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동
옛부터 있던 마을 상리와 봉황동의 첫글자를 각각 따온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상봉동은 조선후기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의 방축리,상리,봉황동,봉현리,중리 지역이었으며 1914년 4월 1일에 전국의
군,면,리,동명을 재조정할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동대문구 상봉동
이 되었는데 1988년 중랑구의 신설로 이의 관할구역으로 변경되었다.
상봉동은 1,567,970m2의 면적에 1993년말 현재 12,283가구 39,330명의 인구가 거주하는데 관내에서 옛지명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동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의약박물관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나 제약회사 전체가 강남구로 이전되면서 의약박물관도 이전, 폐쇄되고 그 자리는 대형 집단주택이 들어설 예정으로 되어있다.
상봉동의 옛지명이 되는 상리는 상봉동과 중화동이 접경되는 지역으로 봉화산의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므로 지대가 비교적 높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웃마을로도 부른다. 황씨가 500년 전에 처음 자리잡아 황씨 집성부락이 되면서 황촌으로 불렀다.
이곳 황촌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고려 공민왕부터 문종 때까지 8대 왕에 걸쳐 살면서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의 먼 집안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관직에 등단한 황희의 세력을 등에 업고 말단벼슬이라도 하나 얻어 볼까 해서 황대감을 찾아가 며칠을
기다리던 끝에 겨우 대감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사려깊고 청렴결백한 황대감은 오히려 노기띤 얼굴로 그를
노려보면서
"힘들게 공부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친척의 후광에 힘입어 관직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나라를 망치고 임금의 얼굴에 수심을 가득 차게 하는 것으로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한느 것이다. 벼슬자린느 짧아 지는 해를 잡는 것과 같으니 차라리 노력해서 땅을 일구며 땀을 흘려 일하는 보람이 자손만대에 더 많은 것을 남겨줄 수도 있고 호강을 받는 일이다."
라고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황씨는 노력하지 않은 채 친척을 등에 업고 벼슬을 얻으려 했던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뒤도 안돌아보고 쏜살같이 물러나 야밤에 가족과 함께 숨어들었던 곳이 바로 봉화산 아래 이곳 상리였다. 이 때문에 마을이름을 황촌으로 불렀으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명관으로 꼽는 황희의 집안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해서 특별히 웃골로 불렀던 것이다.
웃골은 다시 한자음으로 상리가 되었다. 이런 황촌에는 아직도 황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가구 남아 있다.
상리보다 남쪽인 망우로 연변의 한독약품 동쪽에서 동서울시장까지를 중리라 부른다. 가운데마을 혹은 간데골이라고도 하는데
가운데 끼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웃골관느 달리 임씨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다. 간데골 임씨와 웃골 황씬느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매사를 의논하고 살았으나 두 마을이 이어질 수 있는 혼사는 하지 않았다. 두 마을은 비록 성씨가 달랐지만 간데골 임씨들이 먼저 터를 잡은 명문가의 후손인 웃골 황씨들을 큰집으로 섬기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집안의 혼사 금기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경이었다. 간데골 임씨 총각과 웃골 황씨 처녀가 서로 사랑하지만 양 마을어른들의 적극 만류로 인해 애만 태웠는데 마침내 임씨 총각이 용기를 내서 황씨 처녀에게 구혼을 했고 처녀는 이를 수락하였다. 금혼풍습으로 인해 떳떳한 혼인식도 올리지 못하고 바로 동거에 들어간 첫날 두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남매지간과 다를 바 없는데 이게 무슨 해괴한 짓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살림을 부순 후 남자는 멍석말이로, 여자는 조리돌림을 하였다. 양 마을로 끌려다니던 여자는 반 실신상태가 되었고 멍석말이를 당했던 남자는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였는데 다음날부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며 후회를 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부터 양 마을간에 금혼하던 풍습은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상봉동 가운데 지금도 지명이 남아있는 옛마을은 서촌이다. 서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이 지명은 다만 이름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상봉동 북쪽 끝으로 봉화산 중허리깨가 된다. 이곳 사람들은 황촌사람들과 달리 간데골 임씨들과 통혼을 많이 했다.
이 때문에 옛 상봉동 출신 임씨 중에는 부인이 서씨인 사람들이 많다., 서촌 사람들의 직업은 주로 봉화산 봉수대를 지키는 일이었으므로 이 때문에 서촌을 봉현리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봉우재 고개 근방에 밭을 갈아 경작을 했는데 특히 알타리(총각) 무우는 어른 팔뚝만큼이나 굵어서 사촌 남자들의 성기도 봉우재 총각무 만큼 된다는 말이 항간에 전해오기도 한다.
상봉동을 이루는 지명 가운데 또하나는 봉황동이다. 중앙선 철로 남쪽으로 상봉 제2동에 해당되는데 102번지와 103번지 일대이다. 이곳의 지형은 낮지만 비봉형이어서 알을 까기 위해 봉황이 막 날아와 앉는 모습이라해서 붙여진 동명이다. 새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이 봉황새이고 이런 봉황새가 알을 까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은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을 예견해주는 것은 물론 무한한 발전이 있을 것을 알려주는 곳이다. 곧 이 일대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서 상봉동 중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이 될 것이라는 것인데 다만 비봉의 북쪽이 되는 지점, 곧 봉황의 벼슬에 해당되는 부분을 살려두어야 새 가운데 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없앨 경우 닭벼슬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므로 관청과 같은 건물보다는 상업성이 짙은 건물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인지 이 일대는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일찍부터 주막거리로 통했다.
서촌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끝에 마련된 마을이 큰골, 곧 대리인데 이곳에 장사바위가 있었다.
삼표연탄자리가 장사바위 자리이다.
