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중앙시조백일장 당선작] 오가을 외
■중앙시조백일장 1월 당선작
장원
와인 읽기 / 오가을
오래 묵었다는 말은 상처가 많다는 말
나를 알고 있다고 가볍게 흔들지 마
조심은 소중하다는 것 쉽게 깨진 투명한 맘
부딪치는 소리마다 맑은 울음 토하지만
이것만 읽어줘 너에게 물든 내 숨결
조용한 흔들림 속에 숙성된 향기를
요란한 웃음소리 조용한 속삭임도
언제든 부르면 달려가 있을 거야
차갑게 맞아줘도 돼 결국엔 뜨거울걸
오가을_2022년 5월 중앙시조 백일장 입선
차상
겨울 산 보법步法 -무장사지에서 / 정영화
내려온 산 그림자로 조금씩은 흔들렸을
걸어도 제 자리인 외로운 탑신 하나
말갛게 금이 간 세월 돌이끼가 걸어간다
산승山僧은 산을 안고 산은 또 사람을 안고
이쯤에서 무너졌을 법당의 고요 속에
겨울을 건너는 바람 베고 누운 낙엽 한장
다람쥐가 훑고 지난 도토리만 한 세상으로
탁발을 떠난 제자 빈자리 건너 누워
관 밖에 두 발을 내민 부처를 보고 있다
※무장사지 : 경주시 암곡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
차하
그리움 / 전승탁
버선코 고쳐 신고 뒤축을 당겨본다
낮달은 어디쯤에 옷고름 매고 있나
장날에 무명옷 입은 어머니를 보겠네.
이달의 심사평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문은 여는 1월 투고작들을 설레며 읽었다.
자유시가 아닌 정형시에서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율격이다. 특히 시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종장의 음보는 더욱 중요하다. 몇몇 작품에서 율격을 벗어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투고를 하기까지 상당한 고뇌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또한 시조는 번다한 말을 줄이며 행간에는 많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
숙독과 논의를 거쳐 이달의 장원에 ‘와인 읽기’(오가을)를 올린다.
발상이 참신했으며 소재의 내면화가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걸림 없이 읽혔다.
특히 “오래 묵었다는 말은 상처가 많다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보내온 다른 작품들도 습작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상에는 ‘겨울 산 보법(步法)-무장사지에서’(정영화)를 앉혔다.
익숙한 보법인데 진중하며 사유가 잘 녹아들었다. 구조 역시 탄탄했으며 장과 장의 연결이 자연스러웠다. 굳이 지적하자면 보내온 작품들에서 의고체의 울림이 보인다는 점이 다소 염려스럽다. 시조는 전통 형식을 지키지만 내용은 새로움을 담아야 한다.
차하에는 ‘그리움’(전승탁)을 올린다. 선명한 이미지에 단시조의 미학이 잘 담긴 단정한 작품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상당한 시간 시조 창작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해녀횟집’(배순금), ‘그 남자 타워크레인’(한승남)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음을 밝히며 앞날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서숙희·정혜숙(대표 집필)
■중앙시조백일장 2월 당선작
장원
눈, 사람 / 문영
차갑게 얼려둔 시간의 틀 안에
잊기엔 아쉬운 당신을 담았다
한겨울 눈사람처럼
영하로 묶어두고
온몸으로 막아둔 기억의 틈 사이로
슬금슬금 빠져나간 내가 알던 당신이
봄날에 녹아내릴까
냉동고를 꽉 닫는다
문영_제주 출생. 2019년 제주시조백일장 차하.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초승문학 동인.
차상
이명耳鳴 / 김은생
귀 막아도 들린다 공명으로 전하는
기차 소리 파도 소리 혼미하다 바람 소리
우물가 쌀 씻는 소리 알 수 없는 난수표다
난수표 주워들고 해독하려 애를 써도
한 생을 살아가며 남모르게 엉킨 타래
끝끝내 풀지도 못하고 요동치는 주파수
차하
손톱 그 후 / 김보선
구멍 난 장갑 사이 빠져나온 아버지 손톱
황금빛을 향해서 시간을 걸어둬도
제대로 자라지 못해 물집만 불거져
허공에 코를 꿰인 채 앙상한 꿈을 꾼다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무게를 묶어놓고
당신은 흑태의 삶을 몇 번씩 넘긴다
켜켜이 쌓여가는 칼바람 덕장에서
기다림은 숨죽여 바람을 맞는 동안
온몸은 뼈만 남아서 누렇게 익어간다
이달의 심사평
새해의 결심이 조금 수그러드는 즈음이 2월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중앙시조백일장의 문을 두드리는 분들은 시조 창작이라는 결심의 날을 잘 벼리고 있을 것으로 믿으며 응모작을 열었다.
이번 달 장원의 자리에는 문영의 ‘눈, 사람’을 앉힌다. 유한과 소멸의 속성을 지닌 사랑의 감정을 영원성으로의 갈망으로 잘 전개하였다. 특히 “차갑게 얼려둔 시간의 틀” 같은 구체어와 관념어를 조합한 표현이 돋보였다. 또한 제목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시적 대상의 확장을 시도하여, ‘눈’과 ‘사람’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것도 좋은 발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첫 시작의 빼어난 묘사 이후로 다소 쉽게 풀려버린 듯한 느슨한 진술이 아쉽다.
