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4백년 전통 한옥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영덕 괴시전통마을
마을 입구 공용 주차장의 괴시마을 안내도
■ 고려 말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탄생 마을
■ 조선시대 고택이 밀집한 영양남씨 괴시파 집성촌
■ 한반도 최동단 현존 전통 유림 반촌
■ 전국 주요 전통한옥마을 선정
경북 영덕군 영해면 면소재지에서 대진리 바닷가 방향으로 1km 쯤 가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이며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고색창연한 괴시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인데 목은 선생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자신의 출생 마을이 중국의 괴시마을과 비슷하다고 하여 괴시(槐市)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 지금도 지역에서는 괴시마을 보다 호지마을(호지촌)로 부르는 이들도 많다. 마을의 위치는 동해안 7번국도 영해면 출구에서 2km 이며 영해중고등학교 정문 건너에 있어 찾아가기가 수월하다.
▲ 위의 '길찾기' 글자를 클릭하면 위치를 알 수 있고 '지도'를 드래그 하면 확대 축소 가능
■ 괴시마을 팜플렛
■ 영덕군이 제작한 괴시전통마을 팜플렛
■ 마을 역사
마을은 1260년(고려 고종 46)경 함창(咸昌)김씨(목은 선생의 외가, 선생의 외조모는 정경부인 영양 남씨)가 터를 잡은 이후 수안(遂安)김씨, 영해(寧海)신씨 등이 거주하였다. 1630년(조선 인조 8) 무렵부터 영양(英陽)남씨가 정착하면서 영양 남씨 괴시파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후 타성(他姓)들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조선중기 이후 약 4백년을 영양남씨들이 영해평야의 곡창을 기반으로 유가문화를 이루며 한옥 고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성촌에 살고 있다. |
[상공에서 본 괴시마을]
■ 괴시전통마을의 특성
괴시전통마을은 ‘한반도 동단 영남유림 전통반촌(班村)’ 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유교와 성리학이 조선에서 심화되었듯, 조선의 유교와 성리학은 유림의 본향인 安東을 지나 小安東이라 일컫어 왔던 영해부에서 잘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경상도 영해부가 지정학적으로 바다에 막혀 동쪽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반도의 동단 종동지(終東地)인 동시에, 영남 유림문화의 동녘 종착지(終着地)였기 때문에 오히려 유교의 전통성과 보수성을 지금까지 지닐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영해지역은 고려 시대의 창건된 영해향교를 중심으로 유림이 크게 형성된 곳이며, 영남의 유교가 반촌을 중심으로 심화된 지역이다. 괴시전통마을은 영해부 동단에 자리하며 전통가옥이 밀집한 영양남씨 4백년 집성촌으로 오늘까지 유가의 규범과 행의를 엄수하며 반촌의 법도와 예절이 잘 보존된 마을이다.
괴시마을의 4대 특징은 유가규범(儒家規範), 문한문풍(文翰文風), 전통가옥(傳統家屋),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들 수 있다. 지금도 제례에서 유가의 규범을 지키는 문화와 예절이 이어져 오고 있다. 문한과 문풍으로 영남에서 뛰어난 선비가 배출되었으며 문집과 저술, 유고와 서화 등과 판목이 전한다. 20여채의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및 조선시대 가옥들이 복원되어 옛모습을 찾았고, 각각의 고택들을 둘러싼 기와 토담과 마을을 종단하는 1km의 전통 토담길은 유명하다. 내방가사, 윷놀이, 척사, 줄다리기, 정월대보름 민속놀이 등의 세시풍속은 대를 이어서 전승되어 왔다.
