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 시에티카 신인상 수필부문 당선작/ 고성우, 무통, 김동
상반기 / 고성우 백화산 자락의 겨울
무 통 어머님의 오도송(悟道頌)
하반기 / 김 동 ‘자리’에 대하여
백화산 자락의 겨울 / 고성우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대로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오후 들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눈발이 굵어지는가 싶더니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와보니 눈은 이미 폭설로 변해 있었다. 어두컴컴해진 밤하늘에서는 쏟아지듯 눈발이 날리고, 저마다 두터운 눈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채 차들은 도로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읍내에서 일을 마친 아내를 태워 집으로 오려는데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황간 쪽에는 눈이 더 많이 내릴 것이라고, 아직 읍내에 있으면 자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는 고마운 염려였다.
길에 눈이 제법 쌓였고, 이미 어두컴컴해진 밤하늘에 눈발도 제법 굵어졌지만 ‘눈길 운전 한두 번 해보냐, 이 정도쯤이야’ 하는 자신감으로 집으로 향했다. 차들도 별로 다니지 않는 눈 내리는 밤길을 운전해 오는데 아내는 연방 “조심해, 조심해” 걱정을 한다. 도시에서라면 눈이 오건 말건 옆자리에 앉아 졸거나 전화를 하거나 하면서 운전이야 관심 밖이었을 터이지만, 드문드문 불빛이 보일 뿐 사방에 칠흑 같은 어둠만 가득한 시골길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전조등으로 달려드는 굵은 눈발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시골에 내려와서 처음 맞이하는 폭설이다.
작년 이맘때 도로나 주변 정리는커녕 화장실 변기도 놓여있지 않은 우리 백화마을에 이삿짐만 들여놓고 일주일 정도 여관생활을 한 집들이 있었다. 아직 가로등도 들어오지 않아서 밤이 되면 암흑천지이던 산자락에 하나 둘씩 이사를 오면서 불이 밝혀지던 그때를 떠올리면 벌써 아련하다. 한 가정씩 입주하는 모습들을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보면서 아직 공사판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는 황량한 산자락에서 어떻게 잘 지내는지 서로 염려하며 안부를 묻곤 했었다. 겨우내 불어오는 바람에 고생한 이야기하며, 꽁꽁 얼어붙은 석천에서 썰매를 타고 대보름 불놀이를 즐기는 모습, 모닥불을 피우고 삼겹살을 나눠먹는 이웃들의 모습을 부러움 반, 염려 반 심정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백화산 자락에 새로 조성된 우리 백화마을은 현재 40가구가 입주해서 살고 있다. 그때 입주했던 분들에게는 이번 겨울이 두 번째 겨울이겠지만 주민들 대부분이 3월 이후에 이사 온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번이 시골에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여름이 20여 년 만에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는데 올겨울, 특히 12월 초반의 추위와 폭설은 56년 만에 가장 심하다고 하니 처음 시골생활을 시작하는 신고식 하나는 제대로 치르는 셈이다. 11월 말부터 겨울을 알리는 바람이 제법 불어 닥쳤지만 서울에도 바람이 제법 불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여기만 그런 건 아니지’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고, 작년 겨울 지독하게 불어대던 똥바람 소식을 하도 들어왔던 터라 이 정도의 바람은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우려했던 팰릿 보일러도 별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스트로베일 방식으로 벽면이 두텁게 지어진 집은 웃풍도 거의 없고 따뜻했다. 시골살이에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겨울을 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별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아직은 제법 폼새를 유지했다.
생각해보면 눈길이야 도시와 별 다를 것도 없고, 겨울 여행길에 이런 눈길을 몇 차례 경험한 적도 있으니 별 일은 아니겠다만 그래도 약간의 긴장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길은 이제 내가 평생을 살아야 할 곳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모습은 앞으로 내가 평생 겨울마다 만날 모습이라는 것, 시골살이에는 지난봄이나 가을날처럼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황홀하게 펼쳐져 있는 그런 길들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얼어붙은 눈길, 칠흑 같은 어둠과 몰아치는 눈발 속을 더듬더듬 가야만 하는 그런 길도 있을 것이다. 마치 입학식을 치르는 초등학교 신입생처럼 긴장과 설렘 그리고 다짐 따위의 감정들이 어둠 속에서 퍼덕거리다 사라지는 눈발과 뒤섞여 분분(紛紛)거렸다.
