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충공 휘 근 양촌 묘역 및 충장공 도원수 묘역
고양유림 및 용강서원 유적지 순례교육
2015년 3월 31일 7시 30분 고양시 덕양구 원당역 앞 미리 예약된 전세 버스를 40여명이 탑승하여 출발하여 충북 음성읍 삼생4리에 있는 충정공 박서의 묘을 참배하고 충민공 사상을 배활 하고 음성박씨 문중에서 제공하는 송어회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곳을 출발하여 문 충공 묘역인 충북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1시 20분에 도착하여 미리 문충공 부회장님 권영돈씨와 권오섭 총무와 관리소장님의 안내로 부천지위를 받으신 부조묘 사당에서 문중에서 제공하는 주과포를 지설하고 용강서원 원장님이 대표하여 헌작을 강신례 참신례 헌작례 고유축을 봉독하였다. 고유 축은 안동권씨 기로회장 권정택씨가 제문을 지어 낭독하고 해설자 최영숙씨가 해설을 하였다.
사당고유를 맞히고 묘역을 돌아보면서 관리소장님과 수석부회장님이 설명을 하였다. 문중에서는 미리 준비한 음료와 다과 타월을 선물로 증정 하였다. 그리고 묘역에 계신 분들의 문헌을 권정택 회장님 직접 찬하여 배포 하였다.
일정이 바뿐 관계로 3시가 넘어 묘역을 출발하여 경기 양주에 조선 숙종 경종 영조 때의 이조판서 조상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경기 양주 장흥 충장공 권율도
원수의 묘역에 도착하여 우리문중의 권병일 씨가 선두로 안내하여 상위의 강정공 휘 철 영의정에서 참배를 하고 아래에 계신 권율도원수 묘에 헌작하였다.
그리고 권정택 회장의 선조님들의 설명을 자세하게 해설을 하였다.
그리고 권정택 회장은 오늘 고양유림이 양촌묘역과 충장공 묘역 참배하고 찾아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하였다.
近(근) 贊成事(찬성사) 典文衡(전문형) 陽村(양촌) 文忠公(문 충공)
恭愍王 元年 1352년 임진 11월 6일 을해 송도에서 출생하였다.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의 옛 적성 구연은 부친의 별업으로 그곳에서 생장하여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에게서 수학하고 야은 길재 많은 문인을 길렀다.
春秋館檢閱官.禮文館修撰. 長興庫使 兼 進德博士. 禮曺佐郞. 軍簿左郞知制敎.
(춘추관검열관.예문관수찬.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 예조좌랑. 군부좌랑지제교).
奉常大夫 春秋館編修官. 左司議大夫 右文館直提學. 奉順大夫로
(봉상대부 춘추관편수관. 좌사의대부 우문관직제학. 봉순대부)로
判典校寺事 進賢館直提學. 判尉衛寺事. 奉習大夫로 成均館大司成.
(판전교사사 진현관직제학. 판위위사사. 봉습대부로 성균관대사성).
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 簽書密直司事. 入學圖說. 春秋接見錄.
(보문각제학동지춘추관사상호군. 첨서밀직사사. 입학도설. 춘추접견록).
禮記淺見錄. 資憲大夫檢校直 禮文館春秋館太學士 兼 成均館大司成 知製敎.
(예기천견록. 자헌대부검교직 예문관춘추관태학사 겸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嘉靖大夫 簽書中樞院事添書都評議使司事寶文閣學士 花山君으로
(가정대부 첨서중추원사첨서도평의사사사보문각학사 화산군)으로 開國原從功臣修文殿轉學士 (개국원종공신수문전전학사)
태종9년 1409년 2월 14일 58세졸 임종 시 번뇌와 비바람이 불다가 운명하자 비와 바람이 멈추었다고 전하였다.
踐(천) ;摠制公(摠制公)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完山判官(完山判官) 및 副令(副令). 右軍同知 摠裁(우군동지 총재). 평안도成川府使(成川府使). 遺愛碑(遺愛碑)가 세워졌다. 신라 경순왕 사당 敬天廟를 창건하였다.
생몰 년 월 일 미상 세종 13년 1431년 8월 24일에 졸했다.
踶(제); 文景公
자는 仲義이고 아명은 黔童초명은 稻(도)호는 止踶(지제) 휘는 軒이다.
