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제1번대가 조령 부근으로 진출하였을 무렵인 4월 26일, 일본군 제2번대는 동로를 통한 북진 계획을 변경하여 군위→점촌→문경을 연하는 중로로 이동하였다.
제1번대 고니시와 전공을 다투고 있던 제2번대의 주장인 가토는 제1군보다 먼저 수도 한양에 입성하기 위해 기존 진격로인 안동→영주→죽령→단양→충주를 연하는 경로를 따라 북상하는 것보다는 군위→조령→충주를 연하는 경로를 따라 곧바로 북상하는 것이 한성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보고 북상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가토의 제2번대는 실제로는 상주→문경→조령의 경로를 따라 북상한 고니시의 제1번대보다 하루 늦게 조령을 통과했다.
제1번대와 제2번대는 29일 충주성에서 합류한 후 다음 진격로를 합의한 후 제1번대는 다음날인 30일 큰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시작하여 여주로 진출하였고, 선두부대는 남한강을 건넜으며, 5월 2일에는 북한강을 건넌 후 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한 후 동쪽에서부터 한양을 압박해 갔다.
제2번대는 충주를 출발하여 음산→죽산→용인을 거쳐 역시 5월 2일에는 한강 남안에 도착하였다.
한편 구로다가 이끄는 일본 3번대는 4월 18일 낙동강 하류에 상륙해 김해성을 격파하고 창원, 창녕을 함락시켰다. 제3번대는 여기서 부대를 둘로 나누어 우군(右軍)은 무계→개령→금산(김천) 으로 진군하고, 좌군(左軍)은 초개→합천→거창→지례→금산으로 진군해 금산(김천)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각자 북상하였다.
이보다 앞선 4월 17일 조선 조정에서는 조경을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하였고, 조경은 충청도 우측을 거쳐 오면서 군사를 모집해 약 500명을 확보하였다. 조경이 거창에 도착했을 때 무과 출신의 무장 정기룡이 여기에 합류했다.
정기룡은 원래 이름은 무수였으나, 무과급제 후 왕명으로 기룡으로 개명하고, 이후 신립 휘하를 거치는 등 순수 무골(武骨) 출신으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장수였다.
조경은 정기룡을 돌격장으로 임명하여 정기룡은 기마 수십 기를 이끌고 선봉으로 나섰다.
조경은 조방장 양사준, 돌격장 정기룡 등과 함께 5백여 명을 이끌고 남하하던 중 4월 23일에 신창에서 일본군 제2번대의 좌군과 조우하였다. 조선군측에서는 돌격장 정기룡이 선두에서 일본군에게 맹공을 가하여 적군 10여 명을 참살하였으나, 일본군의 본대가 밀려들자 금산(김천)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경상감사 김수가 군사 400여 명을 모아 조경 휘하로 보내 금산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금산 방어선이 저절로 붕괴되자, 조선군은 추풍령으로 물러나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4월 28일 일본군이 밀려왔다. 돌격장 정기룡이 말을 타고 적진에 난입하여 일본군 수십 명을 해치우는 동안 양쪽에서 일본군의 복병이 나타나 조경을 생포하였다. 정기룡은 급히 말을 뒤로 돌려 조경을 구출한 후 황간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조경군이 서로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으나, 조경이 신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더 이상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낙동강 서안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북상을 하던 일본군 제3번대의 우군(右軍)은 4월 27일에 성주를 유린한 다음, 김천에서 좌군(左軍)과 합류하여 추풍령을 통과하였다.
이로써 일본군 3번대는 그다지 큰 저항을 받지 않는 가운데 청주가도(淸州街道)를 따라서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한편, 4월 26일 이일의 상주 패전 보고를 접한 조정은 서둘러 도성수비 대책을 수립하고, 병조(兵曺)에서는 도성 안의 군사를 징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정안에서는 한양을 지킬 것인가? 피난할 것인가를 두고 중신들 사이에서 갑을박론이 벌어졌다. 결국 대놓고 도망가자는 주장을 하지 못한 피난파가 수성파에게 꼬리를 내려 한양 사수가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 이전을 한성우위장, 변언수를 한성좌위장, 박충간을 한양순찰사로 각기 임명하고 사수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하지만, 한양의 성곽을 지키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한양의 성곽은 전투용이 아니라 왕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도성으로써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방어전투를 위한 성채로서는 길이가 너무 길었다.
