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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급 행정안전부(2013. 6. 22) |
탐구한국사 김윤수 교수 총평
지난해 7급 국가직과 지방직보다는 단순한 암기문제는 지양하고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이해위주로 출제가 되었습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조선후기를 중시하는 흐름이 반영되어 상대적으로 조선후기 문제가 절대적으로 비중이 높았는데(5문항), 근현대사 단원 7문항이 출제되었고, 정치사 4문항, 사회․경제사 4문항, 문화사 5문항이 출제되었습니다.
탐구한국사로 학습을 열심히 한 학생은 90점 이상은 무난하였을 것이고, 100점 만점도 상당히 조사가 되었습니다.
1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토기는? •2013. 행안부 7급
밑이 납작한 항아리 양쪽 옆으로 손잡이가 하나씩 달리고 목이 넓게 올라가서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고, 표면에 집선(集線)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주로 청천강 이북, 요령성과 길림성 일대에 분포한다. 이 토기는 고인돌, 거친무늬겅울, 비파형동검과 함께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
① 검은 간토기 ② 미송리식 토기
③ 눌러찍기무늬 토기 ④ 덧띠새김무늬 토기
정답 ②번
2
밑줄 친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그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문구에서 그 이름을 따와서 무애라 하며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드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그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 - 삼국유사 - |
① 부석사를 창건하여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② 천태종을 통해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③ 화쟁의 논리에 따라 중관파의 부정론과 유식파의 긍정론을 다같이 비판하였다.
④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를 제창하였다.
정답 ③번 제시문은 원효의 무애가에 관한 내용이다. 아미타 정토신앙을 대중신앙으로 확립한 것은 원효였다. 원효는 범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교학을 마련하고 나서 스스로 파계한 뒤 속인이 옷을 입고 배우들이 춤추고 노는 괴기한 박을 도구로 만들어 무애가를 세상에 유포시키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이에 따라 나무꾼 장사꾼들도 불타의 이름을 알고 남무(南舞)의 칭호를 부르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원효의 공이었다.<정병삼, 국사편찬위 한국사>
① 의상 ② 의천 ④ 요세
③ 원효는 중관론과 유식론 모두 한편으로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고, 세계는 오직 한마음(一心)이라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마음의 운동이고 발현이며 자기발전이라고 주장하여 ‘공’․‘유’의 대립을 지양․종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주장은 신라 불교계뿐 아니라, 당나라의 법장 등에게도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종의 성립과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3
통일신라시대 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석탑은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② 건축이나 주종(鑄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나마(奈麻)와 같은 관등을 받았다.
③ 가야금 하나로 연주되던 시대에 비해 악기가 다양해지고 악기 편성이 풍부해졌다.
④ 굴식 돌방무덤이 발전하여 봉토를 호석으로 두르고 그 호석에는 12신상을 조각하였다.
정답 ①번 ① 고려시대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7차 교과서>
② 통일신라에서 건축이나 주종(鑄鐘) 등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강고내미가 나마(奈麻)의 관등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신분이 하급 귀족에 속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여서, 결코 천민만은 아니었다.<이기백, 한국사신론>
4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무왕 때에 돌궐, 일본 등과 외교관계를 맺어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② 문왕 때에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를 설치하여 대립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③ 선왕 때에 대부분의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였다.
④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정답 ③번 ③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7차 교과서>
선왕 때 북으로는 오늘날 흥개호(興凱湖) 이북지역에 있던 말갈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서로는 요동평야지역에 진출하였다.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 5경 1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 때 완비된 것이다.<노태돈, 국사편찬위 한국사>
5
다음 괄호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로 옳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안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하면 귀국의 동경도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 역시 우리 경내인데 이제 ( )이 그 중간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완악한 행위와 간사스러운 태도로서 교통을 차단했으므로 바다를 건너기보다도 왕래하기 곤란한 형편이니 국교가 통하지 못함은 ( )의 탓이다. … (후략) 라고 격앙된 기색으로 당당하게 논박하였다. - 고려사 - |
① 거란 ② 여진
③ 돌궐 ④ 몽골
정답 ②번 제시문은 성종 12년(993) 거란의 1차 침입 시 서희와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과의 대화이다.
