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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기도 2일 - '왜 구하지 않는가?'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산속에서 수련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수련회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을 도와줄 조언자와 짝이 되어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조언자는 70대 노인이고 그분은 당신이 살아 온 햇수보다 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왔다.
첫날 아침 샤워를 하러 가는 길에 그의 방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방문이 약간 열려 있어서 들여다보니 그는 막 무릎을 꿇고 막 기도하려던 참이었다.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믿음의 거인들은 기도를 어떻게 시작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멈추어 서서 문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 아니면 전 세계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까? 혹 나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당신이 들은 기도는 “오, 주님, 제게 복주시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간절히 기도합니다!”였다.
그런 이기적인 기도에 충격을 받은 당신은 샤워실을 향해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그러나 물 온도를 맞추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너무나 분명해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은 평범한 우리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옷을 챙겨 입고 아침 식사를 하러 갈 때가 되었을 때 그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기도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하나님께 너무 많은 복을 구하게 되면 속물스럽고 공손하지 못하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기도가 자기중심적으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오히려 그런 기도야말로 매우 영적인 기도이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듣고 싶어 하시는 기도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복을 얻게 하려는 것”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남부 지방에 살았었다는 것까지는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는 유다 지파로 태어나 결국 한 가문의 눈에 뛸 만한 존귀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이야기는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그의 이름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말로 야베스는 “고통을 의미한다. 혹은 불러올 것이다”라는 뜻이다. 장래가 그리 유망 해 보이는 삶의 시작은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아기들은 얼마간의 고통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야베스 출생에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 속에 기억시켜주기로 했을 정도의 일이었다. 왜일까? 아마도 임신기간 동안 혹은 출산 과정에서 큰 충격이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아이가 거꾸로 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머니가 무거운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아이의 아버지가 그녀를 버렸거나 혹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경제적인 파산으로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 염려와 두려움만 가져다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야베스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본보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야베스라는 이름에 주목해보라. 야베스라는 말은 '고통'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그를 힘들게 해산했거나, 아니면 그 당시 그녀를 몹시 힘들게 하는 다른 고통스러운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야베스가 "야, 고통! 무슨 일이야?"라는 말을 거듭거듭 들으며 자랐을 것이라 생각해보라. 또 자신을 "안녕하세요? 전 고통이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소년이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사내아이라도 싫어했을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자랐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라는 것을 매일 기억나게 하며 “그래. 니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널 낳았다고 하더냐”라고 빈정거리는 심술꾸러기들의 놀림 속에서 어린 시절을 견뎌내야 했다고 생각해 봐라.
그러나 야베스는 그의 이름이 가져다주었을 가장 심한 고통은 그의 장래가 그 이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생각된다는 점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이름과 삶이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한 사람 이름을 삭제하는 것은 그를 죽인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때 그 이름에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해주는 예언이나 소망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야곱이라는 이름은 ‘움켜잡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 교활한 족장의 전기를 잘 보여주면서도 간단하게 표현해주는 이름이었다.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은 두 아들에게 ‘말룐’과 ‘기룐’이란 이름을 지어 줬는데 그 뜻은 ‘허약하다’ ‘수척해지다’였다. 그리고 두 아들은 정확하게 그렇게 되었다. 둘 다 어른이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솔로몬의 이름은 ‘평화’란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름처럼 그는 전쟁을 겪지 않고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고통이라는 뜻을 가진 야베스란 이름은 그의 장례를 위해 그리 좋은 징조가 되어주지 못했다.
장래에 대한 침울한 징조에 굴하지 않고 야베스는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는 노예 생활을 하던 조상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주셨고 그들의 강한 적으로부터 구해 주셨으며, 풍요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게 해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들으며 자랐다. 어른이 되자 야베스는 이 기적과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을 강렬하게 소망하게 되었다.
어찌 구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그가 한 일이었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사실 같지 않은 그런 요청을 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는 그의 간구에 나타난 긴박성과 인간적인 연약함을 좋아한다. “복에 복을”이라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히브리 표현은 마치 느낌표를 5개나 더하거나 아니면 고딕체로 쓰고 밑줄을 그어 강조하는 것과도 같다.