차상은 김은생의 ‘이명(耳鳴)’이다. “알 수 없는 난수표”이자 “요동치는 주파수다”인 이명을 “우물가 쌀 씻는 소리”로 참신하게 표현한 것은 상투화된 비유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낯선 비유로 새롭게 다가오게 한다. ‘이명’이라는 현상 그 자체에 대한 묘사와 진술을 넘어 내면화로 확장하고 심화시킨다면 완성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첫째 수 중장 전구(前句)의 반복과 후구의 도치법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은 점, 한 장(章)에 같은 길이의 음보를 배치한 점 등을 한 번 돌아보기를 바란다.
차하로는 김보선의 ‘손톱 그 후’를 선했다. 바람 부는 덕장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흑태”같이 고단한 삶을 진정성 있게 그려냄으로써 공감력을 얻고 있다. 특히 둘째 수 중장과 종장은 시 전체의 무게가 실리는 중심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쉽다면 아버지의 손톱에서 시작된 시적 발화를 끝까지 치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점이다.
시조는 정형 미학의 완결을 지향하는 장르인 만큼 구와 구, 장과 장, 수와 수의 연결이 매우 유기적으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였으면 한다. 이정순, 한명희의 작품을 눈여겨보았음을 밝히며 응모한 모든 분의 분발을 빈다.
심사위원 서숙희(대표집필)·정혜숙
■중앙시조백일장 3월 당선작
장원
성산포에서 / 박숙경
간밤에 몰래 와서 수면 위 잠이 든 별
파도가 흔들기 전 나 먼저 깨워 볼까
간신히 귓불에 닿은 이명처럼 숨비 소리
막 썰어낸 뿔소라를 한 접시 당겨놓고
소주 생각 없다는 말 이곳에선 금기어
바람은 억센 손아귀로 머리채를 흔들고
저 멀리 먹구름에 휘감긴 두모악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저 혼자 숨바꼭질
물결이 물결을 잡고 바람을 표절하는
박숙경_경북 군위 출생. 2015년 동리목월 신인상. 2021년 7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시집 『날아라 캥거루』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대구시인협회·시하늘문학회·은시문학회 회원.
차상
로봇청소기 / 한명희
흘러내린 소리를 순식간에 닦았어요
틈 사이에 끼어 있는 어제 흘린 말까지
이제 막 퇴근한 그는 알아채지 못했어요
모서리에 부딪혀 터져 나온 비명이
바깥으로 샐까 봐 꼭꼭 눌러 삼켰어요
나를 다 안다는 듯이 그는 환하게 웃었죠
속속들이 당신은 옳아 나의 말을 잘랐어요
바닥에 나뒹구는 부서진 모음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지워지는 그림자
차하
라켓 줄 매는 여자 / 김정애
땀과 눈물이 베인 스물두 코 줄을 끊고
겹겹 주름에 숨은 행간을 고쳐맨다
반 코씩 엇갈리며 꿴 이 저편의 균형을
줄 하나 사이에 둔 너와 나 만남 또한
드라이브 하이클리어 밀고 당긴 한판이지
역전과 반전의 미학 칼로 베는 물처럼
땀으로 덮어쓰는 눈물의 보법 같은
저 환한 어둠이 짠 씨 날줄 무늬 하나
또 하루 밑줄을 긋듯 맞물린 올 당긴다
이달의 심사평
새 학기가 시작되는 바야흐로 삼월, 봄꽃들이 화사하다. 일찍 핀 목련은 지고 뒤이어 수선화며 앵두꽃이 질서정연하게 피어난다. 이달에도 시조를 향한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여전히 음보가 어긋난 작품들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공들여 쓴 작품도 시조의 기본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옥에 티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난다.
3월의 장원으로는 시조의 정형 미학에 충실하면서 말부림이 뛰어난 박숙경의 ‘성산포에서’를 올린다. 각 장의 연결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시조에서 꽃이라 할 수 있는 종장 처리가 빼어났다. 다만 제목을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보내온 세 편이 한결같이 일정 수준에 닿아 있어서 읽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차상은 한명희의 ‘로봇청소기’를 앉힌다. 청소기를 의인화해서 새롭게 접근했다. 발상이 좋았으며 전달력이 뛰어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같이 보내온 ‘세탁소의 하루’ 역시 세탁소의 일상을 나직한 목소리로 일기처럼 읊었다. 생활에서 시를 빚어내는 감성이 범상치 않았다.
차하는 김정애의 ‘라켓 줄 매는 여자’를 앉혔다. 라켓의 씨줄 날줄을 인간관계에 빗대어 쓴 작품이다. “줄 하나 사이에 둔 너와 나의 만남”이며 “역전과 반전의 미학 칼로 베는 물처럼”에서 읽을 수 있듯이 “눈물의 보법” 같은 우리네 삶을 라켓에 비유해 잔잔하게 써 내려 갔다.