② 소손녕은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고려가 자신들의 소유지인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신들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침략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공하면 무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거란의 수도인 동경도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하여 소손녕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압록강 동쪽 주변을 여진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만일 여진을 쫓아내어 도로가 통하면 조공하겠다고 하였다. 거란의 침입 이유가 고려와 송의 교빙관계를 고려와 거란의 그것으로 대치하려는 데 있음을 간파한 서희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 국교가 통하지 않은 것을 여진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김당택, 대외교류 역사>
6
고려시대 농민의 생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특정한 직역을 같지 않은 농민은 조세와 공납, 국역의 부담을 졌다.
② 백정 농민 중에도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③ 특정한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본관지로 되돌아가게 하는 귀향형(歸鄕刑)에 처해졌다.
④ 군현별로 일정액을 할당하는 비총법(比摠法)이 실시되자 농민은 공동납으로 대응하였다.
정답 ①번 ① 고려시대 양인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직역체계에 편제된 정호와 직역을 지지 않는 백정으로 구분되었다. 정호에게는 직역 수행의 대가로 토지가 분급되었는데, 이들은 품관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백정은 정호와 달리 아무런 직역 부담이 없고 국가로부터 토지도 분급받지 않은 채 조세와 공납, 국역 등의 삼세를 부담하였다.<한국역사>
② 신분은 양인이지만, 직업이 천한 사람들을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하였다. 즉 양인 중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향(鄕), 소(所), 부곡(部曲), 장(莊), 처(處), 진(津), 역(驛) 등 말단행정구역에 사는 주민들이 신량역천 계층이라고 하였다.<한영우>
③ 고려시대 귀향형은 백정농민이 아니라 관인(일정한 신분층 이상)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본관지로 되돌아가게 하는 형벌인데, 거주지의 제한과 더불어 중앙의 특권적 신분층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박용운, 고려시대사> 귀향형은 관인만이 아니라 관인의 가족, 승려, 군인에 대해서도 과해졌다.<신호응, 국사편찬위 한국사> 문벌가문은 왕경인 개경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지방에 내려 보내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를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이른바 귀향죄가 귀족들에게는 매우 큰 징벌이었다.<한영우>
④ 비총법 실시(조선 숙종 20년, 1694)
7
조선전기의 신분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공노비는 유외잡직(流外雜織)으로 불리는 하급 기술관직을 가질 수 있었다.
② 서얼은 경국대전에 의해 문과 응시가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제약을 받았다.
③ 지위가 높은 문무관원의 자손에게는 음서와 대가(代加)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④ 국역노동이 끝난 공장들은 시장을 상대로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판매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정답 ②번 ① 공노비는 유외잡직으로 불리는 하급 기술관직을 가질 수가 있었는데, 유외잡직에는 노비뿐만 아니라 양인 장인이나 상인도 임명되었다.<한영우>
②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의하면 과거응시자격은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7차 교과서>
③ 조선의 양반사회는 관료적이면서도 반면 세습적인 성격이 함께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전근대적인 신분사회에서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양반의 세습적 성격을 잘 나타낸 것이 음서와 대가제(代加制)였다. 대가제는 조선의 문무 현직자가 자궁(資窮, 정 3품 당하 산계)이상이 되면 그에게 별가(別加)된 품계를 대신 자(子)․제(第)․서(婿)․질(妷) 등에게 줄 수 있도록 마련한 제도이다. 국가의 경사나 큰 행사를 치른 뒤에 백관에 대하여 별가의 은전이 자주 베풀어졌는데, 한 가문에 현직관리가 있으면 그 친족들은 아무런 노력이 없이 대가(代加)를 통해 산계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음서와 대가제는 조선의 양반으로 하여금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는데 유리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변태섭, 한국사통론>
8
우리나라 도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도교진흥책을 써서 불교사찰을 도관(道觀)으로 쓰기도 했다.
