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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21번 22번 23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支謙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빠알리본 – 6Fronsdal영어본 – 7인연담 – 8해설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 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戒爲甘露道 放逸爲死徑 不貪則不死 失道爲自喪
계위감로도 방일위사경 불탐즉불사 실도위자상
無逸不死道,放逸趣死路。無逸者不死,放逸者如尸
appamādo amatapadaṃ pamādo maccuno padaṃ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DhP 21)
Conscientiousness is the state of deathlessness. Negligence is the state of death.
The conscientious ones do not die. Those, who are negligent, are as if dead.
법구경 22번 게송
이 이치를 똑똑히 알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음을 기뻐하고 성인의 경지를 즐기리라
이러한 이치 상세히 알아서
슬기로운 님은 방일하지 않고
방일하지 않음에 기뻐 하고
고귀한 님의 행경을 즐긴다.
慧知守道勝 從不爲放逸 不貪致歡喜 從是得道樂
혜지수도승 종불위방일 불탐치환희 종시득도락
智者深知此,所行不放逸。不放逸得樂,喜悅於聖境
evaṃ visesato ñatvā appamādamhi paṇḍitā
appamāde pamodanti ariyānaṃ gocare ratā
(DhP 22)
Translation:
Having thus distinctively understood about conscientiousness, the wise ones rejoice in conscientiousness, delighting in the sphere of the Noble Ones.
법구경 23번 게송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는 생각을 깊이 하고 참을성 있고
항상 부지런히 수행하여 마음의 대자유에 이르리라.
선정에 들고 인내 하고
언제 나 확고하게 노력하는 님,
현명한 님은 열반,
위없는 안온을 경험한다.
常當惟念道 自强守正行 健者得度世 吉祥無有上
상당유념도 자강수정행 건자득도세 길상무유상
智者常堅忍,勇猛修禪定。解脫得安隱,證無上涅槃
te jhāyino sātatikā niccaṃ daḷhaparakkamā
phusanti dhīrā nibbānaṃ yogakkhemaṃ anuttaraṃ
(DhP 23)
Translation:
Those meditating perseveringly, constantly with strong effort,
those clever ones touch the Nirvana, the highest peace from bondage.
[인연담]
사마와띠 왕비 이야기
부처님께 꼬삼비 근처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때, 사마와띠는 꼬삼비국 우데나 왕의 왕비로서 오백명의 궁녀를 거느리며 호화스러운 궁전에 살고 있었다. 왕비에게는 궁전의 꽃을 돌보아 주는 쿠줏따라라는 여자 시종이 있었는데 이 시종은 꽃가게에서 부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설법을 듣자마자 예류과(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였고, 왕궁에 돌아와 왕비와 궁녀들에게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가르침을 전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경지를 얻게 되었다. 그런 공덕으로 그날부터 쿠줏따라는 힘든 노동은 하지 않게 되었으며, 왕비와 궁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쿠주따라는 그 이후부터 부처님의 설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곳에 가서 설법을 듣고 와서는 왕비와 궁녀들에게 전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에 쿠주따라는 마침내 경율론 심장에 통달하게 되었다.
꼬삼비 국왕 우데나에게는 마간디야라는 다른 왕비가 이었다. 예전에 마간디야 아버지는 부처님의 준수한 모습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자기의 딸 마간디야를 부처님께 바치겠노라고 제의했는데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마간디야는 자기의 용모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큰 수치심을 느꼈다. 그후 마간디야는 꼬삼비 국왕 우데나와 결혼 하여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마간디야는 사마와띠 왕비가 부처님을 존경하여 벽에 구멍을 내고 부처님께 존경의 예를 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이 부처님을 곤경에 빠뜨릴 기회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이 사실을 왜곡하여 보고했다. 즉, 사마와띠 왕비는 부처님과 매우 불결한 내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데나 왕은 그 말을 대수롭게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그 구멍을 보았으나 별다른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간디야의 농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왕이 언제나 삼현금(三絃琴)에 독사를 넣어두고는 사마와띠 왕비가 왕을 독살하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왕은 분노하여 사마와띠 왕비를 왕궁 뜰에 세우고 그 뒤에 오백 명의 궁녀들을 세웠다. 그런 다음 독을 묻힌 화살을 시위에 먹여 직접 사마와띠를 겨냥하여 쏘았다. 이때 사마와띠 왕비와 오백 명의 궁녀들은 이에 조금의 증오심과 원한심도 갖지 않고, 도리어 왕과 마간디야에게 자비의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우데나 왕의 활 솜씨는 아주 유명했다. 전하는 말로는 그가 쏜 화살은 바위도 꿰뚫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의 경우에는 그가 쏜 화살이 왕비를 맞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었는데, 그 화살 끝에는 연꽃이 매달려 있었다. 왕은 이 신비한 결과를 보고는 마침내 왕비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 사마와띠 왕비와 궁녀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부처님을 궁으로 초청하여 그녀들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렇지만 마간디아의 음모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숙부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마와띠 왕비의 궁에 불을 지르라고 사주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비 궁이 불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궁 안에 있던 왕비와 궁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좌선 수행에 마음을 집중했고,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일래과(사까다가미)를, 어떤 사람은 불환과(아나가미)를 성취하였다. 사마와띠 왕비의 궁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곧 우데나 왕에게도 전해졌다. 왕은 급히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서 궁 안의 사람들을 구해 낼 도리가 없었다. 우데나 왕은 이것이 마간디야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보이면 마간디야가 자기 소행이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 뻔했으므로 교묘하게 증거를 잡아내리라 마음먹었다. 왕은 마간디야를 의심하는 빛을 전혀 보이지 않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이제야 안심이다 ! 사마와따가 살아 있을 때 나는 내가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서 늘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이제는 안심이다 ! 누가 이런 좋을 일을 해준 것일까 ? 아마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한 일일 테지.」
왕이 이런 말을 하며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옆에 있던 마간디야는
「대왕이시여, 이 일은 제가 한 것입니다. 제가 제 숙부에게 부탁하여 사마와띠와 궁녀들이 모두 궁 안에 있을 때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지른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왕은 마간디야를 비롯하여 이번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하체를 하나씩 하나씩 구덩이에 묻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머리 위에 볏집을 깔고 불을 붙여서 그들의 머리와 피부가 타 들어가는 고통을 맛보게 하였다. 그런 잔혹한 형벌로 그들을 꾸짖고 나서, 우데나 왕은 커다란 쟁기로 땅을 갈아 그 들을 흙과 범벅이 된 상태로 죽여 버렸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 끝에 다음의 세 편 게송을 읊었다.
[해설]
야무나강 강가에 있는 꼬삼비왕궁터에 가면 사마와띠와 마간디야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마와띠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마간디야의 질투심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쿠줏따라 궁녀가 부처님에게 들은 가르침을 다른 궁녀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이 떠오르고 야무나강에서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놓쳐서 물고기가 아기를 삼켰는데 그 고기가 바라나시에서 잡혀서 물고기의 배를 갈라보니 아이가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이곳에서는 ‘꼬삼비 분쟁’이라고 부르는 승려들의 싸움도 있어서 부처님은 육화경(六和敬)을 설하셨다. 몇 년전에 야무나강 근처에 스리랑카스님 절에서 보름동안 밥을 얻어먹으며 야무나 강가를 배회하였다. 나보고 여기에 절을 지으라고 땅까지 소개해 주었는데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곳에 가지 못하고 있다.
21번 22번 게송은 방일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마지막 유언도 ‘방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방일하지 않도록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법구경 24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支謙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빠알리본 – 6Fronsdal영어본 – 7인연담 – 8해설
부지런히 수행하고 깊이 생각하고 말과 행동이 맑고 신중하며 스스로 억제하고 진리대로 사는 근면한 사람은 그 이름이 빛난다.
힘써 노력하고 새김을 갖추고 행실이 맑고 행동이 신중하고
자제하고 여법하게 사는 방일하지 않은 님에게 명성이 더해간다.
正念常興起 行淨惡易滅 自制以法壽 不犯善名增
정념상흥기 행정악이멸 자제이법수 불범선명증
奮勉常正念,淨行能克己,如法而生活,無逸善名增。
uṭṭhānavato satīmato sucikammassa nisammakārino
saññatassa dhammajīvino appamattassa yasobhivaḍḍhati
(DhP 24)
The good repute of someone, who is energetic, mindful, of pure deeds, acting
considerately, self-controlled, living righteously and conscientious, increases.