우왕 13년 1387년 6월 1일에 송도에서 태어났다. 敬承府主溥(경승부주부).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右獻納(우헌납). 兵曹正郞(병조정랑). 藝文應敎(예문응교). 成均司藝(성균 사예). 典祀廳少尹(전사청소윤). 世子左文學(세자좌문학).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 司憲府書狀官(사헌부서장관). 承政院副代言(승정원부대언). 覆試에 對讀官(복시에 대독관). 集賢殿副提學(집현전부제학). 예조참관 仁順府尹(인순부윤). 平壤府尹(평양부윤). 左軍同知摠制(좌군동지총제). 漢城府尹(한성부윤). 慶昌府尹(경창부윤). 집현전을 확대하여 賜暇讀書(사가독서)를 실시 自治通監訓義(자치통감훈의)를 完成 歷代世年歌(역대세년가) 著述(저술). 計稟使(계품사)의 府使(부사). 藝文官大提學(예문관대제학). 同知中樞府事同(지중추부사). 知中樞院事(知中樞院事). 中樞院使(중추원사). 成均館大司成(성균관대사성). 知春秋館事世子貳使(지춘추관사세자이사). 左參贊(좌참찬). 判吏曹使啓稟使(판이조사계품사). 崇政大夫右贊成(숭정대부우찬성). 治平要覽을撰進 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를 지었다.國朝寶鑑(국조보감)찬진함. 東方族譜의 嚆矢(효시)인 가보를 孝道하여 뒤에 차남 所閑堂 權擥(소한 당 권람)에게 成化譜가 나오게 하였다. 左翼原從功臣(좌익원종공신) 1등에녹훈 純忠積德 秉義輔祚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府使(순충적덕 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吉昌府院君(길창부원군)
1446년 4월 16일에 졸하니 향수가 59세이다.
跬(규) 齊簡公(제간공)
태종의 3녀慶安宮主(경안궁주)와 하가 崇政大夫吉川君(숭정대부길천군) 駙馬吉昌尉(부마길창위) 虎賁司上護軍(호분사상호군) 友軍都摠制(우군도 총제) 三軍都摠制府(삼군도총제부) 安州道都節制使府(안주도도절제사부) 義勇歌節制使(의용가절제사)
4월3일 29세로 졸하였다. 부마로서 慶安宮主 와 혼인
蹲(준) 安肅公(안숙공)
태종 5년1405년 8월 6일 서울에서 출생
宗廟署副承(종묘서부승) 慶昌府承(경창부승)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通禮院奉禮郞(통례원봉예랑) 戶曹佐郞(호조좌랑) 宗溥寺判官(종부사판관)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 朝奉大夫司宰監副正(조봉대부사재감부정) 軍器寺副正(군기사부정) 정교한 화포를 만들었다. 漢城府少尹(한성부소윤) 開城府斷事官(개성부단사관)陰竹縣監(음죽현감) 果毅將軍(과의장군) 義禁府鎭撫(의금부진무)承旨知形曹事(승지지형조사) 嘉善大夫大司憲(가선대부대사헌) 輸忠協贊靖亂功臣(수충협찬정란공신) 漢城府尹戶曹參判(漢城府尹戶曹參判) 吏曹判書․刑曹判書(이조판서․형조판서) 知中樞院事(지중추원사) 戶曹判書(호조판서) 咸吉道都觀察使兼咸興府尹(함길도도관찰사겸함흥부윤) 세조 5년 1459년 4월 30일 졸하였다.
踐(천) 摠制公
자는 伯修이다. 태종 6년 1406년 7월 27일자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으로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右軍同知摠制(우군동지총제) 平安道成川府使(평안도성천부사) 遺愛碑(유애비)
擥(남) 所閑堂(소한당)
시호는 翼平(익평) 자는 正卿이고 지정으로도 썼다.
