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된 그 남자
출입구를 지나면 모자를 쓴 양철 인형이 치마에 인사 글을 새기고 서 있다. “외진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하는 겸손한 인사가 대접받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누구라도 극진한 마음으로 환영하는 것 같아 입구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화산석을 이용해서 대형 화분을 만들고 그 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미로처럼 꾸며 놓았다. 아름다운 정원에 활짝 핀 자란이 미소 짓고 있다. 살랑거리는 꽃과 나무는 바람을 느끼게 한다. 돌과 여자인형은 제주의 삼다 중 둘을 상징하는 것 같다. 포근한 체온이 바람을 타고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혹시 그 남자의 영혼일까?
그 남자를 만난 것은 B 선생님의 글에서였다. 열정과 사랑으로 사진에 몰입하고 제주를 사랑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 뭍사람이 섬에 가서 열정을 불태우다 자신의 유골까지 그곳에 뿌려 영원히 그곳 사람이 된 남자. 언젠가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딸 친구가 제주에서 하는 결혼식에 우리 가족 모두를 초대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제일 먼저 가본 곳이 그 남자의 영혼이 남아있고 체취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곳.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분교를 고쳐 만든 갤러리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20여만 장 찍었다는 사진을 보기 위해 갤러리로 들어갔다. 그 남자는 가고 없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두가 주인이 되어 운영되고 있단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찍은 사진이 내가 처음으로 대면한 그의 얼굴이다. 사진 안에 그 남자는 훤칠한 외모로 호감형이다. 예술인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향기가 느껴진다.
제주에 대한 그의 사랑과 사진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영상을 많은 사람이 앉아서 보고 있다. 사진 속의 멋진 남자는 어디로 가고 영상속의 그는 뼈만 앙상하고 말까지 어눌하다. 두모악이라는 갤러리를 만든 남자 김영갑이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그의 마지막 생을 영상으로 기록해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입구에 있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찡해오면서 눈물이 나서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다.
사진이 전시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진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많지는 않았다. 용오름 사진을 파노라마처럼 걸어놓았다. 같은 장소 같은 사진인데 시간과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맑은 하늘, 구름 낀 하늘,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추기 시작한 사진들을 찍었다. 사진은 순간 포착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곳에 있었을까. 그의 그림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무형태의 바람을 형태로 만들어 찍은 것 같은 사진. 바람처럼 살다가려고 그리 바람을 잘 찍었나?
내가 둘러본 그의 사진에서는 바람과 구름, 햇살과 안개가 보인다. 아니 그의 마음이 보인다. 둘러보는 동안 바람 사진이 제일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일까. 순간, 나도 그의 사진 속의 바람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순수하고 자유롭고 바람 같은 영혼의 소유자임이 그의 사진에서 느껴진다. 그는 제주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제주에 미치고 사진을 사랑하다 난치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분신인 제주를 담은 사진을 지키기 위해 분교를 빌려 갤러리 공사를 했다. 카메라 셔터조차 누르지 못하는 몸으로 제주를 닮은 정원을 만들었다. 왜? 무엇이 그를 그곳으로 오게 했으며 어떤 힘이 그를 그곳에 묶어 놓았을까.
그는 힘겹게 살았지만, 행복한 남자다. 어느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평생 그렇게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진에 그의 영혼을 담고 죽기 전까지 그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한세상 잘 놀고 간 것 같다. 먼 곳으로 떠난 지 8년이 지났어도 그의 체취는 남아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도 안타깝게도 한다. 또 교훈을 받고 잃어버린 열정과 정열을 배우고 간다.
나 역시 나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그 남자는 한 장의 사진이라도 더 찍으려 제주 구석을 누비며 다녔다. 제주에 혼을 내어 준 사람. 아니 그의 혼에 제주가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미칠 정도로 제주를 사랑한 그. 이슬을 맞으며 몇 날 며칠을 한 장소에 머물렀던 집념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 남자처럼 나도 무엇인가에 미칠 수 있을까? 10여 년 전 어설프게 소설을 쓰다가 다 없애버린 적이 있다. 배우지 않아도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권의 책이 다 되어갈 무렵, 부끄럽고 치졸한 것 같아 바로 없애버리고 포기해 버렸다.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않더라도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한 그 사람처럼 이제 나도 감동을 주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발길을 돌리는데 둘러보는 내내 따라다니던 새가 큰소리로 지저귄다. 작별 인사하러 따라 나온 그 남자의 영혼이 담긴 새일까?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던 그 남자.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자신은 속일 수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다는 그 남자. 예술은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어딘가에 한 번 미쳐 보고 싶다. 적지 않은 나이인 내가 온 몸과 마음이 한 곳으로 치달아 미칠 수 있는 열정이 있으려나? 그 남자의 열정과 사랑을 닮은 영혼의 소유자가 나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