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에는 나총례(羅聰禮)를 시조로 하는 ▲금성나씨와 고려 때 상장군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는 ▲나주나씨 등 두 나씨가 있다. 이들은 계통이 전혀 다른 성씨다. 금성(錦城)이 나주(羅州)의 옛 이름이기 때문에 두 성을 놓고 종종 혼란을 일으킨다. 이 두 성씨의 인구는 2000년 현재 금성나씨(錦城羅氏) 40,493명, 나주나씨(羅州羅氏) 108,139명이다.
금성나씨(錦城羅氏)도 처음에는 본관을 나주로 삼았다. 그러나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일 뿐 아니라 시조가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금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금성나씨 일부 후손들은 여전히 본관을 나주로 한다. 그래서 구분하기 쉽게 금성나씨는 토나(土羅), 나주나씨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하여 당나(唐羅)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성나씨(錦城羅氏)의 시조 나총례(羅聰禮)는 고려 초 등과하여 한림이 되었으며 정종 때 공신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금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나유(羅裕)는 1271년(원종12) 김방경을 따라 진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뒤 탐라 정벌 때는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대장군에 올랐다. 조선조에 와서는 중종과 명종 대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친 나세찬(1498-1551)이 이름났다. 1544년(중종39)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성을 거쳐 한성부 우윤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했다. 후에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전남 나주시 문평면 송산리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다.
독립운동가 나용환(1863-1936)은 평안남도 중화 출신이다. 23세에 동학에 가담,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나인협과 함께 평안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활약했다.
나용환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나인협(1871-1951)도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이다. 독립운동가 나석주(1871-1951)도 금성나씨가 배출한 근대 인물이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그는 23세 때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귀국,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26년 김창숙 등과 모의하여 일본의 식민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다. 그리고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소설가 나경손(羅慶孫.1902~1926)의 호는 도향(稻香), 필명은 빈(彬)이다.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부터 천재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나도향은 1922년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영희 등과 함께‘백조’동인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경북 안동에서 1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때 쓴 장편‘청춘’을 1926년에 단행본으로 펴냈다. 1924년 가족의 생계를 맡았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죽자,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빈곤해졌다. 1924년 시대일보 기자로 일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관이나 친구의 하숙방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방랑생활을 계속했다. 1925년 말경 다시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1926년 귀국했다. 그해 8월 26일 급성 폐렴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이듬해‘백조’동인들이 묘비를 세웠다. 나도향은 1921년 4월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펴내는‘배재학보’2호에‘출학(黜學)’을 발표한 이후,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3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뽕’,‘물레방아’,‘벙어리 삼룡’등이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나홍순(羅弘淳, 1829 己丑生) : 문과(文科) 고종2년(1865) 식년시 병과(丙科), 나경성(羅經成, 1847 丁未生) : 문과(文科) 고종29년(1892) 별시 병과(丙科), 나득주(羅得周, 1755 乙亥生) : 사마시(司馬試) 정조13년(1789) 식년시 삼등(三等), 나원석(羅元錫, 1795 乙卯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4년(1867) 식년시 삼등(三等), 나희(羅僖, 1617 丁巳生) : 사마시(司馬試) 효종1년(1650) 증광시 이등(二等), 나경(羅儆, 1620 庚申生) : 사마시(司馬試) 인조26년(1648) 식년시 삼등(三等), 나원집(羅元緝, 1772 壬辰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13년(1813) 증광시 삼등(三等), 나언(羅偃, 1609 己酉生) : 사마시(司馬試) 효종3년(1652) 증광시 삼등(三等), 나정순(羅晸淳, 1874 甲戌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나민(1623 癸亥生) : 사마시(司馬試) 효종1년(1650) 증광시 삼등(三等) 등 모두 15명이 있다. 문과 2명, 사마시 13명이다.
