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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다리 쉼터 (단편소설)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섯 달하고도 달포쯤 더 지났을 때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른여덟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열 살 난 나를 데리고 느닷없이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읍이라는 낯선 소읍으로 이사를 했다.
서울을 떠나 일가친척은커녕 안면 있는 사람 하나 없는 완벽한 타지인 그 곳으로 이사를 한 이유는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꽤 길었던 아버지의 와병과 죽음 후에 어머니가 지친 심신을 달랠 겸 해서 부산행 열차를 탔는데 삼랑진역에 도착할 무렵, 어린 아들이 배탈이 나 부득불 삼랑진에 내려 역전 여인숙에서 하룻밤 지냈고, 그 인연으로 그냥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였다.
역전 국밥집에서 허기를 달래는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우리 그냥 여기서 살아 볼까’ 하는 어머니의 혼잣말이 어쩌면 삼랑진에 정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한 편으론 지친 심신을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고.
그렇게 도착한 삼랑진에서 어머니는 역전 여인숙-이름을 로만여인숙이라고 했다-에서 며칠 쯤 더 머물며 이 곳 저 곳을 돌아본 후에 어느 날 느닷없이 나를 데리고 여인숙을 나섰다.
“가자. 우리가 살 집을 구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역전에서 시장 쪽으로 향한 큰 길을 걸어갔다. 한 이십분쯤 걸어가자 철길 건널목이 나타났고 건널목을 지나 약간 내리막길로 향한 길이 나타났다. 그 길로 내려가자 널따란 장터가 보였는데 마침 장날이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흥청대는 모양이 시골 소읍치고는 제법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삼랑진은 조선시대 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오일장이 서는 곳이었다.
신기한 시골 장날 풍경에 두리번거리는 나를 이끌고 어머니는 복잡한 장터를 빠져나와 사거리 쪽으로 향했다. 그 사거리는 오른쪽으로는 밀양 가는 길이고 어머니와 내가 걸어온 길은 삼랑진역을 지나 안태마을, 원동면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으며, 왼쪽 길은 읍사무소로 향하는 막힌 길이었고, 정면으로 향한 길이 김해 쪽으로 향한 길이었다. 어머니는 김해 쪽으로 향한 길을 따라 걸어갔는데 사거리에서 오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송진국민학교라는 조그마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를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라 불렀다 -가 있었다. 내가 전학할 학교였는데 미처 살펴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송진국민학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놓여진 높은 철둑과 나란히 이어진 길을 한참 더 걸어가서 어머니는 문득 철둑 아래 굴다리가 있는 산자락 쪽으로 방향을 꺾어 들어갔다. 굴다리를 지나자 높은 담벼락처럼 놓인 철둑과 비탈진 산자락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의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신촌이라는 마을이었다. 아마도 높은 경전선 철둑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던 탓에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낯선 마을의 초입 그러니까 굴다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허름한 어느 집 앞에서 어머니의 걸음은 멈추었다.
“여기가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이다.”
어머니의 당당한 선언과 같은 말에 눈앞의 집을 바라본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양철 지붕의 그 집은 꽤나 오래 사람이 살지 않은 듯한 폐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이라고?”
“그래. 조금만 수리하면 꽤 괜찮은 집이 될 거야.”
어머니의 당찬 선언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삼키고 그 집의 녹슬고 반쯤 부서진 낡은 양철 대문을 슬쩍 밀었다.
“끼이익, 철푸덕 ”
대문이 열리면서 한 짝이 떨어져 나가는 요란한 소리가 났고 나는 깜짝 놀라 어머니 뒤로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웃음꽃을 피운 얼굴로 돌아보고는 앞장서서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몇 그루 벚나무와 감나무가 담장 아래로 둘러싼 듯 서있고 작은 화원에는 접시꽃 맨드라미 홍란 백작약 같은 꽃들이 잡풀들과 어우러져 있는 서른 평은 넉넉히 됨직한 마당과 우물이 보였다. 마당을 지나 부엌과 문 하나를 둔 방과 또 다른 방 하나가 연이어 있는 안채가 있었는데 안채 옆으로 화장실과 창고 건물이 기역자 형태로 엉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것들은 어쩌다 태풍이라도 찾아들면 금방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와 보였다. 부엌은 재래식 아궁이 두 개와 무쇠솥이 걸려있었고, 나무로 짜 맞춘 오래되어 보이는 찬장 같은 것이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검댕이 묻었는지 거무스름했다. 툇마루를 지나 방으로 향한 여닫이문을 열어보니 누런 한지 장판이 군데군데 눌고 얼룩이 진 모습으로 깔려 있었고 벽지는 신문지와 폐지를 어수선하게 붙여놓은 것이었다. 물론 방안에서 풍겨오는 곰팡이 냄새 같은 쾌쾌한 냄새도 덤으로 남아있었다.