나는 하늘로 치솟은 성벽 아래 우목하게 파인 육중한 성문 앞에 서 있는 외소한 야베스의 모습을 그려본다. 슬픈 내 자신의 슬픈 과거와 현재 생활에 침울함을 무겁게 지고 있는 그의 앞에는 꽉 막힌 미래만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리고 “아버지! 아버지! 저에게 복을 주세요. 정말로 복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부르짖었다. 부르짖음이 끝나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부서지듯 엄청나게 큰 소리가 울렸다. 그런 다음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덜컹하며 둥근 아치 모양의 거대한 성문이 그 앞에서 활짝 열렸다. 그리고 야베스는 새로운 삶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야베스가 남긴 유산은 고통 속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존귀한' 자라고 불러주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실제로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로 알려져 있다. 이 구절에 사용된 '존귀한'이라는 말은 '존경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야베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만큼 성숙하고 지혜롭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본보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복은 사소한 말이 아니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을 구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우리는 복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어느 강대상에서나 ‘복’ 혹은 ‘축복’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들에게 복주시고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가 먹을 음식에도 복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다 보니 축복이란 단어가 “좋은 하루가 되세요”와 같이 그저 애매하고 무해한 말처럼 사용되면서 그 의미가 흐려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복을 구해야 했던 야베스만큼 그렇게 절실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복이란 말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구할 때 그것은 우리가 자력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고 주실 수 있는 놀랍고도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심으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잠 10:22). 잠언의 저자는 바로 그런 풍성함을 언급하고 있다.
복을 구하는 야베스 기도에 나타나는 극적인 단면을 살펴보자. 그는 어떤 복이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질지에 대한 결정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런 철저한 신뢰는 고급승용차나 그에게 수입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돈을 버는 인기를 끄는 종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레이저처럼 초점을 맞추어 광선을 비추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우리 삶에 최고 가치로 추구할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목적’이라는 강물 속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밖에 다른 모든 필요들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에 밀려 부차적인 것이 된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행하시는 일들 속에 완전히 잠기게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구할 때 기적의 흔적들이 우리의 삶 속에 부산물로 남게 된다. 내가 그 결과를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고 그런 일들이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난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 안에서 별안간 아무 제재로 받지 않게 된다. 당신은 그분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정확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게 된다. 거침없이 하늘에서 주어지는 힘으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가장 먼저 그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천국에 간 존 이야기’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에게 23개의 특별한 복을 보내 주시기로 했지만 당신은 그 중 하나밖에 받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존이란 사람이 천국에 가서 경험한 짤막한 이야기가 있다. 배드로가 그를 안내하기 위해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보여주는 황금길과 아름다운 저택 그리고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황홀함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창고 같았다. 창문은 하나도 없었고 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안을 보고 싶다고 하자 베드로는 좀 꺼려하면서 “안 보는 게 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천국에 무슨 비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저 안에 도대체 얼마나 놀라운 것이 들어 있는 걸까”라고 존은 생각했다. 공식적인 안내가 끝난 후에도 계속 궁금했다. 그래서 그 건물 안을 좀 보여달라고 다시 부탁을 했다.
결국 배드로는 마음이 약해졌다. 사도가 문을 열자 존은 급히 들어가려다 거의 자빠질 뻔했다. 그 거대한 건물 내는 바닥에서 천정까지 선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각 선반에는 빨간 리본이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감개무량해진 존은 “전부 이름이 쓰여 있네요”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제 것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배드로가 그를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솔직히 내가 당신이라면 보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동안 존은 이미 자기의 상자를 보고 싶어 ‘ㅈ’자 표시가 된 선반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배드로는 머리를 흔들며 뒤따라갔다. 베드로가 그에게 다가갔을 때 존은 벌써 자기 이름이 쓰여진 상자의 리본을 풀고 안을 들여다 보자마자 존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배드로가 수차례 했던 것과 똑같은 그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존이 열어본 하얀 상자 안에는 자기가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 원하셨던 많은 복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존은 전혀 구하지 않았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4:2)라고 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끝이 없지만 어제의 복을 구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제 받았어야 할 복을 다 받지 못한 셈이다.
그게 바로 문제다. 당신이 하나님에게 복을 구하지 않으면 당신이 구할 때에만 주어지는 복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구하는 자녀를 통해 아버지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이 당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 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넉넉하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당신의 이름 역시 또 하나의 고통과 수고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주어진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래서 자신은 복을 받을 수 있는 후보자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전에 한 번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복은 당신이 무엇을 하건 상관없이 이미 예정된 대로 부슬비처럼 내려지는 그런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은 장부를 기록하며 관리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당신이 소유한 복 장부에는 입금란과 지출란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근래에 유난히 친절을 베푸셨으니까 더 이상 바라서는 안 되며 조금만 구해서 장부상에 남은 것이 있도록 해야 한다. 어쩌면 당분간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고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당하게 해서 빚을 청산하게 하시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은 죄며 올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 서”(출 33:18)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보다 더 친밀하게 알 수 있기를 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34:6)고 자신을 묘사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의 본성에는 그 선하심이 너무나 풍성해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그 선하심이 흘러넘치게 하신다.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의 그 사고방식을 바꾸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평생 구하겠다고 그리고 더 많이 복주시기를 구하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해 보라.
하나님의 풍성하심은 하나님의 자원이나 능력이나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 때문에 제한을 받고 있다. 야베스는 그 어떤 장애도 그 어떤 사람도 혹은 그 어떤 주장도 하나님의 본성보다 더 크게 학대해 보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 복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 위 내용을 빠르게 읽으면서 감동되는 기도제목을 붙잡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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