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曺雲.1898.6.26∼?)
시조 시인.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에서 출생. 호는 정주랑(靜洲郞), 본명은 주현(柱鉉)이고 운(雲)은 필명이다.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영광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시조 동호회인 추인회(秋蚓會)를 결성하였으며, 영광학원의 교사이자 시인으로서 일제강점기의 사회 계몽운동에 힘썼다. 1926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항하여 가람 이병기 등과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7년 영광삐라사건으로 투옥되어 1939년에 출옥하였다. 8ㆍ15광복 후인 1947년에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에서 시조론과 시조사를 가르쳤으며, 1948년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에 <불 살라주오>를 게재하는 등 초기에는 자유시를 썼으나 좋은 평을 얻지 못하였고, 이후 1925년 [조선문단]에 <법성포 12경>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시조 창작에 매진하였다.
그는 고어투에서 벗어난 일상어로 생활에서 느끼고 경험한 구체적인 소재를 담아 시조가 현대적인 율격과 내용을 갖추도록 만든 선구자였다. 시조라면 버려야 할 구시대적인 유산으로 여기던 일제강점기의 식민지적 무의식에서 벗어나 시조 특유의 운율을 잘 살리면서 우리 민족의 서정과 정감이 오롯이 배어 있는 작품들을 발표하여 현대시조의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에 사설시조의 전형으로 꼽히는 <구룡폭포>를 비롯하여 <석류> <파초> 등이 있다.
월북한 뒤로 잊혀진 문인이 되었다가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 문학사적 위치가 재조명되어, 1990년 9월에 유족과 영광 지역 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운문학전집>을 출간하였으며, 2000년 7월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조운시조집>을 복간하였다. 이 시조집에는 1947년의 초판본에 수록된 작품들과 그 후에 발표한 시조 및 자유시가 망라되었다. 탄생일에 맞추어 고향인 영광 지역에 시비(詩碑) 제막식을 갖기로 하였으나 훼손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0년 9월에 제막식을 가졌다. (두)
시조시인. 본명은 주현(柱鉉). 전라남도 영광(靈光) 출신. 소설가 최학송(崔鶴松)은 그의 매부이다. 1921년 [동아일보]에 첫 작품 <불 살라주오>를 발표하였다, 그 뒤 1924년부터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위시하여 많은 시조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3년 영광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미술과 작문과목을 가르쳤으며, 8ㆍ15광복이 되자 [조선문학가동맹] 시분과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6ㆍ25를 전후해서 월북하였다.
작품집으로는 1947년 5월 [조선사(朝鮮社)]에서 간행된 <조운시조집(曺雲時調集)>이 있다.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하였던 시조작가로, 최남선(崔南善) 이후 이병기(李秉岐)와 함께 시조부흥운동의 후반기에 활약하였다.
그는 월북하기 전까지 줄곧 향리 영광에 살면서 중앙문단과 폭넓은 교분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작세계의 일관된 주제가 민족주의적인 이상과 연결되어 있음은 그가 시조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조에는 ‘조선혼(朝鮮魂)’이 깃들여 있다는 그의 주장과 초기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님’의 함의성(含意性), 곧 우리 언어가 가지는 민족적 감정이 수렴되어 있는 것이다.
시조 시인.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에서 아버지 희섭(喜燮)과 어머니 광산김씨의 1남 6녀 중 다섯 번째로 출생. 호는 정주랑(靜洲郞), 본명은 주현(柱鉉)이고 1940년에 필명인 운(雲)을 본명으로 개명했다.
1917년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립 목포상업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동갑내기인 김공주(金公珠)와 결혼했다. 1919년 장녀 옥형(玉馨)을 낳았고, 이어서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이해에 3ㆍ1운동에 가담했는데, <전라남도지> ‘영광의 독립운동’편에 보면, 당시의 지도인물로 조운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4일 5백 명, 15일 1천5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고 되어 있다. 이 일 후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고, 설상가상으로 5월 21일에 장녀 옥형이 사망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뜻밖에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을 만났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문단 활동에 중대한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후 둘은 의기투합항려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고, 근강산과 황해도 해주, 개성 등지의 고적도 함께 답사했다.
1921년 귀향하여 차녀 나나(那那)를 얻었고, 매부 위계후(魏啓厚)를 중심으로 영광의 지도자들이 설립한 사립 영광학원 국어교사로 취임했다. 이때 [자유예원(自由藝苑)]이라는 향토문예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지방문예부흥운동의 성구이자 효시였다.