그러던 중 신립의 충주패전 보고가 올라오자, 지금까지 결사항전, 죽음으로 한성을 지켜야 한다고 외쳐 되던 사람들도 별 수 없었던지 슬그머니 피난파의 손을 들어 도성수비를 포기하고, 선조가 직접 피난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시간을 벌 요량으로 한강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보광동)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순찰사에게도 한강 방어전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이제 막 무과에 급제한 신임 무관 50여 명과 군사 천여 명을 한강의 도섭(徒涉)이 가능한 지역에 배치시킨 다음, 나룻배를 모두 강 북안에 계류시켜 일본군의 도하공격을 대비하게 하였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이양원과 김명원에게 도성 및 한강 방어를 일임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5월 2일 경 일본군 제1번대와 제2번대가 각각 한강 동쪽과 남쪽에서부터 도착하였다. 김명원은 적의 세력을 보고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무기를 강물에 밀어넣으라고 명령한 뒤 자신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 때 종사관 심우정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총지휘관인 김명원이 전선을 이탈하자 휘하의 군사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부대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강원도 조방장 원호의 군사가 홀로 여주 북쪽의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쪽의 일본군들은 쉽게 도하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 때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이 불가항력을 자인하고 원호의 군사에게 강원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토는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이 없자 병사 한 명을 시켜 북안에 메여 있는 나룻배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타고 수 명이 도하한 다음, 다시 여러 척의 나룻배를 남안으로 가져가 차례로 도하를 완료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쉽게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한양 방어를 포기하고 양주로 퇴각하였다.
이 무렵 충주→양근→용진을 거쳐 북상한 일본군 1번대는 북한강을 건너 5월 3일에 동대문 방면으로 진입하여 텅 빈 도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본군 제 2번대도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도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양을 함락한 일본군 제 1,2,3 번대 주력에 이어 모리 요시나리의 제 4번대 주력까지 입성하여 한양에는 일본군 병력 6만 명이 주둔하였다. 제5번대 이하 일본군 병력도 계속하여 부산에 상륙, 예정된 점령지역으로 진공해 들어갔다.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 재정비를 겸한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초,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면 조선의 왕을 포로로 잡거나, 아니면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고, 조선왕을 인질로 조선전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조선군을 명을 치기 위한 선도부대로 삼으려 했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미 피난을 가버리고 빈 성만을 점령하게 되자 조선군의 협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에 5월 10일, 제2군을 임진강 방면으로 보내 조선군의 반응을 살피면서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5월 16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성 점령의 보고를 받고 아직 대마도에 머물고 있던 제9군과 5천명의 증원군을 부산에 파견하고 제9군으로 하여금 부산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5월 중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한성에 도착하여 제1군을 평안도 방면으로 제2군을 함경도 방면으로 북진을 계속하기로 협의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인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3일, 지휘체제를 개편하여 제3군과 제4군을 구로다 나가마사 지휘의 제3군으로 통합하고 기존 제5군을 제4(후쿠시마 마사노리), 제5(하치스카 이에마사), 제6군(쵸소카베 모토치카)으로 분할하고, 기존 제6군은 제7군으로 서열을 바꾸는 한편 기존 제7군은 예비대로 전환시켰다.
이와 함께 다음과 같이 분지(分地)를 실시하여 점령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는 한편 남해 연안에 부산, 동래, 김해 등 전략 요충지에 왜성(倭成)을 12개의 본성과 6개의 지성으로 쌓는 한편, 현물납세(現物納稅)를 받게 시작하는 등 본격적인 장기 지배체재로 돌입하였다.
● 조선수군
먼저 임진전쟁이 일어나던 당시의 남부쪽의 수군의 관할지에 대해 간단하게 알고 넘어가자.
