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금북정맥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뒷 산, 칠장산으로 오르는 길 상단부에
3 정맥 갈림길이 있고(금북, 한남, 한남금북정맥)
이곳 남쪽 능선을 시작으로 경기도 안성시, 충청북도 진천군 지역을 잠시 이어 가다가
2구간 엽돈재에서 부터 온전히 충청남도 지역으로 들어선다.
이후, 천안, 공주, 청양, 홍성, 예산, 서산, 태안을 거쳐
충청남도 서산시 안흥진에서 마무리하는 V 자형으로 267km 마루금이 이어진다.
금강의 북쪽 지역이라서 붙여진 이름 금북정맥은 산행 내내 금강은 구경하기 조차 어렵고
전체 구간의 90% 이상을 충청남도에서 진행한다.
특히 가야산과 오서산에 오르면
해안을 낀 충청도 지형이 한 눈에 들어오고 안온한 산하가 그림처럼 반영되는 곳이다.
느릿 느릿한 말씨와 완만한 지형, 그리고 풍요로운 들녘이 한없이 정감이 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전체 구간에서 높은 산은 보령 오서산 790m 이며, 예산 가야산(677m) 천안 성거산(579m) 순이다.
칠장산에서 보령 오서산 까지는 4-500m 를 넘나드는 산들이 이어 지지만,
홍성에서부터 안흥진까지는 가야산을 제외 하고는 300m 를 넘는 산이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그렇다고 정맥길이 시시하다고 할 수는 없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의 높이에 관계없이
천안, 청양, 홍성, 서산, 태안의 도심은 정맥길 능선에서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으며
서해안이 가까워 해산물 중심의 먹거리가 풍부하여
많은 이들이 산행과 먹거리를 연계하여 즐겨 찾는 곳이다.
해미읍성, 수덕사, 개심사, 마곡사(공주), 장곡사(청양), 간월암, 서산 용현리 마애삼불등 볼거리와
추사 김정희, 만해 한용운, 김좌진 장군, 윤봉길의사, 유관순, 암행어사 박문수, 김유신 장군의
생가가 정맥 능선을 따라 산재되어 있어 고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양에서 가까운 탓에 사대부들이 별서라고 칭하는 주택을 두고 거주 하였던 곳도 많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가 충청남도 지방에 만 14곳이나 남아 있어서
이러한 성지들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교황 방문으로 널리 알려진 당진 합덕의 솔뫼성지나 해미읍성과 순교지를 둘러보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숙연함을 느낀다.
또한, 바다와 인접하여 어느 지역을 가드래도 풍부한 해산물이 입맛을 다시게 하는 곳이다.
새우, 굴, 대하, 게 등이 계절에 따라 풍부하고
공주 밤으로 유명한 차령 고개 인근의 밤나무와 각흘고개 아래 광덕산의 호두도
산행을 하면서 쏠쏠하게 재미를 더하는 지역이다.
이러 저런 이유로 금북정맥을 구간 구간 개별 산행을 한 산꾼들이 많으며
우리 산악회에서는 전 구간을 완주한 회원이 3명이나 된다.
운영진이 계절에 맞게 산행 구간과 볼거리,먹거리를 잘 조정 한다면
더 없이 행복한 산행이 기대 되는 정맥이다.
첫번째 구간 산행기
일시; 2014.9.14(일) 9:30—15:10
구간; 3정맥 분기점—부부탑—칠현산—덕성산
--무티고개—무이산—만디고개—옥정현
참여인원; 기분죤 산악회원 41명
파란 하늘,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
사과, 떡, 음료수를 가득 싣고 용인 휴게소를 들러 안성 칠장사로 향한다.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맑고
누렇게 익어가는 벌판 너머로 암록에 가까운 능선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7월 초순에 금남정맥을 마치고 무더운 여름 동안 “산행 방학” 을 하고 나서 인지
버스는 만차를 이루고 오랜만에 시끌벅적하다.
1시간여 만에 칠장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는다.
서울에서도 가깝고 사찰도 볼 것이 많아서 항상 붐비던 주차장이 오늘은 한산하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은행나무 길을 따라 사찰로 들어선다.