현대 인물은 나석호(국회의원), 나창주(국회의원, 건국대부총장), 나정웅(공학박사, 과학기술원교수), 나오연(서울지방국세청장, 국민대 경상대학장), 나승정(금성나씨 도유사, 무궁화유지사장), 나승옥(대광화학(주)회장), 나철주(성민물산(주) 사장), 나석주(공학박사), 나철호(이학박사, 전남대교수), 나간채(문학박사,전남대교수), 나학진(철학박사,서울대교수), 나근배(의학박사, 신경외과장), 나중헌(기업은행부장), 나길웅(서린주택대표, 관광호텔사장), 나형주(의학박사, 부안종합병원장), 나세환(홍익교역사장), 나해철(의학박사, 피부과원장), 나병만(의학박사, 내과원장), 나동주(의학박사, 이비인후과원장), 나대성(의학박사, 소아과원장), 나병제(의학박사, 이비인후과원장), 나석권(행정학박사, 상지대교수), 나환일(여수시교육청 교육장), 나승포(전남도청 기획실장), 나무석(광주직할시 내무국장), 나두현(광주서부경찰서장), 나철주(철도청 서기관), 나병관((포창운수(주) 사장), 나용주(한일투자금융(주) 전무이사), 나기호(일신방직(주) 부사장), 나홍(신광염직사장), 나승열(금성주택. 건영(주) 사장) 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주요파는 ▲충절공파 ▲부호군공파 ▲영도첨의공파 등이다.
본관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의 옛 이름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光州)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금성(錦城)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금성김씨(錦城金氏), 금성나씨(錦城羅氏), 금성배씨(錦城裵氏), 금성범씨(錦城范氏), 금성오씨(錦城吳氏), 금성이씨(錦城李氏), 금성임씨(錦城林氏), 금성정씨(錦城鄭氏) 등이다.
집성촌은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전남 나주시 세지면 죽동리, 전남 나주시 문평면 송산리, 전남 나주시 문평면 동원리, 전남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전남 영광군 법성면 대덕리, 전남 나주시 문평면 산호리, 전남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경북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금성나씨(錦城羅氏)는 1985년에는 총 9,490가구 39,905명, 2000년에는 총 12,869가구 40,49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3천여 가구, 5백여 명이 늘어났다. 지역별로는 서울 10,585명, 부산 1,723명, 대구 1,057명, 인천 1,141명, 경기 3,600명, 강원 922명, 충북 656명, 충남 2,435명, 전북 2,352명, 전남 13,150명, 경북 1,072명, 경남 1,097명, 제주 113명이다.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15년 뒤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0,015명, 부산 1,494명, 대구 822명, 인천 1,982명, 광주 6,343명, 대전 976명, 울산 371명, 경기 7,495명, 강원 787명, 충북 758명, 충남 1,166명, 전북 1,706명, 전남 4,894명, 경북 655명, 경남 925명, 제주 104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광주,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 22世孫 九華公 羅茂春(南崗公의 次男)
靑史에 빛난 九華公은 광해조때 간신들이 仁穆大妃 廢母之義를 선동함에 분연히 일어나 天無二日이요 國無二母라 외치면서 극력반대 上疏하시다가 削官廢黜된 光海五賢이시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후진교육에 전념하신 學者이자 忠臣이시다.
錦城 羅氏
