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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대덕에 대한 기독교(경교)적인 사고
고대 한국인의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에 관해 기록한 ‘표훈’의 정체 성경의 삼위일체론과 동일한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해 쓴 표훈대덕은 누구인가?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표훈천사(表訓天詞)」라는 고기(古記)에서 인용한 글이 수록돼 있다. 「표훈천사」는 단군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창조주 하느님을 섬겼고, 더욱이 그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며, 게다가 그 ‘삼위’라는 것도 성경에 계시된 성부·성자·성령과 기능 및 속성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놀라운 글이 있다.
“표훈천사(表訓天詞)에서 말한다. 대시(大始)에 위·아래·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 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上界)로부터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主體)는 곧 일신(一神)이요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며,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 큰 지혜와 능력을 가지셨더라. 숨을 불어 만유(萬有)를 만드시고 열을 뿜어내어 만물의 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시어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생각컨데 저 삼신(三神)을 천일(天一)이라 하고 지일(地一)이라 하고 태일(太一)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고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느니라.” 이 글은 구약성경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킨다. 특히 “대시(大始)에 위·아래·사방은 일찍이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 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는 구절은 창1:1~2과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태초에 흑암 중에서 빛을 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느님은 ‘단일신’이 아닌 ‘삼일신(三一神)’, 곧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요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며 쓰임은 곧 삼신(三神)이시라.”
창조주 하느님은 한 분(一神)이시지만 ‘삼신(三神)’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주체는 일신(一神)이며 작용은 삼신(三神)이라고 한다. 삼신(三神)을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라 하는데,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성경의 성부에 해당)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고(성경의 성령에 해당)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한다(성경의 성자에 해당)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존재양식이 “삼위일체 되시는 한 하느님”이시자, “하나 되시는 삼위일체”라는 뜻이다.
조재국(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는 『한국교회의 전통문화 수용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삼신이 하나의 체(體)가 되고 그 기능에서 셋으로 나뉘어지는 점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유사하다.” 기독교인들이 AD 300년경에 와서야 겨우 감을 잡았던 삼위일체론이 한국인에게는 아득한 옛적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표훈천사」(表訓天詞)라는 고기(古記)에 이렇게 놀라운 글을 남긴 ‘표훈’이란 분은 과연 누구일까? 그의 정체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삼국유사 신라 경덕왕 조에 있는 <충담사> <표훈대덕表訓大德>에 관한 이야기 속에 있다. 아래는 그 간추린 내용이다.
경덕왕은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새 부인을 맞이했다. 왕이 표훈대덕에게 말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어주시오.” 표훈은 하늘을 다녀와서 왕에게 대답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애는 되는데 남자는 불가하다 합니다.” 왕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점지해주기를 바라오.” 표훈이 다시 상제님께 간청하니 상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하계(下界)를 내려오려고 할 때 상제가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가 없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마을을 왕래하듯 천기를 누설하고 다니니 금후에는 아예 다니지를 말라.” 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을 알아듣게 전달했으나 왕은 말하였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만족하겠소.” 경덕왕은 그 후 새 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으니 몹시 기뻐하였다. 그러나 경덕왕은 태자가 8살 때 세상을 떠나니, 태자가 즉위하여 혜공왕이 되었다. 왕은 여자가 될 아이가 남자로 태어났으므로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자의 놀이를 즐기며 자랐다. 혜공왕은 나이가 어려 할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였는데 정사를 잘 못해,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김지정의 반란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혜공왕은 화를 당했다. 모든 것이 표훈대덕의 말대로 된 것이다. 표훈대덕 이후에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여기 나오는 표훈대덕이 표훈천사(表訓天詞)를 저술한 분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서 표훈대덕은 하느님의 명을 받들고 있고, <표훈천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그 삼위의 덕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어 상호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에는 없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표훈대덕을 불교의 승려로 보는 것은 억측이다. 표훈대덕을 스님으로 보니 스님과 상제와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아 많은 억설을 유발했다. 상제를 제석천이니 석가제환인타라(釋迦提桓因陀羅)와 연결하여 궁색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표훈대덕은 단군조선부터 있었던 우리 겨레 고유의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을 계승하고 있던 분으로서 불승이 아니라 국선(國仙) 계통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불교가 들어온 초기 500여 년간은 우리나라에 불교수행자와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국선계열 수행자가 혼재해 있었다. 표훈대덕 이후에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아마 표훈대덕 이후에 국선계열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외래 사상인 불교가 득세하면서 고조선 때부터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한민족 고유의 하느님 신앙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뛰어난 하느님의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우리 겨레는 셈의 현손 욕단의 후손으로서 원래 삼위일체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이기 때문이다(창 10:21~30).
