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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동이족)이었다
저자 주학연/역자 문성재/출판사 우리역사연구재단
비교언어학으로 밝혀낸 중국북방민족들의 원류
중국의 저술가로 활동 중인 주학연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인문과학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그동안 중국 역사서에서 풀지 못했던 역사ㆍ언어ㆍ인류학적 난제들의 해결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10여년동안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글들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으로, '북방민족'이라는 거울을 통해 상고시대 중원사회에 접속하여 상고시대 중원언어가 북방민족 언어인 알타이계 언어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인명·족명·지명·어휘 등 북방민족의 언어정보들과 동서양 민족의 혈연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 북소믈리에 한마디!
저자는 독특한 연구방법론에 따라 북방민족의 기원과 역사를 더듬음으로써 페르시아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정확한 위치 등 그동안 학계에서 꾸준히 논란이 되어 왔던 쟁점들에 대해 보다 독특하고 진전된 단서들을 제시한다.
중국북방민족과 한국인의 뿌리(역자서문요약)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한족(漢族)이 황하(黃河) 유역에서 최초의 중국문명을 건설하고 이를 주변 민족에게 전파했다는 화이문화론(華夷文化論)이 지배해 왔다. 그러나, 역자가 매번 중국의 내몽골(內蒙古)·만주(滿洲)서역(西域) 등지를 찾을 때마다 동아시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유목제국이며, 비단길(실크로드)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동서 문명의 통로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초원길(스텝로드)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물론 수천년동안 중국이 이룩한 문화적 업적과 그것이 주변 민족에게 끼친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라시아에 펼쳐진 광활한 북방민족의 판도를 떠올리다 보면 중국은 또하나의 변방이요 그 역사 역시 또다른 변방의 역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홍산(紅山)·하가점(夏家店)·삼성퇴(三星堆)의 고대 문화 유적들, 그리고 진나라의 발상지인 감숙성(甘肅省) 장가천(張家川)의 고대 유물 등, 최근에 이루어진 일련의 고고학적 발견들 역시 ‘동이(東夷)’를 위시한 북방민족들의 발자취가 그동안 한족의 본거지로 여겨온 중국 내륙 ― 중원(中原) 깊숙이까지 남겨져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들로만 여겨져 왔던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북방민족 즉 ‘오랑캐’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주학연(朱學淵)의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秦始皇是說蒙古語的女眞人)》는 저자가 10여년동안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글들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으로, 체제가 비교적 자유분방하며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대목도 보이지만, ‘북방민족’이라는 거울을 통해 상고시대 중원사회에 접속하여 상고시대 중원언어가 북방민족 언어인 알타이계 언어였다는 전제하에 인명·족명·지명·어휘 등 북방민족의 언어정보들과 동서양 민족의 혈연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독특한 연구방법론에 따라 북방민족의 기원과 역사를 더듬으므로써 페르시아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정확한 위치 등, 그 동안 학계에서 꾸준히 논란이 되어 왔던 쟁점들에 대해 보다 독특하고 진전된 단서들을 제시한다.
● 대진국은 로마나 이집트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진국(大秦國)의 경우일 것이다. 20세기 초의 일본 학자 백조고길(白鳥古吉)은《사기(史記)》〈대완열전(大宛列傳)〉의 ‘여헌(黎軒)’,《후한서(後漢書)》의 ‘이건(犁?)’ 등의 지명이 a·s 등 일부 발음이 생략된 ‘레칸(Lekan)’과 부합된다는 점을 들어 이 도시를 이집트의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비정했으며, 프랑스의 중국학자 펠리오 등이 여기에 동조하면서 백여년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얼마전 선덕여왕(善德女王)을 다룬 국내 TV 드라마에서 ‘여헌’이 이집트로 소개된 것도 이같은 주장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런데, 주학연은 17·18·19장에서 원전에 대한 깊은 분석과 함께 지명·인명 등 언어적 비교분석 및 현지에 대한 인문지리적 고찰을 통하여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오익산리(烏?山離)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이란의 후라산(Horasan) 일대이며, 여헌국 또는 불름으로 불려진 대진국은 이란 서북부 지역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 헝가리민족의 원류인 마자르족은 말갈족이었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헝가리 민족인 마자르(Magyar)족의 민족적 기원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는 마자르족의 족명·인명·지명 및 기본어휘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헝가리인의 조상이 퉁구스계에 속한 말갈족(靺鞨族)이며, 7세기 중반의 요동(遼東)전쟁 및 고구려(高句麗) 멸망으로 촉발된 수백년에 걸친 연쇄작용 즉 유럽으로의 민족대이동의 결과, 최종적으로 헝가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내놓았다.
● 숙신-말갈-여진-만주족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같은 혈통
그러나, 저자가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아무래도 여진족(女眞族)에 대한 재해석이 아닐까 싶다. 그는 중국 고대의 인명·지명·족명 등에 감춰진 언어 코드들을 일일이 대조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기존 학자들이 별개의 족속으로 인식해왔던 숙신-말갈-여진-만주족 등이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기원한 동일 혈통인 퉁구스계 북방민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또, 5장·6장·7장 등에서는 신화학·고고학·문자학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상식을 넘어 삼성퇴 문화·주(周)나라의 희씨(姬氏)·춘추(春秋)시대 월(越)나라의 구천(勾踐)은 물론, 나아가 아메리카 인디언에서도 퉁구스계 난생설화(卵生說話)·새 토템·새깃 장식 등의 신화적 모티브들을 발견하고, 진(秦)나라의 시조설화 및 부족신앙도 그같은 신화·혈통적 친연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 카스피 해는 주르잔(조선해) 해 곧 ‘여진의 바다’
상식을 깨는 역사해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7장·18장·19장에서는 음성학·언어학적 접근을 통해 페르시아의 고대국가인 안식국·조지국이 사실은 퉁구스계 여진족의 영역이었고 카스피 해가 주르잔 해(조선해) 즉 ‘여진의 바다’로 불리는 것도 바로 그같은 역사적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는 새로운 해석도 내놓았다. 중앙아시아 이서지역은 차치하더라도, 한족 문화권 한 복판이라는 중원지역은 그야말로 상고시대부터 상(商)나라에서 청(淸)나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를 위시하여 몽골(蒙古)·돌궐(突厥) 등 북방민족의 각축장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고고학·문헌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까닭에 그의 주장이 논리적 비약으로 비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의 이같은 독특한 접근과 해석은 중국 역사의 주체는 한족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역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 현대 중국사학계의 고정관념을 깨는 주학연의 언어학적 실증주의
물론, 기존의 상식을 깨는 이같은 기술내용은 다분히 의도적인 장치들이다. 저자가 정작 이같은 장치들을 통해 천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학문적 금기 깨기가 아닐까 한다. 고고학·문헌학적 유물보다 고대 언어들을 제1의 근거로 삼는 언어학적 실증주의를 역설하는 그는 언어가 엄연히 또하나의 문화전승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류사적 화석’으로서의 가치를 외면하는 기존 중국 학계의 연구 풍토에 대해 다양한 인식의 배경과 방법론을 통한 새로운 각성은 도외시한 채 지식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결국 쓰레기 같은 글과 썩은 학자들만 양산하고 있다고 맹렬히 질타한다. 그러면서 칼그렌(Kalgren)이 전통적인 중국 음운학의 벽을 허물었듯이 중국 학계도 칼그렌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만인에게 자유로운 학문 창달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 책이 중국과 대만(臺灣)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도 저자가 기술하는 역사적 사실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처럼 전통적인 역사담론의 고정관념을 깨는 그의 이단적이고 파격적인 도전과 통섭의 정신 때문이 아닐까 싶다.
