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산 송씨는 고려시대 진사(進士)로서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던 송유익을 시조로 한다.
시조인 휘(諱) 유익(惟翊)은 고려조의 진사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벼슬하기를 꺼려하여 고향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공의 아들 휘 숙문(淑文)이 정당문학에 오름으로써 공에게 추밀원부사가 추증되었으며, 공의 증손인 휘 송례(松禮)가 고려 원종 때 권신(權臣) 임연(林衍)일파를 제거하고 왕권을 복원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3대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봉하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휘 유익을 시조로 하고, 휘 송례를 중시조로 하여 가보(家譜)가 시작되었다. 당시 휘 송례가 식읍으로 하사 받았던 여량군은 지금의 여산(礪山, 전북 익산시 여산면)이다.
휘 송례의 손자 대에 자손이 많이 번창하여 지금의 여산 송씨 5대 종파인 원윤공파, 밀직공파, 소윤공파, 지신공파, 정가공파가 파생되었다.
11세 충강공 휘 간(侃)은 세종, 문종, 단종의 세 임금을 모셔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단종이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로 달려가 복명하고, 고향인 여산에 내려와 두문불출하였다. 급기야 단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충청도 계룡산에 들어가 제사 지내고 3년상까지 치른 후 흥양(興陽)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냈다. 10여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했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한다. 1793년(정조 17년)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흥양 마륜촌은 지금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가 되어 있다.
충강공의 다섯 아들 맹유, 중유, 계유, 백유, 숙유도 모두 고흥으로 낙향하여 지금과 같은 여산송씨 집성촌을 이루는 연원이 되었다. 휘 맹유의 후손은 재동파 혹은 장파(長派)라고 한다.
17세 계현, 계량, 계창조(祖)와 족형(族兄)인 대립, 희립, 정립조(祖) 등은 임진왜란 때 모든 형제가 무관 또는 의병으로써 외적의 침입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휘 계창은 명종 을축(1565년)생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통례원인의훈련원주부(通禮院引儀訓鍊院主簿)가 되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가(扈駕)했다. 선거이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영남 일대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막내아버지(季父)인 판관공 휘 건(建)을 도와 공적을 세우다가 판관공이 함창에서 순절하자 시신을 수습한 후 대첩을 거두었다. 선무원종록에 기록되었다.
휘 희립(希立)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가장 총애하던 부관이었다. 거북선 건조교육을 담당했으며, 경상우수영이 무너지자 “즉각 출병하여 적의 예봉을 꺾어야 전라도를 보전할 것”이라 간하여 옥포대첩을 이끌었고, 조명이 연합하여 호남의 왜병잔당을 포위할 계책을 내고, 이를 구하러 오는 왜수군을 넓은 바다에서 맞아 싸울 것을 간하여 노량해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노량해전 중 순절한 충무공을 대신해서 끝까지 해전을 지휘함으로써 대첩을 이루었다. 전쟁 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휘 대립(大立)은 휘 희립(希立)의 큰형으로 이순신 장군의 추천으로 권율장군 휘하에서 활동했다. 흥양(지금의 고흥)에 침입하는 적에 맞서 싸우다 흉탄에 순절했다.
휘 복언은 숙종 병신년(1716년)생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으며, 남양송씨와 칠원윤씨 두 분의 부인이 있었다. 휘 정섭의 6대조이며, 우리 집안의 직계 시조이시다.
22세 휘 제행은 후사가 없어 휘 제갑에 의해 대를 이었다.
25세 휘 영호에게 후사가 없어, 봉북 작은집(24세 휘 진연의 후손) 25세 휘 필호의 두 아들 중 맏이인 휘 주민을 양자로 들였고, 봉북 작은 집은 작은 아들인 휘 주성이 계대(繼代)했다.
26세 휘 주민은 고종 갑술년(1874년)생으로 단발령을 거부하여 산중에 기거하셨다.
27세 휘 정섭(禎燮)의 자는 상옥(祥玉), 호는 경암(敬菴)으로 학식이 고명하셨다. 고종 병신년(1896년) 10월 22일생으로 손이 귀하던 집안에 3남4녀를 두셨다. 과거를 준비하셨으나 구한말 세도정치와 조선조의 몰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한의원을 운영하셨고, 향교를 통한 후학 양성에 힘쓰셨다.
휘 정섭의 후손들은 “고흥군 점암면 대룡리 오리(梧里)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28세 휘 기선은 1919년생으로 평생 종택(宗宅)을 지키며 사셨고 3남1녀를 두셨다. 휘 기양은 1926년생으로 일본 유학 후 평생을 교단에 계셨으며, 2남5녀를 두셨다. 휘 기석은 1935년생으로 일찍이 상경하여 마포에 기반을 닦으셨으며, 4남1녀를 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