移葬記
2022년 5월 7일에 봉화군 소천면 고선리 산 27-8과 11 지번의 조부, 조모, 부모의 묘를 봉화군 명호면 삼동리 임458 지번으로 이장했다. 무학봉 앞산 특골의 내가 제사를 모시는 백조부의 산소도 함께 이장했다. 소요 경비는 약 7백만 원이었으며 모두 내가 부담했다.
백부께서 딸만 셋으로 아들이 없자. 집안의 동의 없이 백부의 재물을 탈취할 모의를 하고 양자로 들어간 석포 쪽 도둑양자 그놈이 태백에서 보일러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2006년 6월에 고선리 27-8 등 12정보의 선산을 담보대출로 말아먹었다. 재물을 모두 빼앗긴 백부님께서 홧병으로 몇 달 후인 10월에 돌아가셨다. 그놈은 폭삭 망하고 인천에 가서 노동일을 하다가 몇 년 후에 공사판에서 죽었다. 이후 선산과 묘곡 등지의 8대조 이하 모든 산소가 2년 동안 묵었다. 그것을 보다 못해 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 벌초를 했다. 또 4년 전부터 웃대 산소 모두 시사를 다니게 됐다. 그런데 경매로 산 명성휴게소 사장 박경석이가 10여 년 계속해서 산소 1기당 4백만 원을 요구하며 전기 울타리를 치는 등의 방해를 하다가 폭삭 망해버렸다. 이어서 경매로 산 무진휴게소 김용철이 역시 철조망과 경고판을 세워놓고서는 1기당 년 10만 원씩의 지료를 요구하며 집요하게 성묘를 방해했다.
그리하여 이장이 급선무가 됐다. 2020년 추석 직전에 성묘하러 갔다가 산주 김씨를 만나 소천면 현동리 산 106번지 선산으로 이장을 한다고 통고한 이후 계속 고민하던 차에 늦가을에 의제 박진수네 밭에서 배추를 뽑다가 그 집이 조상 산소를 이장한 얘기를 듣고 업자를 소개받았다. 선산과 고선 토지 한 필지 280평도 죽은 도둑양자 그놈 때문에 2천만 원 담보에 잡혀 있다.
2020년 11월에 이장 사전답사 차 의제 진수와 조덕기 사장과 함께 고선에 갔더니 할머니 봉분 옆이 포크레인으로 긁혀 있었다. 대노하여 김용철이를 만나 산소 훼손 문제로 크게 다퉜다. 이후 2021년 추석 성묘를 하러 가서 부모 산소를 벌초하고 난 후 조부 산소에서 벌초를 시작하다니 김용철이가 와서 대뜸 욕설을 하며 벌초를 방해했다. 성묘 방해로 112에 신고했더니 소천지서 경찰 두 명이 왔다. 벌초를 중지하고 돌아온 다음에 내용증명을 보냈더니 원상복구 한다는 답장이 왔다. 성묘 방해죄로 고소를 할까 생각하다가 산소 문제로 대대로 원수질 사단을 안 만들기 위해 좋은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다.
2022년 3월에 조 사장과 연락이 닿아 이장을 의논했다. 더불어 씨라리골 선산과 고선 토지 두 필지에 대한 상속을 하기 위해 우선 4월 초에 태백새마을금고에 가서 담보 2천만 원을 해결할 방도를 알아보았다. 다행하게도 15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서 서류가 남아있지 않아 가압류 해제 서류비 10만 원만 납부했다. 일단 4월 30일에 이장하기로 하고, 봉화군청에 가서 이장 절차를 문의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주인 백부님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하다고 했다. 상속 문제는 차차 추진하기로 하고, 일단 형과 함께 소천면사무소에 가서 백부님 사망신고를 했다.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옥순이 누나와 대구 옥이 누나에게 연락했다. 두 누나는 대체로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옥녀 큰누나의 맏딸인 부산의 석자는 딸들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선산의 지분을 요구했다. 또 내가 수고한다며 1/5 지분을 주겠다고 했다. 도둑양자의 아들에게 전화와 문자를 보냈더니 전혀 무응답이었다. 아랫것들 둘 때문에 상속 문제로 이장이 막히자 속이 끓어 올랐다. 마침 산양삼 열댓 뿌리를 먹은 것과 아다리하여 화병에 걸려 애를 먹었다. 한의사가 내 체질에는 삼이 안 맞다고 했다. 낮과 밤에 무학려 주변에서 걷기도 많이 하고, 소백산 희방사, 봉황산 부석사, 문수산 축서사, 각화산 각화사를 찾아 불공을 드리고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등 마음을 가라앉혔다. 4월에 시작된 홧병이 6월이 돼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씨라리골 선산으로의 이장이 불가한 이상엔 도리없이 명호 내 산 중화총림으로 이장을 하기로 결심했다. 선산의 7대조와 6대조 때문에 선산으로 이장을 생각했지 사실은 내 산이 송림과 햇볕 등 모든 면에서 명당이다. 처음에 선산 아래를 생각할 적에는 할 적에는 내가 조상 아래에 묻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선산으로 이장하는 일이 틀어져서 내 산에 조상을 모시고 나 역시 그 아래 묻힌다고 하니 마음이 편했다. 미루어서 5월7일로 날짜를 잡고 석물 준비를 했다. 비석은 백조부, 조부모, 부모, 형의 네 개로 하고 상석 한 개를 했다.
