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천문학 ‘3人3色 문학기행’, ‘금강변 소금 밭에 별빛만 반짝이더라!’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입력 2023/11/22 17:42수정 2023.11.23 10:10
- ‘23.11.14. 월천문인 22명, 금강변 단풍색 물길따라 수놓은 문인들의 나드리
- 신동엽 시인, 박범신 소설가, 이병기 시조시인의 지난 100년간의 발자취 탐색
[굿모닝전북=오운석기자] 아침 9시 30, 월천문학회(교수 정군수) 문인 22명은 전주시온성교회 주차장에서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관광버스에 올랐다. 승차하니 정영권 회장의 유쾌한 인사말에 이어 설레는 하루 문학기행이 박수소리와 함께 장도에 올랐다.
오늘 탐구하려는 삼인삼색 기행은 3인 작가들의 개성이 극명하게 다른 색깔을 체험할 수 있어 자못 설레였다.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 신동엽, 영원한 청년 작가이자, 극작가 박범신, 한글학자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왜경에게 잡혀 1년여 옥살이까지 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그래도 다른 개성 속 공통점을 찾자면, 3인 모두 전주 소재 학교를 다닌 점이다. 전주사범학교 신동엽, 전주교육대학교 박범신, 전주공립보통학교에 이병기 선생이 재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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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 생가 마루에서 찰칵(사진_굿모닝전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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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40분, 첫 번째 목적지인 부여 ’신동엽문학관‘에 도착했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40세의 젊은 나이에 시대를 아프게 살다간 시인의 모습이 파편처럼 두 눈을 파고 든다. 그의 장편 서사시<<금강>> 이 우리 '민족의 아픔이자 시인의 아픔'을 행마다 절절히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와 외세에 항거하는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의 함성, 6.25전쟁이 나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고, 4.19 혁명 당시 집회시위 투쟁으로 독재에 항거하면서 시대의 아픔에 동참했던 경험을 처절하게 그려낸 장편 서사시다.
몸소 체험하고 항거했던 4.19 혁명을 소재로 한 <<껍데기는 가라>> 시,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고,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시,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인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라고 절규했던 시 속에 시인의 모습이 생생히 보인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신동엽 시인은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현실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고민하면서 차라리 대한민국의 중립을 외쳤던 시인으로 거기에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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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곡 신동엽' 조시(사진_굿모닝전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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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죽은 시인을 곡한 천상병 시인의 <<哭 申東曄>>이란 조시 속에는 죽었지만 살아 있었다.
어느 구름 개인 날/ 어쩌다 하늘이/ 그 옆 얼굴을 내어보일때 // 그 밝은 눈 한곬으로 쏠리는 곳/ 거기 네 무덤 있거라
잡초 무더기/ 저만치 가장자리에/ 꽃이 그 외로움을 자랑하듯// 신동엽! 너는 꼭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그 잠깐만 두어두고 너는 갔다// 저쪽 저/ 영광의 나라로!
여성 문우들은 잘 생긴 신동엽 시인의 흉상과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들을 재촉해 음식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10분쯤 달려 12시경, 버섯을 닮은 ’연꽂 이야기‘ 라는 연꽃음식 전문점에 도착했다. 문우들 모두가 술잔을 높이 들어 건배사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먹방에 들어갔다. ’잔들이 오가니 이 아니 기쁜가?‘가 얼굴에 씌여진 듯 모두가 즐거워 보인다. 역시 웃음 꽃의 비결은 술이 최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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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문학관 옥상 전망대, 기념촬영(사진_굿모닝전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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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식사를 마친 일행은 버스에 올라 오늘 주요 목적지인 강경 ’소금 문학관‘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문학관에 들어서니 문학관이 설립될 때 까지 일화가 벽에 걸려있었다.
당시 논산시장은 선배 유명작가를 고향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붕새'가 된 와초 박범신을 좁은 공간에 잡아두기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박범신 작가가 다시 고향을 떠난 변명을 들어보자. 「황명선 논산시장이 ”형님! 고향 논산으로 오시지요!“라는 한 마디에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으로 고향 땅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하지만 논산에 내 몸과 마음을 뉘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온 이유는 다가오는 위태롭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 속으로 출발해 간 것이다」라고 설명했단다. 논산시가 고향은 아니지만 꽤 아쉬운 부분이다. 논산시민들이야 말한들 무엇하랴! 영원한 청년작가에 대한 학예사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예로부터 강경은 금강과 논산천 등이 합수되어 바다까지 이어져 물산 이동이 많았고,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였다고 했다. 옥녀봉 전설 이야기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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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앞 금강에 정박된 채 묶여잇는 나룻배(사진_소금문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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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뒷편 옥녀봉엔 옥황상제의 셋째 딸, ’옥녀‘의 슬픈 전설이 남아있다. 강경산, 봉영대 절벽의 해조문, 봉수대, 노을 맛집이 있는 곳이다. 옥녀가 이곳 옥녀봉 앞을 흐르는 금강의 물결에 너울거리는 달빛과 해질녁 노을에 흔들리는 갈대 숲을 동경해 아버지의 승락을 받아 내려왓다. 하지만 풍광에 심취해 시간 가늘 줄 모르고 노닐다 시간이 지나 결국 천상에 진입을 허락받지 못하고 끝내 옥녀봉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전설이다.
