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2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아합의 시대가 끝이 나고 아하시야가 왕이 됨과 동시에 엘리야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제 엘리사의 시대가 시작된다.
왕하 2장은 왕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지자 엘리야가 능력이 엘리사에게 이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엘리야는 이제 자신의 시대가 끝이 나고 하나님앞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슴을 깨달았다.
엘리야는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을 거쳐 요단까지 갔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있는 선지자 생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한 엘리사는 한사코 엘리야를 따라 요단에 까지 동행했다.
요단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시신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찾는다고 찾아질 리가 없다.
선지자 생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엘리야가 승천했다는 것을 그냥 그렇게 표현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시신이라도 찾아서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지자 생도들이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사흘을 골짜기와 산을 찾아다녔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보면 엘리야는 태풍에 실종하여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하고 '실종사'로 처리되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수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얽기섥기 엮어놓는다고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설명할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논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명확하게 설명할수 있게 된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선지자 생도들의 영적 상태가 이러하건데... 일반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할꼬?
뻔한 일이다.
엘리사는 요단에서 다시 여리고를 거쳐 벧엘로 돌아갔다.
엘리야가 머물러 있으라고 한 그곳으로 엘리야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되돌아 온 것이다.
여리고성은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제대로 익지 못하고 떨은 맛을 내는 곳~이라고 성경은 평가하고 있다. (19절)
그것은 여리고성에 사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반영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은 믿는다.
겉모습은 교회도 다니고 경건하게 사는 것 같다.
그러나 그안에 물이 좋지 않다.
생명력은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
그것이 여리고성 백성들의 영적 실상이었다.
엘리사는 여리고성의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던졌다.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레 2:13, 민 18:19, 대하 13:5)
소금의 결정은 정육면체를 형성한다.
말씀의 완전무결함을 의미한다.
소금은 단단하다.
언약의 견고함을 의미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낸다.
말씀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소금은 부패를 막는다.
말씀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약의 소금은 죄를 씻는 정결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형식이나 제도의 겉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 던져질때 생명력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벧엘의 어린 아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져 버렸다.
어린아이들이 왜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하여 대머리라고 놀려댔을까?
집에서 부모들이 욕하며 뒷담화 까는 것을 아이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 같이 들린다.
차라리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들리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말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설명은 해주지 못하면서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정직하고 고백하고 가르쳐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해야한다.
그럼 왜 깨달음을 주시지 않겠는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느냐고~ 대머리 주제에~ 뒷담화까는 것을 아이들이 듣고 그렇게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는 대물림된다.
에이~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만 지껄이는 대머리~~
그것은 아합과 아하시야의 합리주의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곰을 보내 그들을 죽이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일뿐... 영적실상은 그들이 이미 죽은 상태임을 말하고 있다.
엘리사는 그런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선지자 생도들앞에 되돌아가 섰다.
엘리야의 유언과 같이 그곳이 바로 엘리사 자신이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엘리사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엘리야가 고난받았던 것처럼 엘리사도 굶주리고 고난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들려왔다.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비록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으며 이제는 바알과 파리신 바알세붑에게 비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세상보다 더 완고하고 완악한 상태가 되어져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그들에게 보내주신다.
엘리야의 시대가 가고 이제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고
엘리사는 선지자 생도들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무도 몰라주지만....
에이~ 황당한 말이나 지껄이는 대머리~라고 조롱하고 놀리지만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