[인연담]
어느 때 라자가하에 유행병이 퍼졌다. 라자가하의 유명한 은행가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은행가 내외는 중병에 걸리자 아들을 어느 친척 집으로 대피시켰다. 그들은 아들에게 유행병이 사라질 때까지 거기에 있으라고 이르고, 자기들이 숨겨 둔 황금과 보석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자기들이 살아 있지 못하면 아들이 그 재산을 찾아내어 다시 가업을 일으켜 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유행병이 완전히 사라져서 그 은행가의 아들이 다시 옛집으로 되돌아왓을 때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떠날 때 어린아이었던 그는 이제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옛 친지들조차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옛날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곳으로 가서 보물을 찾아보았다. 다행이도 보물은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온 낯선 젊은이가 옛날 많은 재산을 가졌던 은행가의 아들이라고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갑자기 이 재산을 꺼내어 쓴다면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산을 몰수당할지도 모르며 심지어는 절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일꾼이 되어 일자리를 찾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일거리는 인간 시계의 역할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일꾼들을 깨워서 일터로 보냈고, 또 시간에 맞추어 식사 때를 알려 주었으며, 언제 어느 때까지 무슨무슨 준비를 해야 한다는 등등, 인간 시계 역할을 맡아 일을 잘해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일꾼들을 큰 소리로 깨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라자가하의 빔비사라 국왕이 듣게 되었다. 왕은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의 운명을 알아내는 이상한 재능이 있었다. 왕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단한 재산가여야 할텐데 웬일인지 저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아침에 일꾼들을 깨우는 일이나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도록 일렀다.
그렇게 해서 왕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일꾼들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래도 왕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왕은 자기의 판단에 의하면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고 세 번이나 거듭 말하면서, 재삼재사 그 젊은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신분을 조사케 했다. 그 결과 마침내 사실이 밝혀졌다. 그 젊은이는 결국 자기가 은행가의 아들이며, 전염병을 피하여 친척 집에 보내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다시 돌아와 아버지가 숨겨둔 보물을 찾아내었다는 것, 그렇지만 여러 가지 염려 때문에 일꾼으로 살아가고 잇다는 것을 고백했다. 왕은 은행가의 아들 꿈바고사까의 생각이 깊은 점에 감탄하여 공주를 꿈바고사까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꿈바고사까를 재정관에 임명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부처님을 찾아 뵙고 아뢰었다. 부처님은 왕의 이야기를 다 듣고 24번 게송을 읊었다.
[해설]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임에도 깊이 숙고하여 차분하게 접근하는 청년과 그런 청년을 목소리만으로 알아본 빔비사라왕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법구경 25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支謙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빠알리본 – 6Fronsdal영어본 – 7인연담 – 8해설
항상 힘써 게으르지 않고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지혜있는 사람은 홍수로도 밀어낼 수 없는 섬을 쌓는 것과 같다.
힘써 노력하고 방일하지 않고 자제하고 단련함으로써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
發行不放逸 約以自調心 慧能作錠明 不返冥淵中
발행불방일 약이자조심 혜능작정명 불반명연중
奮勉不放逸,克己自調御,智者自作洲,不為洪水沒。
uṭṭhānen' appamādena saṃyamena damena ca
dīpaṃ kayirātha medhāvī yaṃ ogho n'ābhikīrati
(DhP 25)
By exertion, conscientiousness, self-control and moderation,
a wise should make an island, that a flood can not overwhelm.
[인연담]
바보 쭐라빤타까 이야기
라자가하에 사는 한 부유한 은행가에게는 손자 둘이 있었다. 큰 손자의 이름은 마하빤타까였고, 막내 손자의 이름은 쭐라빤타까였다. 큰 아들 마하빤타까는 할아버지를 따라서 수도원에 가서 부처님의 설법 듣는 것을 매우 즐겨 하여 출가하였다. 그는 열심히 수행했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예리하게 관찰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동생인 쭐라빤타까는 매우 둔한 사람이었다. 쭐라빤타까도 형이 출가한 것을 보고 마침내 가정을 떠나 비구가 되었다. 그러나 머리가 둔했던 탓으로 빅쿠가 된 지 넉 달이 되도록 부처님의 게송 한 편도 제대로 외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실망하여 큰 고뇌에 빠졌다. 그런 동생을 본 마하빤타까는 동생이 수행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존경을 받을 수도 없으리라 판단하여, 차라리 가정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당시 유명한 의사였던 지와까가 부처님과 비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게 되었다. 이 행사에는 마하빤타까가 여러 가지 진행 실무를 맡아 보았는데, 그는 신자들의 공양을 받을 비구 명단에서 동생인 쭐라빤타까를 제외시켜 버렸다. 그는 동생이 신자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수행력과 덕행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형의 행동은 쭐라빤타까에게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는 분한 마음에 이제 빅쿠 생활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들 두 빅쿠 형제의 사정을 살펴 아시고 쭐라빤타까를 부르시었다. 부처님은 쭐라빤타까를 마루에 앉게 하신 다음 그에게 깨끗하고 부드러운 수건을 주시면서 이렇게 이르시었다.
「쭐라빤타까야, 너는 지금부터 동쪽으로 앉아서 이 수건으로 마루를 닦아라. 그러면서 수건을 밀고 당길 적마다 라조 하라낭(더러운 것을 닦아 낸다)라고 외도록 하여라.」
이렇게 이르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른 빅쿠들과 함께 공양을 받으시기 위해 지와까의 집으로 가시었다. 쭐라빤타까는 부처님의 배려에 용기 백배하여 열심히 마루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마루를 문지르면서 라조하라낭을 외었다. 그러다 얼마 후에 보니 마루의 때가 묻어 수건이 뻣뻣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 같은 수건의 변화는 그에게,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변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엇다. 그는 마음속으로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며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으시면서 천안(天眼)으로 이 같은 사실을 살펴 아시었다. 부처님께서는 지와까의 집에 계시면서 광명을 놓아 쭐라빤타까 앞에 모습을 나투시어 이렇게 설법하시었다.
「쭐라빤타까여, 비단 수건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때가 끼느니라. 그 때란 무엇인가. 욕망ㆍ갈망ㆍ탐심ㆍ증오ㆍ악심ㆍ진심ㆍ무지ㆍ어두움이 바로 그것이니라. 그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되고, 그러한 무지의 때가 낌으로 해서 사람들의 마음도 때가 낀 걸레처럼 뻣뻣해지며 사악해지는 것이니라. 쭐라빤타까여, 이러한 때를 완전히 제거하면 수행의 목표를 달성되나니, 그때 그는 아라한이 되느니라.」
쭐라빤타까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용기를 얻어 더욱 현상 관찰에 마음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서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둔한 상태가 사라져 아주 지혜롭고 분석력도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
한편 자와까의 집에서는 공양이 끝나서 공양 공덕수를 땅에 부으려 하는데 부처님께서 그것을 제지하시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지금 수도원에 누가 남아 있지 않은지 물으시었다. 그러자 아무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니라. 지금 수도원에 빅쿠 한 사람이 있을 테니 가서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그래서 심부름꾼 한 사람이 수도원에 파견되었다. 심부름꾼은 돌아와서 사뢰었다.
「지금 수도원에는 일천 명이나 되는 빅쿠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쭐라빤타까 빅쿠가 누구신지요?> 하고 물어 보아라. 그래서 쭐라빤타까를 찾아내어 이리로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심부름꾼은 다시 수도원으로 갔다. 그는 부처님이 이르신 대로 일천 명의 비구들에게 「쭐라빤카까 빅쿠가 누구신지요? 모시러 왔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일천 명의 빅쿠들은 일제히
「내가 쭐라빤타까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그는 다시 부처님께 돌아와 이같은 사실을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를 수도원으로 보내시면서, 이번에는 대답하는 쭐라빤타까 일천 명 중에서 제일 먼저 대답하는 사람의 가사를 꽉 붙잡아 그를 데리고 오라고 이르셨다. 그래서 마침내 심부름꾼은 쭐라빤타까를 찾아낼 수가 있었는데, 그가 쭐라빤타까의 가사자락을 잡는 순간 다른 빅쿠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심부름꾼은 쭐라빤타까와 함께 부처님 앞에 나타났고,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공양 공덕을 찬탄하는 설법을 하라고 이르시었다. 그러자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던 법문을 다시 되풀이함으로써 당당히 설법을 마쳤다.