● 한자의 또다른 가능성--갑골문을 음성적 표지로 해석
저자가 둘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자의 또다른 가능성 재인식 하기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학자들이 의미적 표지[의부(義符)]로 인식해 온 갑골문(甲骨文)을 음성적 표지[음부(音符)]로 해석하고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단순히 한자의 의미와 표의성(表義性)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또다른 가능성인 한자의 소리와 표음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자가 동이계 왕조인 상나라에서 창제되었으며 고대와 현재의 동이계 민족들이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같은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자도 현재 어원에 관한 연구를 진행중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처럼 언어 특히 어원에 관한 연구는 고대사 연구에서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책의 몇 가지 문제점들
많은 학자의 저술들이 그렇듯이, 이 책도 몇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저자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비교언어학적인 가설들이 늘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① 상고시대부터 오랫동안 중원지역에 오랑캐의 시대가 존재했다
② 중원문화의 실질적인 주역들이 오랑캐 ― 북방민족이다 (중국은 四夷라 불림)
③ 당시 중원의 언어가 근세 북방민족의 언어이다(우랄 알타이어계 언어)
라는 등의 새로운 주장을 피력하는 그가 이제는 중국 학계에서조차 그 생명력이 다한 상반된 입장 ― 중국문명과 북방민족이 중원에서 기원했다는 ‘중원기원설(中原起源說)’과 한족과 북방민족은 뿌리가 같다는 ‘한로동원설(漢虜同源說)’ ― 들을 틈틈이 거론하면서 논리적 비약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모순된 모습들은 “순수한 인류학적 탐구의 발로”라는 저자 자신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동북 프로젝트나 하상주 프로젝트에 빌미가 될 우려를 안고 있어서 저으기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다.
저자가 중국인이어서 그랬겠지만, 우리 고대사에서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고찰이나 언급이 부족한 것도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저자가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적석총(積石?) 등 고조선(古朝鮮)과 홍산문화·하가점문화의 역사·고고학적 상관성이나 고구려·백제·신라와 북방민족의 혈연적·역사적 친연성 및 그 언어의 알타이어적 특성들에 주목했더라면 보다 좋은 책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더러 이성적인 사유를 방해하는 이 같은 문제점이나 아쉬움들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저자의 문제제기를 계기로 그동안 당연시되거나 간과되어온 수많은 역사적 쟁점들을 또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관조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 중국북방민족과 한민족의 ‘인연’을 탐색하는 책
실제로 인류학·유전학·고고학·언어학 등 각 방면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저자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줄 증거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오늘날 한민족의 정체성과 시원을 찾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새로운 시각과 신선한 자극들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어쩌면 저자가 역사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중국사는 물론 우리 역사까지도 재해석·재조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한국사의 영역에서 북방민족과 우리 한민족의 ‘인연’을 탐색하는 작업은 이제부터 우리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 책 속으로 >
10. ...중국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현재의 하북(河北) 서수(徐水)만 서이(徐夷)의 옛 땅이라고 추정해왔다. 따라서 3,000년 전 동북방의 여진 부락이 퉁구스-구이계(九夷系) 부족을 이끌고 중원으로 진출한 역사는 철저하게 은폐되고 말았던 것이다.--- 6장, 143쪽
11. ...고대 중원의 인명은 융적(戎狄) 부락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즉 우순(虞舜)은 오손(烏孫), 묵적(墨翟)은 물길(勿吉), 맹가(孟軻)는 몽고(蒙古), 형가(荊軻)는 준갈이(准葛爾)에서 유래한 것들로, 이 인명들은 북방민족이 중원민족과 기원이 같다는 증거이다. 여진족과 중원민족이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족명 여진을 이름으로 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 구천(句踐)이다.--- 6장, 146쪽
12. ...어째서 도올이 역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인가. ≪영-몽사전≫을 펼쳐보면 수수께끼는 저절로 풀린다. 몽골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tuuh(투:흐)이다. 초(楚)나라의 역사가 ‘도올’이었다는 것은 명백히 이 몽골 어휘를 차용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옳다.--- 8장 도올로 찾는 중원민족의 뿌리, 169-170쪽
13. ...우리는 지금까지 월지(月氏)·오손이 퉁구스계이며, 우즈베크도 올자-베크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본장에서는 당시의 흉노 지배집단이 여직(女直) 부락이었으며, 흉노가 월지·오손을 하서주랑 너머로 축출한 일도 사실은 여직·애신·올자를 수장으로 하는 부락연맹체 간의 투쟁과 이주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퉁구스 민족이 동북아시아의 토착민이라는 기존의 주장은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9장 흉노족의 혈연과 언어, 182쪽
14. ...유사 이래로 북방민족들은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이주해갔을 것이다. 따라서 4세기부터 유럽에 타격을 주기 시작한 훈(韓,檀)족을 북흉노의 후예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무래도 다소 성급한 결론일 듯싶다. 남러시아 초원은 알고 보면 이미 3세기 이전의 1,0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키메리족·스키타이족·사르마타이족 등의 아시아계 유목민족들의 활동무대였다. 흉노부락은 중화제국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 유목민족들을 결집시키는 핵심세력으로 새로 부상했고, 이때부터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대담하게도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게 되었을 것이다.--- 10장 흉노의 흥망과 이동경로 -결론, 203쪽
15. ...활과 화살은 인류가 발명한 대단히 중요한 문명의 이기이다. 화살은 헝가리어에서는 ny-l(닐), 핀란드어로는 nuoli(누오리), 에스토니아어로는 nool(누울)인데, 신기하게도 만주어의 niru(니루)와 일치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작나무가 헝가리어에서는 ‘화살나무’라는 뜻의 ny-r-fa(니르파)라는 사실이다. 이 또한 헝가리인들의 아시아 쪽 조상들이 싸리나무 화살을 잘 만든 퉁구스계 민족이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말갈-여진인의 궁술은 적을 제압하는 데에 아주 훌륭한 보배였다. 중국의 정사(正史)에서는 진실을 은폐하고 있지만, 고구려 측 역사 기록에 따르면, 요동(遼東)전쟁 과정에서 당나라 태종(唐太宗)은 바로 말갈족의 독화살에 맞았고, 몇 년 뒤에 그 상처가 재발해서 죽었다고 한다.--- 13장 헝가리와 여진은 동족, 235쪽