길조랄까 두 가지가 있었다. 비석의 문구를 복사한 종이를 품고 영주버스터미널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나오다니 종이가 없다. 오던 길을 되짚어 살피다니 둔덕 아래 쓰레기통 밑에 석 장이 고스란히 있었다. 백조부 묘소를 찾아 특골 산에 오르니 산소가 금방 눈에 드러났다. 가파른 자갈밭 특골은 조상 대대로 조와 옥수수 등을 심어 먹으며 목숨을 연명한 곳이다. 뭔가 조상의 보살핌이 있음을 느꼈다.
준비를 마친 다음에 5월 6일에 정지작업을 했다. 조 사장 말대로 좋은 소나무를 20그루 정도 벴다. 큰 포크레인이 나무뿌리를 캐고 우곽을 만들며 문중묘터를 닦았다. 서울에 사는 운용이 형이 내려와 저녁에 영주집 무학려에서 함께 자고, 이튿날 새벽밥을 먹고 고선으로 갔다. 할머니 산소부터 파묘제를 지내고 파묘를 했다. 파헤치디니 할머니 관이 조금씩 드러났다. 관뚜껑을 여니 글쎄 유골이 없고 골토만 수북했다. 이런! 늦었구나, 아차 싶었다. 물길이라서 남아있는 뼈가 거의 없었다. 십여 년 동안 몇 번이나 꿈에 할머니 산소 위로 물길이 콸콸 쏟아지는 꿈을 꿨다. 시신이 썩지 않고 물에 불은 채로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뼈가 물에 녹아 다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참 다행이다. 몇 년 미뤘으면 할머니 뼈 조각 하나 건지지 못할뻔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몇 번이나 현몽하셨구나. 현몽을 절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제 물속에서 뼈를 건져 좋은 집에 할아버지와 함께 모셨으니 손자 된 도리를 조금은 했다. 그러나 관은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인 1967년에 돌아가셨으니 벌써 55년인데도 두꺼운 송판관은 그대로였다. 조 사장이 보고 “부자님 마나님이라서 관 참 좋은 것 했구나”라고 했다.
할아버지 산소에서 파묘제를 지냈다. 할아버지의 관이 조금씩 드러났다. 할아버지의 존재를 처음으로 보고 만졌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49년에 64세로 식중독으로 돌아가셨다. 고선 사촌 집 잔치에 가셨다가 얻어온 돼지고기를 방아간에 두었는데 다음날 잡숫고는 그만 탈이 났다. 두개골은 뒷부분만 남았으나 사지와 갈비뼈는 그대로였다. 키가 크고 장골이셨는 듯 뼈가 길고 튼튼했다. 정강이뼈를 몇 번 살며시 만졌다. 무섭거나 꺼림직한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이 뼈가 있기에 아버지가 있고 내가 있다. 바로 나의 뼈의 근원이다. 귀신이 있다 한들 그 귀신이 바로 나의 근원이다. 그래서 핏줄은 천륜이리고 한다.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부모 산소에 가서 파묘제를 지내고 포크레인이 어머니 유골단지부터 캐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십여 년이다. 내가 불효자인 것을 하늘이 아니 더이상 보탤 말이 없다. 다음으로 아버지 관을 캤다. 아버지 역시 두개골이 조금 있고 사지와 갈비뼈는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뼈를 만졌다. 나를 있게 한 뼈다. 나는 아버지를 66세에 돌아가시도록 한 불효자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더니 불효자에게 남는 것은 깊은 회한밖에 없다. 조사장이 “육탈이 잘 됐구나, 야, 이거 어떻게 팠을까 참 단단한 땅인데.”라고 했다.
유골을 모두 수습하여 이장지에 도착했다. 칠성판에 모신 조상들의 유해는 가벼웠다. 살아생전에 무겁지 돌아가시면 가볍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가벼움도 사라진다. 모시는 순서에 따라 며칠 전에 모셔온 큰할아버지 산소 유토를 시작으로 한 분 한 분 새집에 모셨다. 조 사장의 제안에 따라 저 앞에 있는 장형의 골분도 수습하여 아랫자리에 모셨다. 언젠가 이장하여 모실 날이 있는 줄을 아시는 듯이 장형의 골분도 돌 틈과 위에 덮힌 예단옷감으로 하여 그대로 있었다. 비석을 다 세우고 상석을 제자리에 안치한 다음에 제사를 지냈다. 노자돈도 45만 원 넉넉하게 올렸다. 여동생 정숙이와 매제 최명석이도 참석하여 함께 조상님들을 모셨다. 끝내고 삼을 20뿌리씩 캐서 나누어 주었다.
넓직한 계곡이라서 햇볕도 하루종일 잘 들고 주위의 산이 겨울 찬바람도 방풍하며 전후좌우로 소나무가 울창한 명당이다. 운용이 형도 소나무 숲이 참 좋다고 했다.
2022년 10월 27일
송계 박희용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