“며칠만 이렇게 지내자. 내일부터 수리할 사람 불러 놓았으니 수리 끝날 때까지만 불편해도 좀 참으렴.”
그렇게 시작된 삼랑진에서의 생활은 처음엔 모든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다.
처음으로 부딪힌 문제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지독한 악취와 벌레들, 볼일 볼 때마다 똥통에 빠질까 싶은 두려움은 무엇보다 쉽게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어머니가 창고와 재래식 화장실을 가장 먼저 수세식 화장실과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개조한 탓에 재래식 화장실에 대한 불편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해소 되었던 것이 그나마 어린 마음에도 다행이다 싶었다.
집수리를 하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난리를 치듯 달포 만에 창고를 헐고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을 만들고, 가게를 만들고, 안채 지붕을 고치고, 물받이 홈통을 달고, 부엌을 현대식으로 개조하고, 벽지와 장판을 새로 깔고 붙이고, 마루 끝에 미닫이 중문을 달고, 천장의 백열등을 형광등으로 바꾸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 사는 집 같은 모양이 되었다.
집수리가 진행되는 동안 어머니는 서울의 집을 팔고 세간을 정리해서 실어오고 살림살이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다니셨다. 내가 보기엔 어지간히 피곤할 법 한데도 파릇파릇 생기가 도는 모습이 갓 신접살림을 준비하는 새색시 같았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는 말수도 적고 하루 종일 고아한 품세로 단정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는데 어디에 그런 활력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억누르고 있었던 본래의 기질이 발현된 것인지 신바람 같은 것이 어머니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집수리가 끝나고 서울서 실어온 세간을 정리한 후 어머니는 막걸리 가게를 시작하였다. 시루떡을 넉넉히 쪄서 신촌 마을 집집마다 돌리며 개업신고를 했지만 처음에는 타지에서 온 과부댁이 하는 곳이라는 경계심에서였는지 낯가림을 하는 탓이었는지 하루 두 서넛 쯤의 손님이 겨우 찾아드는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 장날이 지나가면서 어머니의 정갈한 서울식 음식솜씨와 넉넉한 인심 덕분에 조금씩 입소문이 나서 평일에도 스물이 넘는 손님들이 쏠쏠히 찾아드는 가게가 되었다. 특히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아침부터 술손님 밥손님으로 밖에 놓아둔 두 개의 평상까지 다 채우고도 기다려서 먹고 갈 정도가 되었다. 술도가에서 막걸리를 배달하는 강씨의 말에 따르면 인근 다른 막걸리 가게는 하루에 말통으로 두 말 정도를 파는데 어머니의 가게는 보통 하루 다섯 말을 팔았고 장날이면 열 말을 팔았으니 많이 파는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가게 안쪽 모퉁이 땅에다 두말쯤 들어가는 장독을 두어 개 묻어놓고 그 속에 막걸리를 부어놓고 팔았는데 술독의 술이 떨어지면 얼른 술도가로 달려가서 주문을 해야 했다. 술도가에 가서 주문을 하는 심부름은 내 차지였는데 심부름 할 때마다 받는 용돈과 군것질거리가 쏠쏠했다.
그러나 내가 전학 수속이 끝나서 송진국민학교 삼학년 이학기에 편입하여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집에 전화기를 설치한 탓에 그 심부름은 중단되었다. 대신 집 뒤에 만든 닭장에 열 마리쯤 닭을 키워 아침마다 달걀을 꺼내 어머니에게 드리는 일로 내 용돈벌이는 대체되었다.
신촌에 자리 잡은 어머니의 막걸리 가게는 참 묘한 위치였다.
어머니는 가게 간판을 [굴다리 쉼터]라고 붙였는데 굴다리라는 이름이야 가게 근처에 굴다리가 있으니 붙일 만하다고 여겼지만 막걸리 가게 이름에 왜 쉼터라는 말까지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누구나 와서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쉬어가라는 뜻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어머니의 삶에서 쉬어가는 시기라는 뜻을 담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흐린 하늘같았던 어머니의 분위기가 가게를 시작하고부터 파릇파릇 생기가 도는 모습이어서 그런 생각은 이내 지워졌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가게 이름에 굴다리 뒤에 쉼터라고 덧붙인 것은 삼랑진이라는 곳에서 신촌이라는 마을이 가지는 위치를 어렴풋하게 읽어낸 어머니의 지혜의 소산이 아니었나 싶다.