16. ...후위(后魏)에서 수(隋)·당(唐)대까지 실존했던 실위(室韋)는 바로 한대의 선비족이다. 역사지명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시베리아(Siberia)의 어근 시베르(Siber)는 선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단언해온 것을 감안한다면 시베리아는 곧 ‘선비리아’인 셈이다. --- 14장 선비족과 그 언어, 246쪽
17. ...서방세계의 중국 북방민족 언어 연구는 18세기 상반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몽골·투르크·퉁구스의 3대 언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연구는 언어학 측면뿐만 아니라. 인류학적으로 세 민족이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지와 직결된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14장 -결론, 258-259쪽
18. ...중국과 서양에서는 진상도 제대로 모르면서 북아시아 민족들을 달단(??)으로 통칭하는 경향이 있다. 또 몽달(蒙?, 몽고 오랑캐)·만달(滿?, 만주 오랑캐)같이 정치적 편견으로 가득찬 말들까지 만들어냈으며, 손문(孫文)조차 “달단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기만 했을 뿐 정작 달단의 실체가 어느 족속에 속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는 사실 오래전부터 달단이 말갈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다. ...달단은 말갈의 후예로 본래 해(奚)와 거란의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가, 나중에 거란에게 공격당하여, 부족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거란에 복속하고, 일부는 발해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그 나머지 부락 중 음산에 흩어져 살던 자들이, 스스로를 ‘달단’으로 불렀다.--- 15장 몽골족의 퉁구스 혈연, 267-268쪽
19. 인류의 혈연적 융합은 이주과정에서 이루어진다. 16세기에 러시아의 코사크인들이 동진하기 훨씬 이전부터 유라시아 대륙 인류의 이동은 기본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루어져, 인도-유럽 인종의 거주공간은 축소되는 반면, 아시아 인종의 언어와 혈연은 날로 확장 일로에 있었다. 따라서 척박한 몽골 고원에서는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물과 풀이 풍부한 남러시아 초원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유목민족들에게는 이상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몽골 고원의 유목민족은 이 인류의 대이동에서 무한한 인적 원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동·서양 학자들은 한결같이 퉁구스계 민족 역시 이 대이동에 동참한 인류집단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거란에 퉁구스계의 반족(半族)이 있었고, 달단은 ‘말갈의 후예’였으며, 멸리걸 자체도 다름 아닌 퉁구스계 민족이었다. 이들이 서로 융합되면서 형성된 몽골족의 혈연과 언어 속에 퉁구스적 요소들이 진하게 남아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장 결론, 273-274쪽
20. ...프랑스의 티베트 학자 쉬타인(Rolf Alfred Stein)은 사천(四川)성 덕격(德格)·감자(甘孜)의 티베트족이 사용하는 칼·등자·버클의 동물 문양이 오르도스나 알타이 지역에서 출토된 금속 조각 기법과 흡사한 점에 주목하였다. 소련 고고학자는 우수리강 동쪽에서 범·사슴 형상의 금속 장식물을 발견하고, 이 같은 현지의 여진 예술을 알타이지역 스키타이(色族=사카-조선족) 예술이 동방으로 전래된 사례로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스키타이가 식신(息愼-조선)이며 스키타이 예술이 사실은 중국 북방민족 예술이 외부로 전파된 경우라는 점은 간과하였다.--- 16장 티베트족의 북방민족적 요소, 283쪽
21. ...여진·여직은 화하민족(華夏民族, 즉 중원민족 또는 한족)의 조상으로서, “곡 임금이 ···추자씨의 딸을 맞아들였다.”에 언급된 추자(??)씨가 바로 여직씨인 것이다. 우리는 조지국 역시 여진계 부락이며, 카스피해가 조지·안식 등의 여진계 부락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아랍인들이 카스피해를 “여진의 바다”-쥬르잔(조선)해로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18장 조지국은 여직의 나라 -결론, 313쪽
22. ...현대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1/3에 가까운 이란 남성이 몽골인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2/3을 상회한다- 고 한다. 이 결과는 몽골 인종이 페르시아를 수천 년 동안 통치했다는 증거이자, 그 역사를 적어도 기원전의 메디아-페르시아 왕조까지 소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대진국 사람들이 중국인과 비슷하다는 주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19장 대진은 로마제국이 아니다, 319쪽
23. ...중화제국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제국은 메디아인들을 필두로 한 북방민족의 침입과 통치를 오랫동안 받았다. 또한 ≪위략≫에 언급된 대진국은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성 및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지역으로, 바로 고대 메디아-페르시아 왕조의 발상지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이 퉁구스계 민족의 부락이었고,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남 코카서스 일대를 대진국으로 불렀던 점 등을 감안할 때, 메디아인은 아마 퉁구스계 민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장 결론, 331쪽
24.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게르만(German-독일 합스부르크왕조와 영국왕조의 조상은 몽골로이드)이라는 국명일 것이다. 독일인들조차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 국명은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시베리아는 ‘선비족의 땅’이고, 루마니아는 ‘로마인의 땅’이며, 같은 맥락에서 불가리아(부여)도 ‘불가르인의 나라’를 의미한다. 불가르(Bulgar)는 원래 훈족에 속한 부락 - 아틸라 이후의 훈(韓,檀)족은 동유럽으로 이주한 아시아계 유목민족의 통칭이다 - 이었다. ...불가리아의 역사에서는 그들의 선조가 추장을 ‘카안(Khan-韓,汗)’, 하늘의 신을 ‘텡그라(Tengra-단군)’라고 불렀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두 단어 모두 몽골어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고대 불가르인이 초기에 몽골어를 사용했다는 점만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셈이다. 불가리아인과 추와시인의 기원이 같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사실로서, 현재의 추와시어에서는 몽골어와 퉁구스어적 요소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가르는 막북 북방민족의 부락명 복골(僕骨, Vogul) 또는 실위(室韋)부락의 이름 파와(婆?) - ≪위서(魏書)≫를 참조할 것 - 로서, ...족명 복골·파와 또는 불가르에서 ‘복(僕)’·‘파(婆)’ 또는 ‘불(Bul)’은 어근이다. 때문에 ≪북사(北史)≫에서는 골(骨)·와(?)를 생략하고 아예 ‘발-실위(鉢-室韋)’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20장 동방에서 온 유럽민족, 340-343쪽
