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 초기에 울산에 가장 일찍 활동한 선교사 중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은 손안로(Adamson, 아담슨, 1894.5.20.-1914.3) 선교사이다. 그는 원래 영국 태생이며 1884~1889년까지 중국 북부에서 영국성서공회 선교사로 5년간 활동하였으나 인도 장로교신학교(Presbyterian College in Indi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91년에 호주 빅토리아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 in the State of Victoria)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5월 20일에 우리나라에 파송되었다. 당시 호주 장로회 선교회는 그들이 파견한 멕케이(James Hannah Mackay) 선교사가 아내를 잃고 자신의 건강마저 악화되어 한국 선교 2년 만에 귀국하였으므로 그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주 내에서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영국에 의뢰하여 런던 장로교회 소속이었던 아담슨을 추천받아서 적임자로 선임된 것이다. 아담슨, 즉 손안로 선교사는 1894년부터 1909년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 동부 경남 등지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마산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교회 설립 사역
그는 1894년 7월 15일 부산 최초의 세례식을 베어드(Baird) 선교사가 집례할 때 성경(히12:1-2) 봉독과 설교를 담당했고 1895년 11월 3일 유아 세례 1명을 포함하여 남자 10명과 여자 11명 등 모두 22명에게 세례식을 집례하기도 하였다. 1896년 3월에는 초량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반을 개설하였다. 1898년 예배당 건립을 계획하고 1899년 안식년 휴가 때 호주 빅토리아 지역을 순회하며 건축기금을 모금하여 1900년 6월 초량에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초량교회에 시무하면서 여러 지역을 전도해 동래, 기장, 울산, 거창, 의령 등에 선교구역을 확장하였다. 가까운 동래, 사상, 구포지역은 걸어 다니며 전도하였으며, 좀 더 멀리 갈 때는 조랑말을 타고 김해, 진영까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1895년 10월 15일 부산 좌천동에 일신여학교가 설립될 때 도움을 주었으며 고아원을 설립하고 사회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1896년 6월 10일에는 부산 최초의 기독교식 결혼식(심취명-김봉숙) 주례를 담당했다.
손안로 선교사는 울산뿐 아니라 경남의 여러 지역을 순회 전도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의 기록을 보면 15년간(1894-1909년) 부산, 진주, 마산, 통영, 거창교구에서 거의 매년 1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의령군에서는 서암(西岩,1905), 정연(定連,1907), 용소(龍沼,1907), 이목(梨木,1907), 분계실(分溪室,1907), 마장(馬場,1907), 상정(上亭,1908), 신반(新班,1908), 이목정(梨木亭,1908) 교회를 설립하였고 함안군에는 사촌(舍村,1897), 윤외(輪外,1908) 함안(咸安北,1909) 교회들을 설립하였으며, 마산에서는 마산(馬山,1901)교회와 문창(馬山浦,1901)교회도 설립하였다. 그 외에도 양산(梁山邑,1906)교회, 통영의 충무(大和町,1905)교회와 고성의 배둔(背屯,1907)교회와 고성(固城邑,1908)교회를 설립하였다. 창원에서도 월백, 본포제일교회 등을 설립하므로 부산·경남지역에서 무려 20여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실로 놀라운 선교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여러 교회가 세워짐으로 인해서 1911년 7월, 손안로선교사는 마산선교부를 개설하였고 그해 12월 6일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가 조직될 때는 노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거제, 함안, 의령, 마산, 송남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다.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순회 전도를 자주 다녔는데, 이 전도 방법에 대하여 매우 의미있는 소감을 말해주었다.
한국에서 현 상태로 순회 여행을 하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지만, 꼭 필요한 봉사이다. 선교사 자신에게는 모든 계층의 사람을 상황과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이 된다. 또한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된다.
순회 전도의 탁월성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 설립 사역
손안로의 사역 가운데 교회 설립 못지않게 귀중하고 큰 열매는 바로 학교 설립이다. 그는 마산(馬山府 外西面 上南里)에서 사역하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청소년 교육사업에도 힘을 썼는데, 매주 토요일과 주일에는 마산 근교를 순회하며 성경을 배포하였다. 1906년 5월 17일에는 한옥을 사들이고 10여 명을 모아 독서숙(讀書塾)이라는 교육시설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쳐 새로운 문물(文物)을 받아들이게 하였는데, 이 독서숙은 1909년 9월 15일 창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고 그는 초대교장으로 1911년 8월 18일까지 활동하였다. 1913년에는 남녀공학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로 인해 의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많은 시련
손안로 선교사가 이렇게 귀한 열매들을 많이 맺었지만 그의 눈부신 업적 뒤에는 남다른 아픔과 시련이 있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34살의 젊은 나이에 먼저 보내야 했다. 손안로의 부인 엘리자 A.(Adamson, Eliza Annie) 선교사는 남편과 함께 1894년 5월 20일 내한했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1년 6개월 만에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산에서 1895년 11월 27일 한국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심장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뿐 아니라, 울산의 병영교회를 순회 전도할 때는 먼저 와서 사역하고 있던 호주 여선교사들과 갈등을 겪어서 결국 교인들에게 퇴출당하는 수모(?)까지 겪기도 하였다. 심지어 자기 대신에 병영교회 신자들이 원하는 선교사는, 다름 아닌 자기가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오도록 소개해주었던 왕길지 선교사였으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배신감까지 느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울산에서 ‘실패한 선교사’라고 불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서부 경남과 마산으로 이끄셔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패가 없다!
부산·경남지역에서 순회 전도와 교육 선교에 20년간 헌신하여 눈부신 열매들을 맺은 후에 손안로 선교사는 1914년 3월 한국을 떠나 호주 멜버른을 경유하여 영국으로 돌아가서 1915년 8월 4일 런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름다운 사역의 결말을 이룬 손안로 선교사의 삶은 우리에게 주의 소명(召命이 가져다 주는 확실한 성공과 결말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