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 8년 5월 6일자
(재 통화 흥진 부영사 발신, 재만 무등(武藤) 대사 수신, 보고 요지)
국민부의 회의에 관한 건
지난달 1일 통화현 제5구 강전자(江甸子)에서 조선독립단 국민부 소속 혁명군 중대장으로서 활약하고 있던 강옥성(姜玉成) 이하 4명을 체포한 후 불령선인 측에서는 4월 25일 환인현 북전자(北甸子)의 뒷쪽 산 속에서 국민부 장교회의(將校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1중대장 강옥성의 후임(後任)의 선임(選任), 기타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제1중대장 후임에는 조화선(趙化善)을 임명하여 진용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당일의 결의 기타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당일의 주요한 참가자 성명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高而虛)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박대호(朴大浩)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정응선(鄭應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이영걸(李永杰)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김상규(金相奎)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김백파(金白波)(동이[東耳])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김고석(金沽錫)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윤일파(尹一波)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심용준(沈龍俊)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조화선(趙化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김보국(金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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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부 중앙 집행 김두칠(金斗七)
국민부 중앙 집행 김원(金員)
국민부 고문 양하산(梁荷山)
국민부 총사령 양세봉(梁世奉)(서봉[瑞鳳])
2. 결의 사항
우선 제1중대장 강옥성이 체포됨에 따라 후일 대장을 결정하고 다음에 담임 구역을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는데, 기타 더 구체적인 사항은 후일 재회하여 결의하기로 하고 산회하였다.
총사령 양세봉(환인현 북전자 통화현 삼량유수[三樑楡樹] 방면)
고문 양하산(환인현 백룡배[白龍背] 부근)
제1중대장 조화선(동현 북전자[北甸子])
제2중대장 최윤규(崔允珪)(유하현 방면)(제6중대로부터 전임)
제3중대장 심용준(무송현[撫松縣]방면)
제4중대장 박대호(관전현[寬甸縣] 하류하[下流河] 방면)
제5중대장 문학빈(文學彬)(길림 방면)
제6중대장 정현석(鄭現錫)(환인현 백용배[白龍背])(신임)
제7중대장 미상
이 중 제6중대는 유격대를 변경한 것이고, 제7중대는 별동대를 변경한 것이다.
또한, 불령단의 취지 목적은 동일하나 내용은 4파로 분립(分立)된 상태에 있다. 즉
(1) 총사령 양세봉
(2) 고문 양하산
(3)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
(4) 길림(吉林) 방면에 반거 중인 제5중대장 문학빈의 4두목을 중심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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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각파별 내용
(1) 총사령 양서봉=후에 梁世奉 1934년9월에 환인현에서 사망
(가) 김백파(金白波 ; 동이 [東耳] 참모부 외교 부장=후에 金學奎 광복군
(나) 김석(金錫) 모집대장(募集隊長)
(다) 김보국(金保國) 양세봉 호위대장
(라) 윤일파(尹一波) 참모장=후에 1937년 변절
(마) 최윤규(崔允珪) 제2중대장=후에 崔允龜 1936년 혁명군 제2사령관 = 동북인민혁명군 연대 한인독립사 사령 동북항일연군 제1군 대대장겸 총참모장 1940년2월15일 길림성 몽강현에서 양정우를 엄호하다 전사.
(바) 심용준(沈龍俊) 제3중대장
부하 도합 1백 2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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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문 양하산=후에 양기하(梁基瑕)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1932년 관전현에서 일.만 군.경과 격전하다 전사.
(가) 박대호(朴大浩[虎]) 제4중대장=후에 부사령 1936년 혁명군 조직부장 = 동북항일연군 연대 한인독립사 참모장 동북항일연군 제1군 부관장 1943년 동북사령으로 광복군과 도모하다 1947년 사망.