지금도 강경포구와 옥녀봉에는 전설 속 풍광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가급적 해질녁 노을이 비껴갈 때 쯤, 옥녀봉에 올라 노을집에 앉아 노을을 실컷 맛보라 권하고 싶다. 덤으로 흐르는 눈물일랑 손수건으로도 닦지 말아야 한다. 그냥 백마강 잔물결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맡기면 옥녀의 부드러운 손길과 음성을 느낄 수 있을테니...
박범신 소설가는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이 70~80년대 산업화, 도시화로 계급화 되어가는 서민과 부유층 간의 갈등과 사회적 문제에 천착을 하면서 당시 20~30대 청년들의 고통과 고뇌를 고발한 소설을 많이 썼다. 산업화에 무너지는 가정과 자본주의에 점점 배금사상으로 물들어가는 그 시대의 삭막함을 노래한 작가이기도 하다. 문학관의 이름인 <<소금>> 역시 가장이 가출하면서 가족이 와해되는 시련과 <<풀위에 눞다>>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애환을 그려낸 걸작이다. 소금의 인상 깊은 대목 하나, ”인생엔 두 개의 단 맛이 있어. 하나의 단맛은 자본주의적 세계가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빨대로 소비의 단 맛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자유를 얻어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해방감의 단 맛이야“란 대화다. 지금도 화두처럼 생각에 빠지게 하는 말이다. 자본주의가 바이러스라니...
인기가 최고조로 오르던 박범신 작가는 1993년, 광주5.18민주화 운동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20여년의 창작활동에서 오는 피로감에 절필을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대서특필감이었다. 절필 선언 후 히말라야 에베르스트산 등 고봉에도 올라보고 용인의 야산 외딴집에서 3년간 칩거도 하다가 힘을 얻었는지 다시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일행은 문학관을 나와 ’강경하면 젓갈, 젓갈하면 강경‘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젓갈 시장으로 들어섰다. 김장철이라 그런지 문우들은 맛깔스런 새우젓, 명란 젓 등 수십가지의 젓갈의 맛을 보면서 구매에 몰두했다. 비좁은 젓갈집 주인아주머니는 갑자기 ’호떡 집 불 난 듯‘ 바삐움직이다 힘에 붙쳤나 보다. 결국 집에 있는 딸까지 불러들였다. 이런 맛이 여행의 별미가 아닐까?
16시, 마지막 목적지 여산 용화산 자락에 자리한 가람 이병기 문학관을 찾았다.
학예사의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핵심만 딱딱 짚어냈다. 선생이 우리나라 시조의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생가는 선생의 조부가 터를 잡았고, 수우재(守愚齋)라 명명했다고 한다. 수우재 옆 화단에 200세가 된 탱자나무가 신기했고 집 앞 뜨락에는 마치 정자나무처럼 큰 살구나무가 서 있었다. 해마다 봄이되면 전국 사진 작가들이 살구 꽃을 찍으러 오는데 문제는 개화 시점 맞추기도 어렵지만 피었다 해도 4~5일이면 꽃이 다 저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문학관 안에 들어서자 가람 선생의 한글 학자, 시조학자로서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선생의 가르침을 보자. ”글을 쓸 때 용어의 수삼(數三)은 사용을 말자“, 즉 시어를 사용할 때 주의 사항 세가지다. 첫째 난해한 한문투는 가급적 사용하지 말 것, 둘째 아희야, 어즈버, 하노라 등의 투어(套語)를 배제할 것, 셋째, 현대적 감각에 맞는 시어를 사용할 것 등이다.
놀라운 것은 가람 이병기 선생은 19세 되던 해인 1909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66년 6월까지 무려 58년간 일기를 기록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 1년을 빼고는 꾸준히 오랜 세월 일기를 썼다고 했다. 주목할 점은 처음에는 일기를 한문으로 표기하다 1914년 8월 12일부터 한글 표기로 방식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는 스승 주시경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선생의 한글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선생의 일기가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고 하니 존경의 염이 머리를 채운다.
선생의 일기에는 그의 호, 가람(嘉藍)의 설명도 있었다..
아름다울 '가'에 쪽빛 '람'자다. 영원, 완전, 조화란 뜻인데 일기에 적힌 풀이를 보자.「그 근원도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니 영원하며, 이 골물 저 골물 합하여 진실로 떳떳함을 이루니 완전하며, 산과 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어 물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로움이다. 이 세가지 뜻을 붙이어 지음이라.」역시 다르다. 가람? 강으로만 배웠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다니, 내게는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문학관 밖으로 나와 선생의 하늘 높이 우뚝 선 시비 앞에 문우들이 모였다. 정군수 교수님의 시비 앞 '별노래'를 합창하자는 제의에 따르기로 했다.
시비에 새겨진 <<별>>이라는 시를 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합창을 시작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함께 나아오더라 //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은 또 어느게요 /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모두가 3인3색에 도취된 채 별을 헤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버스에 올랐다.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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