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부제-수원수구)
이후선
지하철 문이 열린다. 한 남자가 승차한다. 그는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지하철에 오른다. 다리가 불편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장애인이다. 상의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그려진 회색 티셔츠를 입었고 하의는 검은색 바지에 검은색 신발을 신었다. 지하철에 탑승한 그는,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출입문 근처, 기둥을 잡고 선다. 나도 서 있는 터라 안타까워하며 그를 본다. 순간 그의 다리가 단지 짧은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바지색과 신발색이 같아 쉽게 눈치 챌 수 없었으나 그의 오른쪽 다리가 백팔십도 돌아가 있다. 서 있는 그를 자세히 보니 오른쪽 신발을 거꾸로 신고 있다. 저런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뒤뚱뒤뚱 걸을 수밖에 없는 그의 입장이 이해간다. 의족인지 본인 발인지는 알 수 없는 그의 발은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순간 나는 두 발로 온전히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도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다. 교통위반을 하지 않았다. 파란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넜을 뿐이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링거줄, 소변줄, 코줄, 목줄... 혼자 움직일 수조차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퇴원 후 엄마의 도움을 받아 숨 막히는 재활 시간을 보냈다. 힘들어 울고, 억울해 울고, 허무해 울던 느리게만 흐르는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달수 있었던 이름표가 경증장애인이다.
장애인 아저씨 얼굴을 본다. 얼굴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무시하려 애쓰는 모습,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 자신을 멀리 하는 사람들을 당연시 하려는 모습.
화가 난다. 우리 장애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지. 장애인이 되어 불편하게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왜 동물원 원숭이처럼 사람들 시선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지. 마음 깊이 잠자고 있던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끊어 오른다. 이번엔 공허라는 놈도 같이 손을 맞잡고 올라온다. 어이없는 교통사고, 여러 차례 수술, 눈물의 재활, 나를 바라보던 시선들...
문현역에서 승차한 두 여학생이 내 옆에 선다. 교복을 입은 두 여학생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깔깔거리며 이야기 한다. 오늘 치른 기말고사와 내일 치르게 될 문학시험 이야기도 하며 쫑알댄다.
“연희야! 내일 조침문에서는 어떤 문제가 나올까?”
“글쎄 너무 뻔한 문제 유형이긴 하지만 작품 주제를 묻는 문제 아닐까? ‘누구를 한(恨)하며 누구를 원(怨)하리요’ 여기에 줄이 그어져 있고 이와 관련된 사자성어 ‘수원수구’ 묻는 문제 말이야.”
나의 고교시절을 떠올린다. 문학시간을 좋아했던 난, 친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문학소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많은 문학작품에 감동을 받았지만 조침문에서는 큰 감동을 받지 못했었다.
고전 조침문은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된 유씨부인 작품이다. 가산이 빈궁하여 바느질로 생활하던 부인은 아끼던 바늘이 부러진 것을 애통해 하며 바늘을 의인화 하여 제문형식 수필을 썼다. 모든 것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고 현실에 순응하는 부인 모습이 그리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장애를 입게 된 지금 ‘수원수구’ 본뜻을 깨닫게 되었다. 나약하고 여리게만 들리던 부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자신을 어루만지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최고의 지혜임을 알게 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때론 부인처럼 하늘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것이 자신을 다독이고 스스로를 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나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는지, 그로 인한 장애를 해결할 방법도...
서면역에서 정차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환승을 위해 이번 역에서 하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장애인 아저씨를 보기 위해 눈을 돌렸다. 아저씨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아저씨 곁으로 가, 뒤를 따라 하차했다.
서면역은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역이기에 많은 사람들로 복잡하다. 지하철 1호선이 방금 도착한 모양인지 저 멀리 계단으로 많은 인파가 쏟아진다. 계단을 내려온 사람들이 하나 둘 승강장을 채운다.
장애인이 된 나도, 환승을 하려 한다. 장애로 인해 내팽개치고 포기하고 삶이 아닌 사랑하고 위로하는 삶으로 말이다. 하늘이 나에게 달아준 장애란 이름표를 어떻게 할 수 있으랴...
거꾸로 신겨진 아저씨의 신발은 환승을 위해 씩씩하게 나아간다. 많은 사람들 사이로 아저씨 모습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