(나) 조화선(趙化善) 제1중대장=후에 1936년 혁명군 제3사령관 = 동북인민혁명군 연대 동북항일연군 제1군 부관장.1942년 사망설
(다) 이영걸(李永杰) 제1중대 제1소대장
(라) 정응선(鄭應善) 제1중대 제3소대장
(마) 김상규(金相奎) 제1중대 제2소대장 겸 김두협(金斗俠) 구장(區長)
(바) 정현석(鄭現錫) 제1중대
(사) 정재명(鄭在明) 양하산 호위대장
(아) 김두칠(金斗七) 외교집행위원=후에 金雲亭 혁명군 1936년 외교위원장 겸 참모장 1938년 체포 1940년 보석으로 무순감옥에서 나와 1946년 사망
(자) 이춘호(李春浩) 김두협 방면의 의금(義金) 징수 특별구장
부하는 도합 58명
(3)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후에 崔容成 1937년 체포 사살
비서과장 김해산(金海山) 외 부하 10여 명
(4) 제5중대장 문학빈(길림 방면 반거)=후에 변절
부하 40여 명을 가지고 길림(吉林) 방면을 횡행하면서 양세봉의 지휘를 받지 않고 자유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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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기
무기는 각소(各所)에 은닉해 있으나 일본군 및 만주 국군의 경계가 엄중하기 때문에 확실한 수량 조사도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임시 총사령 양세봉에게 일임하고 있다.
5. 혁명군의 계통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각현 집행위원장(현지사)-선전대장-집행위원(촌장)-둔장(屯長) 구장
혁명군 총사령
각 중대장-소대장
참사 참의
6. 혁명군의 행동
주간에는 양민을 가장하고 부대의 행동은 모두 야간에 행한다. 소대장은 부하의 행동에 대하여 전 책임을 지고 이의 지도에 임하며, 중대장 이상의 간부는 필요할 때 각지에 산재하고 통신망에 의하여 적절히 지휘하는 조직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로 큰길을 피하고 작은 길을 왕래한다.
7. 통신 연락법
통신 연락에는 봉서(封書)를 사용하되 도착 지명을 기입한 위에 민중을 이용하여 한 곳에서 딴 곳으로 체전식(遞傳式)으로 통신하며 일반 조선인 민중에게는 절대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위령을 행하게 하여 극비밀리에 실행할 것.
8. 경계법
각 중대장의 의견 방침에 일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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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무기 및 탄약 구입법
무기는 비적(자위군) 수령 왕봉각(王鳳閣)으로부터 부족분을 보충할 수 있도록 협의할 것.
10. 복장
무기를 휴대할 경우에는 중국식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지 않을 때는 중국옷 또는 조선옷을 착용할 것.
11. 경비 징수법
경비는 모두 전례에 의하여 빈부에 따라 극빈자에게는 연 1원, 중등 정도에게서는 연 3원, 상등 정도에게서는 연 5원씩의 비율로 징수할 것.
12. 일본 기관과의 연락자 처치법
(1) 일본군·영사관·헌병대·조선인민회 등에 연락하는 사실을 탐지하였을 경우에는 그 가족을 전멸할 것
(2) 한번 통화성내에 출입한 자는 이를 체포하여 엄중 취조한 위에 처형할 것.
13. 비적과의 관계
자기(불령단)의 세력이 박약할수록 비적단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원만히 협의하여 모든 사무를 처리할 것.
소화 8년 5월 17일
(재 봉천 봉곡(蜂谷) 총영사 발신, 재만 무등(武藤) 대사 수신, 보고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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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의 최근 상황
동변도(東邊道) 지방에 있어서의 조선혁명당의 최근의 상황에 관하여 당관경찰서에 귀순한 동 당원 지영규(池永奎) 및 전환(全桓)에 대하여 조사한바,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기]
1. 조선혁명당의 조직, 기타(별표와 같음)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는 소화 5년 봄에 통일되어 국민부(國民府)라고 칭하게 되었는데, 국민부는 원래 우리 행정권이 직접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있어서의 조선인의 자치 기관으로서 탄생한 반일적 단체이다.
그런데, 그 지방부 이하에 있는 자로서 무력 행동을 하는 자가 많아 이 때문에 국민부의 규율이 차츰 문란해지려 하고 있었다.
이에 소화 5년 여름 현하죽(玄河竹) 등의 제창으로 현재처럼 조선혁명당이라고 개칭하고, 이를 자치부(自治部)와 혁명부(革命部)로 나누어 자치부는 종래의 국민부로 하여금 이를 담당시키고, 혁명부는 무장 부대를 조직하여 무력 행위를 담당시키기로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혁명당내에 당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위원 33명으로써 조직하여 당 최고 결의 기관으로 한다.
기타 심사위원회 및 선전·조사·교양·재산·서무·외교·조직·교통의 8부를 두고 심사위원장 및 각 부장은 모두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써 충당한다.
심사위원회는 위원 9인으로써 조직하고 당내 각 기관의 행위를 감사(監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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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부는 혁명 사상의 선전 사무를 행한다.