羅氏는 국내에 다섯 本貫이 있다. 그 중 安定․ 軍威․ 壽城羅씨들은 모두 錦城羅씨에서 나눠진 것을 서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크게 나누면 錦城羅씨와 羅州羅씨의 2本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두 姓씨는 300여 년간에 걸쳐 異根이다 同族이다 하는 논의가 계속되어 온 터이지만 점차 中國 豫章羅氏에 속한 中國姓氏라는 데는 별로 異論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듯싶다. 譜學의 역사가 짧은 이 나라에서 1천여 년 전의 世系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피차 어렵고 고달픈 일이므로 나주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兩族이 어떻게 현달해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960년 인구조사당시 羅씨는 15,700여 家口로 국내 姓氏 중 44位에 속했다. 이 중 全南에 4,958가구가 집중해 살아 가히 全南에 本鄕을 둔 全南씨족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역사상 羅씨는 高麗史에 羅裕(10世), 羅益禧(11世)등이 보이고 신증동국어지승람의 羅州고을 인물에도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면 가히 羅씨들의 中祖라고 할 만한데 錦城을 本貫으로하는 羅씨들은 羅裕의 10世祖 羅聰禮를 시조로 삼고 있다. 또 일부기록은 唐太宗때(627~649)唐나라에 살던 羅至强이 高句麗 정벌을 반대했던 탓으로 武臣들의 미움을 사자 한국에 건너와 發羅(羅州의 百濟때 고을 이름)에 살았고 新羅의 벼슬도 살아 한국 羅씨의 始祖가 되었다고 적고 있으나 唐太宗때 發羅는 백제 땅이었던 점으로 볼 때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부족하다. 일부기록은 羅至强의 후손인 羅경이 孝恭王 4년(서기 900년) 羅州 沙손이 되어 羅州羅씨로 得貫했다고 하나 이 때 羅州고을 이름은 錦城이었으므로 이것도 문제가 있다. 다른 성씨의 고찰에서도 본바와 같이 羅씨들이 高麗 중기에 蒙古가 지배하면서 현달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羅州를 중심으로 살던 土豪세력이 국가의 변혁기에 공을 세우면서 현달하자 事大的인 中國의 姓씨에 연관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高麗때의 名門
錦城羅씨들은 이처럼 중국귀화성씨임을 자처 하면서도 시조는 高麗초엽의 羅聰禮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高麗史列傳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世系가 가능하기 때문인 듯싶다. 이 씨족의 譜牒은 1世로부터 11世 사이에 3大庄과 4府院君, 5君封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행적이 비교적 증거 될 만한 인물은 6世의 國英으로 羅州 戶長을 지낸 듯싶으며 10世 羅裕(1225~1292)에 이르러 정확한 史錄들이 나타난다. 그는 三別抄나 女眞 토평에 큰 공을 세워 錦城君의 군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만일 蒙古의 예속 하에서 이룬 공적이 아니었다면 鄭地나 다름없는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이 益禧(?~1345)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上護장군과 商議評理를 지냈으며 羅州 文平에 자리를 잡았던 듯싶다.
羅益禧의 손자가 羅文奎(13世)로 西海道 按廉使를 지냈으며 그 보다 2代 아래인 羅繼從(1339~1415)이 高麗朝에서 藝文提學을 지내다가 낙향해 절개를 지켜 유명하다. 그러나 繼從은 裕나 益禧의 자손이 아니고 6世 국영 때 나뉜 羅守謙의 집안이라 작은 집이라 할 수 있다. 繼從과 같은 代의 麗末인물로 羅興儒가 있는데 益禧의 작은 아들 집안으로 影殿都監判官을 지낼 때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같은 始祖에서 갈려 각각 다른 본관을 쓰고 있는 安定羅씨나 軍威羅씨는 9世祖인 得璜의 둘째 아들 羅允의 자손들이며 壽城羅씨는 14세 羅純의 둘째아들 집안이다.
錦城羅씨는 이처럼 高麗末葉주로 현달했다가 朝鮮朝에 접어들어 不事二君의 宗訓을 지키다가 中宗朝에 이르러 드디어 19세에 羅世纘(1498~1551)이란 인물이 나온다. 大司憲까지 지낸 그는 1544년 成世昌이 湖堂 16명을 뽑을 때 李滉(1501~70), 金麟厚(1510~60), 柳希春(1513~77), 盧守愼(1515~90) 등과 뽑힌 당대석학이다. 世纘은 羅殷制의 손자로 殷制는 郁․ 謙․ 彬․ 均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 손자 대에 으르러 문명을 떨쳐 錦城羅씨 3波중의 한 派系를 이루고 있다. 世纘은 셋째아들인 彬의 둘째아들로 그 후손이 대부분 高敞, 長城 등에 번져있으며 큰아들 世緝의 자손은 和順, 潭陽을 중심으로 번져 本鄕을 떠나 정착한다. (우리 家系는 世緝의 둘째아들 慄의 孫임, 慄의 아들 德用의 둘째아들 茂春의 孫으로 이어짐)
長城 森西 牛峙마을의 三綱門, 담양의 龜山祠(世纘의 증손 茂春)를 자랑으로 내세운다. 정치학박사 羅昌柱, 前 道보사국장 羅承布, 판사 羅炳永씨 등이 이 집안이다.
