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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동시-
하얀 쪽배 타고
청송 장병학
프랑스에 살고 있는 직지야!
너의 나라 대한민국이 그립지?
문화강국 우리나라로 빨라 와요.
청주의 자랑 한국의 자랑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
하루 빨리 직지 상권 보고 싶네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오늘도 반달 노래 흥얼흥얼
직지야, 하얀 쪽배 타고 어서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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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동문학연구’ 동시(2002), ‘시와 의식’(문예한국) 수필(1986) 등단
*충북수필문학회장, 청주문인협회장, 중부문학회장, 국제PEN충북위원장, 충북글짓기지도회장,
한국아동 문학연구회부회장 역임
*충북문학상, 충북수필문학상, 운초문화상(문학), 충북아동문학상, 청주문학상, 진천 문학상,
박화목아동문학상, 한인현글짓기지도상, 문예한국작가상 수상
*꿈을 주는 동시(동시집)(2권), 늘 처음처럼(수필집)(2권), 칼럼집(1권) 펴냄
* 현) 한국아동문학회 중앙위원장,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협 전통문학연구위원,
수필의 날 조직위원, 한국아동청소년문학회 충북지회장
직지 천년 열길
청송 장병학
칠백 여년 직지가 걸어온 길
선생님 말씀에 감동 먹으면서
직지 천년 열길 펼쳐 보아요.
바른 마음 올곧게 다스리는 직지
세계 최초 만든 금빛 나는 금속활자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된 금빛사랑.
온 국민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
직지 찾기 운동 다함께 동참하고
대한 땅 곳곳에 직지숲 만들어요.
자랑스런 직지 보존 못한 대한민국
프랑스에 홀로 계신 직지 왕할아버지
어린 내 가슴에도 죄책감이 달려드네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 왕할아버지
하루 빨리 대한민국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콜랭 드 폴랭시 나라에 봄눈 녹듯 설득해요.
코리아의 위대함과 자존감 상징하는
천 년 화알짝 열어갈 별 중의 별 직지별
세계 최고 으뜸 자랑스런 대한민국 직지
지구촌 곳곳에 직지 문화예술숲 만들어 가요.
할아버지와 직지 공부
청송 장병학
할아버지께서 내게 여쭈셨지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서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이 만들어졌을까?
머리를 긁적 갸웃둥하며
말이 먼저 만들어졌어요.
우리 강아지 최고네!
칭찬해주신 우리 할아버지.
사람들은 서로 의사소통 위해
다음은 뭐가 만들어졌을까?
말은 한번 이야기 하면 금방 살아지지요.
그렇지. 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서로 뜻이 통하는 글자를 만들었지.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처음에는 땅이나 벽에다 적어 놓았단다.
이 후, 나무에 글자 새겨 오래 보존했지
이 시대를 목판 인쇄문화 시대란다.
세월이 흘러 나무에 새긴 글자 좀이 먹고
빗물에 썩어 오래 보존 못하는 아쉬움
많은 양의 학문자료 만들기 위해
영원히 보존시키는 방법이 뭘까?
사람들은 목판활자 문화에서 벗어나
쇳조각을 녹여 금속활자로 책을 펴냈지.
할아버지, 가장 먼저 발행한
금속활자 책은 무엇인가요?
할아버지가 학교에서 공부했을 때에는
세계 최초 만들어진 금속활자 책은
독일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라고 배웠지.
이 후, 1967년 박병선 박사에 의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 하권 말미의 또렷한 글자를 찾아냈지
‘宣光 7年 丁巳七月 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
‘선광 7년 정사칠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인시’
고려 우왕 3년 1377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 오래된 금속활자본이 직지란다.
1454년 구텐베르크가 만든
‘42행 성서’ 보다 77년 앞선 직지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임을 알아냈어요.
할아버지 직지가 무슨 뜻인가요?
직지는 참선을 통해 사람마음을 바르게 볼 때
부처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사람은 항상 바른 마음을 지니라는 뜻이란다.