태종 16년 1416년 5월 7일 한양에서 출생 소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기계가 많고 대지가 있었는데 청년기에 명산을 두루 찾고 문장을 강론하며 花朝月夕을 벗하며 벼슬과 세사에 명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副尉에 武散階 있다가 문종즉위년 1450년10월에 남의 권유로 시년 시에 나가 친책 친척을 포함해 1거 3장을 하였다. 곧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校書館校理(교서관교리) 知製敎(지제교)가되어 首陽大君과 함께 武經을 찬수하였다.계유정란을 성공시켜 수양대군과 함께 輸忠衛社協策靖亂功臣(수충위사협책정란공신) 1등 책훈되고 同副承旨(동부승지) 右부승지 經筵參贊官(경연참찬관) 寶文閣直提學(보문각직제학) 知製敎兼判善工監事(지제교겸판선공감사) 知工曹事(지공조사) 右丞旨(우승지) 세조즉위후 吏曹參判兼同知經筵事(이조참판겸동지경연사) 同德左翼功臣1等吉昌君에 봉하였다. 吏曹判書兼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官事(이조판서겸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 1458년12월 右贊成(우찬성)1459년10월 左贊成(좌찬성) 11월 右議政(우의정)1462년5월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監事世子府(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감춘추감사세자부)가 되었다. 1463년 9월에는 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11년 1465년2월6일 졸하니 향년 50세이다. 임금이 震悼(진도)하여 음식을 거두고 사흘 동안 조회와 저자를 거두었으며 禮曹에서 擧哀를 청하자 집에 가서 곡할 것을 명하였다. 부증을 더하여 관에서 장사를 도왔는데 종종의 대소 관과 교류하던 벗들이 갑작스런 서거에 놀라고 애도하였다. 실록의 졸기에 “器宇(기우)가 寬偉(관위)하고 磊落(뇌락)하여 무리와 같지 않았으며 조용함에 침착하여 말이 적고 時服(시복)에 들고자 힘쓰지 않았으면서 스스로 高世之士(고세지사)임을 자처하였다. 고 하고 또 일찍이 韓明澮(한명회)와 望形至交(망형지교)를 맺어 소하와 조참관중과 포숙의 사이와같다고 치하하면서 집안을 지닌 사람의 산업을 섬기지 않고 더불어 말하기를 창을 곤두세우고 말을 번 듯 쳐 변방에서 공을 세울 수가 없다면 마땅히 만권의 서책을 읽어 이지러지지 않을 이름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轍(철) 雙聚軒(쌍취헌) 康定公(강정공)
자는 경유 또는 자산이고 호는 雙聚軒(쌍취헌)이다. 연산군 9년 1503년 12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生員 進士 式年文科 及第하여 禮文館 弘文館의 著作博士 侍講院設書(시강원설서) 兵曹‧刑曹‧禮曹‧吏曹의 正郞 敎理‧典籍‧直講지내고 司憲府持平(시강원설서) 司諫院獻納(사간원헌납) 司諫院文學(사간원문학) 議政府舍人(의정부사인) 軍器寺副正(군기사부정) 掌樂院正(장악원정) 中宗仁宗의 國喪에 國葬都監郎廳(국장도감낭청) 되고 명종2년1547년 書狀官(서장관)이 되고 同副承旨(동부승지) 3년 뒤 都承旨(도승지) 謝恩使(사은사)가 되어 재차 중국 刑曹判書(형조판서) 전라도 觀察使(관찰사)겸 巡察使(순찰사) 遠接使(원접사) 右贊成(우찬성) 후에 右議政(우의정) 左議政 (좌의정) 1567년 3월에 연경에 가서 목종의 융경제의 동극을 진하하고 귀한하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입승대통 하였다. 새 임금을 입대하여서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고 궁금을 엄숙히 할 것을 진술하니 임금이 가납하고 좌의정에 승진시켰다. 이때 백관의 관모가 심히 정제하지 않았으므로 건백하여 모두중국의 제도를 쫒게 하였다. 선조 6년 1573년에 영의정을 배하고 이듬해 노년을 이유로 치사를 빌었으나 불륜하며 임금이 궤장를 내리고 말하기를 『경의 덕량은 사람들을 진정 시키기에 족하고 재지는 나라를 경영하기에 족하다』 하면서 매양 입대 할 때는 황문 안에서도 부액케 하고 심지어 견여를 타고 입궐케까지 하라는 명까지 하였는데 비록 행하지는 않았으나 왕의 권우가 이와 같았다. 일찍이 御筆로 批答(비답) 하여 『고굉의 元輔로서 큰 가뭄에 장마 비요 내를 건너는데 舟揖이다.』 하였다. 조종에 선 것이 45년이고 네 왕조를 섬기며 네 차례 영상을 배하였는데 사람들이 감히 흠집을 의론하지 않으면서 태평재상이라 하였다. 공이 졸하는 달에 의정부의 큰 홰나무가 폭풍에 부러지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죽을 지경이다.』 하였다. 곧 병이 위독하여 선조11년 1578년 8월 25일에 졸하니 향년76세이다. 純忠積德(순충적덕) 寶祚功臣(보조공신) 安東府院君(안동부원군)으로 追贈(추증)되고 康定(강정)의 諡號(시호)가 내렸다. 중종30년 1535년 3월 19일 실록의 사관으로 나오고 중종32년 10월24일에는 예문관대교로 나오며 중종33년 10월 2일에는 승정원주서로 나오며 홍문관수찬 경연검토관 홍문관부교리 사헌부지평 교리 경연시독관 사간원헌납
묘소는 경기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홍복산 압곡 건좌 쌍분이다.