지방 소읍치고는 꽤나 큰 이만 호 쯤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삼랑진은 경부선 철도역인 삼랑진역과 경전선 철도역인 낙동강역이라는 두 개의 철도역을 가진 특이한 곳이었다.
삼랑진역은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 물동량이 많아서 제법 큰 역이었고, 삼랑진역에서 김해 쪽으로 이어져 있는 경전선 쪽의 낙동강역은 조그마한 간이역 형태의 역이었다. 신촌은 그 중에서 낙동강역에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신촌을 기준하여 왼쪽인 삼랑진역 쪽으로는 부산이나 마산, 대구 등지의 대도시에 나가 제법 많이 배우고 돌아온 사람들이 시장과 역을 끼고 장사를 하거나 읍사무소, 우체국, 보건소, 농협지소, 병원이나 삼랑진역 역무원, 선로보수반 같은 곳에 근무하며 모여 사는 외송, 내송, 송원, 검세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었다.
신촌의 오른쪽인 낙동강역을 지나 김해 쪽으로는 낙동강에 재첩을 캐는 배를 띄우거나 강변에 면해있는 넓고 기름진 농지와 매봉산 자락에 조성한 과수원 같은 것을 일구며 대대로 삼랑진에서 살아온 토박이들과 집단 씨족들이 모여 사는 상부, 하부, 하양, 낙동, 뒷기미 같은 이름의 집성촌 비슷한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촌은 낙동강역과 삼랑진역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서 토박이도 아니고 어깨에 힘줄 정도의 배움이 넉넉하지도 않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과 외지에서 들어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사십 호 쯤 되는 작은 외톨이 같은 마을이었다.
그렇게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신촌에는 무당도 있었고 점집도 있었으며 어부인 최씨네와 장의사인 염씨네와 스스로 백정이라고 말하는 도축일꾼 장씨와 은밀하게 두 집 살림하는 읍장과 우체국장, 농협의 조합장의 작은집인 강철이네, 점순이네, 미숙이네도 있었다. 어쩌면 신촌은 삼랑진이라는 곳에서 뿌리가 잘린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흡사 매봉산에서 신촌을 가로질러 낙동강 쪽으로 흐르는 온갖 생활하수가 뒤섞인 또랑물이 송지저수지에 잠시 머물며 정화작용을 거쳐 강으로 유입되는 것처럼 신촌은 삼랑진이라는 곳의 송지저수지 같은 곳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러한 신촌의 속살을 알려준 사람은 내가 이사 와서 처음으로 만난 동갑내기인 기숙이라는 계집아이였다.
어머니가 가게를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월의 더위도 꺾여 조금 선선할 무렵이었다. 아직 전학 수속이 끝나지 않아 학교에 가지 않고 가게에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아버지가 남기고 간 영어로 된 소공녀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니 친구 엄나? 와 핵교에 안가고 혼자 이카고 있노?”
한 쪽 다리를 저는 땅딸막한 키의 장씨가 두툼한 손으로 가게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나를 향해 툭 말을 던졌다.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장씨의 말이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빤히 장씨를 쳐다보았다.
“이사 온지 얼마 안되서 아직 전학 수속이 안끝나서 그래요. 게다가 이곳 사투리에 적응이 안되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후훗.”
어머니가 가게에서 나오며 살풋 웃음을 섞은 말투로 나 대신 장씨에게 대답을 건넸다.
“글소? 햐, 고놈 똘똘하고 실하게 생깃네. 몇 살잉교?”
장씨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열 살이예요. 국민학교 삼학년에 편입할 거예요.”
“열 살인데 벌써 저레 두꺼븐 책을 다 읽네? 히야, 똑똑한 아들내미 뒀는가베 아지매.”
“호호, 도시 애들은 대부분 저 나이에 저 정도 책을 읽는 답니다.”
“그럿소? 그래도 우리 기숙이도 이 집 아들내미랑 동갑인데 아직 저런 두꺼븐 책은 몬 읽을 낀데?”