조사부는 각 지방의 실정 조사를 명한다.
교양부는 당원의 교양 사무를 행한다.
재정부는 일반 회계 사무를 행한다.
서무부는 일반의 사무를 행한다.
외교부는 당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행한다.
조직부는 당 조직의 연구 및 조직 사무를 행한다.
교통부는 통신 사무를 담임한다.
(2) 조선혁명당 아래에 국민부 및 혁명군을 둔다.
(가) 국민부는 자치위원회 및 총무·지방·공안·교양·재정·외무·교통의 7부 및 중앙재판소를 둔다.
(나) 혁명군·군사위원회·군사령부 및 중대를 둔다.
(다) 자치위원회는 위원 15인으로써 조직하고 국민부에 있어서의 지방 자치에 관한 결의를 한다.
(라) 군사위원회는 위원 21인으로써 조직하고 당의 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토의하고, 당의 결재를 얻어 혁명군으로 하여금 실시하게 한다.
(3) 지방 및 구(區)에 지방의회 및 구의회(區議會)를 두고 각각 위원 3인으로써 조직한다.
위원의 선거는 의회에서 이를 행한다.
지방의회 의원은 호수(戶數) 50호로부터 1인, 구의회 의원은 호수 10호로부터 1명을 선거한다.
2. 최근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조선혁명당(군민부)의 구체적인 활동 상황
(1) 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작년 구(舊) 1월 19일, 주요 인물인 이호원(李浩源;위원장)·김보안(金保安;위원)·장세용(張世用;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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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이 통화 영사관에 체포된 후 별로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소화 5년 혁명당 조직 당시는 봉천·길림·흑룡강(黑龍江) 각 성에서 활동하여 당원 7,8명을 획득하였다.
(2) 국민부
반일 조선인의 자치 기관인 국민부도 작년 4월 통화 사건 후로는 본거지를 각지로 이동하여 소관 각지의 통제를 도모하려 하여 의무금의 징수 및 각지의 정보 수립 등에 힘썼으나 여의하지 않아 거의 사무를 중지한 상태에 있다.
(3) 혁명군
혁명군은 자치 단체인 국민부와는 항상 다른 행동을 취하였는데, 특히 작년 10월의 동변도(東邊道) 토벌 후로는 거의 연락할 기회가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최근의 행동은 판명되지 않았다.
작년 5월경, 동변도에 반거하고 있던 당취오(唐聚五)와의 사이에 연락을 취하여 당(唐)이 발행한 지폐(동 지방은 모두 그 지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약 3만 원(元)을 받아 동북 의용군의 특무대로서 특무대사령부를 두었으며 양세봉이 사령이 되었다.
그는 부하 약 5백 명으로써 특수 행동, 즉 철도 폭파·일만 요인 암살·정보 수집 등을 맡기로 하고 위 금액을 받았으나 전기한 행동을 감행한 사실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일본군 및 만군(滿軍)의 상황을 정찰하고 그 정보를 제공한 사실은 적지 않다고 한다.
3. 근거지
혁명당 본부는 유동적 단체로서 그 소재지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개 신빈·환인·통화 각 현 내를 활동 지역으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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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혁명당과 평진(平津)·상해 방면의 불령배와의 구체적인 연락 통신 상황·방법 및 그 성적
국민부에 재적하고 있는 최의산(崔義山)이라는 자는 재작년(소화 6년) 2월경, 재만 조선인 구축(驅逐) 문제의 교섭을 위하여 남경(南京)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
그 후 만주 사건이 야기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데, 혹 그와의 사이에 연락이 있을지도 모르나 상세한 것은 불명이며 현재의 상태로서는 아마도 연락이 불능할 것이라고 한다.
5. 최근에 있어서의 의용군과의 연락 상황(동변도 토벌 실시 후의 구체적 상황)
최근에 있어서의 의용군과의 연락은 전술한 바와 같은 정도로서 달리 특기할 만한 사실이 없다.
6. 혁명당의 재정
국민부에 속하는 자에 대하여는 1호(戶)마다 1년에 1원 50전(의무금[義務金]이라고 칭한다)을 징수하고 이를 자치에 관한 경비로 충당한다. 또한 1년에 쌀 1두(斗)씩(양미[糧米]라고 칭한다)을 징수하여 이를 혁명군에 납부하고 있었다.