경상좌도(부산에서 울진까지의 동해안)는 동래에 본영을 두고 있는 경상좌수영(수사 박홍)의 관할지였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휘하에 있는 경상우수영은 거제에 본영을 두고 경상우도(낙동강 하구에서 하동 앞바다의 남해안 일대)의 해안과 도서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여수에 본영을 두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은 여수에서 해남까지를, 해남에 본영이 있던 전라우수영(전라좌수사 이억기)은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 일대를 관할하에 두고 있었다.
개전 초기 동래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휘하 함대를 자침시키고 각각 언양과 남해도로 물러났다. 남해도 근처에서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던 원균은 일본수군이 거제도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육지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옥포 만호 이운룡이 전라도 수군에 구원을 요청하여 남해 앞바다를 지키고자 만류했다.
원균은 그의 건의대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순신은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이에 대해 논의했다. 조정의 명령 없이 타 지역으로 출동이 불가하다는 다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해역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하면 전라도 해역도 위험하게 된다는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의 의견을 따라 출동을 결정하였다.
l차 출동 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실제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포작선을 대량으로 징발한 것은 적에게 아군의 세력을 과시할 목적도 있었다.
1592년 5월 4일 새벽 2시. 여수를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남해도 남쪽으로 미조항 끝에 이르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우척부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의 함대는 계속 동진하여 개이도, 사량도 등을 수색하면서 진격하였고, 본진은 평산포, 곡포, 상주포 등 남해도 일대를 수색한 뒤 소비포 앞 바다에서 합류하여 첫날밤을 숙영하였다.
5일 원균과의 약속 장소인 당포에 이르러 주위에 정찰선을 띄워 원균의 함대를 찾았으나, 원균의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원균은 다음날 달랑 1척의 판옥선을 타고 도착하였다. 원균이 도착한 다음 휘하의 기효근 등도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을 이끌고 개별적으로 합류하였다.
원균에게 그 동안의 전황과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얻은 다음 5월 6일 아침에 당포를 출발하여 거제 송미포에서 숙영하였다. 이 날 밤 거제도 동북쪽 가덕도에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6월 7일 새벽 4시경 송미포를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다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거제도 동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점심때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앞서 항해하던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 등으로부터 적 발견 신호인 신기전이 하늘로 올랐다.
옥포 포구 안에 일본선이 있음을 알게 된 조선 수군 함대는 장사진을 펴고 포구 안으로 일제히 공격했다. 일본전함은 30여 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일본군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노략질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괴멸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 수군이 느닷없이 나타나 기습하자 놀란 일본군의 일부는 배로 돌아와 응전하였으나 조선 수군이 일자진을 펼치고 일본 전함을 에워 싸는 한편, 옥포만호 이운룡이 선봉장을 맡아 돌격하여 천 · 지 · 현 · 황의 총통과 각종 완구를 이용해 총공격을 가하니, 일본군들은 견디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조선수군에게 격침되었다. 결국 도도 다카도라가 이끌던 일본 수군의 대선 16척, 중선 8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이 수장되었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이순신 함대의 손실은 전사자 없이 부상자 1명이다.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영등포 앞 바다까지 진출하여 밤을 지낼 계획으로 군사들을 휴식시키던 중, 오후 4시경이 되자 일본군의 대선 4척과 소선 1척이 지나 간다는 척후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 전선은 조선 수군이 뒤쫓아오자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합포 앞바다에 이르러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추격하던 김완, 이순신(방답첨사), 어영담 등의 함대가 전함 4척과 소선 1척을 격침시켰고, 조선수군은 밤을 타고 이동하여 남포 앞바다에서 숙영하였다. 이날 밤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찾아와 조정이 서울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천도했음을 알려준다.
이른 아침에 진해 고리량에 일본군이 머물러 있다는 기별이 척후선으로부터 왔다. 즉각 출동하여 여러 섬과 포구를 수색하였으나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함대가 항로를 변경하여 저도를 지나 고성쪽으로 서남진하던 중 척후선이 적진포에 일본 수군 13척이 정박 중인 것을 발견했다. 함대가 적진포에 이르니 적선 13척이 포구안에 정박해 있고, 일본군들은 육지에 올라 노략질에 한창이었다.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득광, 중위장 이순신 등이 일제히 공격하여 적선 11척(대선 9척, 중선 2척. 나머지 두 척은 도주함)을 격침시켰다.