“학교가면 다 배워요. 세월 지나가면 똑같아지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막걸리가 담긴 노란 주전자와 사발과 안주를 내놓으며 건네는 어머니의 대답에 장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걸리부터 한 사발 따르고 이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 술값은 이거로 하소.”
장씨가 빈 사발을 내려놓고 종이로 싼 두툼한 고기 한 덩어리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오늘도 어디 도축일 해주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가지 안주를 더 내놓았다. 그렇게 장씨가 두어 사발쯤 마셨을 때였다.
“아부지, 어무이가 불러오라 캤다.”
볼품없이 키만 쭉 웃자란 듯한 계집아이 하나가 마을 쪽에서 가게 쪽으로 뛰어오며 소리를 쳤다.
“저 가시나가 지 아부지한테 말하는 폼 쫌 보소. 야, 기숙아 니 일로 쫌 와 바라.”
기숙이라는 계집아이가 약간 주뼛거리는 걸음으로 가게로 다가오자 장씨가 나를 가리켰다.
“절마가 이집 아들내미라 카는데 니캉 동갑이랜다. 둘이 친구해라.”
그러자 기숙이의 날카로운 눈길이 대뜸 나를 향해 건너왔다. 시골아이의 순수한 눈빛이 아닌 야생의 날 것이 상대를 가늠해보는 듯한 음험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렇게 잠시 나를 가늠해보던 계집아이가 눈빛에 담긴 음험함을 감추며 탁자 앞에 앉아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이름은 장기숙이다. 니 이름은 머꼬?”
“이름? 난 이가 성에 동자 하자를 쓰는데?”
“머그리 어렵게 이바구하노? 몬알아 묵것다 머시마야. 이름만 퍼뜩 말해바라.”
계집아이가 화가 난 것처럼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어머니가 한 바탕 웃음을 쏟아내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계집아이를 바라보는 나를 대신하여 말했다.
“기숙아, 저 얘 이름은 동하, 이동하란다. 둘이 잘 지내보거라. 호호호호.”
어머니 말을 들은 계집아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동하라꼬? 알것다. 니 내캉 오늘부터 친구하재이.”
그 때부터 기숙이라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키가 큰 계집아이는 날마다 나를 찾아오는 우리집 단골이 되었다.
여기저기 참견할 곳 안할 곳 가리지 않고 마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버릇을 지닌 기숙이는 야생동물들이 늘 더듬이를 세우고 있는 것처럼 예민한 사회적 감각을 지닌 아이였다. 나를 데리고 마을 이 곳 저 곳을 온통 헤집고 다녔는데 남의 집에 들어갈 때도 자기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함부로 쑥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기숙이가 자기 집에 불쑥 들어와도 그냥 쓰윽 한번 쳐다보고는 하던 일을 그대로 하거나 혼잣말처럼 ‘저 가시내가 또 쳐들어 왔네.’ 하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그런 기숙이의 호전적이고 예민한 호기심 덕분에 금방 신촌이라는 마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정을 빠르게 습득하게 되었다.
우리 집 뒤에 솟아있는 산이 매봉산이고 신촌이라는 마을이 매봉산 치맛자락에 초승달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듯한 형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집을 기준하여 왼편의 이십호 정도가 모인 곳이 신촌 일반이고, 오른편의 이십호 정도 모인 곳을 신촌 이반으로 부른다는 것. 신촌 일반과 이반 사이가 같은 마을이지만 별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다는 것 등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느그집 왼쪽편 뒤 일반 쪽에 있는 집이 곱사등이 양씨집이고 양씨는 양봉쟁이다.”
“곱사등이는 뭐고 양봉쟁이는 또 뭐야?”
기숙이는 허리를 굽히고 등에 손으로 낙타등 같은 모양을 그리면서 말했다.
“곱사등이는 등에 이렇게 혹이 난 사람이다. 양봉쟁이는 벌통을 갖고 여기저기 댕기면서 꿀을 딴다 카는데 꿀 따러 댕기는 사람을 양봉쟁이라 칸다더라.”
기숙이는 양씨가 일년에 몇 달씩 집을 비우고, 양씨가 집을 비울 때마다 양씨집에 삼랑진역에서 선로보수반원으로 일하는 김씨가 가끔씩 들른다고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속살거리며 말해주기도 했다.
산자락 쪽으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은 무당집이고, 그 아래 있는 집이 어부인 최씨네 집인데 최씨는 밀양쪽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에서 가물치를 서너 마리씩 잡아다가 장날마다 시장에 내다판다고 가물치도사라고 했다. 그리고 시장통 사거리 근처에 있는 화도반점이라는 중국집이 최씨 아들내미가 차린 가게라고 덧붙였다.