다음날 오전에는 눈도 그치고 화창하기까지 했던 날씨가 오후 들어 조금씩 흐려지더니 다시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면서 눈발은 점점 더 굵어졌고 어제 내린 눈도 다 치워지지 못한 도로 위로 다시 수북하게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대전에 나갔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 있다가 버스를 타고 황간버스정류장으로 오겠다고 했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와 차량용품점에 가서 바퀴에 체인을 채웠다. 낮에 눈을 치웠다고는 하나 지금 내리는 정도로 봐서는 벌써 다시 수북하게 눈이 쌓였을 것이고 어제는 다행히 마을로 들어가는 언덕길을 올라갔지만 오늘은 힘들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체인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영동읍에서 황간까지 평소에는 20분 정도 걸리는 길을 거의 두 배나 걸려서 도착할 무렵 아내에게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눈이 많이 내려 버스가 운행되지 못한다며 대전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오겠다는 것이다. 황간역에 가보니 버스가 끊겨 역으로 온 사람도 몇 있었고 추풍령에서 오는 버스도 눈 때문에 끊겼다는 소식도 들렸다.
눈 때문에 버스가 끊기는 걸 보니 ‘시골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예전에는 제법 번성했던 황간역은 이제 기차가 정차하는 횟수가 하루에 몇 차례 되지 않다 보니 대전에서 오는 기차가 도착하려면 거의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황간역에서 집까지 평소 같으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눈길에 집에 갔다 오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대합실 한켠에 놓여있는 작은 온풍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대전역에서 이웃집 임양근 선생님을 만났단다. 혼자 먼 길을 올 생각에 걱정스러웠는데 동행을 만났다니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좀 있다가 또다시 전화가 왔다. 마을 주민 중 대전에 근무하는 윤정 씨랑 통화가 되었단다. 윤정 씨도 만나기로 했다며, 윤정 씨가 차를 황간역 주차장에 세우고 왔으니 먼저 들어가도 된다는 소식이었다. 재밌다. 그 넓은 대전에서 단지 마흔 가구가 사는 마을의 주민 세 명이 약속도 없이 만나 함께 들어온다니, 도시생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조금 전까지 다소 쓸쓸하고 염려스러웠던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내와 임양근 선생님, 그리고 퇴근길의 윤정 씨가 대전역의 대합실에서 만나는 모습이 흐뭇하게 그려진다.
안심하고 집에 돌아와 몇 시간 있으니 일행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윤정 씨 차에 체인을 달지 않아서 마을까지 못 올라온다고 해서 마치 구세주라도 되듯 신나게 체인을 매단 내 차를 몰고 내려갔다. 눈발이 퍼붓는 어둠 저편 사람들 몇몇이 보인다. 세 명이 아니고 한 명이 더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덕원 선생님도 황간역에서 만났단다. 미끄러운 눈길을 엉금엉금 걸어오는데 모두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들인데 새삼 반갑다.
이웃을 가득 태운 내 차는 눈 쌓인 경사진 도로를 거침없이 올라간다. “멋져부러!” 고생일 것 같았던 귀갓길이 이웃으로 하여 참으로 즐겁고 편한 길이 되었다. 마을 집들 창가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불빛마냥 차 안에는 환한 웃음이 넘친다. 백화산 자락 아래, 백화마을의 겨울밤이 따뜻하게 깊어간다.
|당선소감|덜컥거림도 스스로 흥겨울 뿐
당선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 앞선 것은 ‘덜컥’하는 마음이었다. 이거 어쩌나 싶다. 준비 안 된 자에게 부여된 임명장처럼 당혹스럽고 무겁다.
깃발처럼 나붓거리던 청년의 시절이 지난 뒤 생계와 안정을 뒤쫓았던 시절은 다소나마 이루었으나 비루했다. 얄팍한 사회적 지위와 남들에 비해 조금은 두툼했던 월급봉투를 버리고 시골로 내려왔다. 버려서 빈자리에 나의 시간이 주어졌다. 차 속에서 짬짬이 들춰봤던 책들을 이제는 청명한 하늘 아래서 읽을 수 있었고 조금은 여유롭게 나의 삶들을 끌쩍거릴 수 있었다. 처음 하는 농촌생활의 서투름처럼 펜 끝을 끌고 가는 길도 덜컥거린다. 다만 내가 바래왔던 길이라 덜컥거림도 스스로 흥겨울 뿐이다.