옛날 서울에서 전국 장사모임이 있었따. 각 도의 장사들도 소문을 듣자 모두 모여 들었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경상도 장사가 허겁지겁 짐을 꾸려 서울로 오던 도중 집으로 돌아가는 강원도 장사를 만났다. 왜 돌아가느냐고 경상도 장사가 묻자, 강원도 장사는 이제 서울에 간다 해도 도성문을 닫을 시간이 다되었고 또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장사가 이미 다 모였는데 늦게 출발해서 오느라고 기운이 다빠진데다가 허기도 지고 해서 그냥 집으로 가는 것이 옳으니 어서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라며 권하였다.
그러나 경상도 장사는 여기까지 쉬지않고 달려온 것도 아까운데다가 강원도 장사가 괜한 소리로 포길르 종용하는 것 같아 듣지않고 길을 재촉했다. 경상도 장사가 상봉동까지 왔을 때 너무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고 두리번거리던 차에 중랑천이 보였고,
이에 물을 마시기 위해 한쪽 손을 굽혀 엎드리자 이때 짚었던 바위 위에 손과 무릎의 자국이 깊게 패이게 되었따.
물을 마시고 막 일어나 길을 재촉하는데 포졸을 앞세운 마을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뒤쫓아 오고 있었따. 그러나 영문도 모르는 경상도 장사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봇짐을 등에 짊어질 때 퐂돌들이 그를 에워쌓고 험상궂은 표정을 한 마을사람들도 뒤이어 그 뒤로 섰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냇물을 모두 마시는 바람에 중랑천이 말라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은 물론 식수마저도 없어져버렸으니 이는 요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저 요물은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고 마을사람 중 한 사람이 그를 가리키며 이유를 말하였다. 장사는 '나는 요물이 아니고 사람이며 혼자서 물을 다마신 것도 아니다.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먼저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는데 그것도 죄가 되느냐'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그가 엎드렸을 때 바위 위에 패인 손과 무릎자국을 가리키며 '사람이 엎드린다 해서 바위가 패일린느 없다. 더구나 패인 깊이가 어린아이의 종아리 깊이 정도 되는데 이는 틀림없이 요술을 써서 사람을 현혹케 하는 것이니 빨리 처형해서 마을의 우환을 없애자.' 고 재촉하였다.
억울하다며 버티던 경상도 장사는 마침내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에게 내려진 것은 처형이란느 형벌이었다. 형리가 죽음을 직전에 둔 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내 억울함은 한으로 맺히고 남아서 앞으로 이 마을에서는 절대 농사를 못지을 것이다. 내 한이 물을 말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검은 땅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며 저 개천(중랑천)은 해마다 홍수로 넘쳐흘러 심어놓은 모든 농살르 망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경악해 하며 빨리 처형해라 아우성이었고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상도 장산느 처형되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해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였고 그가 엎드렸을 때 땅바닥에 패인 무릎과 손바닥에 의해 자국이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석탄)가 날리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으므로 토박이 원로들중에는 이곳에 삼표연탄이 들어서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망우리 근방까지가 경상도 장사의 억울함이 남아있는 곳인데 망우역은 1936년 중앙선 부설공사를 하면서 만든 역이다. 석탄 등 각종 화물수송에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상봉동 344-1번지에는 한독약품주식회사와 한독의약박물관이 있었는데 193년 이전하였고 대신 이 자리에는 대단위 공동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다.
상봉동 83-1번지엔느 상봉터미널이 있다. 강릉,주문진,울진,춘천,화천,속초,현리,양구,양평,여주,김화,철원,이동,와수리 방면으로 출발하는 시외버스터미널인데 마장동에 있던 동마장터미널이 이용객의 증가로 터미널이 좁고 협소하다 하여 이곳과 동서울 종합터미널로 분산 조정하게 되었는데 명실공히 서울 북부관문 노릇을 하고 있다. 1985년에 조성공사가 끝나자 이전하여 시외버스의 운행이 시작되었는데 1993년말 현재 이곳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는 고속도로 경유 직행버스 6편, 경유지없는 직통버스 4편, 직행버스 49편, 완행버스 9편이 적게는 1일 1회, 많게는 1일 96회이다. 상봉터미널을 이용하는 승객숫자가 증가하자 터미널 광장 내에는 1985년 9월 2일 터미널 이용승객들의 만남의 장소 및 휴식공간 사용을 목적으로 팔각정인 여정루를 건립하여 시민들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
상봉동 207번지에 있는 로얄볼링장은 1987년에 준공된 연면적 2,335.7m2로 레인 24개이다. 1988년 제 24회 서울올림픽 때는 올림픽 볼링경기장으로 지정되어 출전했던 한국선수 권종유가 이곳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도 있다. 올림픽경기 관련 기념패와 공로패가 보존되어 있는 중랑구민의 건강생활 여가장소이다.
서울 동부지역에서 재래시장으로 손꼽힌느 동부재래시장은 재래상권의 기능만을 수행해오던 것이 점차 시장 주변의 유동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최근에는 중랑구 상권의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다. 근대상권의 형성과 함께 동부 재래시장이 지녔던 재래상가의 영업력이 상호보완되면서 광역화하여 번창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편 삼표연탄공장 바로 옆에는 쌍굴다리가 있는데 중앙선 철로를 부설하면서 상봉동이 나묵으로 나누어지게 되자 차량과 사람의 통행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망우역을 향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볼 때 좌측의 각진 통행로는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고 오른쪽의 반원형은 차량통과용이다.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지금은 터널 두개의 폭으로 감당하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상봉동은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 예꽈 횡산장삼량 교수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지표에 청동기시대 유물 몇점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발굴조사를 한 결과 토기와 석기 몇점을 수집하였다. 이 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봉화산이 선사시대의 유적지라는 설을 상기해본다면 상봉동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