그런 일이 있는 지 얼마 후에 빅쿠들이 법당에 모여서 여러 가지 토론을 하다가 쭐라빤타까 이야기가 나왔다. 한 비구가 말했다.
「형제들, 쭐라빤타까는 비구가 된 지 넉 달이 되도록 게송 한 편도 제대로 외지 못했었소. 그런데 그 자신 방일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그는 이제 더 이상 바보가 아닌 것이오.」
이때 부처님께서 들어오시어 물으시었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비구들이 사실대로 사뢰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비구가 자신의 모든 힘과 의지력을 다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 노력하면 자신을 세상에서 으뜸가는 지혜의 보고(寶庫)로 만드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25번 게송을 읊었다.
[해설]
바보 쭐라빤타까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렇게 아둔한 사람도 아라한이 되었는데...라는 용기를 갖게한다.
이 게송에서 다른이들은 모두 디빠(dīpa)를 섬으로 번역하였는데 지겸만은 정명(錠明)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洲)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洲)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S22:43)”는 경에 비추어 볼 때 번역의 오류이다.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라는 문맥을 보더라도 디빠(dīpa)는 섬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법구경 26번 27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게으름과 방종에 빠지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부지런을 가보처럼 지킨다.
지혜가 없는 자, 어리석은 사람은 방일에 사로잡히지만,
지혜로운님은 최상의 재보처럼,방일하지 않음을 수호한다.
愚人意難解 貪亂好爭訟 上智常重愼 護斯爲寶尊
우인의난해 탐란호쟁송 상지상중신 호사위보존
暗鈍愚癡人,耽溺於放逸,智者不放逸,如富人護寶。
pamādaṃ anuyuñjanti bālā dummedhino janā
appamādaṃ ca medhāvī dhanaṃ seṭṭhaṃ va rakkhati
(DhP 26)
The fools, the ignorant people give themselves up to negligence.
And the wise one protects conscientiousness as the greatest treasure.
법구경 27번 게송
게으름에 빠지지 말라. 육체의 즐거움을 가까이하지 말라.
게으르지 않고 생각이 깊은 사람만 큰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방일에 사로잡히지 말고 감각적 욕망의 쾌락을 가까이 하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
莫貪莫好諍 亦莫嗜欲樂. 思心不放逸 可以獲大安
막탐막호쟁 역막기욕락. 사심불방일 가이획대안
莫耽溺放逸。莫嗜愛欲樂。警覺修定者,始得大安樂。
mā pamādam anuyuñjetha mā kāmaratisanthavaṃ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vipulaṃ sukhaṃ
(DhP 27)
Don't pursue negligence or intimacy with pleasure delights.
Conscientious practitioner of meditation obtains abundant happiness.
[인연담]
부처님께서 사위성(사왓티) 기원정사 (제따와나)에 계시던 때,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와 관련하여 게송 26번과 27번을 설법하시었다.
사위성에서는 매년 몇 가지 축제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그 중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는 것이 있었다. 그 축제일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자기 몸에 쇠똥과 재를 물에 섞어서 바르고 스스로 바보가 되어 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그들은 이 기간에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허튼소리ㆍ욕설 등을 퍼부었다. 아무리 지혜롭고 고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은 그 축제 기간에는 아예 외출을 않고 집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들은 떼를지어 집집마다 몰려다니면서 집주인에 대해 갖가지 욕설을 퍼부어 댔고, 주인은 그들에게 몇 닢의 동전 따위를 주어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허게 해서 얻은 돈으로 밤새워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떠들어 댔다.
사왓티에 사는 불교 신자들은 대부분 점잖은 사람들이어서 이 기간에 외출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비구들에게 연락하여 탁발을 나오시지 않도록 조처한 다음 공양을 준비하여 새볔에 수도원으로 보내곤 하였다. 그 축제가 이레만에 끝났을 때 신자들은 부처님과 비구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린 다음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지난 이레 동안 고통이 심했습니다. 집 안에 갇혀 지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의 거친 말 때문에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축제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니라.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행위에 물들지 않고, 예리한 주의력을 기르며 항상 정신을 몸과 마음에 집중시키는 수행을 보배로 삼을 것이니라. 이 수행은 진실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하며, 깨달음을 성취케 하게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27번 게송을 읊었다.
[해설]
법정스님의 번역 “생각이 깊은 사람만 큰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는 “선정에 드는 님은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라고 벙역하는게 정확해 보인다. 생각이 깊다는 것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인연담을 보니 2600년전에도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지금도 인도에는 홀리축제,디왈리축제, 두르가축제, 두세라축제등이 열리고 있는데 이때 폭죽을 터트리고 경적을 울리고 악기를 두드려서 외국인들은 견디기가 곤혹스럽다. 금년 디왈리(10월30일)축제에 주민들이 쏘아 올린 폭죽 때문에 미세먼지가 인도 정부 기준치의 42배가 넘었다고 한다. 과연 부처님의 예언대로 인도에서는 바보들의 축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법구경 28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지혜로운 이가 부지런해서 게으름을 물리칠 때는 지혜의 높은 다락에 올라 근심하는 무리들을 내려다본다. 마치 산 위에 오른 사람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듯이.
슬기로운 님은 불방일로 방일을 쫓아내고
지혜의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왼 님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살핀다.
산정에 오른 슬기로운 님이 지상의 미혹한 존재들을 굽어보듯.
放逸如自禁 能却之爲賢. 己昇智慧閣 去危爲卽安. 明智觀於愚 譬如山如地.
방일여자금 능각지위현. 기승지혜각 거위위즉안. 명지관어우 비여산여지.
智者以無逸,除逸則無憂,聖賢登慧閣,觀愚者多憂,如登於高山,俯視地上物。
pamādaṃ appamādena yadā nudati paṇḍito
paññāpāsādam āruyha asoko sokiniṃ pajaṃ
pabbataṭṭho va bhūmaṭṭhe dhīro bāle avekkhati
(DhP 28)
When the wise one expels negligence by conscientiousness,
having climbed the stronghold of wisdom, without sorrow,
such a clever one observes the sorrowing crowd
as somebody standing on a mountain observes the foolish people on the ground.
[인연담]
어느 날 가섭존자(마하까싸빠)는 삡팔리 석굴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라자가하 성에서 탁발을 해 와 일정한 장소에서 음식을 공양하고 나무 밑에 앉았다. 마하까싸빠 비구는 내적 현상 관찰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에 몰두하면서 신통력으로 많은 종류의 중생을 살펴보았다. 어느 중생이 얼마만큼 마음이 집중되어 생활하고 있으며, 어느 중생은 얼마만큼 마음이 산만한 상태로 생활하고 있는지, 또 어느 중생이 어떤 업으로 태어나며 죽어가는지를 살펴보려고 했다. 마하까싸빠가 이런 것들을 알아보려 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사왓티 교외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면서 역시 신통력으로 까싸빠 테라를 관찰하고 계시었다. 그 결과 부처님은 까싸빠가 중생들이 업에 따라 태어나고 죽어가는 현상에 의문을 갖고 그것을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시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는 까싸빠의 지혜로서는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곧 까사빠 앞에 모습을 나타내 이렇게 말하였다.
「까싸빠여, 중생이 태어나고 죽어서 다시금 새 어머니의 인연을 만나 태(胎)에 들어가는 것은 네 힘으로는 알기 어려우니라. 네 능력은 아주 적은 것이며, 여래만이 이에 관한 진실을 꿰뚫어 아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광명을 보내어 까사빠 비구와 마주 앉으신 모습을 나타내고 다음 게송을 읊었다.
[해설]
법정스님의 “지혜로운 이가 부지런해서 게으름을 물리칠 때는 지혜의 높은 다락에 올라 근심하는 무리들을 내려다본다.”는 전재성님의 “ 방일하지 않는 슬기로운 님은 지혜의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읜님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살펴본다.”라고 번역해야 할 듯하다.