25. ...오늘날 바이칼 동쪽에 집거하고 있는 부리아트(Buryat-고조선이 44대 구물 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 바꿈) 몽골 부락의 경우도 ‘부리(Bury)’가 불리(不里), ‘-아트(at)’ 는 몽골계 부락명의 접미사여서 역시 복골족의 후예인 셈이다. 복골족은 일반적으로 투르크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리아트어가 전형적인 몽골어라는 점을 통해 고대 복골족이 원시 몽골어를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헝가리 고고학자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발굴된 4~5세기 훈족의 두개골은 상당수가 현대 부리아트인의 것과 유사하여, 그들이 아틸라의 훈족 대열에 동참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복골족이 서양으로 진출한 불가르 민족의 원류라면, 부리아트(부여)는 시베리아에 남겨진 그들의 종친인 셈이다.--- 20장, 344~345쪽
26. ...게르만(German)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원 전후 로마의 역사지리서인 ≪게르마니아≫에서는 알프스 산 이북지역을 ‘게르마니아(Germania)’로 기록하면서 ‘야만족의 땅’으로 풀이하였다. 독일의 역사·언어·고고학자들은 이 단어를 여러번 연구했지만 번번이 이렇다 할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20장, 348쪽
27. ...게르마니아(Germania)는 바로 키메리아(Cimmeria)의 변형된 발음이나 표기 형태였을 것이다.--- 20장, 350쪽
28. ...중원민족에게서 여직·여진이 지니는 의미는 돌궐이나 몽골의 경우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여진이 여러 차례 중원, 나아가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들이 중원민족 혈연의 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성씨인 공손(公孫)·고신(高辛)·우순(虞舜)은 바로 오손(烏孫)이자, 여진족의 핵심 씨족인 애신(愛新)이며, 그래서 여진족이 스스로를 ‘황금 겨래(金族)’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여진족의 현대적 학명인 퉁구스는 투르크어 속에 존재하는 구성(九姓), 즉 투구스(Tughuz)이다. 여직·여진의 실제 독음은 주르치·주르진(쥬신,쥬센=조선)이다.--- 22장 헝가리계 성씨로 푸는 여국과 귀국, 369쪽
29. ...우연한 기회에 TV 뉴스 자막에서 헝가리 총리 ‘쥬르차니’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곧 쥬르차니 페렌츠(Gyurcsany Ferenc)라는 그의 성명 전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헝가리인의 성명은 동아시아에서 그런 것처럼 성씨를 먼저 쓰고 이름을 뒤에 붙이게 되어 있다. 이 경우도 쥬르차니는 성이고 페렌츠는 이름이다. 그리고 헝가리어에서 cs는 ch(ㅊ)로 읽고 gy는 j(ㅈ)로 읽으므로, Gyurcsany는 쥬르차니로 읽혀지며, 이를 한자로 옮기면 주아차니(主兒?尼)·주리진을(朱里眞乙), 즉 여진니(女眞尼)로 전사된다. 헝가리 총리의 성씨가 여진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은 헝가리 민족의 선조가 극동에서 유래했다는 내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더해주었다.--- 22장, 370쪽
30. ...바이칼호 지역에 거주하던 고대 민족은 ‘츄디’로 기록되어 있다. ≪루시 연대기≫에도 관련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이 츄드족은 핀란드·에스토니아인의 조상이자, ≪게르마니아≫에 기록된 에스티이(Aestii)인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동방의 언어와 상관성이 있는 핀란드-오구르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츄드가 여직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기원전에 이미 동유럽까지 진출한 이들은 동부 슬라브 부락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혈연적 융합을 이루었으며, 이어서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한 노르만족과 함께 루시(러시아) 민족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22장, 371쪽
31. ...한자로 전사된 족명들은 상당히 복잡하게 뒤얽혀 있어서, 만약 한자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표기상의 문제점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동양 민족의 역사는 가닥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2장, 374쪽
32. ...구(九)·녀(女)·귀(鬼)가 독음상 서로 같다는 것을 알면 이와 관련된 역사·언어·문자상의 수수께끼들도 보다 쉽게 풀 수 있다.--- 22장, 376쪽
33. ...공자는 절대로 “성이 공씨.姓孔氏”였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공(孔)’이 이름인 공구(孔丘)에서 떼어낸 글자인 것을 그 내력을 모르는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성씨로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
중원에서 한어가 형성되면서부터 소수의 부락에서 고죽(孤竹)=>올자(兀者), 중산(中山)=>장손(長孫), 포고(蒲姑)=>복골(卜骨) 등으로 '융적(중국 서쪽의 夷 를 지칭)' 식 족명을 계승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국명이 단음절화되었다. 강남의 구오(句吳)가 오(吳)로 약칭되기 시작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공구(孔丘)가 “나면서부터 머리 정수리가 움푹해서, ‘구’라고 이름 붙였다.”라고 한 대목은 한 마디로 중국 역사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헛소리여서 논의할 것도 없겠지만, 공자 조부의 이름 백하(伯夏)는 북방민족의 족명 복화(卜和)이며, 공자 부친의 이름 숙량흘(叔梁紇)은 몽골어로 조선을 가리키는 족명인 숙량합(肅良合)이다. 이를 통해 공자 가문에도 “족명을 인명으로 차용하는” '융적' 식의 작명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3장 고대 중원 인명의 북방민족적 특징들, 390~391쪽
34. ...≪삼국지(三國志)≫<위서·여포전(魏書·呂布傳)>에서는 그가 “오원군 구원 사람으로, 용맹하여 병주에서 벼슬을 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오원(五原)은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의 중심지대-하투(河套, 오르도스)·음산(陰山) 일대로서, 한대에는 남·북 흉노가 격전을 별였던 곳이다. 또 병주(幷州)는 훗날의 태원부(太原府)이다. 따라서 넓게 보자면 여포는 오랑캐,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흉노 출신으로서,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산서(山西)성에서 복무하던 몽골족 출신의 용병이었던 셈이다.--- 23장, 399쪽
35. ...이 책은 중국에서의 역사언어 연구의 실증화를 위한 노력의 산물로, 상고시대 중원인과 중국 북방민족의 인명에 대해 초보적인 비교연구를 시도한 것이어서 완벽한 이론체계를 정립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언어 간의 상호비교를 통해 얻어진 데이터들을 나름대로 고찰·정리해놓았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23장 결론, 402쪽
36. ...중국 학술계는 오로지 아는 데에만 집착할 뿐 깨우치는 데에는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청산도 어렵지만 발전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껏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라고는 쓰레기뿐이었다. 그러니 그 쓰레기 속에서 아무리 파헤치고 쏟아내고 떠들어 대고 한다 해도 ‘썩은 학자朽儒’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24장 실증적인 중국 역사학을 위하여, 411쪽
37. ...언어학은 인류학의 중요한 분야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언어학자들은 상당수가 문자학의 노예 노릇만 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내 여러 민족의 시원을 실증적으로 다루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시도되었다.--- 24장, 412쪽
헝가리 조상이 말갈족? [연합뉴스] 2010.01.14
헝가리인의 조상인 마자르족이 동방에서 왔다는 가설은 널리 통용된다. 헝가리 인명은 어순이 '성씨-이름' 순으로 배열되고 주소를 쓸 때 국명과 도시부터 시작해 마지막에 수신인을 적는 등 동양인과 사고방식이 흡사하다.