주은의 ‘블랙커튼’, 한승남의 ‘15분의 의미’, 김준혁의 ‘항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음을 밝혀둔다.
심사위원 서숙희·정혜숙(대표 집필)
■중앙시조백일장 4월 당선작
장원
홍도, 병풍을 펴다 / 권규미
소슬한 바람무늬
쪽마다 초서체다
천년 벼린 물빛의 심지 같은 절리들이
해무의 끓는 핏속에 뼈를 묻는 으스름
물결들 왁자하니 빠져나간 기슭에
마고의 긴 손톱자국, 이끼로 돋아나면
묵묵히 찬 어구를 놓고
무릎 꿇는 바닷새들
하루치 적막들이 으스름을 굴려가며
뻘밭에 발을 묻은 층층 붉은 돌을 괴어
밤마다 흰 척추를 펴고
별을 문 채 잠드는 섬
◆권규미_2013년 월간 유심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경주문인협회 회원. 2022년 5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그늘의 생존 / 배순금
잎새들이 꼬리 물고 그늘을 줄 세워요
날아드는 새들에 안부를 주고받고
때로는 파고드는 바람과 골짜기에 들어요
하지 무렵 논밭에 늦보리 출렁이면
다랑이 둔덕으로 스며드는 명지바람
유년의 누런 파도는 가난을 기억해요
마지막 철거를 코앞에 둔 슬레이트집
숨어든 그늘 곁엔 왼 종일 거둔 폐지
왜바람 허공을 들락날락 야윈 하루
저물어요
차하
바둑 / 이기동
기초를 다진 곳에 검은 돌 먼저 놓고
생각이 멈춘 곳에 하얀 돌 나중 놓고
머리 속 도면을 보며 놓아가는 돌 돌 돌
기둥을 세워놓고 돌담을 연결하면
부딪친 감성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돌과 돌 만난 곳마다 불꽃튀는 점 점 점
돌과 점 하나된 곳 무한한 묘수의 터
한울에 단 한자리 깊고도 오묘한 곳
그 한 곳 내 꿈이 될 때 무릎치는 집 집 집
※한울: ‘우주’의 순 우리말
이달의 심사평
장원으로 권규미의 ‘홍도, 병풍을 펴다’를 선한다. 보내온 세 편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 주고 있어 믿음이 갔다. 활달한 상상력과 탁월한 묘사로 홍도라는 붉은 섬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내면화한 뛰어난 작품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홍도를 새롭게 해석하여 “심지 같은 절리” “마고의 긴 손톱자국” “층층 붉은 돌”로 형상화하였고 종장의 “해무의 끓는 핏속” “별을 문 채 잠드는 섬” 같은 신선한 표현은 이 작품을 한 층 돋보이게 하여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감을 갖게 했다.
차상으로는 배순금의 ‘그늘의 생존’을 선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음지의 현장을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늘”과 “생존”의 무게를 잘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종장의 “왜바람”이라는 시어의 어감이 묘하게 걸린다. 다른 작품에서 보여 준 “숙명”이나 “단말마” 같은 시어도 마찬가지로 시어 선택이 작품의 완성도를 가르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차하는 이기동의 ‘바둑’이다. 바둑을 두는 과정을 장과 장, 연과 연을 잘 연결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검은 돌과 하얀 돌이 만나 기초를 다지고, 도면을 보며 하나 둘 기둥을 세워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바둑의 오묘한 묘수로 이끌어 낸 점이 돋보였다. 우주에 오직 집 한 채 갖기를 소망하는 청춘들의 꿈이 잘 드러나 있다.
심사위원 정혜숙, 손영희(대표집필)
■중앙시조백일장 5월 당선작
장원
바닷길 재단사 / 한승남
바닷길과 맞대어져 항구의 사연 깁는다
양복점 라사 거리 바다 향기 품을 때
옷감에 파도 떠다니듯 스쳐 가는 가윗날
조각난 해풍은 수습 시절 한숨일까
외항선원 주문 양복 리듬 맞춰 꿰매갈 때
물무늬 둥글게 말려 품 안에 밀물진다
수평선을 한 땀 떠서 깃 위에 앉혀놓고
내 안의 매듭 춤 물살에 풀어 짓는다
저녁놀 긴 솔기 따라 저물어간 광복동
한승남_서울 출생. 고려대 정보통신대학원 졸업. 전 정우직업전문학교 원장. 현 고려아트컴퓨터학원 원장. 2022년 3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압화 / 주은
춤을 추던 팔다리 낱장이 된 지 오래
수첩 속 꽃 한 송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
낮과 밤 바뀐 줄 몰라 눌린 아침 앙상하다
창백한 낯빛은 계절 속에 갇히어
누워있는 병상에서 몸이 몸을 접는다
당신을 가로막는 건 당신이라는 칸과 칸
귓속 기억하는 차가운 침대 모서리
외마디 아픈 소리에 모두들 귀를 닫아
누워서 커가는 소리 바스락대는 그 자리
차하
가위바위보 / 한영권
가위로 자르거나
바위로 치지 말고
따듯이 보자기로 보듬어서 감싸요
내세요!