이 전투가 끝난 후 함대의 수리와 보급을 위해 전라좌수영 함대는 여수로 돌아가고, 원균의 함대는 고성으로 귀항하였다.
1차 출동 5월 7일~9일까지 3번의 해전에서 일본수군 전함 42척을 격파하면서도 조선수군의 피해는 전함의 손실없이 부상자 1명뿐이다.
이렇게 세계전쟁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이순신 장군의 불패 신화는 시작되었다.
5월 2일 한강 방어에 실패한 도원수 김명원이 변복하고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자, 부원수 신각은 도성 안으로 들어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합류하여 양주 방면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 때 마침 함경도 남병사(南兵使)인 이흔이 수하 병력을 거느리고 도성의 후원군으로 들어오다가 신각의 부대를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신각과 이흔은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대오를 정한 뒤, 적정을 탐색하면서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당시 도성에 입성한 일본군은 한성 근교에서 민가를 습격,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있었다.
5월 중순 어느 날(16일 정도로 추정) 신각 군은 일본군들의 약탈 지역이 양주 등지로 확산될 것으로 판단하고, 일본군의 통행로를 탐색하는 데 주력하여 일본군이 해유령을 넘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각은 곧 해유령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일본군의 귀로를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 날 저녁에 일본군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약탈한 우마에 식량 등을 싣고 도성을 향해 해유령을 넘어 오고 있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일본군이 매복한 지점으로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낮의 약탈에 취해 있었던 일본군은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자도 있었고, 술에 취한 자도 있는 등 조선군에 대한 경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군이 매복지점에 들어오자 신각의 명령에 의해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은 일제히 활을 쏘면서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뜻밖의 기습에 놀라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면서 도주하려 하였으나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70여 명 전원이 섬멸되었다.
개전 이후 조선 정규군의 첫 승리였다. 신각은 조정에 승전보를 보내고 남병사 이흔을 함경도로 돌려보내고, 이양원과 함께 연천 부근의 대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한편 도망갔던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선 붕괴에 대한 조정의 문책을 두려워하여 조정에 장계를 띄워 “신각이 명령을 듣지 않아 패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연일 계속되는 패전에 명목을 잃고 있던 조정은 이 장계를 믿고 신각을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선전관을 보냈다. 하지만 선전관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각의 승전보가 피난 조정에 도착하였다.
조정은 다시 신각의 목을 베지 말도록 선전관을 급파하였으나, 뒤따른 선전관이 현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앞서 떠났던 선전관이 18일 대탄에 도착하여 신각의 목을 베어 버렸다.
● 도망가기 바쁜 조정
4월 30일 도성을 떠난 선조의 피난 행렬이 혜음령을 지날 때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처음 한양에서부터 선조를 따라나섰던 일행들 중 상당수가 이미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임진강변에 도착하였으나 이번에는 건널 배가 5, 6척 밖에 없고, 주위가 어두워 도강이 어려웠다. 그나마 작은 배에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타려고 하여 소란이 일었다.
강변의 옛 승청(丞廳) 건물에 불을 질러 주위를 밝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밤이 되어 동파역에 도착하였을 때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부사 구효연이 음식을 가져와 일행을 맞았으나, 굶주린 일행이 다투어 먹어버려 세자 이하 대신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 몫을 다 먹어버린 사람들이 잘못한 것인데, 허진과 구효연은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 쓸까 봐 달아나 버렸다.
이튿날인 5월 1일 선조는 경기관찰사 권징에게 임진강 방어 대책을 수립할 것을 명령한 다음 개성으로 떠나, 그날 저녁 개성부에 도착하였는데, 개성의 인심이 매우 사나워 백성들 가운데 선조의 잘못을 큰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말리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켕기는 것이 있는 조정인지라 백성들에게는 한 마디 말도 못했지만, 다음날(2일)이 되자 정치적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나라를 잘못 이끈 죄로 영의정 이산해가 파직되고, 좌의정 유성룡이 영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정치판인지라 그날 저녁 유성룡에 대한 탄핵이 있자, 다시 그를 파직시키고, 좌의정 최홍원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유성룡은 아침에 영의정이 되어 저녁에 파직되어 아마도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제직기간을 가진 영의정이 되었다.