1922년 10월에 시조동호회인 [추인회(秋蚓會)]를 창립했다. 회원 30명이 월 1회 창작시조를 발표하여 등사판 시조집을 간행하는 한편,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문명퇴치, 외화배척 등의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신제효의 판소리 여섯 마당의 발굴 및 복원에도 힘썼다. 이 무렵 [추인회]의 초청으로 가람 이병기가 종종 영광을 내왕했는데, 이처럼 모임이 활성화되자, 일경의 탄압을 받게 되어 결국 이듬해 해체되고 말았다.
1924년 [조선문단]에서 일하고 있던 서해 최학송과의 우정이 계기가 되어 동지에 <초승달> 등 3편의 자유시를 발표했고, 이해 11월에 부인 김공주와 합의 이혼했다. 1925년 3월 근무하고 있던 영광중학교가 폐쇄되고 9월에는 외병으로 고창 선운사에서 요양하다가 향리 구름다리(도동리)로 돌아와 투병생활을 했다.
1927년 오랜 우정의 결실이라 할 서해 최학송과 그의 한터울 밑 누이인 조문려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해에 이병기를 초청하여 한글강습회와 시조강좌를 개최했고, 가람과 더불어 해불암, 선운사를 돌아보았으며, 변산 등지를 돌며 문화유적을 답사하기도 했다. 1928년 영광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잇던 두 살 연하인 27세의 노함풍(魯咸豊)과 재혼하여 장남 홍재(泓載), 차남 청재((淸載), 3남 명재(溟載)를 얻었다.
1934년 영광에서 항일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독서회인 [갑술구락부(甲戌俱樂部)]를 결성하여 그 회장에 취임했다. 이 회는 고서전람회, 문학강연회, 무용의 밤, 고전음악의 밤, 소인극회 등을 열어 민족문화운동을 주도했다. 1937년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는 당시의 영광의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된 영광체육단이 장성, 고창 정읍 등 이웃 군과 연합운동회로 확산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기미를 보이자, ‘동방약소민족 옹호’와 ‘대한독립만세’라는 전단을 거리에 붙였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그 주동인물을 구속한 사건이었다.
1941년 조선식량단 영광출장소 서무계장을고 재직했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양광민립중학교(영광종합그동학교) 설립 전 기구인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결성하고 그 회장에 취임했다. 1947년 기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하여 그해 5월 <조운시조집>(조선사)를 간행하는 한편, 동국대학에 출강하여 사조론 및 시조사를 강의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한 것을 끝으로 그의 연보(年譜)는 더 이상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문은 그가 왜 남쪽을 등지고 월북했는가 하는 점이다. 연보를 보면, 그는 누가 뭐래도 이 땅의 선각자요, 민족주의자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의 정신의 소산물인 작품 어디를 보아도 공산주의로서의 면모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194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찬탁(贊託)과 반탁(反託), 좌익과 우익의 대립, 여러 민족주의자들의 암살 등으로 대변되는 혼란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이 땅의 선각자였던 그로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쪽이 구제불능의 진흙탕 속으로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반면,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쪽이야말로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한 미래의 천국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 선택은 그의 개인적으로나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개성의 발현을 거부하는 북쪽에서는 그의 참문학을 더 이상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또 한국 현대시조사에 굵은 획을 그은 <조운시조집> 이후로는 더 이상의 시조집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약력】
1921 동아일보에 시 <불살러주오> 발표
1923 영광중학교 미술ㆍ작문 교사
1924 [조선문단] 제2호(11ㅜ얼)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등 3편 발표
1937 영광체육단사건으로 투옥
1945 영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1949 6ㆍ25를 전후해서 월북
【시조】<불 살라주오>(동아일보.1921) <초승달이 재 넘을 때>(조선문단.1924.11) <법성포(法聖浦) 12경>(1925) <한강소경(漢江小景)>(시대일보.1925.6.30) <누이를 보내고>(매일신보.1932.9.29) <구룡폭포> <석류>
【시조집】<조운시조집(曺雲時調集)>(조선사.1947)
【전집】<조운문학전집>(남풍.1990)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천고에 남고 말을
뼈 맞히는 한일지니
한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얘기였을꼬
- 조운의 「서해야 분려야」중 넷째수
일생 불우했던 그였기에 이런 말도 남길 수 있는가. 천고에 남고 말을 뼈맞히는 한이라했으니 한마디 더했으면 어떤 말이 나왔을까. 병으로 일찍 갔으니 서해의 생애에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다. 밑바닥 인생을 살았으나 청사에 남을 작품을 그래도 이 땅에 남겼으니 무슨 한이 있으랴. 조운은 매제 최서해를 기리는 시조 작품을 이렇게라도 부조해놓지 않았는가.