게송에서 누각에 올라가 사람들을 관찰하는 비유가 나오는 것과 같이 부처님은 천안통을 설명할 때도 누각에 올라 내려다 보는 비유가 나온다. 사람들의 전생과 태어날 곳을 아는 천안통의 능력은 마하가섭에게는 없고 말한다. 부처님은 천안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
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
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입
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
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
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비참한 곳, 나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입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이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서 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사문과경(D2)
특이한 것은 불교에서는 시간을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말하는 데 부처님이 전생을 아는 숙명통을 설명할 때 “천 생, 만생, 십만 생까지 보는 것을 넘어서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과학은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과학자들은 우주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우주의 설명이 경전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재의 과학적 사실과 부처님이 묘사하는 우주가 일치하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다.
법구경 29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게으른 무리 중에서 부지런하고, 잠든 사람 가운데서 깨어있는 현자는 빨리 뛰는 말이 느린 말을 앞지르듯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방일하는 자 가운데 방일하지 않고, 잠자는 자 가운데 크게 깨어있는 님 ,아주 지혜로운 님은 마치 준마가 둔마를 제치듯 나아간다.
不自放逸 從是多寤 羸馬比良 棄惡爲賢
불자방일 종시다오 이마비량 기악위현
放逸中無逸,如眾睡獨醒。智者如駿馳,駑駘所不及。
appamatto pamattesu suttesu bahujāgaro
abalassaṃ va sīghasso hitvā yāti sumedhaso
(DhP 29)
Conscientious amongst the negligent, watchful amongst the sleeping, the wise one advances like a swift horse, having left behind a weak one.
[인연담]
부처님이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두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좌선 수행에 관한 법문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정진하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한 비구는 아침 일찍부터 모닥불을 피워 숯불을 만들고는 그 화롯가에 앉아 사미를 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비구는 주의력 깊게 수행에 정진했다.
게으른 비구는 초저녁을 화롯가에서 따뜻하게 보내고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부지런한 비구가 걷기 정진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비구가 잠자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그에게 좀 더 열성적으로 수행하라고 충고했다. 부지런한 비구는 그런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여 머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고 신통력까지 갖추었다. 우기 석달 안거를 보낸 다음 그들은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갔다. 부처님은 두 사람에게 일상생활과 수행에 있어서 불편이 없었는지를 물으셨다. 게으른 비구는 자기는 아침마다 숯불을 피워 화로에 담아 두고 불을 쬐면서 잠을 자지 않고 지냈다고 대답하고는 다른 비구는 잠을 자더라고 고했다. 부처님은 그를 꾸짖으셨다.
“너는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너는 둔한 망아지와 같고, 저 비구는 잘 달리는 준마와 같다.”라며 29번 게송을 읊었다.
[해설]
부처님은 게송에서 거의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준마가 둔마를 제치듯 깨어있는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차이를 설명한다.
수행자에게 게으름은 가장 큰 적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법구경 30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인드라 신은 부지런하여 신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었다.
부지런함은 항상 찬양을 받고 게으른 비난을 받는 법이다.
제석천은 방일하지 않아서 신들의 제왕이 되었네.
방일하지 않음은 찬양받고 방일한 것은 언제나 비난 받는다.
不殺而得稱 放逸致毁謗. 不逸摩竭人 緣諍得生天
불살이득칭 방일치훼방. 불일마갈인 연쟁득생천
摩伽以無逸,得為諸天主。無逸人所讚,放逸為人訶。
appamādena maghavā devānaṃ seṭṭhataṃ gato
appamādaṃ pasaṃsanti pamādo garahito sadā
(DhP 30)
By conscientiousness did Indra become the chief amongst the gods. Conscientiousness is praised, negligence is always censured.
[인연담]
부처님은 웨살리 꾸따가라 승원에 계시던 때에 제석천(삭까)의 전생과 관련하여 게송 30번을 설법하시었다. 어느 때 릿차위국의 왕자 마할리가 승원에서 설법을 듣게 되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삭까 천왕에 대해 설법하고 계시었는데, 마치 눈앞에 보고 계신 듯이 설명하시는 것을 보고 마할리 왕자는 “부처님께서는 삭까 천왕을 만난 보신 적이 있으신 것일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잘 아시는 것일까? 너무나도 생생하게 잘 묘사하시는구나!”하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자기의 생각을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마할리여, 여래는 삭까 천왕을 아느니라. 알 뿐만 아니라 여래는 그가 전생에 무엇을 해서 금생에 삭까 천왕이 되었는지도 아느니라”하고 대답하신 다음, 삭까 천왕의 과거 전생을 이야기해 주었다.
삭까 천왕은 과거에 마가(magha)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로서 마짤라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젊은 마가는 친구 삼십 명과 함께 길을 닦고, 휴게소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여행객이 불편 없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이나라, 친구들과 함께 일곱 가지 의무를 성실하게 지키려고 애썼다.
그 일곱 가지 의무란, 다음과 같다.
첫째, 부모님을 잘 공양해 모시고 뜻을 잘 받든다.
둘째, 나이 많은 어른들을 존경하고, 어려움을 해결해 드린다.
셋째, 일생동안 고운 말씨를 쓰며, 욕설과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넷째, 일생동안 남을 험담하거나 중상하지 않는다.
다섯째, 항상 인색하지 않고 베풀며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
여섯째, 일생 동안 진실을 말한다.
일곱째, 일생 동안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여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이 일곱 가지 의무를 꾸준히 지켰고, 남에게도 이것을 권했다. 그렇게 선업을 닦아 나가면서 언제나 착한 행동, 올바른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금생에 삭까 천왕이 된 것이다. 부처님은 삭까 천왕의 이 같은 전생을 말씀하시고 나서 다음 게송을 읊었다.
[해설]
제석천(인드라)은 도리천(삼십삼천)의 왕이다. 인드라신이 실천한 일곱가지는 단순히 부지런한만 가지고는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석천은 전생담에서는 부처님의 전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나라 건국신화를 보면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고 환웅은 제석천의 아들이라고 한다. 제석천이 부처님의 전생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의 후손이 되는 것이 아닐까? 게송에 나타나는 마가(magha)는 사람 이름이다. 유기난이나 요참은 마가(摩竭人) 마가(摩伽)라는 이름을 그대로 표기하였지만 한글 번역이나 영어번역은 마가(magha)라는 이름을 표기하지 않고 있다.
마할리 경(S11:13)에서는 제석천의 다른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그의 선행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大林]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그때 릿차위의 마할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릿차위의 마할리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를 본 적이 있습니까?”
“마할리여, 나는 신들의 왕 삭까를 본 적이 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는 삭까와 닮은 자였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신들의 왕 삭까는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할리여, 나는 삭까를 안다. 그리고 삭까가 어떤 법들을 수지하였기 때문에 삭까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 지금의 삭까를 있게 한 그 법들도 나는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신들의 왕 삭까가 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마가라는 바라문 학도였다. 그래서 그는 마가완이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가 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보시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는 뿌린다다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가 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존중하면서 보시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는 삭까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가 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휴게소를 보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와사와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는 한 순간에 천 가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사핫삭카(천의 눈을 가진 자)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의 아내는 빠자빠띠라는 아수라 처녀였다. 그래서 그는 수자의 남편(수잠빠띠)이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는 삼십삼천의 신들에 대한 통치권을 가져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그는 신들의 왕이라 불린다.”
“마할리여, 신들의 왕 삭까가 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일곱가지 서계의 조목을 완전하게 받아서 지켰다. 이것을 지켰기 때문에 그는 지금의 삭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어떤 것이 일곱 가지 서계의 조목인가?
살아있는 한 나는 부모를 봉양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가문의 연장자를 공경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부드러운 말을 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중상모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인색함의 때가 없는 마음으로 재가에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하고, 보시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분노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내게서 분노가 일어나면 즉시에 그것을 없앨 것이다.
