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계시록 2장 1-7절
오늘은“첫사랑과 첫행위와 첫열정을 회복합시다.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에베소 교회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터어키 지역으로 그당시 로마제국의 한 중심지였고, 아데미라는 여신의 큰 우상신전이 있던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뉴욕에 비교 할수 있을 정도로 그 당시에는 대도시였던 곳이 이 에베소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에 바울이 이차 선교여행을 하며 여행시에 잠시 들려 복음을 전하고 3차 선교 여행시 2년반을 머물며 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고 눈물로 양육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늘 우리들이 함께 나누고있는 요한 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오기 전까지 목회하던 곳이 었습니다.
1장 17절을 보면 요한이 엎드리어 죽은 자가 될 정도로 두려운 모습의 주님이 나타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해주시면서 네가 본것을 일곱 교회에 전하라 하시고 가장 먼저 평가한 교회가 바로 자신이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1장 20절을 보면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사자이고 일곱 금촛대는 일곱교회를 말한다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는 의미는 각 교회를 살피시며 지키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있다 것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각 교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을 세우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사자들을 오른 손으로 보호하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이야기는 각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이 그냥 세워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주님이 교회의 사자들을 친히 세우시고 보호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샤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 주는 그리스도 시요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마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격에 죽음의 권세가 이길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 부수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음부의 권세를 부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하시기위해 가장 적절한 리더를 각 교회에 세우므로 교회를 지켜 가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사도요한이었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하도록 선택받을 정도로 그의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열심은 인정받는 제자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힘을 다해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에베소 교회를 평가했을 때 거기에는 칭찬과 책망이 함게 있었습니다.
사실 여기서 저는 참으로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주님이 직접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고. 사도 바울같은 복음에 대한 열심과 깊은 믿음과 사랑이 넘치며, 성경적 지식의 탁월한 그가 2년반 가량을 눈물로 양육했고 또 사도요한 같은 사랑이 깊고 계시록을 기록할 정도로 신실한 그가 목회를 했던 교회가 왜 이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가라는 답답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셨고 탁월한 리더가 이끌어 같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가? 그럼 주님의 약속은 무슨 의미가 있고 그 교회에 리더를 오른손으로 튼튼히 붙잡으시고 교회를 다니시며 살피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답답함이었습니다. 물론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는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 답답합은 왜 주님이 세운 모든 교회가 이럴수 없냐는 것입니다. 왜 겨우 7교회 중에 2교회뿐이냐는 것이 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 나도 모든 교회가 나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다. 그래서 무엇이 칭찬 받을 일인지 무엇이 책망 받을 일인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들을귀 있는 자는 듣고 회개하고 돌아 서서 칭찬받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들이 각 교회에 대한 이 주님의 평가를 듣기를 간절히 원하셨으면 각 교회에 대한 평가를 내리실때마다 이렇게 말씀하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에 대한 평가를 내리시고 11절에서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버가모 교회 평가후 17절에서 두아디아 교회에 대한 평가후 29절에서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3장 6절에서, 13절, 22절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우리들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않으면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고 7번 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 반복하셨을까요? 모두 귀를 가지고 계시지요! 주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왜 들으라는 것입니까? 듣고 칭찬받은 일들은 본받고 책망 받은 일들은 회개하고 버리고 고치므로 모두 칭찬받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각 교회를 향한 판단은 최종 심판이 아닙니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듣고 고치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간절한 권면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모두 받았습니다. 칭찬은 본받고 책망받을 동일한 것이 우리안에 있다면 깨닫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받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것도 첫사랑을 벼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고 촛대를 옮겨 버린 형편없는 교회로 오해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칭찬받은 부분은 오늘날의 교회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할 중요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은 그들에게 행위와 수고 그리고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만 많은 교회가 아니라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일하는 척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수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 진실로 열심히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약2:17절에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멧세지가 필요 없는 행함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들의 행함은 적당주의로 대충대충 행하는 실천이 아니라 “게으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실천이었습니다. 온 마음과 온힘과 온몸을 다 드려 ”수고“하며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고하는 행함을 한두번 해보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인내“가 있어 지속성있게 실천한 교회 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3절을 보면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라고 되어있어서
