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이임간(李林幹)은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알평의 52세손이다. 그는 1282년(고려 충렬왕8년)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소감(秘書少監)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충목왕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로 정승이 되었다. 그 뒤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장천은 장수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장수를 본관으로 했다. 그리고 장천이씨(長川李氏)라고도 부른다.
시조의 증손자인 이을진(李乙珍)도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내고 장천부원군이 되었다. 이을진은 고려 우왕 때 충주 단양 도병마사를 거쳐 전라도도순문사, 강릉도도원수, 강릉교주도 도검찰사 등을 역임했다. 1388년 요동정벌 때 팔도 도통사 조전원수로 출전,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대마도 정벌의 명장 이종무는 아버지 이을진과 아들 이승평까지 3대가 왜구와 싸웠다. 그는 1381년(고려 우왕7년) 21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다. 그의 일생은 이때부터 평생 왜구와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이종무는 세종 1년 병선 2백27척과 군사 1만7천명을 거느리고 대마도에 들어가 왜군의 배 1백여 척을 빼앗고 돌아온다. 이를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한다. 이종무의 딸은 정종의 10남 덕천군 이후생의 비에 오른다.
이종무의 아들 이승평(李昇平)은 1419년(세종 1년) 사헌 감찰로 아버지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종군했다.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 등 여러 관직을 지냈지만 청백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1455년(세조 1)에 세조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1456 (세조 2) 중추원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사평(李士平)은 1421년(세종 3)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해졌다.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형 이승평(李昇平)과 함께 세조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예문관대제학 이후평(李厚平)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단종조(端宗朝)에 예문관대제학(禮文館大提學)을 지냈다. 이충걸(李忠傑)은 1486년(성종 17)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연산군과 중종조에 대사헌(大司憲), 절도사(節度使),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 부호군(副護軍), 함양 군수(咸陽郡守)의 관직을 지냈다.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의병장 이삼로(李三老)는 임진왜란 당시 화왕산성(火旺山城)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602년 고산정사(孤山精舍)를 지어 후진을 교육하고, 이듬해 강설하는 규정을 만들어 학교의 제도를 확립하였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고산실기》 3권이 있다.
이시분(李時?)은 1607(선조 40)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단성현(丹城縣) 어은동(漁隱洞)에 운창정사(雲?精舍)를 지었으며 500여보의 제방을 쌓아 농사를 쉽게 하자 공을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 저서는 《단구지(丹邱誌)》가 있다. 이희급(李希伋)은 1576년(선조 9)에 사마시 3등으로 급제하고 1582년(선조 1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저작박사를 시작으로 함양군수가 됐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함양이 함락되자 경상도사(慶尙道事)로 임명, 의병을 모아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난곡사에 위패가 있다.
독립운동가 소청(小靑) 이예모(李禮模)는 1919년 4월 3일 남양리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4일에는 남해읍 장터에서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솔곳에 남해 3.1독립운동 발상 기념비문를 세워 고인의 이름을 새겼다.
화가 이중섭(李仲燮)은 일제의 암흑기에서 해방, 그리고 6.25 전란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에 예술혼을 불태운다. 동화의 세계와 낙원을 그리며 역경을 헤매다 숨진 고독한 예술가다.〈싸우는 소〉·〈흰소〉(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황소〉(이상 개인 소장)·〈투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집떠나는 가족〉(이상 개인 소장)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銀紙畵-담배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의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다.
현대 인물은 이갑천(동아대회계과과장), 이경열(남해군재향군인회장), 이경훈(조달본부법무관), 이권표(평통자문위원), 이규삼(강원도지사), 이규완(한국화학연구소연구실장, 공학박사), 이규택(충주이산부인과원장), 이규엽(성형외과의사), 이균호(평통자문위원), 이기수(경신건업상무이사), 이기순(초등교장), 이기룡(남해제일예식장대표), 이기춘(경감), 이길호(하동군수), 이남상(우림상사대표이사), 이대룡(중앙대신문학과교수), 이덕영(덕우건설산업사장), 이동표(대신증권이사), 이득복(내외운수사장), 이득춘(장수이씨대종회장), 이만재(강서구청 수도관리과장), 이맹기(재무부 경제협력국사무관), 이문오(삼일스텐대표), 이백진(덕우건설산업 전무이사), 이병호(중앙종친회총무), 이보현(육군중령), 이봉조(작곡가), 이봉환(삼천포시축산협회장), 이봉하(경찰서장), 이부근(경남은행 마산부림동지점차장), 이삼(수원지방검찰청검사), 이상열(중수대동보편찬위원장, 양후공파), 이상민(국회의원), 이석로(성동구화양동장), 이석민(현대제모사대표), 이석종(재일본, 공학박사), 이성모(삼원여객사장), 이성방(중앙종친회총무), 이성환(금산면장), 이성훈(전주지법판사), 이수웅(대한종합식품사장), 이수현(재일본, 복도현거류민단장), 이승환(산림단위농협조합장), 이양수(영남탄산이사), 이영로(주식회사국보대표이사), 이영수(동양석재산업사대표), 이영수(숭의여자전문대 관광학과교수), 이영진(바이콘시계공업회장), 이정로(마산영광당안경원대표), 이옥기(홍익전기대표), 이옥천(수협중앙회 비서실장), 이용기(한국유니버살해운사장), 이용익(대승기계 전무이사), 이호봉(동광제재소대표), 이용수(국제등록기상사대표), 이철기(문교부장학관), 이은조(태림상사전무이사), 이윤보(진주실업전문대교수), 이윤호(사법서사) 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집성촌은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도리, 경남 함안군 칠서면 천계리, 황해도 수안군 도소면 용천리, 경남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경남 남해군 양아리, 평남 평원군 공덕면 적암리,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등이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은 입향조가 이종무(李從武)이다. 그가 죽은 후 이곳에 안장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이종무의 시호 양후(襄厚)에서 이름을 따서 양후공파가 되었다. 후손들은 본래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동에 있는 이종무의 묘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제향을 위해서 묘역을 찾는 정도였고 묘역의 관리는 전적으로 묘지기에게 맡겨두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이종무 장군의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문중의 기록을 근거로 가까스로 다시 찾았다. 이종무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이종무의 묘역은 현재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79번지인 광교산 기슭 속칭 능말에 있다. 이 묘역은 1975년 9월 5일 용인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에 장수이씨 양후공파 후손들이 새로 세운 묘비가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7명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장수이씨는 1985년에는 총 3,021가구 12,421명, 2000년에는 총 4,560가구 14,32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천5백여 가구, 2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2,111명, 부산 3,099명, 대구 165명, 인천 302명, 경기 738명, 강원 181명, 충북 78명, 충남 165명, 전북 360명, 전남 290명, 경북 231명, 경남 4,684명, 제주 17명이다. 경남과 부산 지역에 3분의 2가량이 살았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2,201명, 부산 3,804명, 대구 174명, 인천 628명, 광주 76명, 대전 143명, 울산 351명, 경기 1,586명, 강원 166명, 충북 116명, 충남 122명, 전북 271명, 전남 247명, 경북 262명, 경남 4,148명, 제주 29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경남과 부산에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