물리학 박사로 20여년 간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인문학 연구에 매진한 중국 출신 주쉐위안은 수년간 발표한 논문 24편을 묶은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우리역사연구재단 펴냄,문성재 옮김. 431쪽. 2만5천원)에서 헝가리 민족의 원류인 마자르족은 말갈족이고 진시황은 여진족이었다는 등의 가설을 통해 흥미로운 역사해석을 시도했다.
저자는 마자르족의 족명ㆍ인명ㆍ지명 및 기본어휘를 분석해 헝가리인의 조상이 퉁구스계에 속한 말갈(靺鞨)족이며 7세기 중반의 요동 전쟁 및 고구려 멸망으로 촉발된 수백 년에 걸친 연쇄 작용으로 헝가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중국 북방민족들은 족명을 인명으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갈이나 마자르와 관련이 있는 인명이 적지 않다면서 금대 여진족의 마길(麻吉)ㆍ마산(麻産)이나 요대 거란족의 매주(買住)ㆍ말척(抹尺), 원대 몽골족의 마찰(麻察) 등을 전형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저자는 또 화살이 헝가리에서는 'nyl(닐)'인데 만주어의 'niru(니루)'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퉁구스계인 숙신(肅愼)인들이 자작나무의 일종인 싸리나무로 된 화살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자작나무가 헝가리어에서는 화살나무라는 뜻의 'nyrfa(니르파)'라는 것은 헝가리인들의 아시아쪽 조상이 싸리나무 화살을 잘 만든 퉁구스계 민족이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그는 '신당서(新唐書)' 가운데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에 나오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당 태종의 원정 때 북부 말갈족과 고구려는 연합전선을 구축했지만, 나중에 연맹이 와해되고 말갈 부락도 고향을 등지면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00여년 후 유럽에 나타나는 마자르족은 바로 이때 서쪽으로 이동한 말갈족의 후예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책 제목인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장에서는 진(秦)나라는 서주(西周)시대까지만 해도 한족이 아닌 서융(西戎)에 속한 일개 부락에 지나지 않았다면서 진나라 왕실은 한족의 언어와 몽골어를 번갈아 구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진시황은 여진족, 헝가리는 말갈족…
[뉴시스] 2010.01.16
오래 전부터 진(秦)나라가 융적(戎狄)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융적은 고대 중국인들이 이민족을 얕잡아 부르던 명칭이다.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따위와 마찬가지 호칭이다.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는 진시황은 여진족이었고 헝가리 민족의 원류인 마자르족은 말갈족이었다는 등의 가설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물리학 박사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이용, 인문학 연구에 매진한 중국 출신 주쉐위안(68·朱學淵)이 수년간 발표한 논문 24편을 묶었다. (문성재 옮김, 431쪽, 2만5000원, 우리역사연구재단)
지은이는 진나라는 서주(西周) 시대까지만 해도 한족이 아닌 서융(西戎)에 속한 일개 부락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들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동족인 주변의 서융 부락들이 주나라를 상대로 빈번하게 약탈을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과 달리 항상 변함없이 주나라 왕실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뒷날, 충성심에 감격한 주나라 왕실은 진나라를 정식 제후국으로 책봉하고 이 제후국은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중원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한편 인재들을 초빙해 풍속을 바꾸고 부국강병에 전력하더니 결국 일거에 천하통일의 대업까지 이룩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진나라 왕실은 한족의 언어와 몽골어를 번갈아 구사했으며 진시황 역시 몽골어를 구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헝가리의 조상 마자르족이 말갈(靺鞨)족이라는 가설도 제시한다. 마자르족의 족명·인명·지명 과 기본어휘를 분석, 헝가리인의 조상이 퉁구스계에 속한 말갈족이라고 분석한다. 이어 7세기 중반의 요동 전쟁과 고구려 멸망으로 촉발된 수백년에 걸친 연쇄작용으로 헝가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짚는다.
‘진시황은 여진족’ 한족 통설에 도전
[중앙일보] 2010.01.20
현대 중국에서 새롭게 뜬 역사 인물 1호를 꼽으면 단연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처음 통일했다. 현대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 이미지를 요청하고 있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영웅’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다.
그 같은 ‘진시황 영웅 만들기’에 반기를 든 책이 나와 주목된다.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주쉐안 지음, 문성재 옮김, 우리역사연구재단)이다. 도발적 제목이다. 진시황을 중화문명의 주류인 한족으로 당연시하는 통설에 도전했다.
