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숙을 통해 본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
연구위원 류병무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명부가 되었느니라.(교법 1장 2절)
대순진리회의 수도인이 항상 가까이 하는 생활 지침으로는 훈회와 수칙이 있다. 훈회(訓誨)란 가르치고 타일러 뉘우치게 한다는 의미이다. 수칙(守則)은 행동이나 절차에 관하여 수도인이 지켜야 할 사항을 정한 규칙을 말한다. 따라서 훈회와 수칙은 대순진리회의 대표적인 사상인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일상에서 수도인이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지침이다. 이 실천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남을 잘 되게 하라.’인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라고 말씀하시면서 전명숙의 마음을 예로 삼으셨다. 전명숙은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비록 성공하지 못했으나 죽어서는 잘 되어 조선 명부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천은 명부의 착란에 따라 온 세상이 착란하였으므로, 명부가 바로 잡히면 온 세상 일이 해결될 정도로 명부 공사는01 중요한 공사 중 하나이다. 그 명부 공사의 일환으로 조선명부(朝鮮冥府)를 전명숙(全明淑)으로, 청국명부(淸國冥府)를 김일부(金一夫)로, 일본명부(日本冥府)를 최수운(崔水雲)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드는 공사02를 보셨으므로 상등국의 명부를 맡은 전 명숙의 쓰임은 김일부나 최수운의 쓰임보다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왜 이토록 중요한 자리에 전명숙을 쓰셨을까? 또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전명숙의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백의한사 전봉준의 삶의 여정을 살펴봄으로써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것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백의한사 전봉준의 출생과 성장
주지하다시피 전봉준은 고부봉기가 있기 전까지는 우리 역사에서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고부봉기 이전까지의 그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반역 수괴’라는 오명으로 대부분의 자료가 인멸되었다. 또 있다 하더라도 왜곡되거나 윤색된 이야기, 또는 대부분 구전자료이기 때문에 자연히 논리적 비약이나 추정에 그칠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인지 전봉준의 출생, 부모의 족보, 동학의 입교까지의 주장들이 서로 상이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꼭 사실과 부합된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서 시대적인 정황이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설을 더 참조하였다.
전봉준은 1855(乙卯)년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현 덕정면 당촌(지금의 고창읍 죽림리 당촌 63번지)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03 부친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창혁(彰爀 혹은 承?)이고 모친은 언양 김씨(彦陽 金氏)이다.04
그는 부모를 따라 전주 구미리(龜尾里, 현재 완주군 고산면)로 옮겨 살다가 원평 항새마을(정읍시 감곡면 계봉리 184번지)로 이사했다. 항새마을은 1894년 당시 금구 원평의 동학대접주이자 갑오년 백산봉기 때 농민군 총참모로 활약한 김덕명(金德明)을 비롯하여 그의 모친과 같은 성씨인 언양 김씨가 많이 살던 거야(巨野)마을에서 채 십리도 안 되는 위치에 있다. 즉, 부친은 10대의 전봉준을 데리고 자신의 처가(妻家)친척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원평 일대로 이주한 것이다. 여기서 전봉준은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김덕명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이며, 훗날 이러한 인맥과 유년시절을 보낸 연고를 바탕으로 전봉준은 1893년 3월 금구 원평에서 집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도 동학교도들을 모아 이곳 금구에서 주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이곳에서 18세 때까지 살다가 태인 산외면 동곡리 지금곡(知琴谷=知琴室)로 이사했다. 이곳은 동학 접주 중 한 사람인 김개남(金開南)의 생가(生家)가 있는 곳으로 원평에서 약 20리 정도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성장해서 20대 초반에 결혼했다.05 이 시기에 전봉준은 김개남과 송희옥을 만났으며 훗날 김개남의 중매로 그의 딸을 혼인시킬 정도로 김개남과 막역한 교우관계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그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를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06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그는 31세경에 이평면 양교리(陽橋里)로 이사했으나 바로 조소리(鳥巢里)로 옮겨 살았다. 그가 이렇듯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가난했던 가정형편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 속에서 봉건통치 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목도했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 사정과 민중의 삶이 더욱 더 피폐해지는 것을 보면서 항상 마음에서 탐관오리들과 외세에 대한 울분과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전봉준의 혁명적 의식 형성은 의식 있는 농촌지식인이던 그의 부친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기 저기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전봉준에게 서당교육을 시켰고 그러므로 사회 현실을 인지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봉준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부친의 죽음이다. 부친 전창혁은 고부군수의 부당한 학정에 맞서다 죽음을 당한다.07 물론 전창혁의 죽음이 전봉준으로 하여금 고부봉기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부친의 이러한 올곧은 기질을 전봉준이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08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이기 때문에 매우 좋아했으며, 마음을 지켜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해서였다.”09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는 참담한 나라의 현실과 민중들의 삶을 동학을 통하여 개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전면으로