할아버지, 직지는 누가 만들었나요?
직지는 백운화상 스님이 엮은 ‘직지심체요절’ 책을
제자인 석찬, 달잠, 묘덕 스님이 만들었지.
당시 묘덕 스님의 엄청난 시주를 받아
금속활자본 직지를 인쇄했다는 미담은
지금도 후세에 훈훈하게 전하고 있단다.
청주의 자랑, 대한민국 자랑인 직지
할아버지, 직지 공부 많이 했어요.
저도 직지홍보대사되어 널리 알릴래요.
-수필-
오늘밤에도 별, 윤동주
靑松 장 병 학
함경북도 동북단 끝자락과 마주하는 중국 연변에서 연변문화예술위원회와 연변포석회 주최, 생거진천이 낳은 민족문학가 포석 조명희 작가를 기리는‘제1회 포석 조명희 문학제’에 초청 받아 포석회원들과 함께 참여했다.
남의 나라 땅인 중국 연변에서 충북 진천이 낳은 포석 조명희 작가를 위하는 문학행사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까 가슴이 설레었다. 진솔한 마음으로 중국에서 첫 번째 포석 문학제 행사를 성대하게 실시해준 연변 조선족 추진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렸다.
이튿날, 연변 땅에도 찬연한 마알간 햇살이 어김없이 밝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나라 문학 선구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윤동주 시인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용정시로 향했다. 오전 내내 그곳으로 줄곧 달려가는 길목에는 우리가 육칠십년 못 살던 당시의 모습이 버스의 차창 가에 영화 필름처럼 스쳐갔다.
이곳의 작은 집들은 모두가 일정한 틀의 규격으로 붉은 색으로 칠해졌다. 도로의 노상에는 간간이 옥수수와 과일 등을 판매하는 아낙네들이 눈에 띄었다. 가이드는 버스에서 내려 옥수수와 감자를 구입하여 참맛을 느끼면서 고된 삶을 에워가는 중국 아낙네들의 초췌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시리었다.
나는 커다란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구입하여 찾아가는 곳곳마다 생생한 곳을 보듬으며 관광했다. 항일투사의 문학가인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 있는 용정시에 도착했다.
용정시는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용정중학교에 도착했다. 아! 바로 이곳이 우리의 민족의 정기를 불어 넣어 주었던 윤동주 선생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대성중학교의 옛터가 아닌가?
지금은 용정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설레는 가슴을 에우면서 일행과 함께 버스에서 하차했다. 윤동주 선생이 다녔던 대성중학교 입구에 자랑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윤 시인의 시비 앞으로 다가섰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 겠 다/ 오늘밤에도 별/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또렷이 새겨진 윤 시인의 서시를 음미하면서 이국땅에서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하다 잔악한 일본인에게 참사당한 선생에게 묵념을 하면서 넋을 기리었다.
옛 대성중학교 2층 윤동주 선생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 조선족 사람들에게 삶의 좌표로 삼는다는 가이드의 말에 내 가슴은 뭉클했다. 애국열정이 가득 묻어난 윤동주 문학인을 기리는 용정 시민의 실증적 체험학습의 요람이기에 모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명소이다.
비록 이국땅이었지만 이곳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윤동주 시인의 불타는 애국심이 서려 있음을 체감하면서 울분과 애국심이 한 순간 교차했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선생께서 생존 시 일본군과 투쟁하면서 문학을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거하면서 한 많은 삶을 불태우다 왜놈들에게 무참하게 처형당했던 당시의 모습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었다.
윤 시인은 독립운동을 하다 1943년 7월 14일 도쿄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의 죄명은 일제형사의 심문결과‘독립운동’으로 기록되었으며, 체포 당시 상당한 분량의 작품과 일기도 압수당했다고 한다.