선조는 개성에 5월 3일까지 머물러 있다가 도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3일 다시 개성을 떠나 봉산, 황주를 거쳐 7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미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도성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조선군은 임진강을 일본군의 북진을 막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판단하고 전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에 나섰다.
경기도 문산(汶山)과 장단(長端) 사이를 흐르는 임진 나루터는 서울에서 파주를 거쳐 개성에 이르는 길목의 요충지였다.
선조는 한강 방어에 실패한 도원수 김명원이 평양으로 오겠다는 보고를 하자 ‘경기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뽑아서 임진강을 지켜라’고 명령했다.
한편으로는 명나라에서 돌아온 한응인을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에 임명한 후 평안도의 정병 3천 명과 도원수 김명원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되는 독자적인 지휘권까지 부여해 준 다음 임진강 방어선에 투입시켰다.
도원수 김명원과 한응인이 지휘하는 경기, 황해도, 평안도 등의 조선군 총 1만 5천여 명은 강의 북안 장단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누명을 쓰고 죽은 신각 대신에 이빈이 부원수에 임명되었고, 조방장에 유극량, 방어사로 신할이 임명되었고, 경기 감사 권징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홍봉상이 독전관으로는 참전하였다. 충주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의 조선 정규군의 방어선이었다.
김명원 휘하의 7천여 병력은 동파진 나루터에, 유도대장 이양원 휘하의 3천여 명은 연천 대탄 나루터에 포진한 다음, 강변의 선박들을 강북에 집결시키거나 자침시키고, 민가에서 소유한 뗏목을 만들 수 있는 목재들은 사전에 소각시키는 등 일본군의 임진강 도하를 봉쇄하기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하였다.
5월 10일 한성을 떠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제2번대는 파주를 거쳐 13일쯤 문산 쪽 임진강 남안에 도착하여 북안의 김명원 군과 대치하였다. 임진강은 수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나룻배들이 모두 북안에 집결되어 있어서 가토 군은 도하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강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3일 고니시는 본토의 명령을 받아 야나가와 노리노부를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으로 조선조정에 보내었다. 사신으로 조선군의 진영으로 떠나던 야나가와는 제2번대를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임진강에서 일단 후퇴하라고 종용하였다.
야나가와가 조선군측에 강화를 요청한다는 연락을 보내자 조선군측은 3일 안에 행재소에 보고해 회답을 보내겠다고 연락해 왔다. 그러던 중에도 일본군은 임진강 남안에서 조선군과 대치하며 서로 활을 쏘거나 조총을 쏘면서 신경전을 벌이면서 사흘이 흘렀다.
그러던 중 야나가와의 철수 종용을 받아 들인 가토의 제2번대는 17일 강가에 세웠던 막사를 철거하고 무기들을 수레에 싣고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강 북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선군 지휘부에서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한응인과 신할은 일본군의 퇴각으로 보고 강을 건너 추격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도원수 김명원과 일부 장수들은 주저하였다. 그러나 한응인은 이미 선조로부터 김명원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출전을 반대하던 몇 몇 병사를 죽인 다음 독자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이 때 조방장 유극량이 죽음을 무릅쓰고 추격작전을 반대했다. 신할이 칼을 빼려는 듯 하였으나 유극량은 “나라를 위해 반대하는 것이오”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하지 않았으나 결국 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김명원이 주저하고 있는 동안 신할이 강을 건너 추격을 시작했고, 할 수 없이 유극량도 강을 건넜고, 독전관 홍봉상도 뒤를 따랐다.
강 북안에는 5천여 명의 병력만 남기고 1만여 주력을 공격에 투입하였다. 조선군 선봉이 강 남안에 오르자 미처 철수하지 못했던 일본군 잔류 병사들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맹렬히 추격하였다.