② 유학자 최치원은 도교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삼교를 회통한 사상가로 추앙받았다.
③ 고려 문종 때 복원궁이라는 도교 사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도교를 보급하였다.
④ 조선 초기에는 소격서라는 관청을 두고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로서 초제를 주관하게 했다.
정답 ③번 ② 최치원은 유학자인 동시에 도교와 불교에도 조회가 깊어 후세에는 유(儒), 불(佛), 도(道) 삼교를 회통한 사상가로 추앙받았다.<한영우> 신라말에는 선종의 흥융이나 미륵신앙 및 말법사상의 유행과 같은 불교자체의 변화 이외에 최치원의 사산비명에서 제시고 있듯이 유(儒)․불(佛)․선(仙) 삼교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신형식, 국사편찬위 한국사>
③ 고려시대 팔관회 말고도 궁중에서는 자연재난을 이기기 위해 따로 초제를 자주 거행했다. 특히 예종 이후로는 복원궁이라는 도교사원을 세우고 본격적인 도교를 보급했으며, 이곳에서 초제를 지냈다. 이밖에 초제를 지낸 곳으로 대청관, 신격전, 정사색, 구요당 등이 있었다.<한영우>
9
다음 교서가 발표된 시기의 정치 상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013. 행안부 7급
오늘날 사설(邪說)의 폐단을 바로 잡는 길은 더욱 정학(正學)을 밝히는 길밖에 없다. … (중략) … 연전에 서학(西學) 서적을 구입해 온 이승훈은 어떤 속셈이든지간에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전 현감 이승훈을 예산현으로 귀양을 보내고, 이외 시골 백성에게도 상줄 만한 백성은 상주어야 할 관서가 있어야 하니 묘당(廟堂)에서는 소관 관서를 철저히 감독하라. … (중략) … 이렇게 교시한 뒤에도 다시 서학(西學)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찌 정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척사학교 - |
① 탕평정치가 시작되고 속대전이 편찬되었다.
② 화성이 완성되었고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간의 갈등이 커졌다.
③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정치가 이어지고 장길산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④ 근기(近畿) 지역에 거주하는 훈구세력은 실용적인 학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정답 ②번 제시문은 정조 11년(1787)에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이 있는 반촌(伴村)에서 집단적인 서학서 연구를 지도하다가 척사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아 지방으로 축출당하는 정미반회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① 영조 ③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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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제사는 형제가 돌아가면서 지냈으며 책임을 분담하였다.
② 태어난 차례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③ 입양제도가 확대되고 부계 위주의 족보가 적극적으로 편찬되었다.
④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답 ③번 ① ④ 고려시대에서 조선전기까지의 가족제도이다.
② 조선초기 족보에 아들과 딸을 기재하는 순서는 출생순서에 따른 기재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내려갈수록 연령에 관계없이 아들을 먼저 기록하고 딸(사위)을 나중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최재석, 국사편찬위 한국사>
③ 조선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되었다.<7차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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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이현(梨峴)과 칠패(七牌)는 모두 난전(亂廛)이다. 도고 행위는 물론 집방(執房)하여 매매하는 것이 어물전의 10배에 이르렀다. 또 이들은 누원점의 도고 최경윤, 이성노, 엄차기 등과 체결하여 어물이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모두 사들여 쌓아두었다가 이현과 칠패에 보내서 난매(亂賣)하였다. - 각전기사 - |
① 사상과 난전의 발효로 시전상인의 특권이 위협받았다.
② 강경포, 원산포 지역이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③ 포구를 이용하여 경강상인이 선상(船商)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④ 중계무역을 하던 송상이 운송업, 조선업을 지배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정답 ④번 제시문 조선후기 도고 상업에 관한 내용이다.