이기든 지든
아름답게 보를 내요
이달의 심사평
만화방창, 꽃들의 멀미 탓인지 이달에는 응모 편수도 주춤했으며 여전히 시조의 율격을 벗어난 작품들이 눈에 띄어 우려를 금치 못하겠다. 정형률이 생명인 시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긴 논의 끝에 한승남의 ‘바닷길 재단사’를 이달의 장원으로 선했다. 항구 도시 부산의 광복동 거리를 쉽게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오랜 시간 습작을 한 듯 구와 구, 장과 장의 조응이 어색하지 않았다. “수평선을 한 땀 떠서 깃 위에 앉혀 놓고” 같은 구절이며 시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셋째 수 종장인 “저녁놀 긴 솔기 따라 저물어간 광복동”은 압권이었다.
차상은 주은의 ‘압화’를 올린다. 압화를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과 비유해서 쓴 발상이 좋았다. 시어의 부림과 각 장의 조응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보다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차하는 단시조인 한영권의 ‘가위바위보’를 올린다. 단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간결한 시형에 여운을 담아야 한다. ‘가위바위보’는 그런 의미에서 단시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최애경·유인상·이인성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히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손영희, 정혜숙(대표집필)
■중앙시조백일장 6월 당선작
장원
블루로즈 / 이영미
예외를 바라는 게 파렴치한 일일까
수많은 인연들을 남김없이 보내놓고
한 사람 가슴 깊숙이
숨겨두고 싶은 나는,
불덩이 가라앉힌 푸른 빛 비밀 하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은연중에 생기기에
숨 쉬는 하루하루가
열망으로 가득 차
누구는 흑백으로 읽어야 맞다 하고
바라지 말아야 할 꽃이라 어르지만
어느새 짙푸른 휘장 속
나도 몰래 벙그는
이영미_충남 연기 출생. 2021년 ‘패각’으로 에세이문예 수필 신인상 수상. 2022년 시 ‘목어’로 제28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22년 9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9호선 승강장에서 / 김정란
스크린 도어에서 나부끼는 詩(시)꼴은
표정 없는 입과 눈, 살짝 건드리고
유리에 비치는 의미
넌지시 일러준다
전광판에 흐르는 샛강역도 이와 같아
나무배 잡아타고 버들처럼 떠가는데
졸음도 꿈이 되는지
물길은 끊어지고
자꾸만 불러봐도 차오르지 않는 가슴
다시 말해 시 한 편 잘 쓰고 싶은 것
아니면 내가 시가 되어
철로 위에 사는 것
차하
담쟁이 / 장훈
말씀의 붉은 경을 돌담에서 읽는다
단란한 햇볕으로 푸른 날개 말리며
줄지어 소풍을 가듯 하늘길을 오른다
닫혀있는 담벼락에 푸른 밑줄 그으며
늦는 시월 단풍을 데불고 가는 잎새
가을의 문에 기대어 벼랑 하나 넘는다
이달의 심사평
녹음이 웅숭깊은 6월이다.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수준이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음보가 불안하고 고투와 한자를 사용한 작품들이 보였다. 시조는 정형시이며 민족 고유의 문학 형식이라는 전통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정형성이라는 공통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영혼으로 노래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다. 작품에 한자어를 쓴다든지 고시조에서나 쓸법한 어투를 쓴다든지, 종장의 음보가 불안하면 심사에서 제일 먼저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번 달 장원으로 이영미의 ‘블루 로즈’를 선한다. 푸른 장미를 “불덩이 가라앉힌 푸른 빛 비밀 하나” 잘 형상화했다. “한 사람”을 가슴 깊숙이 숨겨두고 싶은 열망을 종장의 “어느새 짙푸른 휘장 속/나도 몰래 벙그는”이라는 상상력으로 종결의 의미를 잘 살린 수작이다. 시인의 개성이 돋보였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 중 어느 것을 선해도 좋았음을 알린다.
차상으로는 김정란의 ‘9호선 승강장에서’를 올린다. 둘째 수의 비유적 표현이 이 작품을 돋보이게 했다. 사용한 시어들도 구체성을 띄고 있어 시인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고 전체적인 구성도 좋았다. ‘벽화가 있는 골목’도 함께 올려도 무방한 작품이었다.
차하는 장훈의 ‘담쟁이’를 올린다. 첫 행의 “말씀의 붉은 경을 돌담에서 읽는다”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담쟁이를 소재로 할 때는 시인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너무 흔한 소재는 웬만해선 눈에 띄지 않는다. 이미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강영록·유인상 두 분의 작품도 끝까지 겨루었음을 알린다.
