론(박종민)
2. 김규석-새마을 운동의 선구자 혜경 김준선생.pdf
[편집자 주]
<글쓴이> 김규식.국제새마을연구소 연구위원. 중앙대학교대학원(행정학 석사), 교보연수원 전임강사(연수과장),
(재)남도학숙 근무, 서울특별시 SMU사회교육원 원장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