慄(율) 都元帥(도원수)晩聚堂(만취당) 忠莊公(충장공)
자는 彦愼(언신) 호는 晩聚堂(만취당) 중종 32년 1537년 12월 28일 출생 하였다. 출생지는 서울 필운동 성장지는 부친의 별업인 강화 연동설이 지배 적이다. 형 쌍천당 恂순 月汀 尹根壽와 함께 이진 당 김덕수 문하에서 수학 하였다.명종 8년 1553년에 17세로 부인 昌寧趙氏를 맞고 명종 11년 1556년 20세로 금강산에 들어가 呼氣를 修練하고 사장을 일삼지 않았으며 23세에 부인 창령 조 씨의 상을 당하고 25세에 안돈에서 始祖墓所를 拜謁하고 28세에 계배 竹山朴氏를 맞았다. 32세에 개성에가 9대조 국재공묘소를 성알 하고 이듬해 음성에가 6대조 양촌묘소를 성배 하였다. 선조8년 1575년 가을에 중봉 조헌과 대주하여 시사에 대해 간개 하기를 『우리가 세상애에 출처 간 어찌 하루 일을 나라를 잊을 수 잊으랴』 고 하였다. 40이 되어도 벼슬을 아니 하자 친우들이 음보 나갈 것을 권하니 웃으며 『강태공은 80에야 현달해서도 천하를 경영하여 구제했는데 하물며 내 나이 지금태공의 반이고 재덕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 공명이 없음을 근심하랴』 고 하였다. 41세에 동래와 부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이듬해 8월에 부친상을 당했으며 44세에 복상을 마치고 10월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45세 때는 한강의 송파 나루를 건너다 여주장사를 만나 의리와 은의로 친교를 맺었다. 선조 15년 1582년 3월 20일에 46세의 유학으로 신년문과 나가 병과 제15인으로 급제하였다. 일설에는 이때 명경과로 사마시하였다고도 하나 국조방목에 병과 급제로 나와 있다. 承文院正子로 補任되고 선조 17년 1584년 9월에는 모친상을 당해 服喪하였다. 선조19년 1586년 服闋하여 成均館 典籍되고 司憲府監察로 옮겼다가 이듬해 全羅道都事로 나가고 선조 21년 1588년에 들어와 禮曹佐郞 되었다. 工曹正郞으로 승진하고 다시 외직으로 京城府判官이 되어 나갔다. 선조 23년 1590년 8월에 54세로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강화에 향리에 작은집을 짓고 晩聚堂이라 編額하니 시냇가에 소나무가 저녁노을을 머금은 뜻에서 딴것이었다.