전봉준이 교조신원운동10 단계에서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2년 11월에 있었던 삼례집회11에서부터이다. 이때 전봉준은 유태홍(柳泰洪)과 함께 관찰부에 소장(訴狀)을 제정(提呈)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때는 이미 동학의 남접이 동학 교단의 상층지도부(북접)와는 다른 지도체제로 서장옥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을 확대 형성시켜 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전봉준도 남접의 지도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92년 12월 초, 민중의 재집회 요구에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당황한 동학의 북접 상층부는 하층농민 대중의 집단력을 피하고 소수인의 대표에 의한 상소의 방법을 제시하여 1893년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40여 명의 대표단이 광화문 앞에서 3일 밤낮으로 엎드려 임금님께 상소하였다.12 그러자 고종은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생업에 힘쓰고 있어라. 그러면 이에 소원을 곧 시행하리라.”라는 답신을 내렸다. 이에 북접계 쪽에서는 복합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해 버렸다.13
1893년 3월 11일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 각지에서 끝도 없는 군중의 대열이 충청도 보은으로 몰려들었다. 수만 명이 모인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14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하여 위무(慰撫)토록 하였고, 어윤중은 4월 1일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계 지도부와 만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말을 전하였고 이에 북접계 지도부는 감격하여 해산을 약속하였다.15
보은집회가 이렇게 진행되어 갈 때, 전라도 원평에서는 전봉준 등이 동학교도 상층지도부에서 주도한 광화문 복합상소가 별 성과 없이 끝난 것에 실망하여 보다 강력한 정치적인 성향을 띤 원평집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보은집회가 갑자기 흐지부지 해산하게 되자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을 원평집회에 두면서 보은집회의 열기를 끌어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16
영웅 드디어 일어서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趙秉甲)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에 해당하는 세를 징수하기도 했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은 만석보(萬石洑)17의 개수에 따른 탐학이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18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건져보고자 오랜 준비와 기일을 기다려왔던 그는 마침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고부 일대의 각 마을 집강(執綱)들에게 격문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20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1893년 11월 고부 서부면 죽산리(古阜 西部面 竹山里)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도소(都所)를 정하고 매일같이 모여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으니 이것이 고부민란이다.19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여 유배형에 처하고 김문현을 감봉 처분하였다. 그리고 새 고부군수에 박원명(朴源明)을 임명함과 동시에 장흥 부사인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20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 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1월 25일 백산으로 진을 옮겼는데, 2월 말경부터 내부에서 의견 차이를 보이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고부농민군은 고부 농민들의 동요와 박원명의 집요한 회유 등으로 3월 초순 해산하였고, 전봉준을 비롯한 수십 명의 동학교도만이 이웃 무장 현의 손화중 대접주 아래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리면서 민란에 가담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무장현에서 출발한 전봉준·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 등 인근지역의 농민군 8,000여 명이 백산에 집결하므로써 연합농민군이 형성되었다. 연합농민군은 3월 25일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金開南)과 손화중(孫華仲)을 총관령(總管領)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정하여 지휘체계를 세우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격문과 4대 명의(名義), 12개조의 기율(紀律)을 선포하였다. 백산의 격문은 봉기에 나서는 농민들의 의지를 적극적이고 진솔하게 밝힌 것이었고, 농민혁명의 출사표였다. 이제 고부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는 전반적인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횃불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격문(檄文)
우리가 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本義가 단연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는 데 있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들 밑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 갑오 정월, 湖南倡義大將所 在 白山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하던 중 1894년 4월 7일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21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하였던 경기전과, 시조 및 시조비의 위패를 봉사한 조경묘가 있는 영지였다. 따라서 전주는 정부와 농민군 모두에게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창의문(倡義文)
민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말라 버리면 국가는 쇠잔해지게 마련이다. … 우리는 비록 재야의 유민이나 군토를 먹고 군의를 입고 있으니,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볼 수만 없다. 인로가 동심하고 순의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생사의 맹세로 삼는다.