羅大用장군은 宗孫系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羅大用장군(1552년~1612년)은 宗孫家系로 시조로부터 21世孫이다. 이 집안은 節制使公波라 하는데 淸白吏公 羅殷制의 큰아버지 羅紩을 派祖로 하고 있다.(羅殷制는 셋째 아들 孫) 전북대 교수 羅來晋, 한국과학원 교수 羅錫柱, 대동화학사장 羅承玉씨 등이 이 집안이다. 셋째집이라 할 竹軒公派 (羅繼從)는 주로 나주 세지면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이 집안은 앞서 밝혔듯이 6세인 國英의 둘째 아들 守謙집안으로 朝鮮朝에 별로 벼슬을 살지 않은 특징을 나타냈다. 오늘날 이 집안 출신으로 전 羅碩昊의원이 있고 전 광주시 교육장을 지낸 羅敬珉, 한국과학원 羅正雄이학박사 등이 있다. 錦城羅씨들은 조선조 중기에까지도 나주를 본관으로 하여 나주나씨와 별도로 구분할 길이 없었으나 1692년 (肅宗 壬申) 과 1747년에 만든 譜牒에 같은 羅州羅씨라 하더라도 羅富를 시조로 하는 羅州羅씨와는 異族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 후부터 나주의 新羅 때 이름인 錦城을 따 本貫으로 하여 羅富의 자손들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混籍의 잘못이 저질러져 큰 문제점이 되었던 탓으로 한때 다시 羅州羅씨와 통합론도 있었으나 錦城市가 생기면서 이 같은 주장이 줄어드는 듯싶다. 이 移貫과 復貫문제는 羅州羅씨와 언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터이나 역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고 나라이름마저 바꿔지듯 한국민족의 上代가 모두 그 규명이 어려운 것을 생각할 때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가 선조의 뿌리를 알고 그 영고성쇠를 살피면서 미래를 사는 지혜와 우애를 배우는데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서울宗親會가 있고 광주를 중심으로 湖南宗親會가 있으며 36세손끼리 모인 埰字會란 모임도 있다.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文平面 五倫동에 있는 鳳岡祠 (羅文奎․․ 羅繼從) 에 모여 제사하고 있으며 2월과 8월 中丁日에는 이웃마을 東院리에 모여 世纘(彬의 둘째아들)등 다섯 선조와 林亨秀 (1498~1551)를 제사하고 있다. 시조 羅聰禮의 묘가 진도에 있다는 보첩상 기록이 있으나 실전해 始祖壇 設立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2012. 12. 15 편집>
광주일보 1983년 5월 18일字 글 : 김정호(향토문화연구소장)
영웅 나대용 장군, 그리고 과학자 나대용
논설위원 김 노 금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ajutoday.co.kr%2Fnews%2Fphoto%2F201309%2F13403-2-8204.jpg)
노란 유채꽃과 강렬한 튤립의 아름다움까지 대한민국 온 산하는 꽃바람 축제이다.
그 축제의 한가운데 지난 4월 21일은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어야 할 나대용 장군을 기념하는 추모 행사와 학술 행사, 그리고 동상을 제막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제작하여 수 백 척의 함선을 앞세운 왜의 침략에 맞서 백전백승의 큰 전공을 세운 것을 오로지 이순신 장군의 공적으로만 기억해 왔던 것이 우리네 현실이었다.
역사는 기록한 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지만 엄연한 거북선 제작자라는 사실을 각종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면 이를 바로잡아 자리매김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 후손들의 몫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랜 세월동안 당연시 되어 와서 국민들의 뇌리에 굳을 대로 굳어버린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라는 공적에서 나대용 장군이 만드신 거북선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작한 후손들의 노력은 참으로 온당하고도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국민들의 의식 속에 오랜 세월 굳어버린 역사에 관한 사실을 국가가 나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임에랴 …….