② 조선후기에 들어 포구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포구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7차 교과서>
③ 선상은 선박을 이용하여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상인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7차 교과서>
④ 경강상인들은 한강을 이용하여 운송과 조선(造船)을 통해 돈을 벌기도 하고, 쌀․소금․어물 등 생필품을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 개성의 송상 전국 요지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차려놓고 주로 인삼을 재배․판매하였으며 의주 상인과 동래 상인을 매개로 청일 간의 중개무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의주와 동래의 상인들은 각각 청나라 및 일본과의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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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양반사회를 비판한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양반이란 사족(士族)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정선(旌善) 고을에 어떤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어질고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고을 군수가 부임할 적마다 방문하여 인사하였는데, 살림이 무척 가난하였다. 그래서 관가에서 내주는 환자(還子)를 타서 먹었는데 결국 큰 빚을 졌다. 그러나 마을 부자가 양반의 위세를 부러워해서 양반을 사겠노라 권유하니 그 양반은 기뻐하며 승낙하였다, |
① 「한민명전의」에서 한전법을 주장하였다.
② 「호질」을 통해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였다.
③ 「과농소초」를 통해 농기구의 개량을 주장하였다.
④ 「중용주해」에서 주자 학설 중심의 성리학을 비판하였다.
정답 ④번 제시문은 박지원의 양반전에 관한 내용이다. 박지원은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을 통해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냄으로써 자신의 실학정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① ② ③ 「한민명전의」, 「호질」「과농소초」 등은 실학자 박지원의 저서이다.
④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은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는데, 17세기 후반의 윤휴는 유교경전(대학, 중용, 논어, 맹자)에 대한 주자와 다른 주해를 내려, 성리학자들로부터 유학의 반역자라는 규탄을 받았다.<6차 교과서>
13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013. 행안부 7급
만물이 생기고 나면 바르고 통(通)한 기운을 받은 것이 사람이 되고, 편벽되고 막힌 기운을 받은 것이 물건이 된다. 물건은 편벽되고 막힌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이(理)의 전체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기질을 따라 본성 역시 편벽되고 막히게 된다. … (중략) … 사람만은 바르고 통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이 가장 영묘하여 건순과 오상의 덕을 모두 갖추었으니, 그 지극한 것을 확충하면 천지에 참여하여 만물을 화육하는 것을 돕는 것도 모두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사람과 물건의 다른 점이다. |
① 최한기에 의해 서양의 경험철학과 연결되어 개화사상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② 이(理)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과학기술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의 배경이 되었다.
③ 화이론에 따라 중화와 오랑케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 보려는 배타적 입장이 깔려 있었다.
④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파와 왕실의 종친 그리고 서얼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 가학으로 이어졌다.
정답 ③번 제시문은 조선후기 호락논쟁 중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관한 것이다.
① 서경덕의 유기론은 18세기 후반 임성주를 거쳐 철종~고종대의 최한기에 이르러서는 서양의 경험철학과 연결되어 주기적 경험철학을 발전시켜 개화사상의 철학적 바탕을 마련하여 조선말기의 중인과 상공인들 사이에 큰 영향을 주었다.<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②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다. 인물성동론은 사람과 모든 우주만물의 보편적 이치를 추구하려는 자연과학정신이 담겨져 있어 북학파의 과학기술 존중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의 배경이 되었다.<한영우>
③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인물성이론은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면서 이를 화이론(華夷論)으로 연결시켜 청을 오랑케로, 조선을 중화로 보려는 대의명분론을 강조하여 위정척사의 배경이 되었다.<한영우>
④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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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2003. 행안부 7급
∙조선국은 부산 등 개항장에 일본인이 와서 통상을 하도록 허가한다. … (중략) … 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를 조사하지 않아 매우 위험하니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 조규 - ∙일본국 인민은 본국에서 현행되는 현행되는 화폐들로 조선국 인민이 소유하고 있는 물자와 교환할 수 있다. - ○○○○ 조규부록 - |
㉠ 청을 의식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였다. ㉢ 부산, 인천, 원산에 이어 군산, 마산까지 개항하기로 하였다. ㉣ 초량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하고 수출입 물품에 5% 관세를 부과하였다. |
① ㉠, ㉡ ② ㉠, ㉣
③ ㉡, ㉢ ④ ㉡, ㉣
정답 ①번 제시문은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와 강화도조약의 부속조약인 수호조규부록에 관한 내용이다.