선조 24년 1591년에 55세로 다시 호조정랑이 되었는데 변경의 경보가 거듭 이르고 義州牧使(의주목사) 자리가 비어있자 공에게 將才(장재)가 있다는 윤두수의 특청으로 낭관에서 일약 堂上官 通情大夫(당상관 통정대부)로 초승하여 의주목사를 배했다. 이듬해 선조 25년 1592년에 일이 생겨 파직되고 義禁府(의금부)의 추고를 받고 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이 터져 중외가 파동 하니 임금이 황급히 “권율이 어디 있느냐” 고 찾아서는 光州牧使(광주목사)를 배하였다. 모두가 북으로 피난하는데 남으로 향함은 사지를 택하는 것인지라 가인들이 형편을 보라고 만류했으나 발행을 서두르자 兄 쌍천당 恂(순)이 집안일을 분별해놓고 뒤 쪽아갈 것을 약속했고 조카 승경이 말고삐를 잡았다고 강개하여 修行하였다. 광주에 이르러서는 군병을 전열하다가 17세의 정충신을 가려내 측근의 지인을 삼았다. 5월에 관찰사 이광을 좇아 용인에 이르렀는데 李洸과 제장이 공의 계책을 듣지 않고 곧바로 적과 접전하여 대군이 궤멸되었는데 혼자서 휘하를 온전히 하여 광주로 돌아와 다시 군사를 모집해 700여명을 얻었다. 7월에 鎭安의 雄峙(웅치)에 군사를 나누어 보내 요해를 지키며 혈전으로 적을 패퇴시키고 8월에 金山(금산)의 이치에서 1천 병력으로 1만5천의 적장 소저천윤경의 정예를 궤멸시키는 대첩을 거두었다. 정충신의 기지로 의주에 승첩이 報啓(보계) 되자 임금이 최초의 승전보에 기뻐하며 羅州牧使(나주목사)를 배했는데 부임하기 전에 전라도 巡察使(순찰사)로 승배(陞拜)하였다. 웅치 외 이치대첩으로 숙명의 湖南穀倉(호남곡창)을 지킨 공은 9월에 근왕하고자 북진하여 수원아래의 禿山城(독산성)에 진주하여 적의 예봉을 누차 깍으니 서부의 통로가 비로소 뚫리고 삼남의 의병이 바람을 따라 봉기 하는지라 임금이 검을 내리고 이를 거느리게 하였다. 선조 26년 1593년 2월에 정병2천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고양 덕양산 즉 幸州山城(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쳤다. 12일 여명의 적의 수만대군이 평야를 뒤덮어 공격해오니 몸소 伯人(백인)을 무릅쓰고 독전하며 사전을 벌려 세 차례의 접전에 승리하여 대첩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杏洲書院(행주서원)에 배향된 6장수의 협조와 결집으로 행주대첩은 대승을 하였다. 명의 제독 이여송은 바로 이 왜군에게 辟除館 회전에서 대패하여 회군했는데 공이 이천 소병력으로 이를 패궤 시키니 면목을 읽고 회군을 중지했으며 기가 꺽긴 왜군은 명군과 화의에 협상을 벌리며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달에 資憲大夫(자헌대부)로 승진되고 4월에 화의가 진행되어 서울에 있던 왜군이 남쪽으로 철수 했는데 파주산성에 주둔한 공이 이를 추격치 못하도록 이여송이 장수 척금을 보내 공을 감시케 하고 한강의 배를 모두 거두어 도강을 못하게 하므로 앙앙하며 진을 파악하고 본도로 귀한 하였다. 6월에 김명원을 대신해 8道都元帥(8도도원수)가 되어 제군을 통독하며 영남으로 이주 하였다. 선조 27년 1594년 삼월에 병으로 시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내의를 보내 간병케 하였다. 이듬해 7월에 한 도망병을 참수한 일로 파직 되었다. 앞서 한 무관이 전투를 기피해 전주로 도주해 명장에게 의탁하니 공이 순찰차 전주에 이르러 사자를 시켜 처포하니 명장이 면죄를 부탁해도 듣지 않고 군법을 시행했는데 이윽고 한재상이 사사로 전주에 들렸을 때 그 가족이 공을 구무하였고 조정에 가득한 기공자가 빌미로 탄핵한 바인데 공이 웃으며 “대장이 된지 3년에 도망병 하나를 밴 것으로 해관이 된단 말인가.” 하였다. 10월에 한성판윤을 배하고 비변사 당상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고 정헌대부로 올라 의정부참찬이 되었다. 선조 29년 1596년 정월에 충청도 관찰사를 배했는데 왜적이 오래 머물며 물러가지 않아 2월에 조정에서 원수를 선임하는 일로 왈가왈부하자 선조가 특명으로 재차도원수로 특배하였다. 상소하여 면하기를 빌어도 선조가 허락지 않고 뒤에 입시하니 “나의 허물로 밖에서 오래도록 수고로웠거니와 경이 아니면 국가의 오늘이 있겠느냐.” 