심사위원 정혜숙·손영희(대표집필)
■중앙시조백일장 7월 당선작
장원
천 원 앞에서 / 윤정욱
성대역 횡단보도 허기가 몰려온다
앞뒤로 뒤집힌 꿈 늘어져 기다릴 때
호떡집 벽돌에 기대 천 원이 익어간다
온종일 말단에 갇혀 눈빛 풀린 직장인
주머니 가벼운데 웃음까지 납작해져
내미는 지폐 한 장에 하루의 품 넓힌다
번개 같은 손놀림은 그늘을 달궈 놓고
힘겨웠을 빈속에 둥근달 안겨준다
어둠 끝 환하게 밝혀 오늘을 꿀꺽 삼킨다
윤정욱_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2학년 재학
차상
칠월의 산産 / 오시내
앞산이 몸을 푼다 제 몸을 꾹꾹 짠다
새들마저 조용해 해산하는 칠월의 산山
한 계절 순산하는 일 붉은 물로 차올라
숨이 찬 오동나무 비지땀을 흘린다
절벽에 박힌 바위 뿌리를 지켜주며
산허리 휘도는 물살 산통은 길을 낸다
한 번 더 힘을 주면 장대비 쏟아지고
흔들리는 우듬지에 새잎이 탄생한다
우거진 숲속의 목청 골마다 우렁차다
차하
예감 / 김은희
잔설처럼 스며들던
열감기 어지럽다
오랜 밤 쌓아왔던
침묵이 부서지고
한 걸음
다가서 보면 두 걸음 멀어진다
건조한 자판 위에
가습기를 틀어봐도
여전히 잔기침처럼
헝클린 문장들
예감은
틀리지 않아 적중하는 글 감기
이달의 심사평
무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까닭인지 이달의 응모작이 그리 만족스러운 양과 질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눈여겨 봄직한 몇 작품들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심사에 임한 결과, 윤정욱의 ‘천 원 앞에서’를 이달의 장원으로 올린다.
퇴근길 고달픈 직장인의 허기를 달래주는 “호떡”에서 끌어낸 “뒤집힌 꿈”과 “웃음까지 납작”하다는 표현은 직장인의 고단함을 선명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뒤집히고 납작해졌지만 오늘의 호떡은 “그늘을 달궈”서 빈속에 들이는 내일의 “둥근달”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 시조의 전개방식 안에서 긍정적인 위무로 내일의 꿈을 잃지 않는 직장인의 애환을 개성적으로 형상화한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차상으로 오시내의 ‘칠월의 산(産)’을 선한다. 생명력 넘치는 7월을 유려하고도 역동적으로 풀어낸 솜씨가 엿보인다. 제목의 한자어 ‘산(産)’과 내용의 주 대상인 ‘산(山)’의 동음이의어 활용, “푼다” “짠다” “차올라” “쏟아지고”와 같은 활달한 시어들을 마지막의 “탄생”으로 완결 짓는 전개방식 또한 많은 습작이 그 바탕이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
차하는 김은희의 ‘예감’이다. 창작의 지난함과 고통은 창작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며 이에 공감하고 있을 터. 시작(詩作)에 드는 과정을 섬세한 메타적 사유로 담아냈다.
많은 응모 작품들이 우리 전통 정서나 정한을 담고 있다. 시조는 그 형식이 옛것이지 거기에 담을 내용이 옛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시조에 쓴 ‘시(時)’의 의미를 거듭 새겨보면서 ‘지금 여기’의 현대성을 시조라는 정형의 집에 미학적으로 앉히는 것이 현대시조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심사위원 강현덕·서숙희(대표집필)
■중앙시조백일장 8월 당선작
장원
돌담 / 김동균
얼기설기 올라앉아 서로를 꼭 잡는다
마을은 어우러진 노른자 흰자처럼
묵묵히 속을 품을 때 숨을 쉬는 돌담길
달걀만 한 돌 하나 틈에서 떨어진다
바람에 등 떠밀려 낮은 곳에 뒹굴면
발끝에 차인 돌 하나 바닥은 이런 거라고
드나드는 바람과 수 천 년 걸어온 길
허물어지는 날들을 다시 또 쌓아가며
삼다도 끌어안을 때 지켜주는 구멍들
김동균_강원도 영월 출생. 안양대 음대 졸업(플루트 전공). 라온제나플루트 연구회 리더. 플루트·오카리나 연주자. 제주도 샤모니리조트 과장.
차상
풍경 / 유인상
컹컹 짖던 개도 없고 붉디붉은 봉숭아도 없고
흙돌담 무너지고 지붕 귀도 떨어졌네
우부룩
풀 자란 마당
바람이 들여다보네
차하
수라 / 고관희
챙그렁 칠성방울 마른 갯벌 울리고
작두 타는 할망 옷자락 너풀너풀
백중날 휘영청 살찐
보름달도 숨죽인다
아궁이 장작불에 정성껏 뜸을 들여
부잔교에 고이 올린 팥시루 뜨끈한 떡
고시레 한덩이 떼어
검은 펄에 건네니
해신도 감심했나 뭇 생명 간절함에
꿈틀대는 갯구멍 고개 내민 흰발농게
엽낭게 흙 토해내고
수라 깃털 파닥이네
혹여나 다시 올까 사라진 도요새
점점이 모여드는 상생의 저 춤사위
해맑은 뿔피리 소리
새울음을 부른다
이달의 심사평
장마와 태풍과 폭염의 8월이 그 막을 내리는 중이다. 참 힘들었다. 8월도, 8월을 견디어낸 우리 모두도. 이달의 응모작 수가 비교적 적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응모자 대다수가 고향이나 어머니 등 보편적 감수성을 보였는데 이는 조금 안타깝다. 시대와 사람을 읽고 이를 고민하는 작품들을 써는 것이 어떨까.