조운의 시조라면 「석류」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많은 평자들이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거론해왔던 작품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 조운의 「석류」
나를 석류에 이입시켜 임에게 붉게 젖힌 가슴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임에게 자신의 뜻을 석류로 의인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알알이 붉은 뜻은 많은 사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사랑을 알아달라는 뜻 같기도 하다. 겉은 못생겼어도 알알이 붉은 속뜻을 빠개서라도 젖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이리도 애틋한 것인가.
김헌선은 「석류」는 밀도 높은 시상의 전개를 통해서 늦가을에 벌어지는 석류와 자신의 마음을 곡진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함께 아울러 보여주고자 했다. 한 폭의 경치를 읊으면서 자신의 정감을 핍진하게 묘사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런 정감 어린 표현은 조운의 단시조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빰에는 이슬이오
가지에는 꽃이로다
곱게 쌓여노니 미인의 살결일다
비단이 밟히는 양 하여
소리조차 희고나
- 조운의 「눈」
조운의 눈은 매섭고 날카롭다. 빰에는 이슬, 가지에는 꽃이라 했다. 볼에 내리는 눈은 녹아 이슬로 맺힌다. 눈물이다. 그러나 가지에는 눈이 쌓여 하얀 꽃이 된다. 꽃이다. 하나는 액체로 표현하여 여인을 눈물로 하나는 고체로 표현하여 여인을 꽃으로 형상화 했다. 미인의 살결은 하얀 눈이다. 비단같은 눈을 밟으니 소리조차 희다고 했다. 시각을 청각화시켜 눈을 더욱 아름답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언어의 마술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이리라.
조운은 당시 여타 시조 작가와는 다르다. 끝없는 자기 성찰과 깊이 있는 현실 탐구에 그의 눈빛이 닿아있다. 그가 자유시를 쓰다가 시조를 쓴 것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고 김재용은 말하고 있다. 일제하에서 조운이 시조를 섰던 이유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일제의 문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구미의 문학양식을 따르는 데 열중하 였고 우리의 것을 부정하는 데 치열하였다.왜 이전의 것을 버려야하는 것에 대한 자기 점검 을 할 틈도 없이 구미의 것을 추종하였다.그렇기 때문에 시조와 같은 장르는 버리는 것이 유행이 었고 시조로 창작하는 것은 어색한 정도를 떠나 복고주의로 몰리는 판이었다.…중략…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뼈 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 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김재용의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의 해방, 그 빛나는 성취」
하나 밖에 없는 그의 「구룡폭포」장시조가 또한 절창이다. 구룡폭포는 경치를 앞에 두고 읊은 것이 아니다. 구룡폭포를 유기체로 보고 몇 생을 닦고 몇 겁을 진화하면 물이 되느냐고 묻고 있다. 불교의 연기론에 근거해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곤로봉 새 벽 안개 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
- 조운의 「구룡폭포」
유재영 시인은 「구룡폭포」를 폭포 이전의 충격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처음 만난 사설시조는 바로 이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문자와 형식에 결박당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당당한 정형의 모습을 보여주다니!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하는 폭포는 조운에게 있어서 공동체적 사물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과 사물을 하나인 장자의 물아일체설로 보고 있다. 조운의 시인은 구룡폭포는 우리가 미처 이루지 못한 사설시조의 무덤이묘 역사라고까지 극찬하고 있다.
화자는 내가 물이 되고 물이 내가 되어 구룡연 천척절애에 굴러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교의 인연설이나 장자의 물아일체나 결국은 하나이지 둘이 아닐 것이다.
연구실 ‘매월헌’ 앞에는 고매화가 있다. 매화는 추위에 향기를 팔지 않고 그 향기 가 천리를 간다해서 필자는 매화를 좋아한다. 매화에 달 하나 얹혀서 연구실 이름을 매월헌이라 붙였다.
조운의 「고매」에 눈이 갔다. 어찌 이리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고매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 조운의 「고매」
이 「고매」에게 ‘절제’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기교도 없으면서도 있는 눙쳐둔 그 솜씨가 추종을 불허한다. 대상을 묘사했으나 대상을 묘사하지 않았다. 인생 그 자체로 허울 다 털어버린 70대 노인의 참모습이다. ‘여기 하나 저기 둘 씩 꽃도 드믄드믄’ 노인 옆의 쓸쓸함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남아있는 사람만 남아있다. 인생의 안과 밖을 이리도 잘 드나들었을까 싶다. 절제 때문이다.