“최씨네 집 옆집이 점순이네 집이고, 그 맞은 편 집이 강철이네 집인데 아지매들이 점순이 엄마랑 읍장이랑, 강철이 엄마랑 하양 동네 이장이랑 얼레리꼴레리 한다고 카더라.”
물론 얼레리꼴레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기숙이도 정확히 설명하진 못했지만 신촌 이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이 미숙이네 집인데 거긴 농협 조합장이 돌봐주는 집이라는 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기숙이는 그런 것들을 어찌 그리 잘 아느냐는 내 감탄 섞인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그런 것쯤이야 하는 모양을 내비쳤지만 표정은 제법 흥분된 모습이었다. 자신이 애써 알아낸 신촌의 여러 가지 정보들을 나에게 전해주면서 자신이 무슨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기숙이를 통해 알게 된 신촌이라는 마을은 일반과 이반 사람들이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으며 신촌을 기준으로 낙동강역쪽 상부, 하부, 하양, 낙동, 뒷기미라는 마을의 사람들과 삼랑진역쪽 내송, 외송, 송원, 검세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소 닭보듯 하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촌에서 어머니의 막걸리 가게 위치가 묘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어머니가 가게를 시작한지 일 년쯤 지난 초가을이었다.
사학년이 된 나는 학교를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어머니의 막걸리 가게 앞 길가 공터에서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곱사등이 양씨가 선로보수반원인 김반장이라는 사람에게 얻어맞고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말리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때리는 쪽도 맞는 쪽도 별다른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서로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정당함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싸울 법한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말이 없고 곱사등이 양씨는 억센 김반장의 손에 멱살이 잡혀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면서 장난처럼 툭툭치는 김반장의 주먹 앞에 눈빛만 쏘아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싸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말리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일반 이반 할 것 없이 골고루 섞여있는 사람들이었다.
“김반장, 와이카노. 사람 잡것데이. 얼릉 고마해라.”
“양씨 퍼뜩 미안하다꼬 하소.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다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금천댁이 어데서 무신 딴 짓을 했것능교? 걍 같이 어불리서 막걸리 한잔 한 거 갖고 갠한 오해해 가꼬 이 사단을 맹그요. 퍼뜩 미안허다꼬 하소.”
사람들은 한결같이 양씨 마누라인 금천댁을 두둔하면서 김반장편을 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보소. 김반장요. 그만하몬 양씨도 알아 묵었을 꺼니까 손 털고 술이나 한잔 더 하다 가소. 갠히 우리 동네 와가꼬 욕봤다는 말 날까 겁나요.”
“그랴. 양씨도 금천댁 아지매 체면 생각해서 업던 일로 하고 고마하소.”
나이 지긋한 아지매들이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자 김반장은 슬그머니 양씨의 멱살을 잡았던 손의 힘을 풀고 마을 아낙들의 떠미는 몸짓에 못이기는 척 어머니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양씨는 여전히 억울한 표정이 남은 듯했으나 더 이상 댓거리를 하진 않고 땅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가 사람들이 흩어지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 사라졌다.
나는 그 소동을 바라보면서 막연하게나마 신촌이라는 마을이 품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한 가지 모습으로 싸움을 말리면서 금천댁과 김반장 편을 드는 모양새는 일반과 이반이 서로 친하지 않다는 기숙이의 말이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비슷한 소동이 다시 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소동의 당사자는 달랐지만 마을 아낙들이 신촌마을 사내를 편들지 않고 누가 잘못했는지 흐지부지 되는 모양새는 똑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막걸리 가게가 있는 길가 공터가 신촌 사람들의 심리적인 완충지대였는지 소동이 나면 늘 그곳에서 났다. 그리고 그 결말은 한쪽은 말리던 사람들과 어머니 가게로 들어갔고 다른 한 쪽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으로 흐지부지 되는 것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똑같았다.
언젠가는 키가 훤칠한 키에 흰 피부를 지니고 약간 대머리인 읍장과 하양마을 이장이 농협조합장과 우체국장과 함께 어스름한 시간에 신촌에 나타나 어머니의 가게에서 함께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뜨이기도 했다. 그 때서야 나는 사람들이 왜 어머니의 막걸리 가게 앞으로 모여드는지 희미하게 이해되는 것 같았다. 아니 신촌이라는 마을이 품고 있는 내밀한 그 무엇을 어렴풋하게 짐작했다고나 할까.