졸작에 주어진 과분한 평가에 부끄럽고 무겁다. 담는 것은 비록 조촐한 생활이겠으나 쓰는 것에는 좀 더 진중해야 한다는 충고와 격려로 받아들인다.
고성우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삼도타임지(紙) 기자.
-------------------------------------------------------------------------------------------------------------------
어머님의 오도송(悟道頌) / 무 통
‘오락가락 장맛비’라는 말이 있다. 금방 비가 내리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비가 비답게 내리지 않고 잔뜩 찌푸린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농부가 이걸 핑계 삼아 괭이만 메고 비 온답시고 집으로, 비가 조금 들었다고 밭으로 왼 종일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비웃는 옛 어른들의, 무슨 일을 진득이 못하는 사람들을 일러 하는 말이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지붕개량사업이 한창이던 어린 시절, 내 속가(俗家)의 초가집도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 얇은 철판지붕은 비 오는 날 여지없이 그 성품을 드러내는데,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세 살 차로 터울을 이루고 있는 우리 5형제는 방안에서 신명나게 마냥 즐거워한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집은 부모님께서 자식들 각각에게 농사일 등 집안 잡사에 철저히 소임을 맡겨 일일이 참여시키셨는데, 그 이유는 먼 훗날 밖(도시)에서 실패라도 할라치면 고향에 들어와서 농사라도 지어야 한다는 부모님 방식의 논리요 인생철학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 가서 일을 배우면 이미 늦다는 인식을 아버지와 공유하고 계시는 어머니셨다. 그런저런 까닭으로 “오늘은 비오는 날!” 하고 육근(六根)으로 전달된 양철지붕의 메시지를 반기고 있는 자식들을 그냥 두고 볼 리가 만무했겠지!
이렇게 형제들이 누렸던 그 즐거움도 잠시, 어머니의 사자후(?)가 방문 옆 툇마루에서 작렬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근(耳根)을 통해 오감(五感)을 저리게 하는 그 분만의 확철인생(確哲人生)한 오도송이 방안으로 여지없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햐! 게으른 놈 잠자기 좋고, 부지런한 놈 일하기 좋겠다!” 말미에 ‘날씨’를 뺐음에도 찰나에 소통이 되는 형제들의 얼어붙은 동시 침묵은 마치 선사(禪師)가 던진 화두를 전광석화처럼 타파해가는 제자와의 선문답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비오는 날 또 일하러 끌려 나가는구나!’ 하는 일순간의 동심원(同心圓)이 끝나기도 전 우리의 이런 분위기를 평정이라도 시키려는 듯, 또 하나의 오도송이 결코 거부하지 못할 상황으로 종료시켰다.
“구부러진 저 나뭇가지는 쇠코뚜레하는데 그지그만(제격)이고, 오늘 같은 날씨는 모종하는데 다시없는 날이구나!” 라는 명분과 함께 각자에게 소임이 주어졌다. 이어 줄줄이 연결되는 통제의 말씀, “도살장 들어가는 쇠(소)꼴(모양)하지 말고 얼릉얼릉 가자가자.”는 재촉에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부슬부슬 가랑비 내리는 날의 고추·들깨·고구마 등 농작물을 이식하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보다 몇 가지 수고로움을 덜어준다. 우선, 일일이 물을 주지 않아도 모종은 거의 산다고 보면 되고, 밀짚대로 덮어주는 햇빛가리개가 필요 없다. 무엇보다 푹푹 찌는 삼복더위를 피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 어머님의 지론이다. 거기다 일 속에서 우리를 심심찮게 하시던 어머님의 일상의 진리(그분의 오도송)는, 지나고 보니 어찌 그리도 옳은 말씀이셨던가!
게으른 농부가 밭에 잡초를 뽑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가 이윽고 풀이 우거져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제 서리애비한테 맡긴다.”, “내 자식 자랑 하지 말고, 남의 곡식 자랑 하지 마라!” 한다고 한다. 자식자랑 하다 보면 시샘이 따라붙기 십상이고, 남의 곡식 장한 것은 나에게 아무 쓸모가 없으니, 내 농사 내가 열심히 김 메고 가꾸어 수확해서 내 창고가 차야지 남의 곡식창고 가득한들 내 주린 배하고는 십만 리(十萬里) 떨어져 있다.