고 하며 내구마를 하사 하셨습니다. 3월에 부임코자 배사하니 선조가 인견하여 종일토록 남방의 일을 문답하고 술을 내렸으며 또 내구마와 안장을 주었다. 7월의 홍산의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일곱 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공이 이를 평정하고 이몽학을 참수 하였다. 선조 30년 1597년 7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의 선봉이 충청도에 일으니 조정에서 한강을 차단코자 공을 입래케 하여 도체찰사 이성룡과 함께 입시하니 선조가 놀라 “남방의 적세가 치열한데 원수가 어찌 급히 입조하였느냐.” 하니 유성룡이 “적이 기전을 핍박하므로 한강을 차단하여 지키고자 하는데 원수가 아니면 불가한 고로 징소 하였다.” 하였다. 이후로 직산과 울산 순천등지에서 거듭 전적을 올렸으나 모두 명장에게 돌리고 끝내 자부하지 않았다. 선조 32년 1599년 봄에 63세로 주둔지 울산에서 단질을 얻어 전리로 돌아가 쉬기를 비니 임금이 허락했다. 귀로에 안동의 태사 묘와 능동의 시조묘소를 전알하고 제전을 보탰으며 종족을 모아 태사 묘에 제의를 의정하고 난중에 태사 묘에 보존했던 성화 보판이 일실 되었으므로 용만 기둥으로 하여금 乙巳譜를 編修케 하였다. 강화의 촌사로 돌아와 두문조양하며 병이 괘차하는데로 입근을 조현코자 했는데 점차 위독하므로 스스로 불기일 것을 알고 서둘러 임조코자 하나 도로로 가는 길을 감당치 못하여 배편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입경하자 기식이 흔미 해 지는지라 필경 임금을 알현치 못하고 서울 필운동 우사에서 졸하니 7월6일이었다. 선조가 진도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피하고 부의를 더해 내렸으며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찬성으로 추증하였다.9월 15일에 장례가 거행되고 7년이 지난 선조 38년 1605년 임진왜란의 전공을 의론하게 되어 효충장의 적의협력선무공신1등에 책훈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으로 영가부원군에 추봉되고 시호를 장렬로 내렸다가 뒤에 충장으로 바꾸었다. 부조의 은전을 내렸다. 선조 25년 1592년 7월 13일자 실록에 나주목사로 제수되는 기사가 나오고 7월 22일자에도 전라도 관찰사에서 겸 순찰사로 칭호케 기사가 나온다. 10월 22일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강화로 오고 11월3일에는 서울로 향하라는 명을 받으며 11월 11일에는 황해도의 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13일에는 전라도 의병을 분속 받는 명을 받는다.
『선조 26년 1593년 1월11일에는 군사4천으로 수원에 주차하고 2월10일에는 멋대로 한강을 건너 무악에서 적을 건드려 포악하게 만들어 다고 하여 대간에 탄핵하고 행주대첩의 결전일인 2월 12일에 하루 전 11일에는 비변사의 변호로 겨우 파직을 면한다. 12일의 행주대첩에 관해 선조실록에 단한자도 안 나오고 이보다 앞서 있는 웅치싸움‧이치대첩‧독산성 승첩 등에 대한 기사가 선조실록에는 삭제되어 반구도 비친 곳이 없다.』 2월 17일자에서야 추기로 『권율이 1개진으로 행주의 승첩을 이루었으니 이들 여러 진을 통합한다면 경성에 웅거한 적도 소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인용이 비쳤을 뿐이다.
維
檀君紀元 四千三百 四十八年歲次 乙未年二月乙未朔
十二日丙午 龍江書院 院長 李世濬 敢昭告于
贈純忠積德 輔祚功臣大匡輔國 崇祿大夫 檢校
議政府左議政 吉昌府院君 行 推忠翊戴 佐命公臣 崇政大 夫 議政府 贊成事 集賢殿大提學 兼 判內瞻寺事 知經筵春 秋館事 世子貳師吉昌君 贈 諡 文忠公 正寢 (之墓)
忠孝豊傳 君子國 詩書業繼 宗中鄕
古今偉跡 多揚裡 老少英才 大振邊
一念恐虧 先祖德 片時惟願 後孫賢
親蔬遠近 同心合 諡文忠公 赤舃傳
願言益篤 專精美 大振名聲 以順天
文忠公 諱近 陽村 龍江書院 任員一同
墓域參拜 謹具庶羞 感告厥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