그런 나의 신촌 마을에 대한 관심도 사학년이 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도시에서 살다가 온 나는 학급에서 꽤나 똑똑한 아이였고 사투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방과 후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학교 대표로 밀양교육청에서 개최하는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수학경시대회 등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 즈음 내 주위에는 기숙이를 비롯하여 다른 친구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 아이들과 어울려 산이나 강에 가기도 하고 친구네 집 원두막에 가보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시골생활에 적응하여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또래의 아이들답게 가끔은 오락실에 들르기도 했지만 TV 시청이나 오락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쏘다니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에게는 시골생활이 오히려 어른들의 세계를 더욱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여름이면 안태계곡이나 매봉산 계곡에서 목욕하는 여인네들의 알몸을 훔쳐보기도 하고 그네들의 은밀한 대화를 엿들으면서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다가 신촌의 적나라한 속살을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된 것은 기숙이 집에서였다.
그 해 여름 방학이 되고 난 후 나는 기숙이집에서 자주 머물렀다. 어머니가 늦게까지 가게를 하다 보니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도 했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이면서도 커다란 감나무와 대추나무로 둘러싸인 기숙이집은 우리 집보다 한결 시원하기도 해서였다.
때마침 기숙이 아버지가 밀양에 있는 큰 도축회사에 일거리를 얻게 되어 한 달이나 집을 떠나 있게 되어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내가 기숙이집에 자주 머무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기숙이의 가슴을 은밀하게 보고 만질 수 있는 특권을 기숙이로부터 얻었기 때문이었다.
키가 백육십센티가 넘게 자란 기숙이는 사학년이 되면서 몸이 조숙하게 변했다. 가슴이 또래 애들보다 더 컸고 이목구비도 또렷해지면서 살결도 하얘져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숙이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환상을 느끼곤 했다.
그런 기숙이의 남자친구 자격과 방학 숙제를 핑계로 기숙이네 집 기숙이방에서 기숙이의 몸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겐 커다란 특권이었다.
기숙이 엄마는 보통키에 통통한 체형이었는데 늘 허름한 몸빼 바지와 목언저리가 늘어진 티셔츠 차림이라 평소 그리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기숙이 같은 딸을 낳았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숙이랑 어울리면서 가끔 숙제를 핑계로 기숙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기숙이랑 한 방에서 잠들기도 했다.
방이 두 칸인 기숙이네 집은 안채와 창고, 창고 쪽에 딸린 화장실 겸 목욕실이 있었는데 안채의 화장실은 기숙이 부모님이 쓰는 안방에 붙어있어서 나는 항상 창고 쪽 화장실을 사용했다.
그날 밤에도 기숙이 집에서 잠이 들었는데 저녁에 수박을 많이 먹어서였는지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어났다. 달빛이 환해서 창문으로 들어왔기에 불을 켜지 않아도 잠든 기숙이를 피해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난 후 다시 기숙이 방으로 돌아오던 순간 나는 기숙이네 안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기숙이 아버지가 왔나 싶어서 그냥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연이어 들려오는 그 신음소리는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해서 불현 듯 내 호기심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안방쪽으로 난 툇마루를 무릎걸음으로 올라가서 안방 미닫이문 틈으로 눈을 가져다댔다.
문틈으로 엿보게 된 방안의 풍경은 적나라한 어른들의 질펀한 육체의 향연 장면이었다.
기숙이 엄마의 하얀 허벅지와 출렁이는 가슴이 보였고 흐느끼는 신음소리는 기숙이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사내는 약간 대머리가 벗겨진 모습이었는데 키가 훤칠해 보이는 모습이 땅딸막한 키의 기숙이 아버지는 분명 아니었다.
“좋제? 좋아 죽것제?”
“그려요. 이러케 콱 죽어두 여한이 없것소.”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의 대화는 비오는 날 논둑길을 걸어갈 때처럼 질퍽거렸는데 나는 그 때서야 기숙이가 왜 장씨를 안닮았는지 짐작이 갔다.
한참 동안 놀라서 굳어있던 나는 다시 무릎걸음으로 뒷걸음질쳐서 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조심조심 기숙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든 기숙이의 뒤에 누워 윗옷 속으로 손을 넣어 봉긋하게 솟아오른 기숙이의 가슴을 만지면서 기숙이네 안방에서 훔쳐본 장면들을 떠올리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늦잠에 놀라 후다닥 일어나 세수하러 기숙이네 마당으로 나섰을 때 여느 때와 같이 몸빼 바지에 허름한 티셔츠 차림의 기숙이 엄마와 마주쳤다.