비구들이여, 신들의 왕 삭까가 전에 인간이었을 때 그는 이런 일곱가지 서계의 조목을 완전하게 받아서 지켰다. 이것을 지켰기 때문에 그는 지금의 삭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도 인드라신은 흰두교에서 신봉하는 신이지만 부처님 당시에도 인드라신은 사람이 친견하기 어려운 신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인드라신이 삼십삼천의 제왕이 된 내력을 이야기하고 인드라신이 어떻게 해서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되었고 어떠한 공덕을 쌓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상윳따니까야에는 제석천왕과의 대화를 모아놓은 25개의 경전을 소개하는데 삭까의 예배 경2(S11:19)에는 제석천왕이 부처님을 물론이고 부처님의 제자들과 재가신자들까지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예경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들을 포함한 여기 이 세상에서 그분은 바르게 깨달은 자이시니 휘지 않는 이름 가지신 스승님 그분께 나는 예배하노라. 탐욕과 성냄과 무명이 빛바래고 번뇌까지 모두 다한 아라한들 계시니 그분들께 나는 예배하노라. 탐욕 성냄 길들이고 무명 극복 위해서 방일을 몰아내고 허물어나가기를 좋아하는 유학들 그분들께 나는 예배하노라.’
이러한 경전을 통해서 불교의 입장에서는 인드라신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공덕을 지어 왕이되었고 부처님을 존중할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들이나 부처님을 가르침을 따르는 재가신자들도 존중하고 예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신의 위치가 윤회하는 하나이 중생일 뿐이므로 신에 대한 제사와 예배는 적극적으로 장려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인도의 흰두교에서는 부처님을 비쉬뉴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자리메김하여 놓고 불교와 흰두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웅은 제석천(환인)의 서자(庶子)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고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고 인간 세상에 내려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동굴에서 함께 살던 곰과 호랑이가 항상 사람이 되고 싶다고 환웅에게 빌었고, 환웅은 쑥과 마늘을 내려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하였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으며, 곰은 환웅이 시킨대로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동굴 속에서 삼칠일(21일) 동안 수도한 끝에 여자가 되었다. 웅녀(熊女)는 아이를 낳고자 하였으나 아무도 결혼해주지 않자 다시 환웅에게 빌었고, 환웅은 사람으로 변신하여 웅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라고 한다.
법구경 31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수행자는 크고 작은 온갖 속박을 불같이 태우면서 나아간다.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은
작거나 거친 결박을 불태우듯 태워 없앤다.
比丘謹愼樂 放逸多憂愆 結使所纏裏 爲火燒已盡
비구근신락 방일다우건 결사소전리 위화소이진
樂不放逸比丘,或者懼見放逸,猶如猛火炎炎,燒去大結小結
appamādarato bhikkhu pamāde bhayadassi vā
saṃyojanaṃ aṇuṃ thūlaṃ ḍahaṃ aggī va gacchati
(DhP 31)
The monk, who is devoted to conscientiousness and who is fearful of negligence,advances like a fire, burning the fetters, small or big.
[인연담]
한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좌선 수행에 관한 설법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정진하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숲에 들어가 자신의 힘이 자라는 한 힘껏 노력했지만 수행에 진보는 없고 힘만 들 뿐이었으므로 다른 수행 주제를 받아 수행해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 숲을 떠나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길을 걷다가 도중에 산불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불을 피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가 산 위에서 훨훨 타올라 오는 불길을 바라보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불은 계속 번져 가면서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구나. 바로 이와 같이 나도 성스러운 수행법이라는 불로써 크고 작은 모든 번뇌와 욕망이라는 장애를 다 태워 버려야겠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곧 자기의 마음이 변화되어가는 현상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제따와나 간다꾸띠에 계시면서, 이 비구가 제행무상의 진리를 체득해 가고 있는 것을 아시었다. 부처님은 광명을 놓으시어 마치 부처님이 그 비구의 앞에 앉아 계시는 듯이 모습을 보이시어 이렇게 말했다.
“저 산불이 모든 크고 작은 장애들을 다 태우는 것과 같이 너 또한 네 지혜의 불로써 크고 작은 모든 번뇌와 욕망의 장애를 다 태워 버려라. 중생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윤회의 생사 고통을 받게 하는 애욕과 집착을 다 태워 버려라.”라고 말하며 30번 게송을 읊었다.
[해설]
인연담을 보았더라면 전재성님같이 “작거나 거친 결박을 불태우듯 태워 없앤다.”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크고 작은 온갖 속박을 불같이 태우면서 나아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실감이 날것이다.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을 부처님은 용케 찾아내시어 화현으로 나타나셔서 수행지도를 하시는 것은 화엄경의 내용같다. 실제로 화엄경은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이러한 신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 별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법구경 32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부지런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수행자는
어느새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러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방일하지 않음을 즐거워하고 방일 가운데 두려움을 보는 수행승은
퇴전할 수 없으니 열반이 그의 눈앞에 있다.
守戒福致喜 犯戒有懼心 能斷三界漏 此乃近泥洹
수계복치희 범계유구심 능단삼계루 차내근니원
樂不放逸比丘,或者懼見放逸,彼已鄰近涅槃,必定不易墮落
appamādarato bhikkhu pamāde bhayadassi vā
abhabbo parihānāya nibbānasseva santike
(DhP 32)
The monk, who is devoted to conscientiousness and who is fearful of negligence, unable to regress, he is just in the vicinity of the Nirvana.
[인연담]
니가마와시띳사 비구는 사왓티 근처의 니가마와시라는 작은 상업도시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자랐다. 그는 나이가 들어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와 비구가 되었는데, 검박하게 생활하고, 항상 작은 것에 만족하고 조용한 곳에서 홀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순수한 마음과 굳은 결심으로 열심히 정진하는 비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탁발을 자기 친지들이 사는 곳에서 얻어 왔는데, 무엇이든 얻어지는 대로, 즉 음식이 나쁜 것이든 거친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했으며, 나머지 시간은 수행에 몰두했다. 심지어 그는 아나타삔디까가 여는 만승공양(萬僧供養)이라든가, 빠세나디 왕이 베푸는 화려하고 풍부한 공양 행사에도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비구들에게는 그의 초연하고 검소한 생활이 곱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니가마와띳사는 자기 친척들과 매우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의 공양만을 받아올 뿐만 아니라 입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먹는다”고 했다. 출가 수행자는 예전의 가족이나 친척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 빠세나디 왕의 공양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매우 교만한 비구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비난은 부처님에게도 전해졌다.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를 불러 소문의 진상을 물었다. 그 비구의 대답을 듣고 부처님은 그의 검소람을 칭찬하신 다음 모든 비구들은 마땅히 이 비구를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설]
법정스님과 같이 “어느새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러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번역보다는 “퇴전할 수 없으니 열반이 그의 눈앞에 있다.”라고 번역하는게 적절해 보인다. 아직 이 수행자는 대자유에 이른 경지가 아니고 목적에 가까이에(santike) 있다는 문장이기에 그렇다. 니가마와시비구는 요즘 말로 시골에사는 토굴스님인데 평생 한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포살날이면 현전승가의 포살당에가서 포살을 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법구경 33번 34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마음은 들떠 흔들리기 쉽고 지키기 어렵고 억제하기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 갖기를 활 만드는 사람이 화살을 곧게 하듯 한다.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
心多爲輕躁 難持難調護 智者能自正 如匠搦箭直
심다위경조 난지난조호 지자능자정 여장익전직
輕動變易心,難護難制服,智者調直之,如匠搦箭直。
phandanaṃ capalaṃ cittaṃ dūrakkhaṃ dunnivārayaṃ
ujuṃ karoti medhāvī usukāro va tejanaṃ
(DhP 33)
The wavering, unsteady mind, hard to guard, difficult to restrain,
the wise one straightens, like an arrow-maker an arrow.
법구경 34번 게송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이 마음은 파닥거린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 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
如魚在旱地 以離於深淵 心識極惶懼 魔衆而奔馳
여어재한지 이리어심연 심식극황구 마중이분치
三四 如魚離水棲,投於陸地上,以此戰慄心,擺脫魔境界。
Vārijo va thale khitto, oka-m-okata ubbhato,
pariphandatidaṁ cittaṁ, Māradheyyaṁ pahātave.
Even as a fish taken from his watery home and thrown on the dry ground (moves about restlessly), this thought quivers all over in order to escape the dominion of Mara (the tempter or Death).
[인연담]
어느 때 메기야 장로가 망고 숲에 정진하러 들어갔다가 탐욕,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나서 정진이 되지 않자 부처님께 돌아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메기야여,너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내가 너에게 ‘내가 지금 혼자 있으니 다른 비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시자의 책임도 던져버리고 수행하러 간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비구는 생각나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란 변덕스러운 것이어서 사람은 항상 마음을 잘 조절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게송을 읊었다.