이달의 장원은 김동균의 ‘돌담’이다. 바람 많이 불어도 끄떡없는 제주도 돌담의 특성을 형상화하였다. 특히 둘째 수가 시적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었는데 셋째 수와 자리를 바꾸면 전체 밀도가 더 높아질 뻔했다. 구와 구의 조응도 자연스러워 언어를 다루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이는 많은 습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터이다.
차상은 유인상의 ‘풍경’이다. 스산한 시골 폐가의 풍경을 감정의 개입 없이 시각화한 단시조이다. “우부룩 풀 자란 마당”을 “바람이 들여다”본다는 종장이 다소 일반적이고 밋밋할 수 있는 전체 분위기를 확 바꿔놓았다. 종장에 힘이 있어야만 하는 단시조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정적이고 하강의 이미지 속에 “우부룩”이라는 상승의 낱말이 놓이니 쓸쓸함이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차하는 고관희의 ‘수라’로 선했다. 수라는 새만금의 마지막 습지인 수라 갯벌을 말한다. 달빛 아래 토속성 짙은 굿판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시는, 원색적이고 신명스런 기운과 이어지게 하여 갯벌의 생명력을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마른 갯벌 울리고” “옷자락 너풀너풀” “흙 토해내고” 같은 역동적인 시어들이 갯벌의 질펀한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잘 살려냈다.
노경호·배순금의 작품들도 눈여겨 보았다.
심사위원 강현덕(대표집필)·서숙희
■중앙시조백일장 9월 당선작
장원
출근하는 봉준이 / 김영욱
황톳재 너머부터 배곯은 점심 무렵
막사발 통문 대신 텀블러 손에 쥐고
달리는 넥타이부대 인파 속에 그가 있다.
하품하는 출구들이 뱉어낸 양복 사이
피 묻은 저고리에 상투머리 차림으로
종각역 빌딩숲속을 둘러보는 봉준이.
황사에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
태극기 앞장세운 노인들이 모여들고
새파란 청춘들 대신 비둘기가 구구 운다
을미년 척사척사斥邪斥邪 봄비 다시 내리는 날
녹두전 기름 냄새 질척한 피맛골로
고부의 횃불을 쳐들고 횡단보도 건너갈까
김영욱_서울 태생. 이화여대 교육학과 졸업. 인하대 한국문화콘텐츠 박사 수료. 아동청소년문학 번역가, 그림책 연구자. 2023년 토지문학대상 수필 부문 수상.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 시 부문 지원금 수혜.
차상
입추 / 윤영화
벌침 세운 땡볕이
연못 쏘고 지나간 뒤
더위 먹은 은빛 송사리
등목하다 툭, 건드린
잘 가요
손을 흔드는
동심원의 눈이 붉다
차하
수다 꼭지 / 전형우
잠가 놓은 슬픈 밤에 수다를 틀었다
가득 찬 생각들이 혼잣말로 고였다가
헐거운 꼭지 끝에서 시끄럽게 새나간다
입이 듣고 귀에 넘쳐 목청은 높아지고
잔소리의 압력이 거침없이 커지는데
오래된 수다 꼭지는 자동으로 열린다
후련하게 빠져나간 속상한 입담들
설거지 함지박은 그때마다 깨끗해져
센말을 헹구는 엄마 어둠까지 씻어낸다
이달의 심사평
여름이라는 계절을 보낼 때면 정완영 선생의 ‘여름도 떠나고 말면’이라는 시조를 읊조려 보곤 한다. 햇살이 한결 맑아진 9월, 이달은 응모 편수는 적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이 많아서 선하는 기쁨이 컸다.
장원의 자리에는 김영욱의 ‘출근하는 봉준이’를 앉힌다.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을 소환하여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들이 여전히 녹록지 않은 오늘의 현실을 굵은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130여 년 전의 그 시절과 오늘을, 역사 속 인물과 지금 여기의 사람들을 절묘하게 교차시키면서 시적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속도감 있게 거침없이 전개한 진술 방식이 돋보인다.
차상으로 앉힌 윤영화의 ‘입추’는 깨끗한 서정성의 이미지가 손에 잡힐 듯이 돌올한, 순간성과 압축성의 단시조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벌침 세운 땡볕” “은빛 송사리” “손을 흔드는/ 동심원”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입추’라는 계절감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차하로 올린 전형우의 ‘수다 꼭지’는 언어 유희로 재치를 부리면서도 이면에 깔린 파토스적인 정서를 파악하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수다 꼭지”는 자연스럽게 ‘수도꼭지’로 읽히면서 작품의 주제어인 “수다”는 “틀었다” “고였다가” “새나간다”라는 동사로 물 흐르듯이 연결된다.