혁명군 부내에는 모연대(募捐隊)라는 것을 조직하여 각 지방에서 국민부에 속하지 않은 조선인으로부터 기부금을 징수하거나 또는 강요하여 이를 본부에 송부하여 혁명당의 자금에 충당하고 있다. 이 밖에 당원(당초 7,8백 명이 있었다)으로부터 1년에 50전씩 납부받아 당의 자금으로 하였다.
작년 5월경부터 동변도(東邊道)에 반거하고 있던 의용군 총사령 당취오(唐聚五)와의 사이의 연락이 이루어져 매월 대양(大洋) 9천 원(元)의 원조금을 받는 협정이 맺어져 약 3만 원을 영수하였으나, 당(唐)이 몰락한 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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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는지 불명하다.
7. 혁명당의 병기·탄약의 수량 및 그 입수 방법
장총, 권총 모두 보통 민가에서 호신용으로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기 당(唐)이 발행한 지폐로써 사들이고 있었다.
지폐는 대양(大洋)과 거의 같은 가치가 있어 민가라고 하여도 개중에는 50정 정도의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자가 있다.
재작년에는 마차 2대를 구입한 일이 있고, 작년에는 의용군 총사령 당취오가 재삼 수교한 사실이 있다.
구입 방법은 주로 행동 지역 내의 주민으로부터 그들이 보신용으로 소지하고 있는 것을 전기 당(唐)이 지출한 지폐로써 구입하는 것으로 1호(戶)에 2,30정을 소지하고 있는 자(지방 호농[豪農]등)도 있어 그다지 곤란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8. 현재의 당원 수 및 군인 수
당원 수(당초는 7,8백 명) 2백 명 정도
혁명 군인 수 6백 명 정도
9. 일·만 대관 암살, 주요 도시 폭파, 교란 등의 계획
전술한 바와 같이 당취오(唐聚五)가 동변도(東邊道)에 반거하고 있을 동안에는 여러 가지로 계획을 하고 있었으나, 현재에 있어서는 상세한 것이 판명되지 않고 있다.
10. 조선혁명당의 장래관
(1) 간부 중 의사가 강고(强固)한 자
양세봉·양하산·박대호(朴大浩) 기타 혁명 간부 군인 중 주요한 자 20여 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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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부 쪽에 있어서는 고이허(高而虛) 한 사람이 강고한 것 같다. 본인이 말을 종합하건대, 혁명당은 만주국내에 산재하는 의용군과 연락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으나, 세계적으로 아무런 변동이 없는 한 본 혁명은 성공되지 못할 것으로 사료된다.
혁명당 간부 중에도 경(硬)·연(軟) 2파로 나뉘어 경파(硬派)에 속하는 자는 일생을 혁명에 바칠 결심으로 분투하고 있으나 연파(軟派)쪽은 귀순을 희망하고 있는 자가 상당히 있는 듯하나 그 수속 등을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그대로 있는 모양이다.
혁명당의 오지(奧地)에 있어서의 만인(滿人) 거주민간의 신용은 상당히 큰 바 있다. 그 원인은 혁명당 군인이 중국 군대와 달리 행동하는 데 있어서 대상(代償)이 되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대금을 지불하고 있는 데 있는 듯하다.
그 증좌로는 작년 우지상군(于芷上軍)이 동변도를 토벌할 때 혁명군과 충돌하여 혁명군이 패주사산(敗走四散)하자 각지의 중국 민중들이 다투어 이를 숨긴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명백하다.
따라서, 혁명당을 철저히 토벌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이의 처치에 있어서는 장래 상당히 유력한 인물이 혁명당 군인을 만주국 군대로라도 개편하여 우대하는 방법을 강구한다면 그들은 당의 체면상 일본국에 대하여는 귀순하지 않을 것이지만 만주국에 대한 귀순은 승낙할지도 모를 일이다.
소화 8년 7월 1일
(재 통화 흥진분관 주임 발신, 재 만주국 무등(武藤) 대사 수신, 보고 요지)
불령단 수령 양서봉의 행동
최근에 그 활동이 첨예화(尖銳化)한 불령단 수령 양서봉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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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불령단 수령 양서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 겸 요녕(遼寧) 민중자위군특무대사령의 명의로 조선혁명군 제2중대(중대장 조화선[趙化善] 및 제7중대(중대장 최윤귀[崔允龜])의 부대 소총 약 90정, 모젤 권총 및 소형 권총 약 10정을 가진 약 1백 명 기타 외교원 김난(金蘭) 및 김사진(金思津) 이하 27명, 도합 약 1백 30명을 인솔하고 있다.