일주문, 은행나무 길
칠장산 둘레길 안내문과 함께 나란히 서있는 암행어사 박문수 길 설명판 뒤로
계단을 따라 산 비탈로 이어지는 길이 소담스럽다.
노란색, 분홍색, 짙은 갈색꽃이 화사한 길을 따라 사천왕문을 지나고
부도탑을 지나 혜소국사비에 이르니 맑은 가을 하늘아래 천년 고찰이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일주문,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사찰과 다르게
방문객들은 일주문을 지나서 경내에 있는 주차장에서 제중루를 거쳐 바로 대웅전으로 향하고
등산객들은 대 부분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일주문에서 바로 해소국사비를 거쳐
나한전을 지나 등로로 들어선다.
나한전과 나옹선사 소나무
노송앞에 자리한 조그만 나한전 앞에서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면서
여우별과 물새님에게 나한전과 장원 급제를 한 박문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 3 수험생을 둔 여우별과 외동아들을 둔 물새님이 등산화를 벗고 나한전으로 올라
간절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자뭇 진지하다.
나한전과 박문수
암행어사 박 문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 문수는 과거에 두 번 낙제한 이후
장원급제를 한 3수생이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홀 어머니 밑에서 공부를 하던 박 문수에게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아들에게 칠장사에 들러 나한전에 가서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어머니 말씀대로 기도를 올리고 나서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꿈에 나한이 나타나 과거 시험문제의 답이라고 하면서 명 문장 7행을 알려주고
나머지 1행은 스스로 완성하라고 하였다.
너무도 생생했던 꿈이 과장에서 현실로 나타나서 꿈에 본대로 7행에 1행을 덧붙여
제출한 뒤 장원 급제를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몽중 등과시 낙조 이다.
이곳 나한전은 지금 까지도 기도의 효염이 있다고 하여
시험때 만 되면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이 장사진을 치는 곳이다.
산죽이 빼곡한 가파른 등로를 지나 정맥 능선에 올라선다.
산죽이 거의 끝나는 중턱에서 회장님이 무전을 받고 뒤 돌아 온다.
산제를 지낼 제물을 차에 두고 와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한다.
이 준항 고문, 맥주병과 넷이서 다시 일주문으로 뒤 돌아 가서
제물, 술, 과일을 나누어서 배낭에 넣고 다시 오른다.
이 회장님과 함께 정맥 능선에 올라서니 이고문과 맥주병님은 멀리 달아나고
칠장산에서 산제를 지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부지런히 오르니 아무도 없다.
정상 바로 아래, 3정맥 출발 지점 까지도 오지 않았는가...?
그곳을 왕복 하려면 후미 인원은 지금쯤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텐데.....?
우리와 함께 뒤 돌아 왔다가 앞서 간 이고문과 맥주병님 마져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정맥 능선상의 다른 헬기장에서 지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상에서 내려서서 부지런히 등로를 따른다.
3정맥 분기점(칠장산 정상 상단부에 위치)
칠장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을 다시 지나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이 맞는다.
낙옆이 수북한 숲은 온통 참나무가 무성하다.
칠장사에서 올라와서 만나는 정맥 능선
다소 높은 봉우리를 치고 올라 헬기장에 오르니 그곳에도 아무도 없다.
다리에 힘이 확 풀린다….
그렇다면 다음 헬기장은 칠현산 지나서 있는데 설마 그곳까지 갔을까….?
힘이 드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헬기장이 등로 옆에 있는 탓에 스치고 지나 갔다고 한다.
부부탑 직전의 첫 번째 헬기장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안부에는 정성들여 쌓은 돌탑 앞에 작은 비석이 서있다.
칠순비 부부 탑
김성기, 임경순 두 부부의 칠순을 기념하는 돌탑의 작은 비석 뒤면에는
“광혜원 장고개 2002년 11월” 라고 쓰여있다.
두 부부는 좌측 광혜원 읍에 거주하는 것으로 짐작이 되고
이 지점은 헬기장 아래로 뚝 떨어지는 안부로서 장고개라고 불렸던 곳이다.
기념일(기념비와 돌탑을 쌓은 날)은 2002년으로서 살아 계신다면 82세가 되었을 것이다.