선생은 이듬해 절친한 친구 송몽규와 함께 규스 후꾸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받았다. 다음 해인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비보를 받았을 때 선생이 운명했다는 슬픈 소식을 가족들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파렴치한 일본인들은 모진 학대와 고통을 가함은 물론 선생의 시체까지 생체실험 자료로 쓰는 비인간적인 생활에 몸서리가 쳐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방명록에 내가 사는 주소를 적고 서명했다. 성금을 모금함에 두 손으로 넣으면서 윤 시인의 불타는 애국심을 되새기었다. 일행 모두 기념관 밖에 나와 선생의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남기려고 동분서주했다.
선생께서 고이 잠들고 계신 묘소를 참배하려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버스로 한참을 가다 좁고 험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소형차만 다니는 아주 좁고 험한 길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려고 했으나 대형 버스라 도랑에 빠져 도저히 지날 수 없게 되는 진퇴양난의 기로였다.
우리는 모두 하차하여 버스를 밀어 가까스로 도랑에서 빠져나와 목적지를 외면하고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 시인이 고이 잠든 묘소를 참배치 못하는 마음 몹시 아리기만 했다. 되돌아오는 버스 차창에 기대면서 선생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좋은 씨앗은 먼 훗날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온 몸에 애국열정으로 묻어난 오늘밤에도 별, 윤동주의 작품들은 대한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사랑 받을 것이다.
철도 새 시대의 통합청주시
청송 장병학
1994년부터 세 차례의 청원・청주 두 지역 간의 통합 실패를 거치면서 통합의 끝은 결코 보이지 않았던 청원・청주! 통합 무산원인은 세 번 모두 청원군민의 통합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청주시의 일방 추진과 외부 세력의 한 몫이 군민의 자존감을 잃게 했다. 세 번째 통합은 청원군과의 사전 협의 없이 청주시가 일방적으로 여론만 믿고 몰아 부치다 청원군민의 감정만 사면서 사면초가 되었다.
네 번째의 마지막 통합을 시도한 방법은 과거와는 통합의 출발점부터 달랐다. 세 단체장인 청원군수, 청주시장, 충북지사의 공약사업으로 민선 5기 출범부터 한 마음이 되어 대통합을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왔다.
청원군의회, 청주시의회, 충북도의회도 한 몫을 했다. 청주・청원시민통합협의회와 청주시와 청원군 통합협의회도 상생 발족하여 관과 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뇌하면서 통합시를 위해 하나하나 실행해갔다.
통합 결정이 되었다고 통합이 성큼성큼 원하는 대로 쉽사리 되지 않는다. 대대로 잔뼈를 묻고 청원지역에 살아온 주민들은 원치 않는 혐오시설이 내 지역에 온다고 하면 어느 누가 반길까? 모든 것들을 청주와 청원은 합심하여 생산성 있는 통합시의 밑그림을 면밀히 그려 감으로써 서로 간 양보와 타협하려는 미덕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맏형인 청주시는 인센티브를 넉넉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동안 내 고장을 지키려고 통합 반대에 끝까지 했던 청원 지킴이 분들도 이제는 깨끗이 승복해야 한다.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주민자율에 의해 성사된 통합시의 구성원으로서 보다 행복하고 잘 사는 통합시를 만들기 위한 발전된 대안을 제시하면서 상생발전의 길로 모색해 나가야 한다.
청원군과 청주시의 2012년 통합은 66년간 인위적으로 갈라져 동일 생활권과 역사권 되찾기와 대한민국 지방자치 발전으로 의미가 크다. 청원・청주 두 지역의 통합은 18년이란 고난의 긴 여정을 지나 청주시민과 청원군민들께서 민주주의 꽃인 주민 직접선거로 이뤄낸 쾌거로써 정말 값지고 위대한 일임에 159만 도민과 함께 큰 박수를 드린다.