“아침 채려놨으니까 기숙이랑 같이 묵고 가그라. 내는 밭에 나가 볼끼다.”
기숙이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세요. 저는 아침만 먹고 집에 갈랍니다.”
“알것데이. 천천히 묵고 가그라.”
총총히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기숙이 엄마의 저 허름한 차림 속에 출렁이던 가슴과 백옥 같은 속살이 숨겨져 있음을 생각하니 다시금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지 말았어야할 것을 엿봤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한 걱정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보름쯤 지나 기숙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기숙이네 집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지만 의외로 기숙이네 집은 평온했다. 장씨는 여전히 도축일을 하러 다녔고 가끔 고기를 싸들고 어머니의 가게에 들러 막걸리 값 대신 고기를 주고 술을 마시고 갔다. 기숙이 엄마 또한 여전히 몸빼 바지에 허름한 티셔츠 차림으로 밭일을 하거나 날품을 팔러 다녔고 그렇게 별일 없이 넘어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두어 달이 더 지나자 기숙이 엄마가 갑자기 입덧을 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장씨에게 축하인사를 보냈다.
“장씨, 축하하고만. 이번에는 아들이라도 하나 맹글었나 보네? 하하하.”
“밀양 가서 좋은 거 묵고 왔는갑따. 그래서 아즉꺼정 장씨는 심이 좋은 갑따. 아들 노으몬 한 턱 내소. 호호호.”
“기숙이 동상 생기몬 기숙이가 키우것네. 장씨는 딸래미 잘 키와나서 걱정이 없겠고만.”
마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인사하자 장씨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허허거리며 인사를 받았다.
“고추 나오면 내사 마을 잔치 한판 할라 안카요. 다들 기대하고 있으소. 하하하.”
장씨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마을 사람들의 축하인사를 받아 넘겼다. 그런 장씨의 모습을 보는 나는 왠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씨가 기숙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악을 쓰며 마을 골목을 휘도는 모습을 꿈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불안하면서도 은밀한 눈길로 장씨를 지켜보고 있음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기숙이 엄마의 입덧 소문이 돈지 며칠이 더 지난 날 늦은 저녁이었다.
어머니가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장씨가 문을 두드렸다.
“아지매요. 문쫌 열어보소. 내 딱 한잔만 더 마시고 갈라카요.”
장씨의 목소리는 어디서 마셨는지 넉넉하게 술이 취한 목소리였다.
“목소리 들어보니 지금도 술이 과하구만요. 고만 들어가 주무시소.”
어머니가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장씨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아지매요. 지발 한 사발만 더 마시고 퍼뜩 일어설끼요. 지발 문 좀 열어보소. 으허허헝.”
건장한 사내의 느닷없는 울음소리와 함께 장씨가 가게 문에 기대어 철푸덕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닫아걸었던 문을 다시 열고 장씨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참말로 고맙심데이 아지매. 내사 아지매가 아니면 어데 가서 내 문드러진 속을 까발리겠능교. 어허허헝.”
어머니가 내놓은 막걸리 사발과 몇 가지 나물 무침 안주를 앞에 놓고 장씨는 눈물을 훔쳤다.
“딴 데서 술마시고 왜 여기 와서 우세요? 무슨 일 있어요?”
어머니가 아직은 어색함이 묻어나는 사투리 섞인 말을 건네자 장씨는 사발을 들어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소매로 입가를 쓱 닦아냈다. 그리고 그렁그렁 하면서도 형형한 눈빛으로 말을 쏟아냈다.
“이 내 속을 누가 알랴마는 그래도 사람 목심이라카는기 중헌 거 아닝교? 안그런능교? 아지매.”
“그래요. 사람 목숨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거죠.”
“그래서 여태꺼정 속없는 놈으로 살아왔지만서도 밤마다 참말로 우째뿔꼬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기라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얘기 해봐요.”