㉢ 부산과 5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중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한다.(강화도 조약 제4조)
㉣ 강화도조약의 부속조약인 통상장정(무역규칙)에는 일본 선박의 무항세, 무관세 등이 규정되어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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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주장이 발표된 시기의 역사적 사실로 가장 적절한 것은? •2013. 행안부 7급
우리가 지금 의(義)를 내세워 주장하는 것은 그 본의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려는 것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强賊) 무리를 구축(驅逐)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호강(豪强)에게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方伯)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하급관리들은 우리처럼 원한이 깊은 자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에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 호남창의대장소 - |
① 일본이 전쟁을 도발하려 하자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② 급진 개화가 문벌폐지와 청에 대한 사대관계 청산을 촉구하였다.
③ 고종이 칭제건원이 요청을 수용하고 구본신참의 개혁과제를 공포하였다.
④ 일본이 공사관 보호 명분으로 서울에 침입하고 서해 지역에서 청을 공격하였다.
정답 ④번 제시문은 동학운동 과정에서 1894년 3월 백산봉기 격문이다. 농민군 지도부는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대장기에 무장기포 때의 동도대장 이외에 보국안민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 넣었으며, 격문을 공포해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에 띄어 백성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① 러일전쟁(1904. 2. 10) 직전에 대한제국은 지부(중국 옌타이)에서 국외중립선언(1904. 1. 21)을 하였다.
② 갑신정변(1884) ④ 청일전쟁(1894)
③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월 광무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칭제건원은 대내외적으로 자주독립국임과 동시에 전제군주제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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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의 주장을 펼친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2003. 행안부 7급
(가)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 의병이 있던 각 지방에서 일본 군대가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 (중략) … 우리는 일본의 강도정치 독 이족(異族) 통제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나)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속에서 다 죽게 되었구나, 구차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도리어 살데 되나니 … (중략) …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를 갚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
㉠ (가) - 노령에서 항일 활동을 하였고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 (나) -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저항하여 자결하였다. ㉣ (나) -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고관을 죽였다. |
① ㉠, ㉢ ② ㉠, ㉣
④ ㉡, ㉢ ⑤ ㉡, ㉣
정답 ③번 제시문 (가)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이고, (나)는 을사조약에 항거․자결한 민영환의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이다.
㉠ 안중근 ㉣ 윤봉길
17
(가)와 (나) 사이의 농업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013. 행안부 7급
구 분 |
(가) 1921년 |
(나) 1936년 | ||
한국인 |
일본인 |
한국인 |
일본인 | |
200정보 이상 |
66 |
169 |
49 |
181 |
100 ~ 200정보 |
360 |
321 |
336 |
380 |
50 ~ 100정보 |
1,650 |
519 |
1,571 |
749 |
20 ~ 50정보 |
14,438 |
1,420 |
12,701 |
2,958 |
10 ~ 20정보 |
29,646 |
1,544 |
30,332 |
3,504 |
1정보 이상 소계 |
1,125,604 |
18,060 |
1,073,177 |
41,986 |
① 전체 지주의 감소는 주로 일본인 지주가 감소한 결과였다.
② 미곡 배급제도의 시행으로 10~20정보 구간 한국인 지주가 증가하였다.
③ 20정보 이상 일본인 지주의 증가는 상품작물 개발과 밭농사 중심경영 때문이었다.
④ 미곡의 수출여건 악화와 일본인 위주 농정의 영향으로 1정보 이상 한국인 지주가 감소하였다.
정답 ④번 제시문은 일제 강점기 산미증식계획 결과 조선인 자작농과 중소지주가 감소되고 일본인 지주가 증가되는 자료이다.