이번 통합은 관이 주도하고, 참여하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자율의 역사적인 첫 통합사례임으로 의의가 더욱 크다. 정말 어렵고 험난한 여건 속에서 값지게 일궈낸 청원・청주 통합시 건설을 위해서 서로의 반목과 갈등을 걷어내고 오로지 화합과 결집으로 행복한 중부권의 명품 도시를 만들어 내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냉정히 바라보건데 두 지역간의 대통합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통합은 총론에 불과하다. 앞으로 닥칠 세세한 각론에서 청원・청주 통합협의회에서 요구한 5개 분야 39개 항목과 79개 항목을 잘 수용하여 해결해야 한다.
이제, 하나된 마음으로 청주시라는 명칭으로 통합시로 결정했다. 청주통합시가 되면서 교육제도가 축소되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다. 청원교육청도 소멸됨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원군 관내 농어촌 지역 학교의 혜택을 보고 있는 갖가지 혜택 소멸도 최소화하도록 충북교육청과 함께 의논돼야 한다.
그동안, 청주 시민과 청주시를 둘러싼 청원군이란 기형적 행정구조와 여건으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갈등을 헌정사상 처음으로 2012년 6월 주민 자율투표로 통합시를 일궈낸 청원군민께 지역구 의원으로서 감사드린다.
이제부터 화합과 결집으로 중부권 최고의 행복도시, 명품 통합 청주시 건설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하게 추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합청주시로 결정되기까지 의원으로서 각종 행사 참여, 언론 홍보에도 앞장서왔다.
통합청주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본다. '충북도의회 청원청주통합지원특별위원회' 위원으로서 관련 기관 간 통합 합의, 통합시청사, 신축할 구청 위치 선정 등에 관한 조정자 역할과 통합지원 입법 등 정치권 지원촉구와 상생발전 방안의 진행 점검 및 촉진 등 열정으로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청주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안’ 의결을 이끌어내는데도 한 몫을 다해 왔다.
앞으로 경기도 동탄에서 내 고향 생거진천을 거쳐 청주공항까지 연결됨은 물론, 청주도심을 통과하는 충청권 광역철도노선 안이 국가 4차 철도망 계획에 팔부능선까지 달려온 통합청주시! 수도권과 직결되는 도심을 지나는 미래지향의 통합청주시의 철도 새 시대가 안전에 펼쳐짐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수를 한아름 보낸다.
동진강 발원지 산신제
청송 장병학
자갈 없는 하얀 모래밭에 연중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꿈을 먹고 자라왔던 나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생각났다. 마알간 물살을 가르며 알몸을 던져 더위에 달궈진 심신을 달랬던 동네 앞 냇가, 때로는 너울 낚시로 피라미를 잡고, 쇠갈퀴로 쓰으윽 맑은 물 속 모래밭을 갈면 은모래 속에서 모래무지 물고기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다시 금방 금모래 속으로 들어가면 조심조심 두 손을 모아 살포시 잡던 어린 시절이 정겹게 생각났다. 넓은 냇물이 우리들 삶의 정겨운 쉼터가 미호천의 상류로만 알고 오늘날까지 불러왔다.
미호천은 음성, 안성, 진천, 증평, 청주 까치내, 강내 합수머리를 거쳐 세종을 지나는 금강, 서해바다로 합류하는 대장정의 물줄기이다. 다른 지역의 큰 강도 다녀보면
‘물의 양, 강폭도 미호천처럼 넓지 못한 곳이 많이 있음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미호천은 왜 강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청풍명월 사람이면 한두 번쯤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요즈음, 청풍명월의 문화예술 발전과 진흥을 위해 봉사하는 운초문화재단(이사장 류귀현)은 창립 5주년 기념사업으로 까치내문화예술회와 함께 무심천의 명칭을 동진강으로 복원하려는 3년간 열정의 목표를 정립하여 진행하고 있음에 한 아름 박수를 보냈다.
조선 후기에 발간된 해동역사 속집 제14권 지리고의 기록에는 동진강(東津江)으로 불려오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미호천으로 격하시켜 오늘 날까지 불려옴에 충북인들은 자존감이 상했다.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뒤안길로 살아왔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진강은 일제강점기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따라 1914년 이후 강을 천으로 격하시켜 미호천으로 부르게 되었다. 1923년 일제가 발행한 조선지에는 까치내 상류를 미호천으로 표기했다.