2006년 대만, 2008년 상하이에서 나온 중국어 원서 제목은 『秦始皇是說蒙古話的女眞人』. 한국어 번역본은 원서 제목을 그대로 풀어냈으니, 없는 내용을 창작한 것은 아니다. 저자 주쉐안(朱學淵·68)이 구이린(桂林)에서 태어난 토종 중국인이고, 미국 몬타나주립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일종의 ‘제도권 학문’을 섭렵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자연과학도인 저자는 개인적으로 헝가리 민족의 시원에 관심을 가졌고,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의 기원으로 관심을 확대했다. 2002년 펴낸 『중국 북방 제 민족의 원류』와 함께 이 책은 저자의 ‘오래된 외도’의 결실이다.
저자는 비교언어학 방법을 도입했다. 저자가 볼 때 인문학에서 가장 자연과학과 닮은 분과가 언어학이다. 언어에서도 문자보다 소리의 변화에 특히 주목했다. 그는 한자의 소리 변천을 통해 고대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다.
저자는 중국 북방민족이 중원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흔히 오랑캐로 불렸던 북방 민족의 근원을 만주 여진족에서 찾았다. 이 논리대로라면 중원의 주인이었던 북방 민족들은 중원의 안방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오랑캐로까지 몰린 셈이 된다.
이 책은 일견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 역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진시황은 반드시 한족이어야만 ‘통일 영웅’이 되는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르코지가 중국 북방민족의 후예?
[연합뉴스] 2009.09.25
달라이 라마 대우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중국과 마찰을 빚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 북방민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재미 중국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중국의 북방 역사학자 주쉐위안(朱學淵)은 대만에서 발행되는 '역사월간' 9월호 기고문을 통해 사르코지 대통령이 중국 북방민족인 여진족의 후손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황하유역에 출현했던 '사오하오'족의 후예가 된다고 주장했다.
주쉐위안은 이 기고문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성(姓)을 근거로 조상을 추적하면 어렵지 않게 그가 유럽으로 건너간 중국 북방민족 후손임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사르코지 대통령 부친인 팰 사르코지(Pal Sarkozy)는 헝가리 귀족 출신으로, 그의 헝가리식 풀 네임인 '나기-보차이 사르코지 팰(Nagy-Bocsay Sarkozy Pal)'을 해석해보면 그가 기원전 황하 일대 중원(中原)에 출현했던 사오하오족에서 분화돼 나온 여진족 후예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나기(Nagy)'는 헝가리어로 '다(大)'를 뜻하고 '보츠(Bocs)'는 여진족의 성씨(姓氏)인 '푸차(浦察)'를 지칭하기 때문에 '나기-보츠(Nagy-Bocs)'는 고대 여진족의 촌락이었던 '다푸차(大浦察)'를 가리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의 해석대로라면 사르코지 대통령의 부친인 팰 사르코지의 풀 네임은 '다푸차 마을 사르코지 집안의 팰'로 풀이 될 수 있다.
그는 또 팰 사르코지의 어머니, 즉 사르코지 대통령의 조모인 '차포디 토트 카타린(Csafordi Toth Katalin)'의 친정 성인 '토트'는 헝가리 최대 성씨로, 여진족인 '퉈터(拓特)' 씨족의 헝가리식 발음이며 차포디는 이 씨족의 근거지였던 촌락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고 있다.
토트 씨족이 터를 잡았던 촌락 차포디의 지명은 중국 위서(魏書)에 등장하는 여진족 인물 '션베이치푸(鮮卑乞伏)'의 '치푸'에서 기원 됐다는 게 주쉐위안의 해석이다.
그는 이를 근거로 팰 사르코지 선조는 유럽에 진출해 헝가리의 '다푸차'와 '차푸디'에 터를 잡았던 여진족의 후손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는 중국의 북방민족 가운데 지금도 사르코지와 비슷한 발음의 성씨가 있다는 점도 사르코지 대통령이 중국 소수민족 후예라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신장(新疆)의 시보(錫伯)족 가운데 '싸구(薩孤)'라는 성이 있는데 고대 여진족들은 습관적으로 '즈(子)'를 붙여 '싸구즈'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헝가리로 넘어가면서 사르코지로 불리게 됐다는 것.
헝가리 성씨 가운데 사르코지와 발음이 유사한 '사르호(Sarho)' 성씨 역시 중국 역사서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등장하는, 기원전 중국 황하유역에 살던 '사오하오' 성씨에서 유래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고대 사오하오 씨족의 후손인 여진족이 중국의 서역을 통해 유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사르코지와 사르호라는 성으로 분화됐고 이들 가운데 헝가리에 터를 잡은 사르코지 일가에서 프랑스의 대통령이 배출됐다는 주장이다.
<기획탐구> 중국, 단군신화까지 노린다
[연합뉴스] 2007.11.07
관변학자 "황제(黃帝)집단의 곰토템서 기원" 주장 / 모든 동북아 민족은 황제족의 후예"식 논리 일관
단군신화 등 참조 잃어버린 여신신화 복원도 주장 / 국내학계 "곰문화는 고아시아족 것..황제와 무관"
동북아지역 여러 민족의 전래 곰토템신화는 중국인들의 공동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黃帝)집단에서 기원했으며 단군신화의 뿌리도 황제집단의 곰토템이라는 주장이 중국 관변 연구기관의 한 신화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장본인은 중국 국무원 산하의 종합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 비교문학연구중심 주임 겸 문학연구소 교수인 예수셴(葉舒憲.53). 중국신화학회 회장, 중국문학.인류학연구회 부회장, 중국비교문학학회 상무이사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신화를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응"으로 폄하한 동북공정, 신화ㆍ전설시대를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 고대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요하(遼河) 일대를 황제의 판도로 못박으려는 요하(遼河)문명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은 현재 비교문학연구소를 통해 소수민족의 신화 및 구비문학 연구를 중점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고고연구소와 역사연구소,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등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 각종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 "황제집단 곰토템이 단군신화의 뿌리" = 예수셴은 최근 출판한 저서 '곰토템(熊圖騰)-중화조선신화탐원(中華祖先神話探源)'에서 전통적인 문자훈고, 출토된 갑골문.금석문, 여러 종족의 민속은 물론 정식 고고발굴 및 민간의 구비전승 등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며 곰토템의 황제집단 기원설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곰토템은 유웅씨(有熊氏)라는 별명을 가졌던 황제집단에서 시작돼 우순(虞舜) 시대와 하(夏)나라 시대로 이어졌고, 곰을 조상으로 삼는 신화는 전욱(顫頊)을 거쳐 진(秦)나라, 조(趙)나라, 초(楚)나라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승됐다.