이는 곧 남이 먹는 음식이 내 주린 배를 채워 줄 수 없듯이, 나의 생·사 일대사를 남이 해결해줄 수 없음은 이 집안─석문(釋門)─에 내려오는 천년경책(千年警策)의 말씀과도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비 오는 날 스님은 왜 전화 안 받으세요?” 불자들의 질문에 “낫 들고 오락가락하다 보니…” 라고 대구하며 웃기도 하는데, 그때의 훈습(薰習)으로 나는 여전히 비만 오면 으레 낫을 들고 암자 주변에 풀베기를 하거나 잡다한 일거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가랑비를 맞으며 일에 가속이 붙으면 일종의 일삼매에 빠져들기도 해 배고프지 않으면 저절로 요사채에 들어가지 않게 되니 전화 또한 자연히 받지 않을 수밖에. 그래서인지 ‘비만 오면 일하는 스님’으로 불자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저 임제선사의 할(喝)을 이어받은(?) 어머니의 오도송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기 전에 하다 남은 들깨 모종을 마저 해야겠다.
그리고 또한 이 살림은 어떠한가!
제방의 납자들이여! 법우(法雨)처럼 비 내리는 오늘, 방일한 자 잠자기 좋고 눈 밝은 자 수행하기 좋은 날씨 아니던가?
|당선소감|문학당(堂), 그곳은 자유지대인가
세밑에 남녘 치고는 눈이 많이도 왔다.
절 마당에 쌓인 눈으로 어른 키만한 눈 불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새해는 님의 해!”라는 간이편액을 세우고, 또 이 말은 ‘설불언(雪佛言)’이라고 주석을 달아, 카톡으로 수백 통을 연하장으로 보냈다.
강원도 토굴 스님이 “저는 눈 치우느라 골병이 들었는데, 스님은 눈으로 한 소식 얻었네요.”라기에 “봄처녀 신도가 어련히 알아서 할려구요!”하고 댓글 놀음을 했다. 똑같은 눈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듯이 인간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박사논문 지도교수는 논문은 표현이 무미건조하여 맛이 없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또 내 수필을 읽어본 시인은 너무 논문스러워 맛이 없다고 하였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냐고요!”
한 십 년 논문 속에만 묻히다 보니 강산이 변하듯 내 심성도 변했으리라. 그래도 양쪽 집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이정표가 이 집 『시에티카』에 있는 듯싶어 큰 위안이다.
시에문학회 문방(文房) 선배 제위께 질정과 격려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육근(六根)을 다스려 자유를 만들어가는 육화(六和)도량에서
무통행자─저두
무 통 경남 사천 출생. 중앙승가대학교, 위덕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졸업. 논문 「지장보살 대원에 관한 연구」, 「중국 지장보살신앙의 전개」, 「한국 지장보살신앙의 전개」. 저서 『지장보살신앙 연구』, 『지장보살다라니 수행법』. 현재 경북 영천 육화사 주지, 한국불교사회과학연구소ㆍ한국지장신앙연구소 소장.
|시에티카 신인상 수필 부문 심사평|삶의 무게와 수필에 대한 예의
고성우 씨의 글은 자연과 함께하는 공동체 정신을 평이하고 진솔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백화산 자락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려 살아내는데 여간 어려움이 따르는 게 아니나. 그러나 씨가 발견한 “이 길은 이제 내가 평생을 살아야 할 곳의 길”이라는 발견을 통해 “이웃을 가득 태운 내 차는 눈 쌓인 경사진 도로를 거침없이 올라간다”고 한다. “멋져부러!” 고생일 것 같았던 귀갓길이 이웃으로 하여 참으로 즐거운 길임을 깨닫는다. “백화마을의 겨울밤이 따뜻하게 깊어”가는 것처럼 씨의 글도 깊어가길 바란다.
무통 씨의 글은 지난 과거 농경문화의 기억을 통해 삶의 지혜를 찾아내는 솜씨가 남다르다. 「어머님의 오도송(悟道頌)」은 제목 그대로 어머니의 일상의 진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참 말씀이다. 과거의 비오는 날 “햐! 게으른 놈 잠자기 좋고, 부지런한 놈 일하기 좋겠다!”가 오늘의 비 오는 날 “방일한 자 잠자기 좋고 눈 밝은 자 수행하기 좋은 날씨 아니던가?”로 치환되면서 지혜의 폭이 확장된다.