미호천의 명칭 유래를 살펴보면
‘동진강은 망이산으로 부터 남쪽으로 흘러 진천현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 기현의 남쪽에 이르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라고 해동역사 속집 제 14권 지리고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동진(東津),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진천 두타산이오, 하나는 청주 적현이며, 하나는 전의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공 주의 금강으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1872년 연기현 지도에도 미호천을 동진강으로 또렷이 표기되어 있다.
1882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전도에도 미호천이 동진강으로 표기되어 있고, 중보문헌비고(1903-1908)에도 금강 지류로 동진강이라 하여 1900년 전후로 미호천을 동진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미호천이 동진강으로 불려온 실증들이 고증되어 있음은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19세기에 간행된 청주읍지에도
‘작천은 고을의 북쪽 20리에 있다며, 물줄기의 맥은 진천, 청안, 괴산, 회인의 경계에서 나와 작천에 합류한다. 상류는 오근진 이 되고 하류는 진목탄이 돼 연기 경계인 동진에 닿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미호천은 하천 길이 89.2㎞, 유역 면적 1,861㎢이다 연 강수량도 1250㎜에 달하고 하천 폭도 200m이상이며, 500-1000m에 이르는 곳도 50%나 되는 4대강 다음으로 차지하는 우리나라 제 5위의 큰 하천이면서도 강이 아닌 천으로 격하되어 불리고 있으니 충북인의 피울음 소리는 날로 번져 나갈 것이다.
미호천 명칭 복원 사업 첫 행사로 청주시의회 주최, 운초문화재단 주관 미호천 명칭 복원 토론회(2020.11.27)를 청주시 의회에서 전문가 중심으로 가짐으로써 학설과 지증학적으로 많은 지식을 안겨줌에 언론과 시민들은 물론, 찬사와 성원을 보내 주었다.
경자년 끝자락 낯빛이 차가운 12월 초하루, 운초문화재단과 까치내문화예술회 회원들은 동진강의 첫 발원지인 망이산을초겨울 햇살을 받으며 무심천의 명칭을 복원하려는 뿌듯한 마음으로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동진강 첫 발원지로 향했다.
청주를 떠나 17번 국도인 오창과 진천을 거쳐 음성으로 향했다. 먼저 음성 삼성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삼성행정복지센터를 찾아 면장께 취지 말씀을 드렸다. 내가 초임 교감으로 생활했던 삼성초등학교라 거리마다 정감이 넘쳐났고 고향 가는 기분으로 상쾌했다. 삼성 면장께서 먼저 나를 알아보면서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망이산에 대한 유래와 위치 등을 상세히 안내해주심에 뿌듯한 마음을 품으면서 망이산으로 향했다.
동진강의 첫 발원지인 망이산(외적을 망보는 산)은 차령산맥 8-9부 능선에 음성군 삼성면과 경기도 안성시 율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망이산을 마이산이라고도 불려오고 있다.
일행과 함께 삼성면 양덕1리 마을길을 따라 신한정밀 공장 입구 임도에 망이산을 향하는 이정표가 반갑게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줌에 줄곧 임도를 따라갔다. 멍개나무, 단풍나무의 마디마다 섬섬옥수 꽃잎 자욱들이 우리를 한껏 반겨주었다.
망이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줄곧 가파른 산길로 이어졌다. 초겨울 낯빛은 차가왔지만, 40여분 좁다란 산길을 줄곧 오르면서 온 몸에 땀에 젖어 웃옷을 벗기도 했다. 혹한을 견뎌낸 물녘의 빠알간 열매들이 나뭇가지마다 대롱대롱 우리를 반겨주었다.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몇 번 쉬면서 오르다보니 어느덧 정갈한 팔각정이 자리하였다. 매달 이사장님과 함께 등정하실 때마다 힘들다는 말씀이 없으셨는데 오늘은 쉬어가자고 제안하시니 꽤나 가파른 산길이 아닐 수 없다.