④ 1920년 시작하여 1934년에 중단된 산미증식계획 과정에서, 수리시설 확충사업은 각지에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농민들을 가입시켜 저수지 등을 축조․정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리조합비가 과중하게 부과되어 많은 자작농이 토지를 팔고 소작농민으로 전락하였을 뿐 아니라 중소지주조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일본인 지주 등 상당한 재산을 갖춘 일부 대지주만이 이 사업을 이용하여 토지소유를 확대할 수 있었다.<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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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조선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2013. 행안부 7급
① 만주사변 이후 남면북양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방직 자본가를 보호하였다.
② 중일전쟁 이후 새로운 미곡 증산을 위한 흥남질소 비료공장을 설립하였다.
③ 태평양전쟁 이후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인 청년을 국내외로 동원하였다.
④ 침략전쟁에 필요한 근로보국대 동원, 놋그릇 공출 등 노동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하였다.
정답 ②번 ③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인의 경제활동은 상업이나 식료품 및 소비재생산을 위한 경공업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1926년 함경도의 부전강 수력발전소가 완성되고, 다음 해에 그 전력을 이용한 조선질소비료공장이 흥남에 세워지면서부터는 중공업에의 투자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변태섭, 한국사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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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언문이 발표된 배경으로 옳은 것은? •2013. 행안부 7급
우리는 피로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함을 다시 선언한다. 5천 년의 주권과 3천 만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자기의 정치 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신탁통치를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의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
① 모스크바 3국 외상회가 열려 한국문제를 의결하였다.
② 김구와 김규식이 참가한 남북지도자회의가 성과없이 끝났다.
③ 중도세력이 좌우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④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답 ①번 제시문은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1945년 12월 31일 시위대회에서 선택한 선언․결의문이다.
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돈 신탁통치에 대하여 우익측은 한국의 독립과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신탁통치 결정이 한국의 실정을 오해하고 국제협약에 위배된 것이며, 민족자결원칙과 민족적 자존심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
(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2003. 행안부 7급
(가)이번 4월의 참사는 학생운동사상 최대 비극이요,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 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를 하는 바이다. (나)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 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며, 선린관계 및 주권 상호존중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상호 의망(意望)함을 고려하고, 양국의 공동 복지 및 공동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 및 안전을 유지하는데 양국이 … (중략) …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
㉠ 진보당 사건, 경향신문 폐간이 이어졌다. ㉢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 부산정치파동으로 야당 국회의원이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
① ㉠, ㉡ ② ㉡, ㉢
③ ㉡, ㉣ ④ ㉢, ㉣
정답 ②번 제시문 (가)는 1960년 4․19혁명에서 서울시내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이다. (나) 1965년 한일협정에 관한 내용이다.
㉠ 조봉암 진보당 사건(1958년)
㉡ 1964년 3월 24일 이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굴욕외교반대투쟁은 학생․재야정치인․언론인을 비롯하여 노동자․농민 등 광범위한 계층이 참가하는 전국적인 반외세․반정부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6월 3일에 최고조에 달하였다.<한국역사>
㉢ 1960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은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혁명공약을 발표하여 개혁의지를 천명하였으며, 초헌법적인 최고통치기구로서국가재건최고회의와 그 직속기관으로중앙정보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군정을 실시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에는 박정희, 중앙정보부장에는 김종필이 취임하였다.<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가 임박하자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현행헌법으로는 자신이 재선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대통령직선제로의 헌법개정을 위해 정치파동을 일으켰다.(1952년 5․26 부산정치파동) 즉, 피난 수도 부산에서 공비토벌을 빙자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야당의원 47명을 체포․감금하였던 것이다.(1950. 5. 26) 이러한 가운데 이승만정권은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한 소위 발췌개헌안을 만들고, 이를 국회에서 기립표결에 붙여 통과시키고 말았다.(발췌개헌, 1952. 7. 4) 이로써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어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압승을 거두고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변태섭, 한국사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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