수필문학은 현실에 처해있는 자신의 삶을 보듬고 갈무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성우 씨와 무통 씨의 글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을 통해 수필문학을 한층 깊게 해주고 있다. 앞으로 좋은 글로 독자에게 큰 감동과 지혜를 선사하는 수필가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이성천(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양문규(시인)
-------------------------------------------------------------------------------------------------------------------
‘자리’에 대하여 / 김 동
백로(白露)가 지나서인지 아침 공기가 신선하고 상쾌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승용차로 갈아타고 출근할 때, 학교 앞 한쪽 길가에 아침 이슬을 머금은 청자색 나팔꽃이 아침인사를 한다. 환하게 미소 짓는 나팔꽃 여운이 가슴에 남아 오전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점심 이후 가을 햇살도 맞고 신선한 바람도 쐴 겸 학교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강당 뒤를 돌아서 오솔길을 걷다 보면 파란색의 달개비꽃이 앙증맞게 피어있다. 십여 분 정도 산을 오르다가 산허리를 반환점으로 돌아서 내려온다.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조금 벗어난 평평한 곳에 전에 보지 못한 살평상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평상을 닦을 수 있는 수건까지 걸쳐있는 모양새로 보아 아마도 주변에 사는 이웃 사람이 최근에 만들어서 가져다 놓은 모양이다.
널찍한 평상에 떡하니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며 먼 곳을 바라본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사이로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교실에서의 학업에 지친 모습과는 달리 생기가 있고 활기가 넘친다.
가까운 곳에서는 청설모가 근처에 사람이 있어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분주하게 먹이를 옮기고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현실에 대한 욕망과 자연의 여유로움을 동시에 일깨워준 주인 없는 빈자리가 더없이 고마울 수가 없다.
단독주택 생활을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아파트 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직장이 멀다는 이유로 본가에서 나와 전세를 살았다. 아이 둘을 낳고 큰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몇 년간 2층 주택에서 살았다. 셋방살이에 지쳐서 본가로 들어오면서 아파트 생활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서 여태껏 본가 2층 주택에서 살고 있다.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직접 모눈종이에 설계도면을 만들고 도목수와 함께 재료를 구매하여 지은 집이다. 건물이 튼튼한 장점이 있지만 오래되어서 내부 구조와 크기가 현재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점도 있다. 주방은 작고 욕실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주방이 좁아서 신혼 때 장만한 식탁을 작은 식탁으로 대체하였지만, 그마저도 건강식품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얹혀있어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 대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방 안쪽에서 따로 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방 입구 쪽에서 함께 식사하였다. 현재 우리집에서는 식탁 대신에 둥근 상에 음식을 차려서 방으로 가져와 식사하고 있다. 모양이 둥글지만 각자 자리가 정해져 있다. 창문 건너편에 내가 앉고 오른쪽에 아내, 맞은편에 둘째 아들이 앉고 나의 왼쪽이 맏아들 자리다. 지금처럼 자리배치가 고정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TV가 창쪽에 있어 간혹 TV를 보면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벽보다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운치가 있는 것 같아서 집안의 가장인 내가 먼저 선점을 해버렸던 것이다. 식사예절에서 현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과거에는 어른을 배려하고 공경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대에 맞지 않고 힘든 일은 차츰 개선해나가야겠지만 전통적인 예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마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교사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교실붕괴’라는 말은 내가 사는 지역이 아닌 다른 일부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겼지만, 지금은 아니다. 수준별 이동수업을 하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 책을 가져 나가는 학생.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잠을 깨우면 겨우 부스스 일어나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경우. 전에는 단순한 가출이나 ‘왕따’현상 그리고 학업성적에 대한 비관으로 말미암은 자살 등이 커다란 문제였다.
이제는 집단적인 따돌림과 집단폭력으로 인한 자살로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신문에 실린 단편적인 기사―“오랫동안 지속된 구타의 흔적”, “문자 답 늦을 때마다 2대 추가”, “물속에 처박자” 등―만 보아도 가해 학생들의 행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담하고 끔찍하다.
‘교실붕괴’의 원인을 찾자면 어디 한두 가지뿐이겠는가! 시장논리에 입각한 입시 위주의 치열한 경쟁교육. 지속적이지 못한 교육정책의 난립. 인터넷 게임과 휴대전화 사용의 급증. 사회 유명인사의 도덕불감증. 출세 지향주의의 사회풍조 등등. 특히 교육문제는 성과 위주의 임시방편적인 처방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보충수업, 사교육 절감을 위한 특별수업, 토요 방과 후 수업도 필요하지만, 정규교과 수업의 내실화가 더욱 절실하다. 중견교사를 퇴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교육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평가라는 명목으로 단위학교 교육활동의 발목을 잡을 것이 아니라 교육예산의 실질적인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교육 주체인 교사, 학부모, 학생 간의 소통과 협력이 절실한 때다.