- 갑오 사월, 호남창의소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에 당황한 조정은 1894년 4월 29일 밤, 고종의 주재 아래 긴급 대신회의를 열고, 결국 청군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정부의 원병요청에 따라 5월 5일 청국군(淸國軍)이 충청도 아산(牙山)에 상륙하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5월 6일 인천(仁川)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에 의하여 청국군과 일본군이 들어와서 대치국면으로 치달아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22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접혀진 꿈
혁명은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다시 봉기를 준비하던 전봉준은 전주, 진안, 홍덕, 무장, 고창 등 각 지방 농민군에게 “일본병을 쳐서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몰아낼 마음으로 다시 거병하자.”는 취지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였다.23 여기에 그의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12월 2일에 순창 피노리24에 도착한 전봉준은 옛 부하 김경천을 만났다. 하지만 자신이 믿었던 부하인 그의 밀고로 관군에게 붙잡힌 전봉준은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다섯 차례의 심문을 받은 후 결국 을미년(1895) 3월 29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
전봉준이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거병을 한 것은 『전봉준의 공초 사료』25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다음은 제1차 심문과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문 - 너의 이름은 누구인가?
답 - 전봉준이다.
문 - 나이는 몇 살인가?
답 - 41세이다.
문 - 살고 있는 곳은 어느 고을인가?
답 - 태인 산외면 동곡리이다.
문 - 하는 일은 무슨 일인가?
답 - 선비로서 일하고 있다.
문 - 너는 전라도 동학의 괴수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답 - 처음은 창의로 기포하였고 동학괴수라 일컬은 적은 없었다.
문 - 너는 어디에서 민중을 불러 모았느냐?
답 - 전주, 논산 땅에서 의병을 모았다.
문 - 작년 3월간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도취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어 문 -그렇게 하였는가?
답 - 그때 고부군수는 액외의 가렴이 기만냥인 고로 민심의 원한으로 이 거사문 -가 있었다.
문 - 고부군수 이름은 누구냐?
답 - 조병갑이다.
문 - 이러한 탐학한 일은 다만 고부군수에게만 그쳤느냐? 혹 이속배들의 작간문 - (作奸)은 없었는지?
답 - 고부군수 단독으로 행하였다.
문 - 너는 태인땅에서 거생했는데 어찌하여 고부에서 기요(起擾)했느냐?
답 - 태인에서 살다가 고부로 이사한지 수년이 되었다.
문 - 그런즉 고부(현 이평면)에는 너의 집이 있느냐?
답 - 불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문 - 그때 너는 늑징(勒徵)의 피해가 없었느냐?
답 - 없었다.
문 - 일경 인민이 다 늑렴(勒斂)의 피해를 입었는데 네 홀로 피해가 없었다는 것문 -은 무엇 때문인가?
답 - 학구로써 업을 하기 때문에 전답이라고는 삼두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 - 너의 가족은 몇 명이나 되느냐?
답 - 가족을 합해서 6명이다.
문 - 일경 인민이 다 늑렴의 해를 입었는데 너만 홀로 없다하니 참으로 의혹이 간문 -다.
답 - 나는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을 정도이니 어찌 늑렴할 것이 있겠문 -문 -는가?
문 - 고부 군수가 도임한 것은 몇 년 몇 월인가?
답 - 재작년 동지 섣달 양월간이다.
