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맨발 산책을 하고 낮에는 볼 일을 보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애를 써서 얻은 결과로는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기, 영화 보기, 혹은 휴대폰을 들고 무작정 시간을 보내기 등이다. 맨발 산책을 하고 볼 일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저녁의 일은 난해하고 피곤하다. 나는 내 의지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내는 속이 불편해서 마시지 못하는 거라고 요즈음 수일 간에 걸친 내 금주를 정의한다. 난해함이란 바로 이 두 가지 정의 사이에서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데 있다. 피곤하다는 데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특히 비가오는 저녁에는 이 피로가 가중되어 극한 고통으로 바뀐다. 어제 내린 비가 그랬다.
어머니와 함께 우산을 쓰고 은행과 전화국과 휴대폰 판매점과 역전 옆('옆'이 중요하다. 건너 편이 아니므로. 거기는 50년 전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중앙 시장과 7000원짜리 뷔페 식당을 다니며 대문자 A의 빈자리를 메우고 돌아오니 오후 세시. 아침 아홉시부터 일을 수행하기 시작했으니 족히 일곱시간이 걸렸다. 어머니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챙겨준 물목 중에서 중앙시장에서 산 콩고물 흰떡을 먹고 싶은 의욕을 밀고 잠이 쏟아졌다. 소파에 누워 입을 벌리고 (아마도) 코를 골고 (틀림없이)가끔 앓는 소리도 내며, 달궈진 엿가락처럼 자꾸만 몸이 바닥으로 늘어지는 감각으로 잠을 잤다. 일어나야지, 이러면 안되는데 의식은 천정으로 향하고 몸을 여전히 바닥으로 늘어지는 시간이 길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깨어난 게 아니라) 깨어졌다. 그 때 내 몸은 대문자 A가 임종하던 순간의 자세를 꼭 닮아 있었는데, 대문자 A가 소파에서 운명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이 무너진 날 이후로 내 습성과 행태마다 달라붙는 자의식이 잠과 잠깨기 사이에도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창문도, 거실로 들어온 빛깔도, 벗이 권한 루테인을 먹지 않고, 여동생이 보내온 루테인은 아들에게 줘서 침침한 시선에 잡힌 창 밖 풍경도 회색빛이었다. 오후 다섯시를 향해 가고 있는 시간에도 빛깔을 준다면 '로맨스 그레이'에서 로맨스를 뺀 그것밖에 더 있을까.
'아아' ('아'자 돌림 두 식구,아내와 아들)가 퇴근하기 전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건 몸 속에 있는데, 내리는 비가 그것을 꺼내어 거실 바닥에 펼쳐 어지럽게 늘어놓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욕망은 머리가 여럿 달린 짐승. 밖으로 나가고 싶은 자의식이 스스로를 키워 엉뚱한 제발저림을 만들었을 뿐인데, 시간을 보며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대문자 A가 떠난 후 내 혼자만의 드라이브는 줄곧 또 한 방향을 고집한다. 유성을 지나고, 동학사를 지나고, 마티고개를 옆으로 끼고 긴 터널을 지나갔다. 충남과학고등학교 이전 결사반대 플랭카드가 쏟아지는 폭우를 견디며 그걸 만들어 묶은 그 동네 이장단의 의지를 몹시 떨며 흔들며 젖은 채, 계속 젖어가면서, 겨우겨우 전하고 있었다. 금강을 지나면서 와이퍼를 더 빠르게 작동시켰다. 그 길로 들어서서 십여분만 가면 대전공원묘원이 나타날, 우회전 길을 버리고, 직진했다. 그래, 무의식이건 의식이건 자의식이 시키는 대로 가 보자.
참으로 오랜만인 동네였다. 큰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이태 전, 그리고 70에 단명한(요즘엔 70이 분명 단명이다. 60대에 가면 요절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평판에 민감한 사람은 주의할 일이다. 특히 술) 사촌형의 추레한 장례 행렬을 따라왔던 지난 해 봄. 그리고, 어제. 사위는 완연히 어둠 속에 잠겨 빗소리와 와이퍼에 쓸려나가는 물줄기와 헤드라이트에 비취며 그어오는 물의 사선들이 미디어 아트속 흐르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안에 내 고향마을이 있었다. 시집 오던 사촌 형수가 긴 초입길을 걸어오며,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나와 맞는 우리들의 까매진 얼굴을 보며 서울 여인의 웃음을 보여주었던 길, 오학년까지 걸었던 길. 그 길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서 조부모님과 큰 아버지 내외 분들이 묻힌 밤나무 산쪽으로 느릿느릿 차를 몰았다. 사람 하나 안보이고, 무릎 높이의 가로등에 들어온 주홍빛이 신호수처럼 길 가장자리에 늘어서 있었다. 산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반달 모양으로 길게 돌아나오는데, 마을 회관에 이르렀고 그 앞에 공터가 있었고, 한켠에 봉고차 한대가 서 있었다. 갑자기 한참동안 나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던 몸의 신호가 도드라졌는데, 요의였다. 공터와 거기 주차해 있는 봉고차가 요의를 일깨울 수 있을까. 나는 차를 내렸다.
작은 단층 건물이 있었다. 직감적으로 화장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신주 위에서 빛나는 가로등이 비춰준 작은 현판의 글씨도 그와 같았다. 신사용이 아니라 남자용이라고 써 있는 문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었다. 굳게. 열리지 않는 화장실 손잡이를 열기 위해 애를 써 본 사람들은 알리라. 요의는 산술급수적으로 상승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일반함수의 포물선과는 전연 다르게 솟구치는 요의의 사선(여기서 '사'는 죽을 '사'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끝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을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건물 옆, 공터 안쪽 집에서 새나오는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어둠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다음에는 손과 몸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 시간, 혹시라도 나를 지켜볼 다른 눈이 있을까 신경을 등 뒤로 가득 모으고, 아무런 심중도 의도도 없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 보았다. 흙담이었던 경계가 무너진 자리, 철제 울타리가 쳐져있는, 여린 가로등 빛에 드믄 드믄 드러난 집터. 50년 전, 대문자 A와 어머니, 그리고 두 살 위 형과 두 살 아래 남동생과 열 두살까지 살던 집, 뉴질랜드로 떠난 막내가 첫 돌을 며칠 남겨둔 날, 떠난 옛 집, 대문자 A가 심은 측백나무와 감나무와 밤나무가 저쪽 편 울타리를 이루었던 집. 그 집을 보며 나는 몸에서 무언가를 떠나보내며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이미 할 일을 끝냈는데도 오래도록 그 자세로. 비가 어깨를 적시고 손을 적시고 바지를 축축이 적시고 그리고도 또 적실 게 많이 있었고, 적셔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만 돌아서고 싶다는 마음이 들때까지.
생각했다. 오늘 금주도 성공이다. 비가 내리지만 오늘은 술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하루가 꿈만 같았다. 모든 게 꿈이라면 어떨까. 어제 내린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