자리는 각자의 성격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르다.
혼자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때 은근히 옆자리에 이성이 앉기를 기대한다. 젊은 시절 이성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갈 때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보고 싶어한다. 대학 시절 강의를 들을 때는 장학금이라도 받으려고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한다. 나이가 들어서 이런저런 강의를 들을 때는 가능하면 앞자리를 피해서 앉는다.
요즘 들어 50세에서 58세 사이의 베이비붐(baby boom)세대가 은퇴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끈 실질적 주역임에도 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의 책임감으로 노후생활을 불안해한다. 나 또한 그 세대로서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과거 자신의 직위나 현재의 자리에 연연하기보다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준비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자리는 나의 ‘삶’이며 나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당선소감|무지개를 좇아서
먼 길 돌아서/마침내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철없던 시절에/학교 가는 누님이 부러워 마냥 따라 나섰지./몽당연필 주워 모아서 따먹기하고/볼펜대에 끼워서 침 발라가며/꾹 꾹 눌러 공책에 글씨를 쓰네.//학교 파하고/운동장에서 뛰어놀다 더우면 냇가에 가서 멱도 감고/동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저 멀리 산자락에 선명하게 걸쳐있는 무지개를 보고/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냅다 달음박질하네.//어머님 먼저 가시고/아버님 고3때 순직하셨을 때/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대학 학사모에 교복을 입고 멍한 가슴을 달래었네.//직장생활 어언 29년/오로지 한 길을 달려오면서/갈등과 외로움에 밤잠을 설칠 때마다 묵묵하게 옆을 지켜준 아내./아비가 가지 못한 그 길을 맏아들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둘째도 건강하게 군복무에 임하고 있네.//무지개!/저 멀리서 손짓을 한다.
수필공부를 처음 지도해주신 <달구벌 수필>문학회의 장호병 선생님과 수필과 지성 아카데미 문우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한동안 주춤하던 시기에 글쓰기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신 <시다리기> 회원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어린 시절 무지개 좇던 소년의 가슴속 깊이 내재해있던 그 꿈과 대학 시절 다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메모지에 긁적이며 시를 써보던 그 마음을 다시 꺼내보려고 한다.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주신 『시에티카』에 감사드리며 자연을 느끼고 풀 한 포기에도 관심을 가지는 자세로 느리지만 서서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
김 동 경북 성주 출생. 경북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대구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역임. 현재 대구 정동고등학교 교사.
|2013년 시에티카 하반기 신인상 심사평|문학이 ‘말’의 시선으로 시대를 통찰할 때
문학은 한 개인의 내면을 표출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목소리를 담는 양식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문학은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대부분의 작가나 시인들은 사회현실을 도외시한 채 개인의 아우라 속에 갇혀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며 내면을 표출하는데 급급한 게 아닌가 자문할 때가 많다.
문학이 ‘말’의 시선으로 시대를 통찰할 때가 있었다.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고, 피폐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그것은 사화성과 예술성이 다름 아닌 공동체 삶의 성과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2013년 시에티카 하반기 신인상에 세 분의 당선작을 내기로 하였다.
시 부문 나영채 씨의 「돌탑」 외 2편은 원시적 자연의 숨결을 공동체적 삶의 원형으로 복원해주고 있다. “떡갈나무가 풀어놓은 그늘이 넉넉”함 속에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자란다.” 안원찬 씨의 「귀가 운다」 외 2편은 번잡한 일상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양식으로 시가 존재한다. 그것은 “소리의 먼지”를 씻는 행위이기도 하고, “알지이터”가 “붓다의 옷을 입고 태어”나기도 한다.
수필 부문 김동 씨의 「‘자리’에 대하여」는 ‘자리’의 고전적 의미를 현재적 ‘자리’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는 현대수필이 아쉬워하는 작가의식이 깊게 자리한다.
연일 국정원 대선 개입 규탄 시국선언이 붓물처럼 터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문학이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양식으로 소중하게 자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 명의 신인이 문단에 첫 발을 내딛는 발걸음이 힘차길 빈다.
심사위원/공광규(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양문규(시인, 본지 발행인) 이재무(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