문 - 도임이 꼭 어느달인가?
답 -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거년이 일년이다.
문 - 도임하자마자 처음부터 곧 학정을 행하였는가?
답 - 처음부터 행하였다.
문 - 학정을 처음부터 행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즉시 기요 하지 않았느냐?
답 - 일경 모든 인민이 참고 또 참고 견디다가 종말에 부득이 행하였다.
문 - 너는 피해가 없었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기요하였는가?
답 - 한 몸의 해를 위해 기포하는 것이 어찌 남자의 일이라 하겠는가? 중민이 원탄문 -하는 고로 백성을 위해 제해코져 하였다.
문 - 기포 시에는 무엇 때문에 주모하였는가?
답 - 중민이 모두 나를 추대하여 주모로 삼은고로 민언을 따랐다.
문 - 중민이 너를 주모로 삼았을 때 너의 집에 왔었는가?
답 - 중인 수천명이 나의 집 근처에 모인고로 자연히 이를 하게 되었다.
문 - 수천명 중민이 무엇 때문에 너를 추대하여 주모로 하였는가?
답 - 중민은 비록 수천명이나 모두가 어리석은 농민으로 나는 문자를 알고 있문 -었기 때문이다.
문 - 다시 기포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26
답 - 그 후 들은즉 귀국(일본)이 개화를 한답시고 처음엔 민간에게 일어반사의 알문 -림도 없었고 또 격서도 없이 솔병하고 도성에 들어와 야반에 왕궁을 격파, 주문 -상(임금)을 경동케 하였다는 말이 들리는 고로 시골 선비 등은 충군 애국의 마문 -음으로 분개를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 일인과 더불어 접전하여 일차적으문 -로 이 사실을 청문하고자 하였다.
다음은 제2차 신문과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문 - 너는 작년 3월에 행한 기포의 뜻은 백성을 위해 제해할 뜻으로 하였문 -다하는데 과연이냐?
답 - 그렇다.
문 - 그런즉 전라일도 탐학의 관리를 제거코저 기포하였느냐? 그렇지 않으문 -면 팔도를 한가지로 이같이 할 의향이었느냐?
답 - 전라일도 탐학을 제거하고 또 내직의 매작권신을 쫓아내면 팔도가 자문 -연히 한몸이 될 것이다.
문 - 너는 어떤 계책으로 탐관을 제거코저 하였느냐?
답 - 별도로 계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심의 간절한 바가 안민에 있으므문 -로 탐학을 본즉 분탄을 이기지 못해 이 일을 하였다.
문 - 너는 고부군수에게서 피해가 많지 않았는데 어떠한 의견으로 연유하문 -여 이 거사를 행하였는가?
답 - 세상살이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건져 보고문 -자 하는 의견이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자신이 거병한 것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 아닌 학정에 의하여 어려움에 처해있는 백성들을 위하여 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그가 죽기 전에 옥 중에서 시 한수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時來天地皆同力 運法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27
(시래천지개동력 운법영웅불자모
애민정의아무실 애국단심수유지)
때가 올 적엔 천지가 다 내게 협력했건만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네.
애민 정의의 길이 내 잘못이 아니었건만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주랴!
