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7 박무정 (MirSin )
[미래의밤] 큐피드의 고뇌 2 : 접속 -中- 03/05 16:31 497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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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 수가 있는 거에요?"
김지연이 언성을 높였다.
"아, 그래서 제가……."
"세상에! 내가 어떻게 그 애를 끌어냈는데, 하라는 일은 안하고 도
대체 어딜 싸다니다 온 거에요? 그 좋은 기회를 다 놓쳐 버리고 도대
체…… 난 몰라, 몰라, 몰라!"
"예, 예,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닭 한마리>를……."
"몰라, 몰라, 몰라! 아무튼 당신 땜에 난 망했어요.소비자 고발
센터에 고발해 버릴 줄 알아요."
큐피드가 아무리 변명을 하려 해도 지연은 전혀 틈을 주지 않고 마
구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음식물을 입 안으로 가져
가고 있었다. 닭다리가 그녀 입에 다가간 순간, 어느새 뼈만 남아 상
위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저 밥줄 끊기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요?"
큐피드는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니, 당신이 잘했으면 내가 왜 이러겠어요? 맡은 일은 안하고 도
대체 어디에 눈이 뒤집혀서 그렇게 나다닌 거에요?"
마구 떠들어대는 그녀 입에서 튄 허연 파편들, 닭고기 조각이 얼굴
에 튀었지만 큐피드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눈이 뒤집혔다?
사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지금 그는 눈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스
스로가 쏜 화살에 맞아서 정신을 못 차리고 신상은 커녕 얼굴조차 모
르는 미지의 여자를 쫓고 있는 것이다. 자기 가슴에 눈길을 준 채 어
루만지던 큐피드가 이내 상이 뒤집혀 버릴 것만 같은 격한 한숨을 내
쉬었다.
"에휴! 정말 문제네요. 사실 나도 벌이가 안 돼서 먹고 살기도 바
쁜데 딴전이나 부리고 있으니……."
"딴전? 그게 뭐죠? 도대체 무슨 딴전을 부리길래 일을 다 망쳐 버
린 거에요?"
김지연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뭔가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
녀는 입으로 가져가던 닭날개를 내려놓고 요란스럽게 쏘아댔다.
"사실은 저도……."
"아, 빨리 말해요! 나 성질 급해요."
큐피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식점 안에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는 손님들의 눈이 그들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 이거 수많은 사
람들이 듣는 데서…… 이러다가 소문나면 정말 신용 다 떨어지겠네.
"지금 사람들이 많으니까 좀 조용히 해 줘요."
큐피드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람?"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지연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좋아요. 일단은 내가 참죠. 내가 젤 좋아하는 닭고기 사 줘서 참
는 거에요. 그나저나 하려던 말이 뭐죠?"
"예. 사실 나도 지금……."
"지금?"
지연이 말꼬리를 물고 빤히 쳐다보는 통에 큐피드의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닦달했다.
"지금 뭐요?"
"사실 저는, 사랑에 빠졌어요."
"예에?"
그녀의 반응은 매우 컸다. 아마 주변 사람들 시선이 다시 집중되었
으리라 생각한 큐피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랑?"
다시 목소리를 낮춘 지연이 물었다.
"박현주라고……."
큐피드는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박현주요?"
"예."
"그 여자가 누군데요?"
"나도 잘 몰라요."
"잘 몰라?"
"예. 통신에서 이름만 봤어요."
"아이구, 두야!"
지연의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 바람에
입에 든 고깃점이 밖으로 퉁겨 나왔다.
"저, 어떻게 안될까요?"
큐피드가 우물거렸다.
"뭘 말예요?"
"우리 서로 공조체제로 들어가죠."
"웬 공조체제?"
"제가 업무 처리비용을 안 받을 테니까……."
"안 받을 테니까?"
거기서 그녀의 눈이 몹시 커졌다. 목은 잔뜩 뽑아져 앞으로 기어나
오고 있었다. 중요한 대목이다. 비용을 안 받을 테니까. 안 받을 테
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큐피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안 받을 테니까, 뭐요? 빨리 말해요!"
이런 마녀 같으니!
정말 마녀는 집요했다. 돈, 돈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눈에 불을 켜
고 달려들고 있었다.
"김지연 씨도 나를 도와줘요."
"도와줘?"
"예, 간단해요. 그저 통신에서 박현주 씨를 만나면 슬쩍 신상명세
좀 물어 줘요.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어디 사는지만 알아내면 돼
요."
"에구, 내 팔자야."
지연은 한탄을 하면서도 손은 어느새 조금 전에 내려놓은 닭다리를
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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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안은 조용했다.
이미 손님들은 다 빠져 나가고 큐피드와 김지연 두 사람만 남아 모
니터에 눈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모니터 빛을 받은 네 개의 눈빛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마치 숲의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는 야수
처럼. 창밖에는 어느새 술집 간판 불빛이 하나 둘씩 꺼져가고 있었
다.
"에휴! 이거 언제나 오려나?"