[해설]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 떡이고 있다.’라는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 수 있다. 가만히 놔두면 그저 대책없이 날뛰는 것이 마음이다. 이 정도면 나도 홀로 수행할 수 있으리라 마음먹은 메기야 존자는 숲에서 날뛰는 마음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다. 이래서 바른 견해를 갖춘 후 수행하되 스승과 도반의 도움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법구경 35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붙잡기 어렵고 경솔하고 욕망을 따라 헤매는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억제된 마음이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원히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 이야말로 훌륭하니 ,
마음이 다스려지면,안락을 가져온다.
輕躁難持 惟欲是從. 制意爲善 自調則寧
경조난지 유욕시종. 제의위선 자조즉영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ṁ dantaṁ sukhāvahaṁ.
The control of thought, which is difficult to restrain, fickle, which wanders at will, is good; a tamed mind is the bearer of happiness.
[인연담]
어느 때 비구 예순명은 마띠까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우기안거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비구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각기 자기 방에 있으면서 다만 열심히 수행할 뿐 둘이 모여 앉아 이야기하지 맙시다. 우리가 수행하는 동안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말을 하지 말고 수도원의 종을 울려 알리기로 하고, 하루 한 번 마을로 탁발나가는 시간에만 모여서 나가되, 그때에도 침묵을 지킵시다. 둘이서 한 군데 앉지 말고, 저녁 때 한 자리에 모여서 법랍이 높은 선배의 훈계를 듣고, 아침에는 일찍이 탁발을 나갑시다.」
얼마후 마띠까의 어머니는 우유ㆍ버터ㆍ치즈 등을 준비하여 수도원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스님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수도원의 종을 쳤다. 그러자 비구들은 자기 방에서 따로따로 걸어나왔다. 마띠까의 어머니는 스님들이 각각 한 사람씩 따로따로 나오는 것을 보고
「지난번에 제가 집으로 초청했을 때는 모두들 같이 오시더니,오늘은 왜 따로따로 모이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신자님, 우리는 각각 자기 방에서 서로 떨어져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고 비구들은 그녀에게 수행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부인은 배운 것을 그 자리에서 세 번 네 번 외더니 곧 수행을 시작하여 아주 짧은 기간에 불환과를 성취했으며, 네 가지의 신통력도 얻었다. 그렇게 그녀는 신통력으로 비구들의 수행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비구들이 아직도 탐심과 진심ㆍ내적 현상 관찰이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삼매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수행자들에게 음식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각종 쌀죽과 여러 가지 견고하고 부드러운 음식에 향미를 넣어서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비구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그 안정된 마음으로 내적 현상을 바르게 관찰했으며, 결국 사대오온의 자연적인 성품을 보아 삼매를 이루어 아라한과를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신통력까지도 갖추었다.
비구들은 안거가 끝나고 부처님을 뵈러갔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매우 신심 있고 매사에 배려가 깊었던 마띠까 촌장의 어머니로부터 넉넉하게 음식과 필수품을 공양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부처님과 비구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한 비구가 마띠까의 어머니가 비구들을 잘 공양한다는 말에 자기도 그곳가서 수행하고 싶어졌다. 그곳에 살면서 그녀가 생각하는 것을 모두 즉각 보시하자 그 비구는 그녀는 타심통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제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져 버렸구나. 생각이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어서 때론 좋은 생각도하고 나쁜 생각도 하기 마련인데, 이 여자신자는 내가 일으키는 나쁜 생각을 다 알 게 아닌가 ? 얼른 이곳을 피해 떠나는 것이 상책이겠다>.
비구는 그곳을 떠나 다시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그간의 사정을 아뢰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너는 이제부터 네 마음 하나만을 잘 보호하도록 하여라. 마음은 매우 보호하기 어렵고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니라. 너는 이제부터 너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말라.“라며 게송을 읊었다. 그 비구는 부처님의 이 같은 설법을 듣고 다시 마띠까 마을의 수도원 돌아가 마띠까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수행을 했고, 머지 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해설]
여기 인연담은 매우 흥미롭다. 타심통을 가진 재가자가 스님들을 시봉할 때 일어나게 되는 이로움과 두려움을 잘 설명하고 있다. 또한 육십명의 스님들이 생활하는 방식에서 스님들이 안거를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각기 자기 방에 있으면서 다만 열심히 수행할 뿐 둘이 모여 앉아 이야기하지 맙시다. 우리가 수행하는 동안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말을 하지 말고 수도원의 종을 울려 알리기로 하고, 하루 한 번 마을로 탁발나가는 시간에만 모여서 나가되, 그때에도 침묵을 지킵시다. 둘이서 한 군데 앉지 말고, 저녁 때 한 자리에 모여서 법랍이 높은 선배의 훈계를 듣고, 아침에는 일찍이 탁발을 나갑시다.」
부처님 당시에는 안거때에도 따로 처소를 사용하며 정진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출가하여 5년동안은 은사스님 밑에서 계율을 배우고 그 뒤부터는 유행을 하며 살고 안거를 하더라도 자기의 처소에소 정진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육화경(六和敬)에서 신화공주(身和共住)와 의화동사(意和同事)라고 잘못 번역하여 승가의 전통이 모여사는 것으로 오해되어져 왔다. 그래서 승가대학이나 선원에서는 큰방에 작게는 십여명에서 많게는 백여명의 대중이 같이 모여 사는 것이 승가의 전통이라고 알게 되었다. 어디에 살든 같이 살고 무슨 일이든 같이 하는 것이 승가라고 받아들였다. 대중이 모여살면서 일어나게 되는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는 것이 승려생활에서 배워야할 덕목으로 여겨졌다. 대중간의 갈등을 참고 이겨내는 것을 먹물 들인다,장판때 묻힌다라고 표현하며 당연히 거쳐야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벌을 주고 폭력까지 사용하며 살았다. 사원의 기둥들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처소에서 따로 따로 사는 것이 부처님의 전통이라는 것을 모으고 살아왔다. 설사 겨울이 있는 까닭에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함께 모여살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중이 민주적으로 소통하며 살았다면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겠지만 명령과 복종을 강요하는 문화였기에 자유로운 소신발언이나 법담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살아오다보니 승려들이 비판해야 할때나 자정의 목소리를 내야할 일에도 침묵하게 되고 몇십년을 참선해도 대중앞에서 설법 할 줄 도 모르게 되었다. 최근 다행스럽게 지리산 백장암과 도봉산 망월사등에서 육화경을 다시 바르게 해석하고 승가의 토론문화를 살려내는 선원이 생겨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법구경 36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알아보기 어렵고 아주 미묘하고 욕망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지혜로운 이는 지켜야 한다. 잘 지켜진 마음이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 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
意微難見 隨辱而行. 慧常自護 能守則安
의미난견 수욕이행. 혜상자호 능수칙안
此心隨欲轉,微妙極難見。智者防護心,心護得安樂
Sududdasaṁ sunipuṇaṁ yatthakāmanipātinaṁ,
cittaṁ rakkhetha medhāvī, cittaṁ guttaṁ sukhāvahaṁ.
Let the wise man guard his thought, which is difficult to perceive, which is extremely subtle, which wanders at will. Thought which is well guarded is the bearer of happiness.
[인연담]
사왓티성 내에 은행가의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집으로 자주 탁발을 나오는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지 가르쳐 주십시오." 비구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진 재산을 삼등분하여, 그 중 한 몫은 사업에 쓰고, 다른 한 몫은 당신의 아내와 자녀들의 생계에 쓰고 그리고 나머지는 승가에 시주하십시오."
은행가의 아들은 당장에 그대로 실행했다. 그리고 나서 비구가 되어 스승으로부터 경을 배우고 계사로부터는 율을 배웠다. 그런데 계사의 가르침에 실증을 내고 차라리 나는 가정으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다음부터 그는 몹시 쇠약해지고 피부도 거칠어졌고 몸은 비쩍 말라 갔다.