■ 주변 환경
마을은 주봉 망월봉(望月峰) 아래 여덟 팔(八)자 형국으로 자리잡아 자연 지형에 맞춘 가옥구조가 대부분 서남향으로 되어있다. 마을 가옥 중에서 30여 호가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인 <영해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이 마을이 옛부터 세도가들의 터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괴시마을은 해안에서 약 3Km 거리에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동해 바닷가와 가장 근접하여 형성된 양반촌으로 이는 비옥한 영해평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해부(寧海府)는 넓은 평야와 풍부한 물산으로 고려 초기부터 천여년을 도호부(都護府)로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영덕에 군청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영덕, 영양, 평해를 속현으로 두고 작은 안동(小安東)이라 불릴 정도로 유교문화가 발전된 곳이다. 특히, 집성 반촌인 괴시마을, 인량마을, 원구마을을 중심으로 영양남씨, 재령이씨, 안동권씨, 무안박씨, 대홍백씨 등이 주도하여 발전해온 큰 고을이었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영해부 출신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의 항일 전투 등 의병 활동이 격렬하였고 일제의 군청 개설을 반대했던 유림의 고장, 이 곳 영해부를 고려시대 이래 천년의 도호부(지금의 市규모)에서 한낱 일개의 면(面) 단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해촌 고택
■ 전통 행사
괴시전통마을은 조선후기 영남 사대부들의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어 조상의 멋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 체험의 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 2003년부터 2년마다 5월에 이곳에서 <목은 문화제>가 열리고, 2006년도부터 매년 10월경 <호지말 한마당 잔치>와 목은 이색 탐방로 걷기행사가 펼쳐져 관광객들에게 소중한 지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 영양남씨와 괴시전통마을
마을이 영양남씨 괴시파 4백년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것은 영양관의 1세조인 고려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영양군 홍보의 15세손이며 영해부의 입향조인 용담현령 송정公 남수(南須,1395~1477)의 8세손인 장사랑 사재감 참봉 남두원(南斗遠, 1610~1674) 公이 1630년경에 시거하면서부터이다.
남씨(南氏)는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렴사(按廉使) 김충(金忠)이 황명으로 일본 사신을 다녀오던 도중에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영덕 축산에 표착(漂着)한 다음, 신라에 살기를 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姓)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였다. 시조인 영의공 남민(南敏)이후 고려 중기에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남씨로 분관되어 영남과 경기지역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 인구는 약 25만명에 이른다.
▲영덕군 축산항, 시조 영의공 표착지에 세운 남씨발상지 비석, 전 국무총리 남덕우가 쓰고 <남씨대종회>에서 세우다
영양남씨 괴시문중은 시거조(始居祖) 두원 공에 의해 비롯되었고, 公의 장남 붕익(1641~1687)이 현종 13년(1672년)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영산현령을 지낸 이후, 마을의 문한(文翰)이 이어져 영남 유림에서도 우수한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괴시남문은 영해부 향교를 중심한 지역유림과 향촌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적 관혼상제의 예절이 근래까지 전승되어 온다.
학문을 위해 건립하였던 입천정, 괴정, 만루한, 침매정, 물소와서당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문중 선조들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제사(齊舍) 6곳(덕후제, 태창제, 추모제, 추원제, 영모제, 양걸제)에서 해마다 정해진 날에 제사를 모신다. 전통 민속놀이로서 윷놀이, 줄다리기 등과 농사와 관련된 세시풍속이 전래되어 왔으며, 유가의 규범과 행의를 엄수하는 문화와 예절이 이어지고 있다.
▲ 마을행사에 참석한 괴시마을의 어른들
근대에는 기미년(1919년) ‘영해3.18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계병(南啓柄-남세혁, 신돌석 의병장 적극 후원, 영해 협창학교 설립 항일사상 고취, 만주망명 독립군 모집, 건국훈장 애국장), 남진두(南鎭斗,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순국, 건국훈장 애국장), 남효직(南孝直, 건국훈장 애족장), 남응하(南應夏, 독립유공자) 등 영양남씨 괴시파가 영남 지역에서 구국과 항일 운동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뿐만아니라 인근 마을 영양남씨들과 함께 했던 독립 만세는 문중 차원의 국권회복 운동이기도 하였다.
1919년 영해 장날에 일어난 3.18 독립만세운동에 2천명이 참여, 한강 이남에서 벌인 만세운동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평가된다. 2014년 기준으로 독립유공자 경북 2,071명 가운데, 안동 344명, 영해를 비롯한 영덕이 206명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의 통계는 영덕으로 집계되지만 당시 독립만세는 영해지역에서 일어난 의거였으며 유공자 대부분이 영해인들이었다.