그런데 1974년 민족문화 연구원의 나대용 기념사업회로부터 출발한 후손들의 40 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이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나 역시 오래전 74년도에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발표하신 동아일보 반쪽 분량의 "나대용 장군과 거북선" 이라는 글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후손을 통해 접하지 못했다면 결코 "거북선을 만드신 나대용 장군" 이라는 제목의 장편동화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영국의 해군 기록지 (1883 년 ) 에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전선은 철판으로 몸을 싸고 거북모양으로 만들어 당시 일본의 나무배로 만든 배를 깨트렸으니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철갑선은 진실로 조선인의 발명이다." 라고 적고 있으니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세계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바다를 재패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곧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도, 신라 말의 동양 삼국의 패권을 장악한 해상왕 장보고, 그리고 나주지역 해역에서 견훤과 자웅을 겨뤄 고려건국의 기초를 다진 왕건 또한 모두 바다의 패권을 장악한데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모두 역사를 통해 배웠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에 세계 역사 속에 우뚝 세울 수 있는 거북선을 발명하신 "과학자 나대용" 장군은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요 임진왜란의 전란 속에서 이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지난 4월 21일(2012년), 비가 내리고 돌풍이 휘몰아쳐 내리는 가운데서도 나대용 장군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에는 멀리 진해에서 해군 군악대와 또 나대용 잠수함의 승조원들이 달려와 주었다.
또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서울에서 어린 자녀까지를 대동한 후손들이 참석하였다. 자랑스런 나대용 장군을 기리는 식전 행사와 동상 제막식에까지 그리고 추모 학술대회까지 자리를 옮겨가면서도 그 어느 누구도 조금도 불평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들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으며 감격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대용 장군에 관한 책을 펴냈다는 사실 하나로 토론자로 앞에 선 내가 오히려 가슴이 뜨거워 옴을 느낄 정도였다.
나대용 장군을 역사에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반세기동안 청춘을 바쳐 장군의 귀한 업적을 되살려낸 장군의 직계후손인 서울 대광화학 나승옥 회장과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 사업회 이사장이신 나무석 회장, 그리고 많은 후손들에게 나주인의 한사람으로서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갖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또 사업회가 계획하고 있는 과학관건립, 방죽골 재현, 그리고 영산강가에 거북선을 띄우는 사업과 관광개발 등의 계획도 그간의 추진 성과로 보아 자못 기대가 된다.
장군의 생가마을을 단장하는 일, 한옥 관광 단지 등의 조성 사업에도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기를 충심으로 빌어 본다.
2012년 0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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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선을 제작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호국영웅 나대용 장군 서거 400주기 추모제향과 동상 제막식이 지난 21일 소충사에서 거행됐다.
나대용 장군 서거 400주년 이대로 끝내서야
거북선 제작 주도 임진왜란 승리로 이끈 ‘민족영웅’
21일 추모학술대회 악천후로 무산, 시민적 관심 필요
나주가 배출한 조선시대 과학자이자 거북선 제작자인 체암 나대용 장군(1556~1612)이 올해로 서거 400주년을 맞았다. 과학의날인 지난 21일 장군의 탄생지인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추모제향과 동상제막식이 열렸다.
(사)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이사장 나무석)가 주최하고 전라남도와 나주시가 지원한 이번 행사는 나대용 장군 사당인 소충사 일원에서 추모제향,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으며, 기념학술대회와 거북선 실험 현장 방죽골 답사는 악천후로 취소됐다.
이날 추모제향 행사에는 고성혁 부시장과 이기병 도의원, 임성환 시의원을 비롯, 금성나씨 대종중과 해군 나대용함 승조원, 해군 군악대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고성혁 부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거북선을 이용한 전술의 승리가 이순신 장군의 몫이라면 거북선을 제작한 과학전의 승리는 나대용 장군의 몫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영산강의 주역으로 바다를 지켜냈던 자랑스러운 선조의 정신을 이어 받아 앞으로 우리 나주가 새로운 영산강 르네상스 주역으로 도약할 것을 확신한다”고 힘주어 밝혔다.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나무석 이사장<왼쪽 사진>은 “1974년부터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충사와 생가를 복원하고 동상제막 등의 사업을 해왔고, 앞으로도 생가마을인 오룡동을 한옥관광마을로 조성하고 과학관, 방죽골을 새로 만들어 조선기술 등 역사적 발자취를 전시하고 나아가 영산강에 거북선을 띄워 관광개발에 기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성나씨 대종중 나진 종친회장<왼쪽 사진>도 “우리나라 조선산업이 일본을 누르고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나대용 장군의 선진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며 “자라나는 우리의 2세들에게 나대용 장군의 과학정신과 발명정신을 계승시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 가는 시대를 준비하자”고 강조했다.