에베소 교회가 이런 행위과 수고와 인내를 보여준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 목적까지로 올바른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행함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거짓된 교훈을 시험하여 들어낼 정도의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6절을 보면 주님이 미워하시는 니골라당을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악한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교훈을 시험하여 들어내고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이끄는 니골라당을 미워했다는 것은 에베소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는 것을 말합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지은자에게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고전5:13)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거짓교훈을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이런 경고를 했습니다. [행 20:29-30](29)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30)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럴사한 말로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당시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에 죽으심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유대인으로 개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며 모세의 율법을 지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없고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렸다가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힐때 그리스도는 그를 떠났다는 등 교묘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약화시키는 이단들이 이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떤 거짓교훈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까?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주자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간에 화합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꽉 막힌자이고 고지식한 자라는 때로는 평화를 파괴하는 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아무거나 믿어도 착하게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자가 평화를 이루어가는 자가 구원을 받는것 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요1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자는 착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믿어도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북미에서 활성화 되고 있는 것으로 우리 들을 유혹하는 종교가 또 있지요. 뉴 에이지, 우리도 신이 될수있다는 것입니다.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가 신과 만나고 신이 들수있다는 흥미진진한 내용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노교사상과도 일치하지요. 이모든 것들이 바로 거짓된 이단의 교훈들인 것니다. 이런 것 들을 철저히 거짓임을 드러낼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와 음행들이 교회에 들어와 있습니까? 성공주의, 물질만능주의 우상 음행에 대해서는 제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음란물에 대하서 음란한 행동에 대해 자유라는 이름하에 방종을 허락하며 우리들이 얼마나 관대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렙5: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 철저하게 음행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님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행위와 수고가 있는 교회였으면 악한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교훈을 시험하여 들어내고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이끄는 니골라당을 미워하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3절을 보면 주님의 이름을 위해 게으르지 않으며 참고 견디는 인내까지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성공하거나 이익을 얻기위한 인내가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인내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교회가 한가지 약한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이 책망하신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서신서를 13권 정도 썼는데 동사형이나 명사형을 포함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107번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중에 6분에 1에 해당되는19개가 6장밖에 안되는 에베소서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1장 4절에서 시작하여 6장 마지막절 24절을 보면 의미심장하게 끝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사도바울도 이들이 처음 사랑을 버리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채고 이 부분을 강조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의 이 권면과는 반대로 이들은 그 첫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 5절을 보면 주님은 이들에게 어디서 이 사랑을 떨어뜨렸는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들의 처음 행위가 어떠했는 지를 살펴 봄으로 알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1-20에 보면 에베소 교회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9절과 10절에 바울사도가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매일 성경을 가르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당시를 연구한 책들을 보면 유대시간으로 5시에서 10시, 지금 시간으로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성경을 가르친 것입니다. 점심시간을 뺀다 해도 매일 많은 시간을 바울이 전하고 에베소 교인들은 들었던 것입니다. 