조선군은 승세를 타고 파주쪽으로 계속해서 일본군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철수하고 있던 가토가 본대를 재정비한 후 반격을 가해 오자,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밀려 강변으로 후퇴하면서 접전을 벌였다. 조선군은 임진강으로의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밀려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다. 군사를 독려하며 활을 쏘던 유극량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신길은 말을 탄 채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고, 독전관 홍봉상도 전사하였다. 강을 건너려던 조선군은 뒤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에 밀려 강에 빠져 죽거나 일본군의 총, 칼에 쓰려져 갔다.
유성룡이 편찬한 《징비록》에 따르면 임진강변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강물로 떨어져 죽는 조선군 병사들의 모습이 마치 모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과도 같았다고 적혀있다.
김명원, 한응인, 검찰사 박충간과 잔류 군사들은 강 북안에서 속수무책인 채 이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했는데, 이 때 갑자기 박충간이 도망치자 군사들은 도원수가 도망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앞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김명원과 한응인이 군사를 수습하려 했지만 남아 있는 군사는 1천이 채 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아직 도강도 하지 않았는데, 김명원과 한응인은 방어선을 포기하고 행재소로 후퇴했고, 권징은 가평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군 2번대는 곧바로 도강하지 않고 한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임진강 상류인 대탄으로 북상한 후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대탄에 진을 치고 있던 이양원은 일본군이 강 남안에 나타나자 싸워보지도 않고, 군사를 거두어 강원도로 철수해 버렸다.
고니시는 일본군 1번대를 응원군으로 이끌고 벽제관까지 왔다가 승전보를 듣고 서울로 되돌아갔고, 그 뒤 일본군은 작전계획에 따라 길을 나누어 한 편은 개성 쪽으로, 한 편은 강원도 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로써 임진강 방어선도 붕괴되고 방어선은 이제 대동강 전선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일본군은 개전 10여 일 만에 경상도 일대의 주요 읍성을 점령하였지만, 일본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주둔군이 점령하고 있는 일대뿐이었다.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뒤 곧바로 5월초부터 경상도 전역에서 의병군이 대거 봉기하였다.
그 중 가장 먼저 의병군을 일으킨 사람은 의령의 곽재우였다. 곽재우는 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 만인 4월 24일 가솔 5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전 훈련판관 심대승을 선봉장으로 전 훈련봉사 권란을 돌격장으로 삼아 부대를 편성하였고, 관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거두어 무장하였다.
일본군은 작전 계획에 따라 낙동강 하구 김해 칠성포에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싣고 강을 따라 북으로 영산, 창녕, 현평, 고령, 성주, 왜관, 구미, 금산, 상주까지 내륙 깊숙이 물자를 이동시켰다.
곽재우는 의병군을 조직한 후 치고 빠지는 작전 위주의 훈련을 시킨 후 낙동강변을 따라 일본군을 괴롭혔다.
한편 5월 중순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일본군 제6번대의 주장인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부장인 승장(僧將) 안고쿠지 에케에이로 하여금 의령 방면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안고쿠지는 스스로 ‘전라감사’ 라 칭하며, 연도의 수령들에게 감사 행차를 영접하라는 통고문을 보내는 한편 5월 하순에 함안에서 남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입하려 하였다.
곽재우는 안고쿠지가 의령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김해, 창원 지역의 일본군이 남강을 도하하여 의령으로 진입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남강 북안의 정암진 일원에 병력을 매복시켜 놓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정암진(鼎巖津)나루는 부산이나 마산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요충지 중 하나였다. 여기를 건너 산청, 함양을 지나 팔량치로 넘어 남원으로 가거나 육십령을 넘어 장수로 가게 된다.
5월 24일 안고쿠지는 2천 여 병력을 이끌고 정암진 대안에 도착하였다. 안코구지군은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도하 지점을 선정하고, 정찰대로 하여금 도하 후 그들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팻말을 꼽아 표시해 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강 준비를 했다.
밤 사이 곽재우는 군사를 동원해 방향 표시를 늪지대로 돌려 놓고 숲속 요소요소에 복병을 배치하는 한편, 정암진 숲속에도 복병을 배치시켰다. 날이 밝자 일본군 선봉대가 도강을 시작하였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곽재우 의병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뒤이어 안고쿠지 군의 주력이 남강을 도하하여 정암진에 상륙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곽재우 군이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안고쿠지 군은 불의의 기습에 당황하여 조직적인 반격을 하지 못한 채 달아나기 바빴다.