또 "(황제족의) 곰토템은 고대 퉁구스인과 가까운 종족군(種族群)의 전파작용에 의해 조선족(한민족)의 옛 기억 속에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웅모생인(熊母生人)신화를 남겨놓고 있다"는 것이다.
곰토템의 요소가 다분한 단군신화의 뿌리는 황제족의 곰토템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인 셈이지만, 그 허구성은 중국의 고대 문헌이나 구비전승 등에서 황제족의 곰토템과 관련한 신화나 전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을 보면, 탁록(琢鹿)대전에서 치우(蚩尤)를 물리친 황제 헌원(軒轅)은 오제의 처음이고, 고양씨(高陽氏)라고도 하는 전욱은 황제의 손자, 요순(堯舜)시대의 순임금을 일컫는 우순은 전욱의 6세손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북공정에 참여한 요하문명론의 주도자인 중국고고학회 상무이사 궈다순(郭大順)도 황하문명보다 앞서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홍산문화를 황제족과 관련시킨 바 있으나 단군신화를 직접적으로 황제족의 곰토템으로 연결시키지는 않고 홍산문화 지역이 황제족의 영역이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민족을 황제족과 연결시키려는 중국 학자들의 논리는 "한반도의 곰-호랑이토템 숭배라는 점에서 볼 때, 한민족 문화의 주체부분은 그 기원이 중국 남방의 이어(彛語)계 민족 문화와 같고, 그 공동선조가 황제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이것이 한민족 토착문화의 진정한 뿌리"라고까지 비약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민족문학연구소 북방실 연구원 위안리<苑利>)
그러나 단군신화의 무대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홍산문화 지역의 여러 유적.유물 발굴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신석기인의 곰숭배 문화는 황제족의 것이 아니라 퉁구스족이 가져온 2만-3만년 전의 고아시아족 것으로서, 황제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게 국내 학자들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 "단군신화는 황제족과 한민족의 연결고리" = 예수셴은 일부 학자들의 '중원(中原) 퉁구스인 가설'과 '홍산(紅山)문화 황제족문화 가설'을 동원, 이들 가설이 단군신화의 발생 배경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즉, 황제족을 비롯한 중화문화의 주류민족과 상고시대에 중원 및 북방에서 활동했던 퉁구스인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동일한 주체'였고, 따라서 황제족과 곰토템의 관계, 단군신화와 곰의 관계를 동일한 퉁구스인들의 문화원류 범위 내에 포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곰토템 신앙과 신화의 기술 내용은 황제-화하(華夏)민족을 조선-한민족의 상고시대 문화기억과 연결시켜 주는 공동의 끈"이며 "이는 의외일지 모르지만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중원 퉁구스인가설'은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물리학자 주쉐위안(朱學淵)이 저서 '진시황(秦始皇)은 몽골어를 한 여진인(女眞人)이었다'에서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제시한, "진나라 혈통의 연원은 퉁구스인"이라는 내용이다.
또 '홍산문화 황제족문화 가설'은 요하를 중심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동부와 랴오닝(遼寧)성 서부 일대의 5천-6천년 전의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가 황제족의 것임을 주장하는 내용으로서, 중국은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에 의해 이를 통설로 굳히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셴은 홍산문화의 핵심 유적 중 하나인 랴오닝 우하량(牛河梁) 여신묘(女神廟)에서 여신상, 곰 아래턱뼈, 곰 발톱과 곰 머리로 추정되는 진흙 소상의 파편이 출토되고, 인근 적석총 등에서 옥으로 만든 곰 모양의 '옥웅룡(玉熊龍)'이 발견됐다는 점도 곰토템 황제족 기원설의 입증자료로 제시했다.
'동북아의 곰문화와 곰신화'를 쓴 이정재 교수(경희대 국문학과. 민속학)는 단군신화 등을 통해 드러나는 한민족의 곰토템과 황제족의 곰토템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으나 그 기층은 고아시아족과 고아시아문화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즉, 일부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고아시아족의 곰문화와 황제족의 곰토템이 나중에 연결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기반은 어디까지나 고아시아족과 고아시아문화에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단군신화로 황제족 곰토템신화 '복원'? =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초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동물 모양의 옥제품이 돼지를 닮은 것으로 보아 '옥저룡(玉猪龍)'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특징이 곰에 더 가깝다며 '옥웅룡'으로 바꾸고 웅룡이 용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예수셴은 이 옥웅룡을 또 하나의 증거사례로 들어, 중국의 고문헌에는 황제족의 곰토템과 관련된 기록이 없지만 그 실마리는 남아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참조하면 황제족 곰토템신화를 복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구두로 전승되고 있는 중국 만주-퉁구스어족의 곰토템신화와 한국의 단군신화, 일본 아이누족 및 미국 인디언의 유사 신화를 참조한다면 황제족 곰토템신화의 대체적인 줄거리 복원이 가능해 오래 전에 잃어버린 문화유산이 다시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함께 "발생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화하족의 토템동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용은 곰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면서 "신석기에 속하는 홍산문화 우하량 여신묘의 발견으로 용의 기원 연구가 참신성을 띄게 됐다"고 평가했다.
우하량 유적 등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홍산문화 시기의 "웅녀신 숭배와 웅룡 덕분에 부계제도 확립 이후 중원문화가 잃어버렸던 여신신화의 전통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최근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을 펴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는 이와 관련, 홍산문화 만기(기원전 3500-기원전 3000년)의 주도세력을 곰토템 집단이자 그 이전 모계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보면서 황제족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단군신화 웅녀족의 후예였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우하량유적으로 대표되는 홍산문화 만기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로서 아직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초기 부계사회'였으나 황제 신화를 보면그 후손이 모두 남성으로 이어지는 등 이미 고도화한 부계사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만일 홍산문화의 곰토템이 황제 유웅씨와 관계된다면, '부계사회의 황제족'은 그보다 이른 '초기 부계사회인 홍산문화의 후예'가 되고, 그럴 경우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족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곰족, 즉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족의 후예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중국 신화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곰토템 신화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민족은 조선족, 다우르(達斡爾)족, 허쩌(赫哲)족, 오르존(鄂倫春)족, 에벵키(鄂溫克)족, 몽고족, 위구르(維吾爾)족 등 12개에 이른다.