경덕왕릉으로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왕릉 (사적 제23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
표훈대덕에 대한 기독교(경교)적인 사고의 비판 |
표훈에 대해서는 기독교 학자들이 종종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하나님의 신도라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기록으로 표훈에 대해서 좀 알아 본 다음에 논의를 전개해보자.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편부터 보자.
경덕왕이 아들이 없자, 표훈대덕에게 부탁하여 상제께 청을 넣어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했다.
표훈은 하늘에 올라가 상제에게 말하였고, 상제는 딸은 가하나, 아들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경덕왕이 표훈에게 부탁하여 아들로 바꿔달라고 했고,
표훈의 청을 받은 상제는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제는 표훈이 다시는 하늘에 올라 천기를 누설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태어나 왕이 된 아이가 혜공대왕이며, 혜공대왕은 여성스러웠고(트랜스젠더일 가능성도 있음), 정치를 못해 나라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기사 맨 앞에 당에서 덕경(도덕경의 일부)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24년만에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혹 모습을 나타내어 대궐의 뜰에서 왕을 모시었다는 지극히 도교적인 내용이 나온다.
표훈의 행적은 지극히 도교적이다. 표훈이 만난 상제는 어디까지나 도교의 신이다.
표훈은 표훈천사라고도 하는데, 천사는 도교의 한 갈래인 천사도에서 보듯 도사의 한 명칭이기도 하다. 또한 표훈으로 인해 남자로서의 생명을 얻은 혜공왕이 도류(즉 도사)와 어울려 희롱하고 놀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도 그를 도사라고 보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즉 일연은 그를 도사가 아니라, 대사, 즉 스님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서술은 어디까지나 불교가 잡다한 종교를 흡수하여 그것을 능가하는 위대한 종교힘을 설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흥법, 탑상 등 삼국유사 소제목부터 전형적인 불교설화집을 연상시킨다.
일연은 표훈을 도사지만, 스님으로 보았다. 즉 표훈의 다른 기록에는 그가 스님임을 말해준다.
즉 탑상(塔像) 제 4 동경홍륜사 금당 10성 기록에는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니소(泥塑-진흙으로 만든상)는 아도,염촉,혜숙, 안함,의상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니소는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이다.” 라고 하여 신라 10성의 하나로 표훈을 들고 있다.
또한 의상전도(義湘傳敎) 편에는
의상의 10명의 제자인 10 대덕을 들고 있는데,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 의적 등이 그들이다. 표훈은 의상의 제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표훈이 일찍이 불국사에 살았으며, 항상 천궁을 오고갔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여기서 표훈은 앞서 말한 표훈대덕(천사)와 같은 인물이다. 즉 경덕왕이 자문을 구한 표훈은 신라왕궁과 가까운 불국사에 살았던 것이다.
또 대성(大城) 효(孝) 2세부모(二世父母) 편에는
김대성이 곰을 위한 장수사를 세우고, 다시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 전생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는데, 신림, 표훈 두 성사를 청해서 각각 거주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표훈은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어 살아온 것이다. 불국사는 751년 경덕왕때에 만들었다고 삼국유사에 나온 것을 보니 앞의 경덕왕이 상의한 표훈과도 일치한다.
이렇듯 표훈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국사에 거주한 표훈을 이도형님의 말처럼 경교의 전도사로 보려면 무엇보다 불국사의 성격부터 재조명해야 한다. 신라에 이 무렵 경교가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도교와 불교의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표훈을 경교의 전도사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경교와 불교가 결합되었다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국사에 경교의 흔적이 있는지도 찾아야한다.
단지 상제, 천계라는 것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될 수도 (번역의 용어로 차용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있다고 경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이르지 않는가 한다. 참신한 발상에는 높은 점수를 주겠지만, 먼저 TEXT의 용례부터 찾고서 종합적인 견지에서 이런 주장을 해도 늦지 않나 싶다.
충담사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향가를 구사하는 경교 전도사로 보기는 더더욱 힘들다.
충담사는 도교에 가까운 전통 신앙인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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