어머니가 장씨의 사발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아랫동생 타이르듯 조곤조곤하게 말을 건네자 장씨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소싯적에 주먹으로 한 가락 했던 놈이라요. 밀양 마산 대구꺼정 원정도 댕기고 했었소. 그러다가 부산에서 빡시게 싸움박질이 붙었는데 억수로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능기라요. 그때 병원에서 무르팍도 뽀사지고 붕알이 터져뿔고 해서 씨없는 수박이 됐다 캤소. 근데 언젠가 기숙이가 생기더니 시방 또 기숙이 동생이 뱃속에 들어 앉았뿌렀다 안카요. 내가 참말로 속이 말이 아닝기라요. 어허허허헝.”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타향도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 되는 거고 내 새끼다 여기고 키우면 내 새끼 되는 거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씨 뿌렸다고 다 지 새끼 되는 게 아닌 것이 이 사람 사는 일이기도 하지요.”
“글치요? 그런 기지요? 아지매가 내 속을 참말로 족집게 맹쿠로 잘 들다보는 거 같소. 이렇게 한 세상 살다가몬 되능거 아닝교? 맞지요 아지매.”
“그래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옛사설도 있잖아요.”
“마자요. 지 새끼를 보면서도 지 새낀지 모리는 허우대 멀쩡헌 놈도 있고, 이 한짝 다리 저는 빙신인 내 한테 아부지라고 부르는 새끼도 있고. 어허허허. 사람 사는 거시 다 글치요. 안그렁교?”
“그래요. 그렇게 좋은 쪽만 보고 살면 되는 거지요. 애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어른들 허물로 상처 받게 만드나요? 애들 상처주면 죄 받아요. 죄 받아.”
“글치요. 애들이 무신 죄가 있것능교. 암튼 고맙소. 아지매.”
“세상엔 필요의 대상도 있고 열정의 대상도 있는 법. 누구에겐 필요의 대상이 또 다른 누구에겐 열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너무 자학하지 마세요. 애들이 꽃이잔아요.”
“글치요. 내 한테는 그냥 세간마냥 필요해서 살부비고 살아도 다른 넘에겐 안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요. 애들이 꽃이라.... 알아무것소. 이만 갈라요.”
그렇게 한 바탕 쏟아 놓은 장씨는 휘청거리며 일어서서 가게를 걸어 나갔다.
어머니는 장씨가 돌아간 후에도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어두운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방안에서 방문을 빼꼼히 열고 가게를 흘끔거리며 장씨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장씨가 돌아간 후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어머니가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뒤 몇 달이 지나 기숙이 동생으로 사내 아이가 태어났고 장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소리 친 그대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잔치를 치뤘다.
어머니는 안쓰러움을 담은 미소를 띈 표정으로 장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는데 어머니의 인사를 받은 장씨의 눈빛에 잠시 물기가 어린 것을 본 사람은 어머니와 나 이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 후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어머니는 집과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밀양으로 이사를 했다.
언제부터 어머니와 연이 닿았는지 모르는 외삼촌이 밀양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오면서 나를 밀양중학교로 전학시키고 어머니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준 때문이었다.
신촌을 떠나던 날, 나와 어머니를 배웅해준 사람은 장씨와 기숙이었다. 기숙이 등에는 사내아이가 포대기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기숙이에게 장씨의 비밀을 말할까 망설이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비밀 하나 쯤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굴다리 쉼터]라는 저 막걸리 가게가 또 다른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응어리진 그 무엇을 풀어내고 가는 삶의 완충지대로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그렇게 신촌을 떠났던 거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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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재미 있고 울컥하면서 읽었습니다. 우리 문학회가 소설 부문이 부족했는데, 참 반갑습니다. 또한 오랜 필력이 전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연락처를 주세요. 월례회 때 초대할테니 밀양 한번 오세요~
하헌주 010 8757 2062
감사합니다. 실명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설은 초보입니다. 데뷰는 시로 했어요. ^^
반갑습니다 밀양문학회에 단비 같은 분이 오셨네요 설레입니다 꼭 뵐 수 있길 바랍니다
반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있어 두어 달 쯤 정리된 후 뵐 수 있을듯 합니다.
강건하십시오.
이동하씨가 이석재씨로 실명을 바꾸셨나요? ㅎㅎ
정말 어렵게 힘들게 사셨겠지만
그래도 소설을 보니까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네요♡
밀양문학회에서 꼭 뵙고싶어요.
ㅎㅎ 과분한 댓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정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몇 십년을 거슬러 옛시절로 돌아간 듯 했어요.
월례회서 꼭 뵙고 싶어요~~
공감은 최고의 칭찬이죠 ^^
언젠가 뵐 듯 합니다.
'굴다리 쉼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문상'과 '삼랑진 시편'들도 감동적으로 읽었구요.
삼랑진이 다시 한번 깊고 정겹게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