한숨을 내쉬면서 마녀가 키보드를 토닥거렸다.
<박현주 님은 현재 사용중입니다.>
꽝!
동시에 네 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들어왔다!"
마녀가 먼저 외쳤다.
"아!"
큐피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말도 못하고 신음에 가까운 감탄사만
내보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무르며 마음을 안
정시켜야 했다. 그 사이 계속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고 있어요?"
이내 정신을 차린 큐피드가 물었다.
"지금 그 여자가 들어간 대화실을 찾아 쫓아가는 중이에요."
<## 김지연(OLYMPOS) 님이입장하였습니다. ##>
화면에 나타난 글자를 보고 큐피드는 극도의 긴장상태에 빠져들었
다. 드, 드디어! 드디어 그녀가 있는 전선으로, 그녀를 향해서…….
박무정(MirSin) 댜꾸댜꾸덜 오시라요! 내래 매우 반가움이야
요.
전도연(추녀2) [진짜전도연]어서 오실 지경입니까?
한석규(추남No1) [가짜한석규]어솽!!!
박현주(SUNY75) [써니] 어서 오시와요..^^
김혜진(SexyNo1) [쎄엑시] 어서 오실 줄이야!
김지연(OLYMPOS) <<떠똬빨간마뇨>>붸쉬쉬!봔과와여..
김일항(HWASIN) 오쇼!
박무정(MirSin) 왔으면 날래 자아비판 하기야요. 아니면 저쪽
구석에 가서리 무릎 꿇고 코피 흘리든지.
많은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사가 쏟아져 나왔다.
"빨리 물어봐요!"
다급한 큐피드가 안달했다.
"아, 가만 있어요! 들어가자마자 어떻게……."
마녀가 눈을 흘겼다.
"그래도 빨리……."
그때였다.
그 끔찍한, 흉악한 악마의 저주보다 더 끔찍한 말소리가 들려온 것
은.
"저, 손님들! 영업 때 됐는데요."
돌아보니 종업원이 옆에 와 서 있었다. 그 종업원. 쟁반으로큐피
드의 화살을 퉁겨낸 그 문제의…….
"알았어요. 금방 끝낼게요."
마녀가 돌아보며 대꾸했다.
"예. 좀 빨리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다니까요!"
마녀는 한 마디 쏘아붙인 뒤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불안한 눈빛으
로 종업원을 바라보던 큐피드의 눈도 화면을 향했다.
"가장 빨리 끝내는 방법이 있지."
마녀가 중얼거리면서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줘..현주뉨.혹쉬..>
<예?>
박현주가 대꾸했다.
<혹쉬..줴과와는현주뉨와뉜과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큐피드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드디어 마녀의 버릇이 나왔다! 도
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저 발음. 아마 그녀는 혀뿐만 아니라 손가락
의 유전자 이중나선까지 뒤엉켰나보다.
그러나 다행히도! 박현주는 똑똑했다.
<글쎄요? 전 첨 보는 거 같은데..^^>
<현주뉨쥡위워뒤쥐여?>
현주 님 집이 어디지요?
큐피드는 그 정신 없는 글자들을 풀어 읽느라 뇌의 처리능력 전체
를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저는 신길동인데요>
앗! 신길동! 드디어!
큐피드는 너무 기쁜 나머지 비명을 지를 번 했다. 이제야 일이 제
대로 풀려 가는 것이다. 똑똑한 마녀……. 갑자기 그는 마녀가 대견
스럽게 생각되었다.
<구뤠여?구럼뫈는궈과튼뒈..>
그래요? 그럼 맞는 거 같은데……. 근데 이 번역이 맞나?
<빨간마뇨님은 어디신데요?>
<현주뉨쥑좡위워뒤쉬쥐여?>
박현주가 물었으나 마녀는 무시하고 넘어갔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
다. 그리고 자기 신상을 밝히면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들통날 테
니까.
<저요? 전 여의도에 있는데요..>
<여의둬여?>
<예.. 서양이요>
<숴양?숴양위워뒤여?>
<투자금융이요..>
<숴양투좌금융위여?>
<예..*^^*>
서양 투자금융!
"알아냈다!"
지연이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큐피드도 신이 나서 외쳤다. 두 사람은 목표물의 위치를 확실히 포
착하는 쾌거를 이룩했다는 기쁨에 서로를 얼싸안고, 얼싸안고, 얼싸
안고…….
"으악! 징그러!"
두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면서 상대를 밀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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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 쥐금 급한 일위 생겼어."
마녀가 전화기에 대고 칭얼거렸다.
"그냥, 와 보면 알와. 별권 와뉘쥐뫈, 쥐금 돈위 없워 못 움쥑여."
큐피드는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공중전화 부스 속의 마
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뮈안행! 정말 뮈안행! 화쥐뫈 눠도 왈좍아. 놘 의정부 쥐뤼 좔 뭘
롸숴 쥡웨 뭣 들워과."