정암진 전투에서 곽재우 의병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일본군 제6번대 별군(別軍)은 더 이상 이 길을 통한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 의령과 삼가 두 현의 군사를 모두 곽재우 지휘 아래 편입시켜 병력이 1천여 명이 되었고, 민가의 양곡도 곽재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전 목사 오운과 박사제가 거느린 3천여 병력이 합세하여 곽재우 의병군은 총 병력이 4천으로 늘어났다.
● 조선수군의 연전연승
조선 수군의 2차 출동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의 출동이었다. 당초에는 6월 4일 출동하기 위해, 전라 우수영에 연락하여 3일까지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월 27일 원균으로부터 일본수군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급보를 받고 계획을 앞당겨 전라좌수군의 단독출전이 되었다.
2차 출동에서부터 거북선이 처음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관해서는 1차 출동시 전투편성에 돌격장이란 직책이 있었던 걸로 봐서 1차 출동시에도 거북선이 출동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일본전함 10척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원균의 급보를 받은 전라좌수영 함대는 우수영과의 약속보다 앞서 판옥선 23척, 협선 15척으로 함대를 편성하고 좌별장 우후 이몽구와 같이 5월 29일 새벽에 수영을 출발하였다.
남해 노량으로 가는 도중 경상 우수영 판옥선 3척 이끌고 대기하고 있던 원균과 섬진강 하구의 하동 부근에서 합류하였고, 일본수군이 사천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함대를 이동시켜 사천을 향해 항해하고 있을 때 일본전함 한 척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나아가 격파하여 서전에 사기를 북돋았다.
사천만(泗川灣)에 도착하여 보니 일본군은 형세가 험준한 곳에 수백 명씩 진을 치고 대항할 태세였으며, 바다에는 12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다. 만(灣)의 입구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바다가 얕고 벌써 썰물이라 판옥선같은 큰 배가 쉽게 돌진할 수 없고, 날도 어두워져 일단 함대를 뒤로 물린 채 공격을 삼가 하였다.
실질적인 연함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헛점을 노려 적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적을 궤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함대를 천천히 후퇴시켰다. 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10리도 못나와 이순신 장군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일본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배에 타고 조선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때마침 저녁 조수도 밀려들어 큰 배도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조선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위력을 드러내었다. 적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각종 총통들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에서는 불꽃이 피어 올랐다. 일본수군은 처음 보는 신병기에 겁을 먹고 속수 무책이었다.
이런 와중에 권준, 어영담, 배홍립, 정운, 김완,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 송성, 이웅화 등의 다른 판옥선들도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은 앞서 다른 해전보다 치열하여 이순신은 전투 중에 왼쪽 어깨에 조총을 맞아 중상을 입고 이후 수년동안 고생하게 된다. 전과로는 적함 12척을 격침시켰다.
날이 저물어 사천만 모자랑포로 이동해 그날 밤을 보냈다.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조선수군함대는 모자랑포를 출발하여 6월 1일 정오쯤에 고성땅 사량도에서 도착하여 하룻밤 휴식을 취하였다. 밤 사이 일본수군이 당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2일 아침 8시경에 사량도를 출발하여 10시경에 당포에 도착하니 적선 21척(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고 약 300여 명의 일본군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노략질에 한창이었다. 이 당시 일본수군은 전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약탈을 위해서 남해안 근방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전투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한결같이 배는 포구에 정박시켜 놓은 다음 뭍에 올라 노략질에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공격 신호와 함께 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포구 안으로 진격하였는데 적함 중 판옥선 크기에 누각이 있는 대선이 있었는데, 붉은 비단 휘장이 늘어진 대장의 배로 누각 안에서는 적장이 꼼짝도 않고 앉아서 지휘하고 있었다.