◇ 중국 학계의 곰토템 논란 = 예수셴은 지난해 발표한 한 논문에서 염제(炎帝)와 황제를 공동조상으로 받들고 용을 으뜸 토템으로 삼는다 하여 '염황자손', '용의 후계자(龍的傳人)'로 자칭하는 중국인들의 중요한 일부분은 '곰의 후계자(熊的傳人)'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하량유적을 포함한 북방에서의 고고학 발견을 통해 용의 원형이 돼지, 사슴, 곰 등 실제 동물들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그 가운데 황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동물은 우하량 여신묘 발굴을 통해 상고시대인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곰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언론에 따르면,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 류칭주(劉慶柱)는 예수셴 등 일부 학자들이 우하량 여신묘에서 발견된 일련의 실물을 증거로 곰토템설을 주장하고 있는 데 대해 동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류칭주는 현재 중국 고고학계의 우하량유적지 발굴 및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잘한 자료'에 의존해 황제족 곰토템설을 주장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면서 "일부 학자들은 앞서 홍산문화를 염제(炎帝)문명이 남긴 것이라고 추정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곰과 용의 관계에 대해서도, 옥웅룡이라는 한가지 유물만을 증거로 용의 원형이 곰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으며, 만약 '곰-용일체설'이 성립되려면 곰이 어떻게 용으로 형상화했는지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 홍산문화.우하량유적.요하문명론 = 우하량 유적지가 대표적인 광의의 홍산문화는 일반적으로 네이멍구자치구 츠펑(赤峰)시 홍산의 신석기 유적지 외에 이와 유사하거나 같은 같은 계통의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는 여러 문화유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소서하(小西河)문화(기원전 7000-기원전 6500년), 흥륭와(興隆窪)문화(기원전 6200-기원전 5200년), 사해(査海)문화(기원전 5500-기원전 5700년), 부하(富河)문화(기원전 5200-기원전 5000년), 조보구(趙寶溝)문화(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 협의의 홍산문화(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 소하연(小河沿)문화(기원전 3000-기원전 2000년), 하가점(夏家店)하층문화(기원전 2000-기원전 15000년) 등이 포함된다.
중국은 랴오닝성 서부 링위안(凌源)시와 젠핑(建平)현 접경지역 우하량에서 발굴된 여신묘와 제단, 적석총 등을 일컫는 우하량유적에 대한 발굴 및 연구 작업을 본격화하면서 그 일대를 자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발상지로 자리매김하려는 이른바 요하문명론 확립에 주력하고 있다.
요하문명론은 요서지역에서 기원한 모든 고대 민족이 역사시대뿐만 아니라 신화.전설시대부터 중화민족의 일원이었고 황제족의 후예라는 논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고, 일각에서는 우하량 여신묘, 제단, 적석총 등 각종 유적지에서 발굴된 각종 웅룡과 곰의 아래턱 뼈 등을 근거로한 곰-용 일체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천여년 동안 지속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당시의 사회형태가 황제의 부계씨족사회보다 앞서는 모계씨족사회의 전성기로서, 시기적으로 황하문명보다 앞서 '중화문명의 서광'을 비쳤다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적지 않은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기의 사람들이 청동기 주조기술을 갖고 있었는지, 도시와 문자가 있었는지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해 증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가 '문명시대'에 진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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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텡그라(Tengra).탱그리,당가르,딩기르(수메르) 등등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달리 불려지는 인물의 명칭은 '단군'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참조: 주쉐안의 책은 절판 되어 구입 할 수 없습니다.
주)이해를 돕기 위해 파란색으로 주석을 달았습니다.
환(한=빛,처음)국 12연방- 신시 배달국(구리국)-고조선-대부여-북부여,동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계보
덧붙여 화하족이라고 하는 중국사람들은 없습니다.태우의 환웅의 막내 아드님이신 태호복희님이 북동쪽 배달국에서 중원으로 오셔서 陳나라를 세우시고 이란성 쌍둥이,또는 이복 남매로 알려진 여와님이 서방으로 가셨습니다.태호복희님에 대한 기록은 아시아에 많은 기록이 있지만,여와님은 기록은 아시아에 기록이 없습니다.서방에서 신(고등문명을 전달한 분)으로 추대받으셨고 유럽과 중근동에 신으로 남으셨습니다.훗날 14대 치우천황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리국이라 불린 세력들이 중원의 옥토인 양자강과 황화 사이로 오셔서 정착하셨습니다.중국의 시조라 하는 황제 헌원,혹은 공손 헌원은 배달국에서 갈라져간 지류 입니다.
또한 현재의 일본이 백제와 한반도 이주인이 세운 나라가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고조선 때에도 일본으로 많이 이주하였습니다.지금의 큐수에는 단군님과 관련된 지명과 사당들이 많이 있습니다.일본이 이를 감추기 위해 명칭들을 많이 바꾸었지만 고조선 때에 일본을 정벌하러 간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사실 단일민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단군조선을 구성한 민족들이 여러부족이었고(9환족 5인종) 다민족의 연방국가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과학적으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이주경로를 밝혀 증거를 보면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12연방국가와 정확히 맞아 들어 갑니다.환국이 있었던 부족들이 소유했던 여성에게만 전해지는 미토콘드리아 dna와
남성에게만 전해지는 y염색체에 숨겨진 dna의 분포과정을 보게되면 중앙아시아시아 환국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유전자풀이
가장 다양하게 나온다는 겁니다.중앙아시아,유럽,중근동 등,그리고,유전학적 분석으로 확인된 증거,그리고 우리의 환단고기에 기록된 기록,그리고 환국의 구성원이었던 현재의 국가들에 남겨진 이 3가지 기록들은 정확히 맞아 들어 갑니다.고로 환국12연방 국가는 있었고 이를 계승한 고조선이라는 나라의 중심점에 계셨던 단군은 환국의 구성국가였던 민족과 나라에서는 모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환국12연방-신시 배달국-고조선이 실존했던 증거 3가지
1.환국12연방에 대한 실존 기록은 환국 구성민족이었던 국가에 기록으로 아직도 남겨져 일치한다는 점
2.유전자 분석으로도 중앙아시아에서 동서로 이주한 유전자분포도가 우리 고서에 이동설에 대한 기록과 일치 하고 있다는 점
3.환국,,훗날 단군께서 배달국의 흩어진 9환족을 통일하고 그 후손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단군님을 추대하여
기록에 남겼다는 점.
(중앙아시아,유럽,중근동 국가들에 남겨진 그리고 우리의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에 대한 명칭의 기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