부처님은 그 연유를 아시고 그에게
"네가 만일 한 가지만 잘 지킬 수 있다면 너는 다른 모든 것을 보호할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그것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네 마음이니라. 너는 그 한 가지만 잘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고 게송을 들은 은행가의 아들과 다른 많은 비구들은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해설]
경을 공부하고 율을 공부하는등의 일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그런때에는 부처님이 간단하게 지도하시는데 그것이 마음 한 가지만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마음 하나가 선업과 악업을 짓고 의미를 만들고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평정을 얻고 도를 깨닫게 한다.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한다(總攝諸行).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법구경 37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홀로 멀리 가며 자취도 없이 가슴 속에 숨어든 이 마음을 억제하는 사람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리라.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있는,
마음을 제어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리라.
獨行遠逝 覆藏無形. 損意近道 魔繫乃解.
독행원서 복장무형. 손의근도 마계내해.
遠行與獨行,無形隱深窟。誰能調伏心,解脫魔羅縛。
Dūraṅgamaṁ ekacaraṁ, asarīraṁ guhāsayaṁ,
ye cittaṁ saññam-essanti, mokkhanti Mārabandhanā.
They who will restrain their thought, which travels far, alone, incorporeal, seated in the cave (of the heart), will be freed from the fetters of death.
[인연담]
상카락키따 비구의 여동생은 사왓티에 살고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평소 존경하던 오빠의 이름을 따서 상카락키따라고 지었다. 이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 외삼촌인 상카락키따의 제자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조카 상카락키따는 부처님으로터 수행 주제를 받아 어느 마을에 있는 승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기 석 달 동안 그곳에서 수행하면서 신자들로부터 가사 두 벌을 받았다. 마침 수행기간 동안 자신의 가사가 낡아 해졌으므로 그는 한 벌은 자신이 입고, 너머지 한 벌은 스승이자 외삼촌이 상카락키따 비구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우기가 끝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외삼촌이 계시는 승원으로 갔다. 그는 가지고 온 가사를 비구의 발 아래에 놓고는 청하였다.
"존경하는 스승님, 이 가사를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비구는 대답하였다.
"나는 이미 가사가 있으니 그것은 네가 입도록 하여라."
그래서 조카는 당황했으나 한 번 결심한 것이므로
"이것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괜찮다, 내게는 이미 가사가 있으니 그것은 네가 사용 하여라."
조카인 상카락키따는 그 가사를 스승에게 바침으로써 자기에게 크나큰 공덕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승이 사양하더라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 더 요청했다. 그렇지만 스승은 끝내 가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상카락카따는 스승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는데 몸은 부채질을 하면서도 마음은 조금 전의 일이 어른거려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분의 조카이며, 또 이분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분은 내 공양을 받으려고 하시지 않는구나. 이렇게 나와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부족하신 분과 평생을 보내기는 실로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
그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스승이 받지 않으시는 이 가사를 시장에 내다 판다면 아마도 암염소 한 마리 정도는 살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암염소를 키우면 곧 새끼를 낳겠지. 그러면 그 새끼들을 키워 팔아서 여러 마리의 암염소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늘려 가다 보면 머지않아 나는 많은 염소를 키우는 부자가 되겠지. 그렇게 돈을 번 다음에 아내를 맞이하자.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 나는 외삼촌의 이름을 따서 상카락키따라고 짓고, 아내와 함께 아들을 데리고 승원에 와서 외삼촌에게 인사를 올릴 수도 있으리라. 나는 승원에 가는 동안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여보, 아이는 내가 안고 가리다." 그러면 아내는 "아니에요. 아이는 제가 안고 갈거예요. 당신은 마차나 잘 몰도록 하세요"하며 아이를 꼭 껴안겠지. 그래서 실랑이를 하게 되고, 아내는 어린아이를 놓쳐 떨어진 아이 위로 수레바퀴가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제 자식을 안고 간다면서 아이를 지키지도 못한단 말인가 ! 네가 나를 망쳤구나"하고 소리치면서 아내를 채찍으로 내리칠 것이다.
그가 이런 상념에 젖어 있을 때 그의 손은 그의 생각을 따라 움직여 그는 들고 있던 부채로 비구의 머리를 때리고 말았다. 비구는 곧 젊은 조카가 왜 자기의 머리를 때리게 되었는지 알아챘다.
"너는 네 아내 대신 이 늙은 비구를 때리는구나."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상카락키따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외삼촌의 말에 공포감을 느끼고 밖으로 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승원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아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데리고 갔다. 부처님께서는 저간의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마음이라는 것은 가까운 것은 물론 먼 것까지도 능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을을 잘 다스려 멀리 떠나가지 않도록 해야만 하느니라. 수행자는 항상 열성적으로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관찰하고 있어야만 하나니, 그리하여 그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갖가지 장애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느니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젋은 상카락키따 비구는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해설]
여기 인연담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꿈(調信之夢) 이야기와 흡사하다. 아마 조신의 꿈의 출처가 이 인연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체가 없는 마음은 멀리가고 혼자간다. 생각해보면 이런 마음이 살아내는 인생이기에 내가 사는 것 같지도 않고 백년이 일장춘몽처럼 덧없다. 게송에서 ‘신체가 없이’보다는 ‘형체가 없이’라고 표현하는게 좋을 듯하다. 동굴을 법정스님은 가슴이라 번역하였고 전재성은 비유 그대로 동굴이라고 번역하고는 설명이 없다. ‘동굴’은 육체를 비유하는 것일진데 숨어있다기 보다는 ‘의지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오해를 줄일 수 있을 듯하다.
법구경 38번 39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바른 진리를 모르며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지혜는 완성될 기약이 없다.
마음이 안정을 잃어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이 흔들린다면,지혜가 원만하게 완성되지 못한다.
心無在息 亦不知法 迷於世事 無有正智
심무재식 역부지법 미어세사 무유정지
心若不安定,又不了正法,信心不堅者,智慧不成就。
Anavaṭṭhitacittassa, Saddhammaṁ avijānato,
pariplavapasādassa, paññā na paripūrati.
If a man’s thought is unsteady, if it does not know the true law, if the serenity of mind is troubled, (in him) wisdom is not perfected.
법구경 39번 게송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선악을 초월하여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
공덕과 악행을 떠난 깨어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
念無適止 不絶無邊 福能알惡 覺者爲賢
염무적지 부절무변 복능알악 각자위현
若得無漏心,亦無諸惑亂,超越善與惡,覺者無恐怖
Anavassutacittassa, ananvāhatacetaso,
puññapāpapahīnassa natthi jāgarato bhayaṁ.
There is no fear for him whose thought is untroubled (by faults), whose thought is unagitated, who has ceased to think of good and evil, who is awake (watchful, vigilant).
[인연담]
사왓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고 숲속을 헤매다가 승원에 가서 비구들이 탁발해 온 음식을 얻어 먹게 되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처럼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수행자가 되면 참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출가했다. 출가후 그는 마음 놓고 음식을 먹었고, 결국 그의 체중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매일같이 아침마다 탁발을 나가는 것이 싫어졌고, 또 체중 때문에 쉽게 피곤해지는 것도 싫어서 가정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랬지만 세속 일도 편하지 않았다. 아주 힘이 들었고, 또 일상적인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여간 따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승원으로 들어가 비구가 되었다. 그러나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그것이 불만족스러워져서 두 번째로 다시 가정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그는 가정과 승원을 왕복하기를 자그마치 여섯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는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승원에서는 물론 세속에서도 잘 견뎌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자기의 게으른 마음에 따라 행동할 뿐으로 자기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찟따핫타라고 불렀다.
찟타핫타가 이같이 승원과 가정을 왕래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임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때 (그것은 그가 여섯 번째 가정에 돌아와 있던 때였다.) 그는 아내가 잠자고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아내가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잠들어 있는 추악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코를 골고 있었는데, 입에는 침이 흐르고 있었고, 배는 두꺼비처럼 불러 있었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찟따핫타는 그동안 승원에서 수도 없이 반복하여 들었던 가르침, 즉 몸은 무상한 것이며,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사람들은 이 더러운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착각하고 집착하여 살아감으로써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이 같은 진실을 곧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중얼 거렸다.
