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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 (端午)
지금은 많이 퇴색된 풍습이지만 단오 날은 민족 명절이었다. 이제 나라 안에서 단오의 풍습이 가장 흥하게 남아있는 곳은 영동지역인지라 지금도 단오의 풍습이 영동지역에는 으뜸 명절로 진하게들 즐긴다. 단오는 설날 추석과 함께 중종中宗 13년(A. D. 1818)에 삼대명절로 정한 바 있으며 계절 적으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이기도 하다.
5월 4일은 소단오 또는 소중오라고 하는데, 이는 단오를 하루 앞두고 다례 음식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밤잠 안 자고 바쁘게 지내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축제의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단오는 수리, 천중절, 중오절, 수릿날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이 날 여자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다. 이렇게 하면 머리카락에 윤기가 흐르며 빠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근래에 와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창포에는 항암 물질과 비듬, 아토피성 질환을 치료하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함평군에서는 벼농사 대체 작물로 특화 시켜 비누와 화장품을 생산하여 함평군의 특화 사업을 하기도 한다는 뉴스를 오늘 아침 보았다. 남자들은 창포로 술을 담아 마시기도 한다. 어린이는 창포탕을 만들어 세수를 하게하며 부녀자들은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어 수壽자나 복福자를 새기고 끝에 붉은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았지만 비녀가 사라진 마당에 그러한 풍습 자체가 사라지고 없다. 어제가 단오라는 것은 사실 아침까지도 몰랐다. 서울 사는 조카 놈이 전화로 단오의 유래에 대해서 메일로 좀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책 저 책 뒤지다가 나도 모르는 사실을 발견했다. 단오의 유래가 굴원屈原으로부터 나왔다 한다. 울분의 시인 굴원의 초사를 참 좋아하기 때문에 굴원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중국문학에서 굴원을 배제하고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굴원의 영향은 시경詩經과 이백과 두보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전설에 의하면 굴원이 충직고결하고 문장이 뛰어나 초楚 회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굴원의 벼슬이 높아지자 간신들의 시기도 따라서 높아졌다. 간신들이 시기하여 참소를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그를 내치자 굴원은 그 유명한 <이소경離騷經>이란 글을 지어 임금이 깨닫기를 빌었다. 그러나 불행이도 초 양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하여 굴원을 장사 땅으로 귀양 보냈다. 그래서 비분강개하여 글로 심회를 풀다가 5월 5일에 멱라수에 몸을 던져 세상을 하직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죽은 날인 5월 5일에 대통에 쌀을 넣어 그 물에 던져 제사지냄으로써 그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이것이 단오 명절의 유래라 하며, 그 시초가 불길한 날로 비롯하였기에 액을 예방하려고 창포 뿌리로 만든 비녀에 붉은 연지를 묻히는 것이다. 단오 날은 오늘날의 서양풍속인 발렌타인데이와 흡사한 가슴 설레는 처녀총각들의 날이었다. 조선시대 유교교육으로 인한 남녀칠세부동석의 내외의 예가 이 날만큼은 완화되어 완전히 자유스럽지는 않아도 서로서로 얼굴을 흘낏 쳐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침이면 새 옷으로 갈아입은 여자들이 그네를 뛰기 위해 나들이를 나오며 남자들은 힘자랑을 겨루는 씨름장에 나오는 길에 오가면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속담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하였다. 저녁이면 모닥불을 켜고 벌어지는 탈춤이 축제의 흥분으로 몰아넣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단오의 풍습은 갑오경장(1894)이후 단절되어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영동지역에는 제일의 손꼽히는 명절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 강릉 남대천에는 단오절의 풍성함이 저자거리로 나와 앉아 있을 것이다. 영동 제일의 굿으로 손꼽히는 단오 굿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강릉 단오 굿은 옛날부터 관민이 하나가 되어 행한 축제의 성격이 짙은 마을 굿이다. 아흔 아홉 구비를 돌아 올라가는 대관령의 산신 국사서낭님을 모시는 강릉 단오 굿은 강릉 사람만이 아니라 영동 지방의 강원도 주민 모두의 축제로서 오늘까지도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처음 구경한 도시에서 촌 소년이 느꼈던 그 단오절의 화려한 감정이 지금도 아슴아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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