대장은 모두 작년 여름에 착용한 특무대복인 회색 군복에 회색 헌팅캡을 착용하고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아래쪽에 ‘요녕 민중자위군특무대사령부’라고 적힌 것을 게양하였다. 간부 장교는 말을 타고 중요한 서류는 말에 싣고 있었다.
이들은 6월 20일 통화현 제5구 강구촌(江口村) 성창구(城廠溝)에 나타나, 27일 아침 일찍 서강전자(西江甸子)에 도착하였는데, 이 때 동 지방에 비적 토벌을 위해 출동 중이던 만주국 군대 제3 영(營)의 약 1개 중대가 환인 방면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조우하였다.
만주국 군대는 불령단으로부터 일제히 불의의 사격을 받아 전진을 저지당한바, 만군(滿軍)은 형세가 불리하다고 보자 정전 신호를 하고 정전 신청을 하였다.
그러자, 불령단으로부터 비무장병을 파견하여 진지에 등산(登山)시키라고 요구하였고, 만군은 이 요구에 응하여 이와 타협한 결과 무사히 통과하였다고 한다. 탐지한 바에 의하면 위 제3영으로부터 파견한 교섭병(交涉兵) 중에는, 작년 여름 당취오(唐聚五)의 자위군에 가입 활동하였을 때 양서봉과 면식이 있는 자가 있어 양서봉과 격조했던 인사를 한 후, 오히려 불령단에 동정 어린 언사를 하여 서로 밀약 협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타협한 후, 불령단은 동지 조선인 이필규(李弼奎) 집 부근에서 소를 도살하여 잔치를 벌여 촌민(村民)을 소집해 놓고, “우리 혁명군은 이번에 봉황성(鳳凰城)에 있는 비수(匪首) 등철매(鄧鐵梅)와 교섭하여 후원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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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에 있는 수령 신장호(新長好)가 거느리는 비적(匪賊) 약 1백 50명과 합작하여 통화를 진공(進攻)하고 또한 지방에 있어서의 친일 주구, 즉 민회(民會) 지부원 등을 주벌(誅伐)할 예정이므로 일반 주민은 철두철미 우리 혁명군을 후원하라. 운운”하며 그들 특유의 선전 연설을 하였다.
동일 저녁, 20명 내지 30명씩 수 부대로 갈려 각 방면으로 출발한 그들은 이를 결사대·암살단이라고 떠벌이고 있었다. 그 행방은 불명이다.
소화 8년 7월 15일
(재 통화 흥진 부영사 발신, 재만(在滿) 무등(武藤) 대사 수신, 보고 요지)
국민부 혁명군의 활동에 관한 건
국민부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은 금년에도 고량(高粱)이 무성해져서 비적의 도량에 편리하게 되자 적극적 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28일 이래, 그는 부하 약 1백 30명을 거느리고 통화현 제5구 강구촌(江口村) 성창구(城廠溝), 서강전자(西江甸子) 방면을 횡행하여, 한때는 2,30명이 1조가 된 결사 암살단을 밀파하려 하였으나, 현재 주위의 사정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활동 범위가 축소되어 있어 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7월 12일에는 제4구 소도령(小都嶺)을 경유하는 도중에 전화선을 절단하고 제7구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대서분(大西芬) 부근에 이르러 다시 제4구 북구(北溝)를 거쳐 7월 13일 고창구(庫倉溝)로 이동하여 잠복중인 듯하다는 정보가 있다.
한편, 불령단 제4구 군자금 징수 위원 이춘호(李春浩)는 중국옷을 입고 7월 13일 하구촌(河口村)에 와서 제2회(하반기) 군자금의 독촉을 하였으나 아직도 납입한 자가 없었다.
이들 불령단은 종래 빙탄간(氷炭間)인 공산당과 제휴하여 그 세력의 확대를 도모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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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거지는 아직도 흥경현(興京縣) 왕청변문(旺淸邊門) 부근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번의 이동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비수(匪首) 왕봉각(王鳳閣)과의 어떤 묵계 아래 왕봉각 토벌의 후방 견제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이영걸(李永杰) 이하 약간명은 북전자(北甸子)에 주둔 중으로, 무기 탄약은 비수(匪首) 등철매(鄧鐵梅)의 소개에 의하여 구입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출처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이번에 다음과 같이 위원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중앙특무외무집행위원금남(琴南)
신빈 지방집행위원장강홍락(康弘樂)
신빈 지방경무집행위원문학진(文鶴鎭)
통화 집행위원장김여옥(金麗玉)
통화 경무집행위원오상갑(吳尙甲)
동 경무위원주두범(朱斗範)
또한 그들은 먼저 폐지한 유격대를 부활 조직하여 왕청변문(旺淸邊門)에 주둔중이라고 하는데 그 병력은 확실하지 않다.