마을은 입향조가 세거한 조선 중기 이후 문과(대과) 급제와 사마시(생원, 진사) 급제가 이어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영해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근래에 와서도 엄한 법도 속에서 성장한 마을 출신의 인재와 자손들이 국내와 외국 여러 분야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40명에 가까운 박사와 대학교수들을 배출한 것은 글을 숭상했던 마을의 문한과 문풍에 의한 것이라 보여진다.
영남 지역에서 영덕 괴시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는 또 다른 반가의 고풍스런 멋이 있다. 괴시마을은 하회와 양동에 비하여 마을 유래, 마을 형태, 가옥 구조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괴시마을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동해에 가장 인접한 유림 양반촌으로 주변 풍광이 수려하고 농산, 임산, 수산 등 물산이 풍부하다. 하지만 유가(儒家)의 범절과 관혼상제, 반가(班家)의 문한(文翰)과 문풍(文風)이 동일하여 예전부터 서로 간의 혼인을 통한 인척 관계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문중 간의 교류가 이어져 오고 있다.
근래에 와서 중앙정부, 경상북도, 영덕군의 3체제 지원과 <영남 북부권 유교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괴시마을의 전통 유교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2000년 이후 약 7년간 110억 원 이상의 사업비를 투입하였다. 목은 이색 선생의 추모 유적지와 20여 호의 고택을 복원하고 마을을 정비하는 국가사업을 전개한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우리나라의 특색있는 전통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괴시마을은 서울 은평역사전통한옥박물관이 주관한 전국 24곳 전통마을에 선정되어 특별사진전이 열리기도 하였다(동 박물관, 2015).
■ 영양남씨 상징 조형물 ▼영양남씨를 표상하는 조형물을 시조 영의공의 표착지 인근이며 4백년 집성촌인 괴시마을 앞에 세우다 <영양남씨대종회>2016.9
■ 주요 고택과 가옥 구조
마을의 전통 가옥들은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남아 있는 고택들은 모두 200~3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들로, 'ㅁ'자형 구조인데 영남 반촌(班村)에서도 보기드문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뜰을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랑채 뒤에 안채를 숨겨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사대부가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30여 호의 고택 가운데 종택, 대남댁, 물소와고택, 해촌고택, 구계댁, 주곡댁, 괴정(槐亭),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 국가 및 道 문화재 자료만도 15점이 된다. 조선 후기 영남지역 사대부가의 주택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학자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
▼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과 사당(민속자료 제75호) ▶ 남석순 교수의 종가댁
종택은 입향조의 장남 남붕익 공이 약 300년 전에 건립한 가옥으로 “☐”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조선후기 주택의 소박한 고격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괴시마을 공간 구성에서 핵심적인 가옥이다.
아래 사진 ▼ 종택 사랑채로 두차례 중수되었으며 ▶우측으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이어져있다.
▼ 대남댁(문화재자료 제197호) ▶ 남석순 교수의 작은 종가댁
입향조의 차남 남붕한 공의 손자 괴정 남준형 공이 영조 42년(1766)에 건립하여 약 250년된 가옥으로 1911년에 중수하였으며 평면구성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통례칸과 사랑채의 내부공간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 공간은 안채 ‘ㅁ’과 별도의 사당채 ‘ㅡ’ 로 구성되어 있다.
▼ 물소와고택(문화재자료 제198호)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 공이 종택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이 건립한 집으로 1864년에 중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출입구에는 남, 여의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는 담이 높게 쌓여 있으며, 관련 건물로 물소와서당이 있다.