조운은 1900년 전남 영광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주현이나 필명인 운을 본명으로 개명했다. 1924년 『조선문단』제 2 호에 자유시「초승달이 재 넘을 때」외 3편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1937년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일제에 투옥 되어 1년 7개월만에 출옥했다.
1947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 그해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간행했으며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 이후 한국문단에서 사라졌다.
읽고 자고
읽고 자고
出接만 여겼더니
몰라보는 어린 자식
돌아서며 우는 안해
이 몸이 갇힌 몸임을 새삼스리 느꼈다
- 조운의 「면회」
읽고 자고 읽고 자고 했으나 밖에 나가기만을 여겼더니 자식은 몰라보고 아내는 운다. 그제야 내 몸이 갖힌 몸인 줄 알았단다. 슬쩍 뒤로 물러난 모습이 기막히다. 모습만 보여주었을 뿐인데도 가슴이 아프다. 자식은 어리고 아내는 울고 그만으로도 처자의 곤궁함을 알 수 있다.
김헌선의 글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 장문을 인용한다.
한 때 이름이 높았던 시인도 세월이 흐르고 독자의 의식과 취향이 달라짐에 따라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이름은 잊혀졌던 시인도 세월이 변하고 중요성이 재평가되면 서 다시 그 이름과 작품이 되살아나곤한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시조시인 가운데 이은상과 조운은 적절한 비교거리가 될 수 있다.이은상이 그러한 사례 가운데 전자에 해당하고 조운은 후자에 해당 한다. 이은상은 행복한 예우와 대접을 받고 살아 생전에 분수 넘치는 영예를 누렸다고 할 수 있 다. 기가막히게 뛰어난 기교를 지니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말을 교묘하 게 얽는 감각적 시조를 써서 세상에 이름을 얻었다. 그러한 이은상의 글 솜씨는 시조를 재인식시 키는 데는 긍정적 기여를 할지 모르나 도리어 시조가 지니는 그윽한 흥취를 되살리는 데는 시조 의 참맛을 잃게 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반면에 이은상의 글솜씨와는 다르게 우리말이 지니는 묘미도 중시하면서 정감 어린 시적 정조 를 되살리는 시인으로 조운을 꼽는데 서슴치 않는다. 조운은 그만큼 빼어난 시조시인이었다. 그러 나 조운이 그다지 행복한 삶을 누린 것 같지는 않다. 남쪽에서 1947년에 『조운시조집』을 내고 월북한 다음에 이념적 장애로 말미암아 곧 잊혀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곧 세상의 이목 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평가마저 유보된 채 문학사의 저편에서 숨어 있어야만 하는 기막힌 시련을 당해야했다. 조운 시조가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몰인정한 세상이 조운의 시조를 버린 것이다.
- 김헌선의 「조운시조의 전통계승과 의의」에서
5월인데도 며칠 간 폭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더워서 그런지 새들도 여기저기 이상한 말로 지껄인다. 무슨 새인지 알 수 없다. 솔바람에 물으니 무시하고 더위에 물으니 그도 본체 만체 한다. 꿩, 뻐꾸기, 꾀꼬리가 먼 데서 간간이 울어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오늘 아침도 새이름을 몰라 이 아니면 고민할 뻔 했다.
시조의 교과서라 할 만한 우리 민족의 서정과 정감 어린 조운의 시조 몇 작품을 소개한다.
불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 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 조운의 「채송화」
넌지시 알은 체 하는
한 작은 꽃이 있다
길가 돌담불에
외로이 핀 오랑캐꽃
너 또한 나를 보기를
나
너 보듯 했더냐
- 조운의 「오랑캐꽃」
쥘상치 두손 받쳐
한입에 우겨 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 조운의 「상치쌈」
시조의 맛은 어떤 맛일까. 오늘따라 조운 시조집을 읽으며 많은 생각들이 오고간다. 지금도 터주대감 시조가 문단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식민지적 무의식이 망령을 부리는가 싶어 소름이 돋는다. 시조에는 어떤 소리가 날까. 징소리 같이 유장하게 흐르는 긴긴 강물소리가 아닐까.
1941년의 가족 사진, 왼쪽으로부터 3남 명재,
차남 청재, 조운, 사위 임씨, 장남 홍재, 부인 노함풍씨 딸 나나
출처: 서예문인화,2016.6,118-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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