그결과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매일 몇시간씩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요 14:21절 말씀“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이 말씀 처럼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어떤 분인줄 말씀을 통해 알려고 했고 그 말씀 대로 살려고 온힘을 다해 행하여 수고하고 인내하며 살고자 하는 주를 향한 열정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행 19-20장을 살펴보면 에베소교인들이 의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을 알수 있고 특히 [행 20:36-38]을 보면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이 장면은 바울이 3년간 에베소 교회에서 이들을 가르치고 주변 지역의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들과 헤어질때의 장면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귀히 여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는 교회였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가 인간들 서로 간에 깊은 사랑의 관계가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부터 40년이 지나 요한이 게시록을 쓸 당시는 이처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첫사랑과 첫 행위들을 버리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말씀을 사모하여 배우던 그 열정이 주님을 나의 생명 나의 사랑 으로 여기고 모시던 생활이 변질 된것입니다. 강렬한 열정과 사랑이 그리고 영적인 갈급함이 줄어들고 예배는 무 덤덤해 져 저리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사랑과 감사가 사라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사람에 대한 끊는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행함과 수고, 그리고 올바른 교리는 남아 있었지만 뜨거운 가슴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도 이 에베소 교회의 초기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서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경회가 있다고 하면 교인들은 쌀자루를 짊어 지고 강원도 에서도 서울까지 며칠간을 걸어와서 사경회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가져온 쌀로 밥을 해 먹으며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매일 금요일 밤 10시에 기도회를 시작하면 새벽 4시까지 밤을 새며 철야기도를 하고 5시 새벽 기도회 까지 하며 기도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를 하며 마음이 너무 아파 그 자리에서 데굴 데굴 구르며 자신의 죄를 아파하며 다시는 이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함과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데굴 데굴 굴러야만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정도로 간절하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모습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이런 진정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여 그 관계가 회복되고 용서 받은 원수는 이런 사랑과 용서에 감격하여 교회에 나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말씀을 행하여 나감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 람원교회로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한국이나 이민 교회에 이런 말씀에 대한 사모함, 말씀을 지키고자하는 열정이 있고 죄에 대해 아파하며 회개하는 진실함이 그리고 용서와 사랑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교회가 적은 것 같습니다.
현대교회를 묘사하면 이렇다고 합니다. 주일 대예배 때 설교가 30분을 넘어가면 시계를 보고, 함께 모이는 것에 힘쓰지 않고 귀찮아하고,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 없이 하루에 3번 식사기도 중심으로 살아가고, 매일 하나님의 말슴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일년에 신구약전체도 아니라 그 얇은 신약성경조차도 한번 읽지 않는 형편이고, 성도 서로 간에 별 관심도 없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서로 상처를 주게 되는 모습이 현대 교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가 이렇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부 교회 일부 성도들은 초대교인 이상 열심을 가지고 계신분들도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나 이민 교회가 그리고 이곳에 캐나다 교회들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신앙의 흐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대의 한국나 이민교회 역시 이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애뜻한 첫 사랑은 잃어 버리고 살아도 되는것입니까?
결혼을 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첫사랑의 그 애뜻함을 잃어도 그냥 그런대로 별탈없이 사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별것 아니지 않은가? 또첫 사랑이 없어도 그냥 그런대로 교회에 출석하고 맡은 일에 충성하고 사회에서 직장 생활도 충실하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수도 있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을 보면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서 임하여 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재림 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었을 때 하지 않으면 징계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즉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많으면 촛대를 옮신다는 것이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촛대인 교회자체를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심판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고를 통하여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경고를 귀롤 듣지 못해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옳기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별빛과 같은 지도자를 상실하고 증인이라는 교회로서의 의미을 상실하고 교회가 황폐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교회를 살펴보면 안타깝게도 이들은 이 첫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여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5세기까지 중요한 기독교 회의장소로 쓰임을 받았지만 5세기 이후에 쇠퇴했고 14세기에 투르크 족들이 에베소의 남은 사람(주민)들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는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할수 없게 만드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주님은 여기에 대한 대책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5절 초반부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고 했습니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1)첫째 생각하라입니다.