▼ 해촌고택(문화재자료 제199호) ▶ 남석순 교수의 백부님 댁
괴정 남준형 공의 차남 해촌 남극만 공이 영조 31년(1775)에 건축하여 240년이 넘었으며 고종 15년(1878)에 보수한 고택이다. 정면 4칸, 측면 7칸의 안채와 사당의 ‘ㅁ’ ‘ㅡ’ 구성되어 있고, 안채는 정침과 아랫방, 중문, 큰 사랑 및 작은 사랑이 배치되어 주택의 평면과 공간구성이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 천전댁(문화재자료 378호)
남유용 공이 광서 2년에 건립한 건물로 안채에 사랑채와 문간채에 연결된 “ㅗ"형태로 이어진 독특한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어 “날개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 주곡댁(문화재자료 제393호)
소유자의 7대조인 남경괄 공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그 현손인 남효순(1863~1942) 공이 중수하였다. 택호에는 남효순의 처가 소재지인 한양 조씨 집성촌인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를 딴 것이다.
주곡댁의 독특한 현판 글씨(사진)는 未齊와 遲庵이다. ‘미제’는 아직 덜 된, 가지런하지 못한, ‘지암’은 더 딘과 집의 뜻을 갖고 있으니 ‘아직 덜 된 사람과 더딘 사람이 사는 집’으로 이해된다. 안대문에 글씨 鬱壘와 神荼 즉, 울루와 신도는 집안으로 들어오는 잡귀들을 물려 쳐 주는 귀신을 말한다.
▼ 경주댁(문화재자료 제395호)
고택은 함창김씨, 수안김씨, 영해신씨, 신안주씨 등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을 당시, 수안김씨가 살았던 건물이라 전해지고, 마을에서 천전댁과 더불어 집 앞에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구계댁(문화재자료 제396호) ▶ 남석순 교수의 종숙(5촌)댁
남경악(1763~1821)공이 1805년경에 건립하였고, 그의 현손인 남경목이 1910년경에 중수한 ☐자형 가옥으로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나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 영은고택(문화재자료 제459호)
고택은 남공수 공(1793~1875, 괴정 준형 공의 증손)이 건립하였고, 마을 내 다른 가옥과 달리 전면 좌우측에 처마를 달아 팔작지붕의 박공 부분이 보인다. 관련 정자로는 스무나골에 침수정이 있다.
▼ 사곡댁(문화재자료 제425호)
남용이 고종 27년(1890)에 건립한 것을 1942년 남응호가 매입하였으며, 택호는 증조부인 남조영의 처가 동명인 경주 사곡을 딴 것이라 한다.
▼ 백회재 고택
▼ 상귀댁
▼ 상포댁
▼ 도평댁(남석순 교수댁)
1880년 건립(140년 전) 때는 초가(草家)였으나 1928년 남석순 교수의 조부(남진해 公)가 친척에게 매입, 와가(瓦家)로 개축하여 해촌고택에서 살림을 난 집으로 8칸 겹집이다. 道平宅 택호는 남교수 조모의 친정, 한양조씨 집성촌(시인 조지훈 문중)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에서 비롯되었고, 모친의 친정(안동 의성김씨-안동군 길안면 지례동 국란리)을 지칭, 菊蘭宅으로 부르기도 한다. 2004년 국가 유교문화권사업의 일환으로 중수된 가옥이다.
▼ 괴정 앞 풍경
괴정(서당)앞에서 해촌고택(백부님댁), 구계댁(종숙댁)이 보이는 사진으로 아랫마을의 중심축에 있다.
▼ 입천정(문화재자료 제392호)
남붕익(1641~1687)공이 1680년경에 건립하여 학문을 강도하였다고 하며 200여년이 지난 후 5대손 남흥수가 여러 친족과 힘을 모아 그 터에 입천정을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경사지형에 입천정과 마계정사, 고직사가 배치되어 있다.
▼ 괴정(문화재자료 제397호)
조선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 공이 고려 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부자의 유허지인 이곳에 槐亭을 창건하여 景牧齋라 하고, 연못을 파고 괴류를 심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다. 괴정 중건기에 의하면 순조 17년(1817)에 중건하였고 이후에 고종 13년(1876)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 물소와서당(문화재자료 제394호)
물소와 서당은 좌승지에 추증된 남택만(1729~1810) 公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축한 것으로, 한때는 사당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한다.
■ 목은 이색과 괴시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