눈에 띄는 작품들이 많은 이달의 응모작들에서 읽고 고르는 작업이 한결 즐거웠다. 이런 즐거움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강현덕·서숙희(대표집필)
■중앙시조백일장 10월 당선작
장원
스트랜딩 / 나정숙
라일락 이파리는 첫사랑의 비린 맛
한 잎 떼 넣어주던 바다 빛 눈동자에
수줍은 이야기들이 글썽글썽 걸려있다
수평선 꼬리에 걸고 바람살 조준하면
돋을볕 과녁에서 터지는 금화살들
C단조 휘파람 소리 촤르르 쏟아진다
물결 위 되돌이표 출렁이는 기억 너머
목구멍 동굴 속엔 해초들 자라나고
검은 새 슬픔을 향해 일제히 고개 돌린다
한때의 물길 따라 서투른 사랑 가고
마지막 호흡 닫고 바다 깊이 몸을 던진
돌고래 루시드 드림
파도 울음 한 자락
나정숙_광주광역시 출생. 조선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후조·우듬지 동인.
차상
나이주의(ageism) / 황혜리
육십오 세 이후에는 문밖이 소심해져
갈피를 잡지 못한 내일이 서성이지,
엄마가 혼잣소리로 건반을 두드린다
반음씩 올라가는 음계를 내려가며
애매하게 평등해진 오늘처럼 머쓱한 날
경로는 우대가 아니라 우려라고 웃으신다
온 집안에 흘러드는 귀에 익은 피아노곡
쇼팽은 총지휘자 왈츠는 시작되고
안무도 정해졌는데 나는 늘 모호하다
삼십 중반 내 나이도 안팎이 소심해져
몇 가지 자격증을 가방 속에 챙겨 넣고
오늘도 취업전선에 총대 메고 나선다
차하
10월의 표정 / 전미숙
노란 전구 벌의 몸속 달콤한 노란빛
휩쓸린 맵찬 바람에 휘몰아 오르려다
턱 걸린 검은빛 얼굴 빨간 여우
매서운 눈
중턱에 부딪혀 표정 잃은 세모난 모자
호박 속 맑은 눈 어린 생쥐 하얀 얼굴
떨켜에 미련 두지 않고 굳게 닫은
그 입술
이달의 심사평
때가 되었다. 릴케가 말하는 때, 가을. 지난여름은 대체로 가혹했으나 그래도 위대했다. 붉은 사과와 노란 모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들판의 누런 벼들도 증거물이다. 또 이 마당의 알곡 같은 투고작들도 그것을 보여준다.
10월 장원은 나정숙의 ‘스트랜딩’으로 선했다. 고래의 집단 자살을 일컫는 스트랜딩은 아직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지만 전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기현상이다. 그래서 화자는 고래의 서사를 추측해 보는 것이다. 바닷속에도 사랑이 있어 올 때의 기쁨과 갈 때의 슬픔이 “마지막 호흡 닫고 바다 깊이 몸을 던진” 이유일 것이라고. 이 서정적 상상력과 활달한 이미지 직조는 “루시드 드림”이라는 말로 마무리하면서 완성도를 높였다. 꿈인 줄 알면서 꾸는 꿈이라니 그 슬픔도 울림도 더 깊고 클 수밖에 없겠다.
차상은 황혜리의 ‘나이주의(ageism)’다. 에이지즘은 연령 차별주의를 말한다. 이 작품은 노인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과 청년 실업 문제를 다뤘다. 화자는 “문밖이 소심해”진 “육십오 세”가 넘은 어머니와 “안팎이 소심해”진 “삼십 중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배경 음악을 깔아 놓은 듯 피아노와 쇼팽의 왈츠가 있다. 그러나 엄마도, 화자도 이런 상황들이 애매하고 모호하다. 제도권에서 밀려난 세대와 아직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세대의 우울함과 초조함이 작품 전체에 잘 흐른다.
차하는 전미숙의 ‘10월의 표정’이다. 노랑·검정·빨강·하양 등 색채 이미지로 화려한 향연을 펼쳐놓았다.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보자기처럼 미각과 촉각의 그것도 감싸고 있어 입체감도 준다. 그렇게 짜놓은 10월이라 매우 선명하다.
심사위원 강현덕(대표집필)·손영희
■중앙시조백일장 11월 당선작
장원
환승입니까? / 정해선
아무런 연고 없는 지상의 언저리를
무작정 달려가는 일상이 곧 터널이라
어플이 놓친 노선을 차창에 그려본다
뫼비우스 함정 같은 외길에 부딪히다
퇴로 없는 그곳을 당신도 지나쳤는지
점멸등 깜빡이듯이 하루가 손 흔드네
정해선_충북 보은 출생. 충북대 임학과 졸업. 제31회 전국한밭시조백일장 입상. 2021년 공직문학상 은상 수상. 현재 충북도 산림녹지과 근무.