이것은 원어상의 의미는 계속해서 생각하여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자신들이 어디서 이렇게 첫사랑을 잊어 버리게 되었는데 생각하여 그 떨어진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처음 그들의 가슴을 사로 잡았던 열정, 구원의 첫감격,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했던 구원의 기쁨과 자녀로서의 행복의 자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의 열정과 사랑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아직 이 첫 사랑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 날 이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며 하시기 바랍니다.2)두 번째 회개하라 입니다.우물쭈물 하지 말고 단호하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죄가 있을 때마다 미루지 말고 회개하나는 것입니다. 현재에 몸에 익은 것들에 미련을 갖고 꾸물대면 회개할수 없는 것입니다.성령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유명한 인물중에고 과감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김유신 장군의 일화입니다. 창녀가 있는 술집을 다니며 방탕하게 살았던 삶을 정리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후 자신의 말이 자연스럽게 창녀의 집으로 가자 단칼에 자신이 그렇게 아끼던 말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타락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단을 지킨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성령이 없는 사람도 의지적으로 이정도 죄악은 이겨낼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안에는 우리를 돕는 성령이 계시는 크리스찬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할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와 몸에 익은 신앙의 게으른 모습에 대한 것들 말씀과 기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섭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열정이 없는 죄악을 단호하게 잘라내는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깨달을수록 그 말씀 앞에 회개하고 자신을 변화 시켜 가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열심을 내야하는데 이것과는 반대로 많은 경우에 말씀을 알아갈수록 이것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롬 2장 3-4절은 이것에 관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하나님께서 말슴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고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시는데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말씀을 알아가고자하는 마음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 용서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이것을 방해하는 자신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열정이 없는 죄악을 단호하게 잘라내고 회개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3)세 번째 행하라입니다.할까 말까 하지말고 과감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의 변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 까지 따라줘야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토론토를 가고자 기차를 탓는데 헬리팍스 쪽으로 가는 기차를 탓다면 어떻게 해야합니다. 머릿속으로만 토론토에 가야되 콧물과 눈물울 을리면서 내가 정말 잘못했어 헬리팍스로 가는 기차를 탄 것은 잘못이야 토론토에 가야되는데 나는 정말 토론토에 갈거야 한다고 토론토에 갈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정말 토론토로 가려면 다음 역에서 내려서 서쪽으로 가는 기차로 바꾸어 타는 노력과 행동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회개를 통한 무엇에 대한 변화된 행위를 하라는 것입니까?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를 살펴본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경청을 그리고 열심히 뜨겁게 드리는 기도와 사람에 대한 인정이 넘치는 사랑의 행위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첫사랑을 회복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기본적인 첫사랑의 행동들입니다.주님은 이런 대책을 말씀 하시면서 약속과 격려도 합께 하셨습니다.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이같은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순종하여 이기는 자는 첫사랑과 첫행위을 회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영생을 실제적으로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좋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풍성한 영생을 누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이 귀한 하나님와의 풍성한 교제를 통한 영생의 약속을 말씀하시며 이것을 귀기울여 듣고 회복하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와 뜨거운 사랑 없이도 우리들은 믿음이 교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교회에 잘 나올수 있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짐이 되고 이 짐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지치게되고 원망과 분열이 일어 날 수밖에 없는 것는 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사람, 그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그 동기가 사랑과 감사이기 때문에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 해도 기쁨일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처음 사랑의 감사와 기쁨이 늘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매일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사도바울이 자신이 경험한 고난의 일들을 고린도 후서 11장 23-28절에 열거해 놓았습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아무리 바울이지만 얼마나 이것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동기가 사랑과 감사였기 때문에 이 짐이 기쁨이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고통보다 교회를 위하여 염려함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뜨거운 처음사랑이 교회를 살립니다. 교회에 생명력을 줍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살리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는 것이 이 첫 사랑입니다. 만약 내게 주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그 감격과 사랑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둔해 져있다면 자신의 처음 사랑을 어디서 흘렸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을 만났을때 그 첫 감격과 첫열정과 첫 사랑을 기억해내고 냉랭해진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단호하게 정리하므로 이제 다시 첫 행위를 회복해야합니다. 물론 아직도 그 첫 사랑의 감격을 가지고 계신분들은 이것을 잃어버리지않도록 말씀안에서 깨어 기도하며 지켜가시기바랍니다."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하리라. " 주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우리들이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몬트리올 람원교회가 에베소 교회처럼 수고와 인내로 행함이 있는 교회가 되고 올바른 교리를 지키는 교회가 될뿐 아니라 “생각하고 회개하고 행함으로” 첫 사랑, 첫행위, 첫열정을 회복하여 뜨거운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시므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으며 사는 풍성한 삶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