"내가 여러 차례 비구가 되었다가 다시 환속한 것은 이 여인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도 생활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보관하고 있는 노란색 가사를 거머쥐고 일곱 번째의 출가를 하려고 승원으로 뛰어가면서 연방 아니짜(無常)와 둑카(苦)를 외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그가 승원에 도착하여 다시 비구가 되겠다고 하자 승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장로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소. 당신은 너무나도 자주 머리를 길렀다 깎았다 햇기 때문에 이젠 칼 가는 숫돌조차 다 닳게 될 정도요."
이에 당황한 찟따핫타는 자기 마음이 예전과는 다르다면서 사정했다. 그리하여 결국 책임자는 마지못해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일곱 번째로 비구가 된 찟따핫타는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끈기 있게 관찰수행하여 며칠 사이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찟따핫타의 생활이 예전과는 다르게 오래 계속되자 다른 비구들은 이 일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찟따핫타에게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승원에만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찟따핫타는 대답했다.
"내가 전에 가정으로 돌아간 것은 아직도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가족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나는 이제 다시는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비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이 사실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찟따핫타는 진실을 말하고 있느니라. 그가 과거에 집과 승원을 왕래할 때는 그의 마음이 만족을 몰랐기 때문에, 가정에 있을 때는 승원이 좋아 보였고, 승원에 있을 때에는 가정이 좋아 보였었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담마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제 아라한이 된 그는 좋고 싫음을 다 초월하였으므로 흔들림이 없어진 것이니라." 라시며 부처님은 게송 38번39번 게송을 읊었다.
[해설]
여섯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번복하다가 일곱번째 출가하여 도과를 얻었다는 비구이야기는 흥미롭다. 출가생활을 하다가 환속하면 인생의 패배자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태국등의 남방불교국가에서 단기출가제도를 도입하고 있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원하는 때에 출가생활을 할 수 있는 문화가 바람직해보인다. 공덕(puñña)과 악행(pāpa)을 떠난 깨어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는 것을 요참은 超越善與惡라고 번역하였다. 선악과 악을 초월하라는 것이 선과 악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을을 말한다. 악행도 그렇치만 선행도 그 선행의 결과를 받아들일 주체(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이 진실이 아님을 알기에 그 행동이 업으로 되돌아오는 두 번째 화살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악을 동시에 초월한 아라한의 행동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에서의 선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부처님은 "연꽃이 이슬에 물들지 않음",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음"등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연기법, 불이법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불교와는 달리 선악과를 심어 놓고 그에 대해 처절한 벌을 내리는 기독교의 선악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전재성님은 ‘피폭을 여의다’는 생소한 단어로 번역하였는데 마음에 동요가 없다. 흔들림이 없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법구경 40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이 몸은 물항아리처럼 깨지기 쉬운 줄 알고 이 마음을 성곽처럼 굳게 하고 지혜의 무기로 악마와 싸우라. 싸워 얻은 것을 지키면서 계속 정진하라.
이 몸을 옹기라고 알고 이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하여
지혜를 무기로 악마와 싸워 성취한 것을 수호하되 집착은 여의어야 하리.
觀身如空甁 安心如丘城 以慧與魔戰 守勝勿復失
관신여공병 안심여구성 이혜여마전 수승물부실
知身如陶器,住心似城廓,慧劍擊魔羅,守勝莫染著
Kumbhūpamaṁ kāyam-imaṁ viditvā,
nagarūpamaṁ cittam-idaṁ ṭhapetvā,
yodhetha Māraṁ paññāvudhena,
jitañ-ca rakkhe, anivesano siyā.
Knowing that this body is (fragile) like a jar, making this thought firm like a fortress, let him attack Mara (the tempter) with the weapon of wisdom, protect what he has conquered and remain attached to it.
[인연담]
어느 때 오백 명의 비구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정진 수행에 관한 설명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적합한 장소를 찾다가 넓고 깊은 숲에 도착했다. 이 숲에는 신들이 나무에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비구들이 이 숲을 수행 장소로 정하자 나무에 있던 신들은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비구들이 자기들 아래에 있는 것은 옳지 않아서 자기들도 땅에 내려와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들은 이 비구들이 머지 않아 곧 떠나려니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비구들은 숲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곳에 머물렀고,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그러자 신들은 비구들이 여름 안거를 이곳에서 보내려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만일 그런 생각이라면 그들은 별 수 없이 우기 동안 흙바닥에서 지내야만 했으므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신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비구들을 이곳에서 쫓아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들은 밤마다 흉칙한 모습으로 나타나 비구들을 놀라게 했다. 예를 들면 머리는 있으나 몸이 없다든지, 몸은 있어도 머리는 없는 모습 따위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이상한 소리를 질러 대어 주위를 매우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구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수행력으로써 이를 극복하기로 했다. 그들은 현상 관찰의 힘으로 귀신들에 대한 불안ㆍ공포ㆍ놀람 따위를 이겨 보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실패하게 되어 결국 부처님을 찾아 뵙고 이 같은 어려움을 사뢰었다. 부처님은 비구들이 겪은 일을 자세하게 들으시더니, 그것은 비구들이 알맞은 무기를 갖지 못했지 때문이며, 알맞는 무기를 가지고 가면 괜찮으리라고 말했다. 그 무기란 자비의 마음으로써 자비는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비구들을 위하여 자비경을 설법해 주었다.
비구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자비경을 배워 숲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경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을 들은 신들은 비구들에게 더 이상 적대감을 갖지 않게 되었고, 비구들을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숲속에 신들의 장난이 사라졌다. 그래서 비구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서른두 가지 몸의 각 부분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분석 관찰하는 수행에 전념하여 마침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부처님게서는 사왓티의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의 수행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그들에게 광명을 보내시어 마치 부처님께서 그들 앞에 계신 모습을 나투시어 이렇게 말했다.
“육신의 허무함이 마치 질그릇 같음을 깨달은 사람은 마음을 잘 다스려 튼튼한 성곽처럼 만든다. 그는 이렇게 마라를 정복하고 마음을 잘 보호하여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설법 끝에 오백 명의 비구들은 모두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해설]
이 게송이 자비경의 인연담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자비무적이라는 말이 나온것도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술취한 코끼리를 힘으로 제압하거나 신통으로 제압하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제어하셨듯이(시무외인) 자비경은 상대밥으로 하여금 자비의 마음을 내게 함으로서 악심을 버리고 친절한 마음을 내게한다. 싸워서 무찌르는 것과 다른 방법이다. 자애심을 가지고 머무르는 것 자체가 '성스러운 삶'(브라흐마의 삶)이라 표현하셨다. 자애의 마음에서 지혜의 칼이 나타난다.
-자애경-
(기존의 자애경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번역을 소개한다)
1. 누구든지 착한 일을 능숙하게 실천하고,
고요함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유능하여 올바르고 정직하며,
말하는데 부드럽고 온화하며 겸손하자.
2. 만족할 줄 알고 남이 도움주기 쉽고,
분주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며,
감각기관 고요하여 사려 깊고,
공손하며 사람들에 애착 말자.
3. 현자들에게 비난받을
사소한 허물도 짓지 말자,
그들 모두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이 안락하기를!
4. 어떤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도,
연약하건 강건하건 예외 없이,
길다랗건 커다랗건,
중간치건 짧다랗건 미세하건 두터웁건,
5. 볼 수 있건, 볼 수 없건,
멀리 살건, 근처 살건,
태어났건 태어나게 될 것이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안락하기를!
6. 서로서로 속이지 않고,
어디서건 누구이건 경멸하지 말고 살아,
화내거나 악한 생각 품어서도 안 되나니,
다른 이의 괴로움이 지속되길 바라지 않기를!
7.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다해 보호하듯,
그와 같이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도,
한량없이 자애마음 펼치기를!
8. 온 세상에 대해서도 자애롭게,
한량없이 자애마음 펼쳐가서,
위로 아래로 그리고 사방으로,
걸림 없이 증오심도 원한심도 넘어서길!
9. 서서있건 걸어가건 앉아있건,
누워있건 깨어있는 동안에는 계속하여,
이런 자애마음 알아차려 확고하게 유지하길!
여기 이런 것을 성스러운 삶이라고 부처님들이 설하셨네.
10. 이런 자애 수행자는 삿된 견해 갖지 않고,
계행들을 잘 지키며 통찰력을 성취하여,
감각적인 즐거움을 탐욕함이 제거되어,
실로 두 번 다시 윤회하는 태중에는 들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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