고만 고만한 봉우리 3-4개를 지나고 나서 제법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른다.
숨이 턱에 닿고 급히 오느라 힘이 들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가던 이 회장님이 “ 저 봉우리인 것 같네요..어서 오세요..‘라는 말에 힘이 솟는다.
기다리던 산행 대장, 용찬씨에게 “왜 이곳까지 와서 지내나요? ” 라고 물으니
첫 헬기장을 스쳐 지나서 놓치면서 이곳 까지 왔다고 하면서 계면쩍어 한다.
출발 지점부터 여기까지 4km 이상을 거의 뛰어 오다시피 한 걸음 이었다.
칠현산 정상 돌탑 앞에서 산제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장소가 비좁아서 다소 혼란스럽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금북정맥 267km 산행이 무탈하게 이어 지기를 기원해 본다.
칠현산七賢山
첫 산행 구간의 최고봉( 515m) 이다.
혜소국사가 일곱 도둑을 나한으로 변하게 한 이후 종전의 아미산을 칠현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산제와 휴식을 마치고 내려서니
오래된 헬기장에는 길게 자란 들풀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똑순이 부회장과 감사님.(칠현산 지나서 폐 헬기장에서)
다소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니 누군가 커다란 돌 위에 곰림정상(513m) 이라고 써 놓았다.
산의 정상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운 지점으로서 산 아래 마을 곰내미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등로 주변으로 높게 자란 참 나무가 하늘 마져 가려서 시야가 답답하지만
이따끔씩 손바닥 만하게 시야가 트인다.
멀리 송전탑이 지나가는 오른쪽 능선 너머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금수원이 있고
왼쪽으로는 경기도 죽산면의 들녘이 이어진다.
곰림 정상석
이정표 기둥에는 생거진천 이라고 써있고 남쪽 능선 방향으로 덕성산 50m 라고 붙어있다.
지금부터 좌측 지역은 충청북도로 들어선 셈이다.
잠깐 사이에 덕성산 정상에 오르니 진천 방향으로 시야가 툭 트인다.
누런 들판 사이 사이로 들어선 건물들은 진천군 광혜원면, 대소면을 뒤로 금왕 공단이 자리하고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암록색 능선이 증평시와 함께 한남금북정맥 능선을 짐작케 한다.
가야 할 방향의 능선 저 너머에는 김 유신 장군의 생가턱 남아있는 문백면이다.
덕성산 정상에서 조망 한 광혜원,진천,증평 방향
광혜원 면은 예전에는 민승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덕성산 남쪽방향 능선을 경계로 좌측은 경기도 죽산면, 우측은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 면이다.
이 능선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산 마루금 이다.
광혜원에는 충청 감사의 이.취임식 이워지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마치 문경새재에 경상 감사 이.취임때 인수 인계를 하던 교구정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정표의 반대 방향으로는 무술 마을을 가르킨다.
그런데 무술마을은 병무관 마을 상단에 있으므로 같은 방향이어야 하는데 누군가 착각을 한 것 같다.
지도를 들여다 보니 병무관,무술, 화랑들, 사장골 등 덕성산 아래 마을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을 통일 한 김 유신 장군이 젊은 화랑들에게 무술을 연마시킨 지역이라고 한다.
덕성산 길림길에 세워진 이정표
지리한 등로가 이어진다.
떠들썩 하던 앞선 그룹이 능선 이곳 저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시작한다.
오늘 구간은 옥정현까지 가는 도중에 산 정상 두 세곳을 제외 하고는
둘러 앉아 식사를 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
그나마 정상도 20여명 내외가 앉을수 있을 정도라서 이렇게 인원이 많으면 대안도 없다.
먼저 시작한 젊은이들 그룹에 곁 붙어서 식사를 한다.
준비해 온 양배추 쌈으로 대충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일어선다.
버스 안에서 나눠준 것과 산제를 지내면서 이것저것 먹은 탓에 과식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배가 부르니 발걸음은 느려진다.
다소 높은 봉우리(470m)를 올라서니 질주하는 차 소리가 요란하다.
좌측으로 틀어서 내려서니 등로 곳곳에 떨어진 도토리가 지천이다.