결국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백성을 사랑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상제님께서는 전명숙을 만고의 명장이라 칭하면서 백의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고 말씀하셨다.28 백의한사(白衣寒士)란 가난하면서 벼슬도 갖지 못한 선비를 말한다. 전봉준이 비록 변변한 벼슬조차 하지는 못했지만 남을 잘되게 하려는 마음 하나로 천하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이 남을 잘 되게 하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움직인 것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이 가졌던 마음과의 비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상제님께서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공사 2장 19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차경석을 동학의 해원두목으로 정하는 공사를 보신다. 동학이 보국안민을 주장하였으나 그 이면의 마음에 왕후장상을 바란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씀으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이다.29 원래 김개남의 본명은 김영주(金永疇)였으나 자신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손바닥에 ‘開南’ 두 글자를 써 주고 나서 김개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남이란 ‘남조선을 연다.’는 뜻인데 남조선신앙은 정감록의 예언처럼 조선 후기에 민중에게 널리 퍼져있던 구제(救濟)사상이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의하면 남조선신앙이란 “우리의 앞날에 남조선이 있어서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우리를 그 곳으로 끌어 들여다가 지금 시달리고 쪼달리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바라고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저절로 성취되는 좋은 세월을 가지게 된다.”는 신앙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김개남은 스스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자신이 바로 남조선, 즉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인공이 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왕후장상을 꿈꾼 대표적인 인물로는 손화중(孫華仲)이 있다. 당시에 “도솔암 마애불의 명치 부분의 감실(龕室)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고 오직 새 세상의 주인이 아니면 이 비결을 열어 볼 수 없으며, 이 비결이 나오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참언이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2년 손화중과 그 수하들이 한밤중에 선운사를 습격하여 마애불의 명치에 있는 감실을 도끼로 부순 뒤 비결서를 훔쳐가는 일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손화중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주인이라는 믿음이 급속도로 퍼졌으며 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 주변에 왕후장상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자신들의 욕심을 감췄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민중들은 순수하게 자신들을 위해 싸운 전봉준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당시에 구전되던 동요의 내용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전봉준 공초
무장포고문 茂長布告文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연후에야 집과 나라에 무궁한 복이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해하고 총명하니 어질고 양순하며 바르고 점잖은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도우면 요순의 덕하와 문경 文景 의 선치를 가히 바랄 수 있을 것이라
그러나 오늘날의 신하된 자는 보국은 생각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녹봉과 직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며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을 간하는 말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 匪徒 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흐트러져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더해가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 管子 가 가로되 사유 四維 禮 義 廉 恥 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하였으니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도다
공경 이하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난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부질없이 일신의 비대와 가문의 윤택만을 꾀하고 과거의 문을 돈벌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응시 장소는 매매하는 저자로 변하고 말았도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사복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일만을 거리낌 없이 일삼으니 전국팔도가 어육 魚肉 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허덕이도다
수재 守宰 가 탐학하니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도다 국가를 운영하고 민을 편안케 할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 鄕第 고향에 있는 집 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 붙여 사는 자이니 나라의 위망을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모든 지역이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인민이 뜻을 모아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다 1894년 1월 10일 저녁, 전라도 정읍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 단신의 사내 하나가 섰다. 키는 작았지만, 담력은 산같이 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다.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고 저 악랄한 지주나 관료 손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 그런데도 중앙의 대소 신료들은 자기 잇속 채우기에만 정신이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조병갑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입니다. 부디 저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고 이 나라를 바로잡는 대열에 앞장섭시다. 자, 날이 밝기 전에 곧바로 고부 관아로 쳐들어갑시다.”
듣고 있던 군중들은 한 맺힌 함성을 토해냈고, 전봉준은 이들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 관아로 향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탐관오리에게 잃고 전봉준은 1855년 아버지 전창혁(全彰赫)과 어머니 언양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봉준의 집안은 고조부 때만 해도 벼슬을 했던 양반 가문이었으나 이후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읍 당촌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기울어짐에 따라 순창, 임실, 고부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서른 살 즈음고부 마을로 들어왔다.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 풍수도 보고,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도 대필해주었다. 가난했으나 농사를 짓지 않았던 전봉준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방법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호남 지역은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당시의 부패한 지방 관리들이 이 땅을 한밑천 챙기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데 있었다. 세도가 풍양 조씨 척족이었던 조병갑도 그런 인물이었다.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해온 뒤 온갖 노략질을 벌이자 참다못한 군민들은 관아로 달려가 소장을 올리고 억울함을 호소한 적도 있었지만, 조병갑은 이들을 난민으로 몰아 엄한 형벌로 다스렸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도 이 일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매 맞아 죽었다. 이후에도 백성들은 몇 번에 걸쳐 관아에 몰려가 호소했으나 욕심에 눈이 먼 조병갑은 이들을 옥에 가두고 몽둥이로 다스렸다.