일행은 팔각정에서 겨울 땀을 닦으며 음성 삼성면, 진천 광혜원, 안성 일죽면이 한 시야에 잡혔다. 온몸에 흘렀던 땀을 식힌 후, 팔각정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들이 갈망했던 무심천 발원지인 작은 연못이 준엄한 모습으로 자리함에 가슴 벅찬 감동이 이어졌다.
이 높은 망이산 정상에 있는 이곳 발원지는 한 타레 실 길이만큼 깊었다는 아련한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오랜 시절을 지나며 많은 군사들이 이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니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미호천 발원지란 안내판 아래에서 정성껏 준비한 과일과 술을 차리고 미호천 발원지 산신제를 지냈다. 초헌관은 까치내 문화예술회장, 아헌관은 충북도의원을 지냈다고 필자, 종헌관은 충북시인협회 부회장이 미호천의 원 이름인 동진강으로 개명해달라는 충정어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올렸다.
직접 친필로 써오신 축문을 운초문화재단 이사장께서 총총 읽어 가시는 동안, 우리 모두 무릎 꿇고 미호천 발원지에 대해 무한의 감사한 마음과 충북인의 자존감을 살리는 미호천 명칭 복원에 청풍명월 전 도민이 동참 해주실 것을 빌었다. 우리는 미호천 발원지인 이곳에서 이사장님의 미호천 명칭을 동진강으로 복원하려는 말씀을 듣는 순간 절로 숙연해졌다. 단체 사진도 찍으며 앞으로 진행될 미호천을 옛 이름인 동진강으로 복원시키자고 한마음 한뜻으로 결의했다.
미호천이 하루 빨리 조선 시대에도 동진강으로 불리어왔던 고귀한 하루 빨리 옛 이름으로 복원시켜 나가는데 민, 관, 언론이 혼연일체 되기를 갈망했다. 나아가, 동진강 까치네 일대를 넓은 호수 같은 보와 광장을 만들고, 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문화예술단지를 조성함은 물론, 연 초에 해맞이 행사는 물론 세종시까지 연계하여 세계에서 유일한 자연생태계와 각종 세계 문화예술 관광단지를 벨트화 하는 선진 청주가 되는 그 날을 손꼽아본다.
백제 시대에는 망이산에 토성, 통일신라는 석축을 길게 쌓아 외적을 막아낸 격전지인 망이산성(충북기념물 128호)과 진천 소흘산(봉화산)의 봉수와 음성의 봉수를 받아 경기도 죽산 건지산을 거쳐 한양으로 연결하는 직선 봉수대인 망이산 봉수대를 일정상 참관하지 못해 아쉬움이 온 몸에 감쌌다.
다가오는 대망의 새해에 다시 동진강(미호천) 발원지 산신제를 기약하며, ‘미호천 명칭 복원 운동’ 첫 삽을 뜬 사단법인 운초문화재단(류귀현 이사장)에 감사의 박수를 한아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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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의식(詩와意識)’(문예한국) 수필(1986), ‘한국아동문학연구’ 동시(2002) 등단
*충북수필문학회장, 청주문인협회장, 중부문학회장, 국제PEN충북위원장, 충북글짓기지도회장,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 문예수필문학회 부회장 역임
*충북문학상, 충북수필문학상, 운초문화상(문학), 충북아동문학상, 청주문학상, 진천문학상,
박화목아동문학상, 한인현글짓기지도상, 문예한국작가상 수상
*꿈을 주는 동시(동시집)(2권), 늘 처음처럼(수필집)(2권), 칼럼집(1권) 펴냄
* 현) 한국아동문학회 중앙위원장,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협 전통문학연구위원,
수필의 날 조직위원, 한국아동청소년문학회 충북지회장, 진천문협, 충북글짓기지도회, 충북아동문학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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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시 3편, 수필 3편 잘 받았습니다. 제21집을 위해 귀하게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