차상
폭포 / 오세춘
한 조각 거울 절벽 빗질하는 푸른 폭포
별무늬 찰랑대는 세모시 발 사이로
한지 등 차오르는데 누구를 기다리나
차하
어떤 물음 / 조우리
새로워야 한다기에 백지를 접었었다
쉬워야 한다기에 곁으로 모셔왔다
정형을 지키기 위해 모서리를 지웠다
주류와 비주류를 알아본 주인처럼
유행과 깊이들로 자릴 놓는 심사평에
시간의 압박 골절을 미덕으로 남겼다
시절을 덧칠하듯 빈 허공 메우다가
시차로 다다르는 뜬구름 눈썹마다
희디흰 붓질을 마친 궁리라는 속눈썹
꽃 패를 다스리고 예를 알아야기에
비바람 부는 날도 뜬눈으로 지새웠다
나라는 구덩이 앞에 텅 빈 여백 움직였다
이달의 심사평
11월은 ‘중앙 시조 백일장’ 월 응모작을 마감하는 달이다. 1월부터 11월까지 당선된 33명의 응모자가 갈고 닦은 야심작들을 가려내야 하는 12월을 위해서다. 12월에는 그동안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내온 이들 중 단 한 명이 새로운 시조시인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장으로 등단 절차를 마친 역대 당선자들 중 많은 시인들이 현재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중앙 신춘시조’는 그 위상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11월의 장원은 정해선의 ‘환승입니까?’다. 제목과 내용의 거리가 긴장을 유도하고 있다. 그렇게 편리하다는 “어플”도 노선을 제시하지 못하여 “일상이 곧 터널이” 되고 마는 현실이 쓸쓸하게 와 닿는다. “뫼비우스 함정 같은 외길에” 서서 의지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당신”조차 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식한 화자의 고독함도 잘 묘사되었다. 욕망과 결핍으로 방황하는 현대인들이 살아내어야 하는 “하루”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차상은 오세춘의 ‘폭포’다. 폭포를 “거울”, “찰랑대는 세모시”, “한지” 등의 참신한 비유로 동양화 한 폭을 완성해 놓았다. 상상력이 돋보인다. 하강과 상승의 대비를 통해 그리움, 혹은 기다림이라는 주제에 가닿게 한 언어 부림이 시조 쓰기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보이고 있었음도 알겠다. 단수는 시조의 본령이다. 좋은 단시조는 짧으나 긴 여운을 준다.
차하는 조우리의 ‘어떤 물음’으로 정한다.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고심하고 퇴고하는 과정이 잘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좋은 시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도 잘 나타나 있다. “시간의 압박 골절을 미덕으로 남”기고 “비바람 부는 날도 뜬눈으로 지새”우며 습작에 몰두한다는 진술이 이 ‘중앙 시조 백일장’에 임하는 응모자의 모습이라 매우 아름답고 치열하게 다가왔다.
김복희·남경민·이정순의 작품도 오래 들여다보았다. 더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강현덕·손영희(대표집필)
[제42회 중앙시조대상 당선작] 이태순 김상규 권규미
■중앙시조대상
고래
비 내리는 기차역 물이 출렁거리고
눈이 슬픈 아이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커다란 푸른 고래가 기차역에 들어왔다
칸칸마다 불빛을 따스하게 매달고
아이를 부르는 고래의 비린 노래
바닷가 역으로 떠날 고래가 멈추었다
가냘픈 영혼 되어 어둔 방을 벗어난
아이야 고래 타고 바닷가 역에 가자
피멍이 얼룩진 아이 야윈 손이 차갑다
이태순_경북 문경 출생. 200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오늘의시조 시인상(2007), 중앙시조신인상(2010), 오늘의시조문학상(2022) 수상. 시조집 『경건한 집』 『따뜻한 혀』 『한 끼의 시』 등.
■중앙시조신인상
불꽃놀이
두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이리 주렴
내가 행복을 주지, 밀밭 위의 소녀야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신비를 알려주지
어깨에 앉아 있던 연갈색 종달새는
길들이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갔단다
소녀야, 채찍은 거둬 덤불숲에 던져주렴
밀짚 얹은 나귀는 주저앉은 나귀일 뿐
짐을 진 소녀야, 방황을 한 줌 주지
들판이 빨갛게 물든 자유를 보여주지
박하의 박하마저 겨울의 겨울마저
입김마다 번지는 시작의 귓속말
소녀야, 용기를 주지, 곧 타오를 불꽃처럼
김상규_제주 출생.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중앙신춘시조상
조문국을 다녀오다
북쪽의 북쪽으로
흰 말을 타고 갔다
바람 강 얼음산을 넘고 또 넘어서
찔레꽃 우거진 뜨락
왕의 잠에 닿았다
만발한 묵언뿐인 오래된 꽃의 나라
원래 가시나무의 먼 혈족이었던 나는
뚝뚝 진 그 묵언들을 치마폭에 거두었다
능원은 아득하고 때때로 반짝였으나
말과 글과 풍속이 서로 멀어진 탓에
면벽한 물방울들만
총총 세다 돌아왔다
권규미_경북 경주 출생. 중앙시조백일장 2022년 5월, 23년 4월 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