참다못한 1893년 11월 전봉준을 주축으로 한 20명이 모여 고부 관아를 부수고 조병갑의 목을 벤 뒤 전주 감영을 함락할 것 등을 결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했으나,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발령이 나 계획이 무산됐다. 그러나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공작을 벌여 다시 고부 군수로 부임해오자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이 분노가 하나의 힘으로 뭉친 것이다.
민란이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돼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전봉준의 지도 아래 고부 관아로 들이쳤다. 조병갑이 이미 달아난 고부 관아는 군중들의 함성에 파묻혔고, 관아를 점령한 백성들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나누어 가졌다. 또 곡식 창고를 열어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신임군수로 박원명을, 봉기를 진압하고 조사할 안핵사로 이용태를 내려보냈다. 박원명은 난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며 지난 죄를 모두 용서할 테니 각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고 타일렀다. 그 말에 많은 농민군이 해산했고 전봉준도 고부를 떠났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난 이용태는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줄줄이 잡아갔다. 특히 농민들이 주축이었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전가하며 동학을 탄압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은 분노하며 다시 한번 무장봉기를 결의했다. 손화중·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과 손을 잡은 전봉준은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걸고 다시 일어났다. 1894년 5월 4일 고부군 백산면에 모인 인원은 약 1만 3,000여 명이었다. 전봉준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을 맡았다. 전봉준은 격문을 지어 봉기의 이유를 널리 알렸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한 네 가지 군율을 정했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4.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이로써 처음에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민란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된다. 이 무렵 동학은 온건 노선을 주장하는 북접과 개혁적인 행동 노선을 지지하는 남접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5월의 기병 당시에는 남접만 가담하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따르는 북접은 기병에 반대했다.
집강소 설치하고 폐정개혁 시행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 고개에서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그 기세를 몰아 봉기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장악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건의했다. 그 사이 전봉준은 ‘호남 제일성’이라 불리는 전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뒤따라온 진압군이 성을 포위하고 서울과 호남의 군사들이 원병으로 몰려들어, 정부군과 농민군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정부의 원병 요청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했고, 청의 출병을 구실로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했다.
뜻밖의 국면에 전봉준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개혁안을 수용한다면 전주성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관군도 더 이상 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5월 7일 전봉준은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다음날 전주성을 나와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전주 화약이다.
이 화약대로 전봉준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본래는 관과 민이 협력해 개혁 작업을 진행한다는 취지였지만, 실제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거의 도망가고 없는 상태에서 집강소는 농민들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농민 자치였다. 비록 호남 지방과 일부 인근 지방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농민이 자치를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또한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탐관오리는 뿌리 뽑을 것”, “무명잡세는 혁파할 것” 같은 농민들의 요구뿐 아니라 “종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등 매우 급진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반외세를 외치며 다시 거병했으나 밀고 당해 교수형에 처해지다 그런데 조선에 상륙한 일본은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개화파 정부를 출범시키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는 조선 내정을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조선의 제도를 자신들이 편한 대로 고쳐나가고 있었다.
9월 초 전봉준은 삼례에 직속 부대를 집결시켰다. 이렇게 모인 농민군 4,000여 명은 스스로 의병이라 칭했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각지의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받들고 손화중과 김덕명에게 총지휘 임무를 맡겼다. 이번에는 북접계도 합류해 그 세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농민군이 넘기에 높은 산이었다. 공주를 공격했다가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했고, 나머지 농민군도 진압되기에 이른다. 농민군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전봉준은 일단 농민군을 해산시킨 뒤 재기병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호남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개남을 찾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 옛 부하 김경천을 만나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현상금에 현혹된 김경천과 그의 이웃들은 잠든 전봉준을 몽둥이로 쓰러뜨리고 밀고했다.
일본군에게 넘겨진 전봉준은 살려달라고 하면 일본으로 데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제의를 뿌리치고 다섯 차례의 심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일어서 죽음을 앞둔 순간 목숨을 담보로 한 유혹마저 거부한 채 투쟁한 그의 삶은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매우 앞서 있었던 그의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 그가 보여준 무장항거정신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