한 두명이 허리를 굽히더니 아예 숲으로 들어가서 느긎하게 줍는 사람이 늘어난다.
평택과 제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등산모자 한 가득 주워 들고 등로에 올라서니
이 영환 고문이 가까이 와서 한마디 건낸다.
“가지고 가야 묵 한모 나오기도 어려우니 한 두명에게 몰아 줘요....”
일리 있는 말씀이다.
줍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옆에서 열심히 허리를 숙이는 달맞이 님에게 건낸다.
오른쪽 숲으로 드러나는 제천 평택 간 고속 도로는 휴일이라서 그런지 한가해 보인다.
조금 후에 안부에 내려서니 돌탑이 서있고 좌우로 희미한 샛길이 남아있다.
무티고개
금북정맥의 충청남도 구간에는 무르티 고개, 물편 고개등
충청도 지방 특유의 고개 이름을 자주 만나게 된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밋밋한 정상에는 나무 가지에 사장골 정상이라고 써서 걸어 놓았다.
좌측 산 아래 동네 사장골의 뒷산 정도로 이해가 되는 봉우리이다.
참나무가 빼곡한 숲 길을 이어가다가
가파른 봉우리로 이어지는 등로 중턱에서 우측으로 갈라지는 사면길로 접어든다.
정면으로 올라가면 무이산(462m) 정상을 거쳐 내려 서면서 사면길과 다시 만나게 되는 곳이다.
진천 방면으로 전망이 트이고 지나온 능선도 조망되는 유일한 곳이다.
등로를 살짝 벗어 난 무이산 정상석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앞선이 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내 본다.
동구리, 오서산, 가야산은 가 봤겠지 ?
아니요, 그게 어디 있는데요....?
우리가 가는 금북정맥 보령과 광천 중간에 있는데,
가을 억새로 유명하고 전망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여..
예산 가야산도 전망이 좋고 산세가 멋지 고요…..
남자들과 가지 말고 사랑하는 님과 꼭 가보세요.
시간이 허락치 않으면 춘천 구봉산 전망대를 가 보시구요....
구봉산은 어디 있어요 ?
춘천 시내 외곽에 있는데, 야경이 아주 환상적입니다.
전망대에는 유럽식 테라스가 있고 거기서 바라보는 야경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뿅 간다고 해요...
...........................???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물새님하고 가세요....
아니, 왜 저하고 가요, 동구리가 저한데 기를 다 빼앗길텐데.....
조금 전 소나무 아래서 찍은 사진을 떠 올리면서 슬쩍 찔러 봐도 동구리는 묵묵 무답이다.
또 다른 안부에 도착하니 조금 전과 비슷한 지형에 돌탑이 서있고
나무 가지에는 만디고개라고 써서 걸어 놓았다.
경상도 북부 지방의 사투리로 만디는 산 봉우리나 고개 마루 정상을 의미하는데
이곳 안부는 무슨 의미일까...?
이리 저리 지루한 숲길을 이어 가다가
우연히도 진희씨를 선두로 하고 고문 다섯명이 나란히 서게 되었다.
앞선 진희씨를 보고 강 고문이 한마디 하는 바람에 모두들 실소를 한다.
“진희씨, 당신이 고문들 대장이여...산행 속도가 딱 맞구먼....”
완만한 능선에 올라서니
손 바닥 만한 정상에는 미리 도착한 회원들로 북적인다.
누군가 나무 판자에 고라니봉이라고 써서 나무 기둥에 묶어 놓았다.
지형으로 봐서 좌측 능선으로 갈 수도 있지만 등로는 우측 능선을 따라 확연하다.
오늘 구간의 마지막 봉우리 고라니 봉
평탄한 등로를 이어 가다가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 서니
정면으로 난 등로는 망사 울타리로 막아 놓았고 우회길은 급 경사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떨어진다.
원 정맥 능선(정면)과 우회길 임도 갈림길
산 중턱까지 내려 왔다가 다시 솟구치고 나서 아스팔트 도로 옥정현(재)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충청북도의 경계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스코트가 세워져 있고
넓은 공터는 풀숲이 무성하다.