기념사업회는 이날 전남대 이성식 명예교수와 나대용함 김성규 부장소령, 한국학 호남진흥재단 서명원 상임부이사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나대용 장군의 활약과 기념사업의 방향에 대해 토론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악천후로 취소하고 차후 일정을 잡아 다시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대용 장군을 임진왜란을 승리를 이끈 구국의 영웅으로 추모하기에는 이번 추모행사 자체가 짜임새 없고 엉성했다는 지적이다.
행사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전라남도와 나주시가 2천만원의 사업비를 지원해 이번 기념사업을 추진하는데 장군의 얼을 기리는 삼현육각 연주회와 문화공연 등을 곁들여 좀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 속에 추진됐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더구나 지역의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나대용 장군의 과학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해마다 학생들이 참가해왔으나 이날은 문중과 일부 관계자들만이 참석해 아쉬움을 남겼다.
참석자들은 주5일 수업제로 인해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더라도 지역 교육지원청 차원에서 학생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독려를 했어야 할 것이라고 교육당국의 무사안일함을 꼬집었다.
더구나 최근 새롭게 단장한 사당 주변에 주차장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아 행사에 참가한 차량들이 좁은 진입로에서 뒤엉켜 북새통을 이뤘으며, 사당 바로 인접한 곳에 있는 대규모 축사에서 악취가 풍겨 참가자들의 코를 감싸 쥐게 했다.<오른쪽 사진>
참가자들은 호국인물을 선양하는 문화재 주변에 축사를 허가해 준 나주시의 근시안적인 행정에 대해 혀를 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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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가 배출한 조선시대 과학자이자 거북선 제작자인
체암 나대용 장군(1556~1612)이 올해로 서거 400주년을 맞았다.
과학의날인 지난 21일 장군의 탄생지인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추모제향과 동상제막식이 열렸다.
학술토론회도 열릴 예정이었으나
강풍을 동반한 폭우로 취소돼 아쉬움을 남겼다.
체암 나대용 장군은 누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배 만든 배달겨레의 조상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 1556~1612)장군은 임진왜란 때 수군의 장군으로 거북선 제조와 쾌속선인 해추선 발명 등에 앞장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조선의 대표적인 과학자이자 발명가다.
1556년 나주 문평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첨추(僉樞) 나항(羅亢)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문장이 뛰어나 문인이 되려고 했으나 1583년 선조16년 훈련원 별시에 병과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 직을 맡아, 적의 대선 두 척을 격파하고, 사천해전에서는 분전 끝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한산도 해전에서도 부상을 당하였다.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와 같은 공을 인정받아, 1594년 강진현감으로 제수되었고, 이어 금구, 능성, 고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606년 12월 24일 나대용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창선을 개발하였다고 전한다. 전투형 거북선과 탑승인원을 많이 필요한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해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창선을 건조한다. 125명이 필요한 판옥선에 비해 격군 42명으로도 배의 운용이 가능하며, 군 인력을 늘이지 않고도 배를 두 배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한 장점이 있었다.
1610년 광해군 2년에는 남해현령에 제수되어 해추선이라는 쾌속선을 고안하여 건조하였고, 1611년에는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에 제수되었으나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재발해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대용 장군은 조선 최고의 선박기술자로 거북선을 개발하였는데, 탁월한 전공을 세웠으며 속도가 느린 판옥선을 개량해 해추선 등을 고안하였다. 또한 해전에서 기술적 우위를 가지게 한 핵심 기술자였다. 나대용에 대한 기록은 《충무전서》,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등에 전해져 내려온다.
1974년 10월 이은상을 회장으로 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가 조직돼 체암 나대용 장군 실기가 편찬 되고, 1977년에는 나대용 생가와 묘소 등 호국유적지를 전남도지방문화재 26호로 지정됐다. 이듬해 11월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소충사를 건립해 과학의 날인 매년 4월 21일 추모제향을 거행해오고 있다.
1999년 6월에는 나대용 장군의 탁월한 과학적 조선기술과 구국정신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옥포 대우조선소에서 건조한 제8호 잠수함을 나내용함이라 이름 지었으며, 2007년 12월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를 발족해 기념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