유격대 중대장에는 총사령(양세봉)의 호위대장인 김광욱(金光旭)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소화 8년 7월 21일자
(재 통화 흥진 부영사 발신, 재만 무등(武藤) 대사 수신, 보고 요지)
불령선인단 국민부 혁명군의 조직 변경
1. 조직
국민부 독립 혁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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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양세봉
부사령박대호
고문양하산
제1중대장김창천(金蒼天) (매일신보 동년(1933) 12월12일에는 결빙 강화 회의 신임명자 는 다음과같다. 제1중대장 이춘산(李春山)
제2중대장조화선(趙華善) (제2중대장 조화선(趙化善)
제3중대장심용준(沈龍俊)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제4중대장장명도(張明道) (제4중대장 정봉길(鄭鳳吉)
제5중대장문학빈(文學彬) (제5중대장 문학빈(文學彬)
제6중대장정현석(鄭現錫) (제6중대장 박동근(朴東根)
제7중대장최구규(崔久珪) (제7중대장 최용규(崔冗奎)(崔允珪.奎)이다.
(최윤구.최윤규(崔允龜.崔允九.崔允奎)의 명은 / 동아일보 1932년 崔允奎 / 조선일보 1934년 崔允九.崔允奎 중대장으로 발표한다.그리고 1935년7월13일자 조선일보에서는 조선혁명군 제2사령관 崔應九(崔允九)로 나온다.)
유격대장 겸 보위대장김광옥(金光玉)
참모장 겸 비적연락김활석(金活石)
군사부장 겸 비적연락김학규(金學珪)
법제부장 겸 지휘관윤일파(尹一波)
참사김두칠(金杜七)
중앙집행위원장고이허(高而虛)
외무집행위원장김은진(金殷鎭)
외무집행위원금남(琴南)
통화 지방집행경무위원장김여옥(金麗玉)
통화 지방집행경무위원오상갑(吳尙甲)
통화 지방경무위원주두범(朱斗範)
2. 무기
전원의 3분의 2는 소총 및 권총을 소지하였으나, 중화기 등이 없고 약간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3. 책동 상황
(1) 그들은 군자금으로서 종래에 상반기 80전, 하반기 80전을 징수해 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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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에는 상반기 1원 50전, 하반기 1원 50전으로 정하고, 또 지방비로서 상반기 75전, 하반기 75전을 가중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2) 혁명군 부사령 박대호(朴大浩)는 무장 당원 80명을 인솔하고, 관전현(寬甸縣) 제5구 이도구(二道溝)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6월 하순 이래 관전현(寬甸縣) 대강구(大崗溝)에 잠복 책동중의 제4중대 제4소대장 오동오(吳東吾)로 하여금 조선 벽동(碧潼) 방면으로부터 카키색 군복을 구입시켜, 점차 이와 같은 복장으로 통일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7월 8일 관전현하 일대 및 환인현 동부 지방에 거주하는 선농(鮮農)으로부터 군용 양말(糧秣)로서 매호(每戶) 조(粟) 2두(斗) 혹은 쌀 1두를 징수하는 외에, 군복 구입 및 제잡비로서(잠대금[暫代金]이라고 한다.) 각촌 거주 선농에 할당하여 징수하였는데 이미 그 금액이 2천 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6월 하순 이래 환인, 흥경 방면의 비적단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금월 상순 표변한 환인현 제1구 자위단(단장 오철심[吳鐵瀋] 이하 60여명)의 총기 매수에 분주하고 있다고 한다.
(3) 동 혁명군 제1중대 제7소대장 이영걸(李永杰)은 무장원 7명을 거느리고 강산(崗山) 두도구(頭道溝)를 근거로 하여 북전자(北甸子)·두도구(頭道溝)·백석랍자(白石拉子)간의 왕래 연락에 노력하고 있었으나, 7월 초순 백석랍자도 근거지를 이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