옥정현玉井峴
고개 아래 첫 마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와
좌측 충북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를 연결하는 고개 마루이다.
예로부터 진천에서 고개를 넘어 오면 옥정리에서 물 한 바가지를 들이 키면서
물 맛이 좋다고 알려진 곳이다.
자료에 의하면 안성에서 구입한 소금을 지고 옥정현을 넘어 진천으로 와서 쌀과 바꾸어 갔다고 한다.
고드미, 바르미 상징물
"곧게 바르게 산다"는 뜻으로 충청북도의 마스코트이다.
타 지방과 충북을 연결하는 도로에는 대 부분 세워져 있다.
더 쓰고 싶은 이야기--------------------------------------------------------------------------------
칠장사
칠장사가 우리에게 친근하게 된 것은 벽초 홍 명희 님이 쓴 소설 임 꺽정과 무관하지 않다.
갓바치로 유명한 병해대사와 10여 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일어난 일들이
세간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작은 사찰임에도 국보와 보물이 존재하는 것은
선조의 계비 인목황후 때 궁중의 원찰로 지정한 인연도 큰 기여를 하였다.
정맥 산행을 하는 산꾼들은 3개 정맥의 분기점인 이곳 칠장산 능선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며
일반인들에게는 근교에 있고 접근이 용이하여 누구나 쉽게 산행을 겸한 방문이 쉬운 탓이다.
천년 고찰 칠장사 대웅전
칠현산
칠현산의 옛 이름은 아미산이다.
예전에 한 도둑이 목이 말라 샘을 찾던 중 눈부신 빛을 발견하고 찾아가니
맑은 샘물이 솟아나서 정신없이 마시고 나니 손에 든 바가지가 금으로 변해 있었다.
도둑은 바가지를 챙겨 산막으로 돌아 왔고 나머지 도둑도 똑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나중에 금 바가지는 평범한 표주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둑들은 스님의 신통력이 작용 한다고 보고 질장사 혜소국사를 찾아가 사죄 하였다.
그 길로 도둑들은 출가하여 혜소국사의 지도아래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이 일을 기려 아미산을 칠현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칠장사漆長寺도 칠장사七長寺로 고쳐 썼다고 한다.
나한전
사찰의 가장 뒷 부분, 칠장산으로 오르는 지점에 오랜 된 노송아래에 볼품없이 조그만 건물이 있다.
혜소국사의 지도하에 일곱명의 도둑이 나한이 되어서 이를 모신 건물이다.
암행어사 박 문수의 기도로 널리 알려진 나한전은
입시철만 되면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님들로 인하여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다.
나한전과 나옹선사가 심은 소나무
나옹선사와 소나무
나한전 뒤에는 고려말의 나옹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가 있다.
고려말의 고승(高僧)이자 왕사(王師.임금의 스승)였던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는
경북 영덕 출신으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나옹선사는 조선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우리나라 3대 화상(지공, 나옹, 무학)중의 한 분으로
생존 당시에는 석가모니의 후신 또는 생불(生佛)이라 할 정도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미움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버려 두고
물처럼 바람 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
암행어사 박문수
암행어사 박 문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 문수는 과거에 두 번 낙제한 이후
장원급제를 한 3수생이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홀 어머니 밑에서 공부를 하던 박 문수에게
칠장사에 들러 나한전에 가서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어머니 말씀대로 기도를 올리고 나서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꿈에 나한이 나타나 과거 시험문제의 담이라고 하면서 명 문장 7행을 알려주고
나머지 1행은 스스로 완성하라고 하였다.
너무도 생생했던 꿈이 과장에서 현실로 나타나서 꿈에 본대로 7행에 1행을 덧 붙여
제출한 뒤 장원 급제를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몽중 등과시夢中 登科詩 낙조落照 이다.
落照吐紅掛碧山 지는 해는 푸른산에 걸려 붉은 기운을 토해내고
寒鴉尺盡白雲間 찬 하늘에는 가마귀가 힌 구름사이로 날아간다.
問津行客鞭應急 나루를 건너려는 나그네는 말 채찍질이 더욱 빨라지고,
尋寺歸僧杖不閑 산사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쉴 틈이 없구나.