먼저 거북선이 공격하여 대장군전으로 배에 구멍을 내고, 귀두로 충파를 하니 적함이 흔들리는 사이에 중위장 권준이 적장을 활로 쏘아 맞히고, 바다에 떨어진 그의 목을 우척후장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베어 올렸다. 그러자 일본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갈팡질팡 겁을 내어 도망치는데 총에 맞고 화살에 맞은 자들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적선 21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육지에 상륙하려 하였으나 마침 이때 대선 20여 척이 많은 소선을 이끌고 거제도에 닿았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고, 추격을 포기하고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섬멸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나오자 일본함대는 5리쯤 되는 곳에서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뱃머리를 돌려 도주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진주 창선도로 물러나 숙영을 하고 3일 아침 출항하여 개이도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적함을 찾지 못하고 고성 고둔포에서 숙영했다.
4일 당포 앞 바다로 이동하여 적을 찾고 있었는데, 정오쯤에 전라 우수영 이억기가 이끄는 함대(판옥선 25척)가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이로써 조선수군은 전라좌수영과 우수영, 경상 우수영의 연합함대를 편성하게 되어, 판옥선 총 51척(전라좌수영 23척, 우수영 25척, 경상 우수영 3척)의 대함대가 편성되었다.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수군은 하루동안 작전회의를 하며 착량포에서 숙영했다.
5일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김모 등 백성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당포에서 달아난 적함들이 거제도를 지나 당항포에 있다고 알려왔다. 이동 중 일본전함 6척(대선 4척, 소선 2척)을 발견하고 선두의 정운 등이 달려가 격침시켜 버렸다. 이 일본전함들은 진주성 근처를 노략질하다 그곳을 지나던 유숭인의 기병대에 발견되어 쫓겨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조선수군에게 걸려든 것이었다.
당항포에 이르러 그 곳 지형을 살펴본 즉 포구가 20여 리나 깊숙이 들어가 있으나 그 폭이 넓어서 전선이 들어갈만 하므로 먼저 척후선을 보냈더니 적이 있다는 신호로 신기전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순신은 전선 4척을 포구 어귀에 남겨 두어 후미를 경계토록 하고, 당항포에 이르니 적선 26척(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포구 안에 정박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배는 3층 누각이 있었고 검은 휘장 안에 장수인 듯한 자가 앉아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거북선을 앞세우고 뚫고 들어가 3도 전선이 교대로 집중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필사적으로 반격을 하자, 이순신은 작전을 바꿔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약간의 탈출로를 만들어 주자 일본군은 기함을 호위하며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연합함대는 다시 적을 포위하고 협격하였다.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각종 총통들과 신기전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들이 격침되었다. 곧 적의 대장선이 불길에 휩싸이고 적의 장수가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적함 25척을 격침시켰다. 1척이 남아 있었으나 그대로 둔 채 철수했다. 넓은 바다에서 군사들을 휴식케 하고 밤을 보내며 부장 이순신으로 하여금 강 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남은 적함 1척이 탈출을 시도할 때 요격하도록 하였다.
6일 새벽 탈출을 시도하던 적함은 조선전함의 포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전투가 끝난 9시 경에 일본전함을 불태우고 있는데 경상 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뒤쫓아와 죽은 일본군의 목을 베니 모두 50여 구나 되었다.
고성 정을우장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천성, 가덕 근방을 수색하던 중, 적선 1척이 율포에서 부산으로 향하다가 조선수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율포 바깥 바다에서 대선 3척은 나포되고, 대선 2척과 중선 1척은 격침되었다.
8일 거제도 송진포, 9일에는 가덕도 천성, 가덕까지 수색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10일 미조항으로 귀항해 각각의 수영으로 개선하였다.
2차 출동에서 조선군 피해는 전함손실은 없고, 전사 11명, 부상 47명의 손상을 입었다. 다섯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전함 72척이 격침되었고, 전상자는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전상자의 추정은 일본전함 한 척 당 약 100명을 탄 것으로 추정해서 계산한 수치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상당수 육지에 있었고, 전투가 끝났을 때는 육지를 통해 도망갔기 때문에 정확한 전상자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게다가 전상자 1만 명의 수치는 약간 축소한 것으로 약 3만 명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2차 출동 후 이순신이 조정에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적군의 귀 88개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이 전사자 속에는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포함되어 있다.
여백으로의 고흥산책 카페에서 퍼왔습니다.
첫댓글 임진왜란 이야기2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