放牧園中牛大影 풀 뜯는 소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望夫臺上妾低鬟 댓돌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의 쪽 그림자는 나지막 하다.
蒼煙枯木溪南里 고목 사이로 저녁 연기 파랗게 피어오르는 남쪽 냇가에는
短髮樵童弄笛還 단발머리 총각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누나.
(파란 글씨의 행은 박문수가 직접 지은 구절)
박문수는 1691년 9. 8일(음) 외가 집이 있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옛 진위현 향교동)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묘지는 천안시 동남구 북면(北面) 은지리(銀芝里) 은석산 자락에 있다.
인목대비 칠언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17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와 혼인하였으며 4년 후 영창대군을 낳았다.
임진왜란 중 나라가 위태하여 영창 대군이 태어나기 전
후궁으로부터 출생한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 책봉을 하였으며
선조가 돌아 가시고 난 다음에 즉위한 서출 출신 광해군이 즉위하자 터무니 없는 모략으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 제남과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인목대비는 칠장사에서 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의 위패를 모시고 천도제를 올렸다.
그리고 인목왕후는 서궁(덕수궁)에 유폐 되었다.
이때의 소회를 담은 시가 남아 있다.
인목대비를 늙은 소로, 광해군을 채찍을 든 주인으로 빗대어 표현한 내용이다.
老牛用力已多年 (노우용역이다년) 늙은 소는 힘을 다한 지 오래 되어서
領破皮穿只愛眠 (영파피천지애면) 목이 찢기고 가죽도 뚫어져 잠만 잘려고 하네
犁耙已休春雨足 (여파이휴춘우족) 밭갈이도 끝나고 봄비는 넉넉히 오는데
主人何苦又加鞭” (주인하고우가편) 주인은 어이하여 괴로운 채찍질을 하려는가
그 후 인조반정으로 인목왕후가 대왕대비로 복귀하고 영창대군과 아버지 신원도 복원 되었다.
인목대비는 부처님이 소원을 이루게 한 것으로 믿고
승려 법 형을 시켜 5년 여에 그린 “오불회괘불탱”을 칠장사에 내려주고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칠장사 주지승에게 내려 주었다.
이 탱화는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오래 된 부처님 그림으로서
4월 초파일 같은 큰 행사때 만 칠장사 마당에 내 건다.
오불회괘불탱(국보 296호)
3단구도로 도솔천궁을 묘사한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6.56m, 폭 4.04m 크기로 구름을 이용하여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었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 궁을 표현하였다.
---칠장사에 대한 이야기(칠장사 발간 자료에서), 그리고 문화재 청 자료에서
국보와 보물 다수를 소장하고 있는 칠장사는
가람의 배치가 다른 사찰과는 아주 다르다.
보통,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지만
넓은 주차장을 지나고 일주문을 지나면 또 다른 주차장이 나온다.
절을 찾는 사람은 이곳에서 사천왕문이 있는 좌측 길을 버리고
주차장 뒤 제중루濟衆樓 건물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일주문을 지나고 좌측 도로를 따라 사천왕문을 지나서 바로 대웅전에 이르거나
뒷 산 칠장산으로 바로 오르는 사람이 많다.
일주문 뒤 주차장에서 바라 본 제중루와 범종각
메모; 사진이나 내용중에서 언급한 회원님중 불편하신 분은 연락 주시면 즉시 조치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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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악
역사서가 따로 없네요~~
잘~배우고갑니다^^
1구간이 머릿속에 그려지내요^^~
늘 감사 드립니다 귀한자료 잘보고 갑니다,
옛 날 아버님께서 방과 후 예습 복습을 잘 해야만 공부를 잘 한다 늘 말씀 하셨는데...
훗 날 귀중한 자료가 될것입니다.
다녀온곳을 다시한번 복습한듯 생생하네요~~~
잘~~배우고 갑니다~^^
9/28 배티재 직전 옛날 배티재 고개(중앙CC) 무덤가 정자에서 휴식 후, 고갯길 계단에서 인사드리겠읍니다..
반갑습니다. 알프스 다녀 오신 정기 좀 불어 넣어 주십시요
금북길 접어 들었군요... 감축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