으휴! 도대체 무슨 소리냐? 큐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간단
하게, 미안해, 너도 알잖아, 난 의정부 지리 잘 몰라서 집에 못 들어
가. 그렇게 말하면 되지, 도대체 웬 기린 모가지꼬인 것 같은 발음
은!
"엉! 궈뫄워. 빨뤼 와!"
말을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마녀가 득의의 표정으로 큐피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 카드를 챙긴 뒤에 부스를 나와 큐피드
에게 다가왔다.
"이제 됐어요."
그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 친구가 날 데리러 올 거에요.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말아요!"
"예, 알았어요. 이번엔 절대!"
그렇게 말하면서 큐피드는 가방을 벌려 안에 든 활과 여러 개의 화
살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밤이라 훨씬 유리해요. 그 사람은 나를 발견하기 힘들 거
고 아무도 없어서 더 좋고."
"근데, 설마 야맹증은 아니겠죠?"
마녀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걱정 말아요. 난 양쪽 시력이 5.0인 데다가, 닭보다 올빼미를 즐
겨 먹기 때문에 밤눈은 끝내줘요. 그리고 봐요."
큐피드는 화살 하나를 꺼내 마녀 앞에 내보였다.
"이건 화살촉에 예광제가 발라져 있는 거에요. 말하자면 예광탄인
셈이죠. 그리고 이거……."
큐피드가 두 번째 끄집어낸 것은 망원경이었다. 마녀로서는 처음
보는 묘하게 생긴 망원경.
"이건 인프라레드 스코프에요."
"인프라레드 스코프?"
"그걸 한국말로는 적외선 망원경이라고 하죠. 이걸 활에 달고 조준
하면 밤에도 천 미터 밖에서 오줌 누는 여자 엉덩이까지 볼 수 있어
요."
여자 엉덩이?
그 말에 장난스럽게 인상을 찡그리던 마녀가 이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여자 엉덩이던 가슴이던. 아무튼 심장은 더 환하게 보이
겠죠? 뜨거운 피가 끓는 심장!"
"당연하죠."
큐피드가 망원경을 가방 속에 넣으면서 대꾸했다.
"좋아요. 그럼 이젠 믿겠어요. 다신 실수하지 말아요."
"예. 그러죠."
"그리고, 일 처리비용은 공짜라는 거 꼭 기억해요."
그 말에 약간 시무룩해졌던 큐피드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죠, 뭐. 내 사랑을 찾게 해줬는데 뭘 못해 주겠어요."
"그런데 말예요, 큐피드."
마녀가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
"너무 여자한테 연연하지 말아요."
"왜요?"
"큐피드는 직업이 남녀의 사랑을 맺어주는 거에요. 그런데 자기가
사랑에 빠져 버리면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나 같으면
참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할 수 있다면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면서
말리겠어요."
"음……."
큐피드는 두 눈을 내리깔고 무거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더군다나 요즘은 장사가 안 돼서 죽을 쑨다면서요? 그런데 엉뚱한
데 한눈팔고, 그러다 보면 장사는 더 안 될 거고 신용까지 떨어질 수
있어요."
큐피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뭐, 판단은 자기가 할 일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에
요."
큐피드는 우울했다.
어떻게 하지? 그녀 말은 분명히 맞다. 이렇게 나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이 모두 여자에 대한 감정을 자
제하지 못해서 몰락하고 말았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
데 그저 남의 가슴에 화살이나 쏘아대서 먹고 사는 주제에, 정말 이
런 처지에 사랑타령이란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닐까?
"아무튼 뭐……."
큐피드가 너무 시무룩해 보이자 마녀가 말을 돌렸다.
"박현주 씨는 언제 찾아갈 거죠? 날 새면?"
"예."
큐피드는 짧게 대꾸했다.
"그래요. 하긴, 집 주소는 모르니까 직장 근처에서 기다려야겠죠.
나머지는 큐피드가 알아서 잘 하겠죠. 이제 우리는 발등에 떨어진 불
부터 꺼야 하니까."
발등에 떨어진 불…….
그것은 마녀에게 있어서는 남자친구 처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큐피드에게 있어선…… 그것은…….
박현주…….
큐피드는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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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서양 투자금융>
건물 현관 안내판에 적혀 있는 몇 개의 상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서양 투자금융!
"저거야!"
"예?"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친 큐피드는 옆에서 돌아오는 반응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초로의 청경 아저씨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고 있
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큐피드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살피고
있었다.
"아, 예. 제가 찾는 사람이 이 회사에 있거든요."
큐피드는 얼른 쑥스러운 웃음으로 둘러댔다.
"이 회사요?"
"예."
"이 회사가 어딥니까?"
"예. 서, 서양 투자금융이요."
"서양 투자금융이요?"
"예."
청경은 계속 의심을 가득 품은 눈초리로 큐피드를 살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서양 투자금융은 4층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대꾸한 큐피드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가 눈앞에 있다. 내 사랑이 눈앞에 있다! 그녀
를, 박현주 그녀를, 그녀를 만나게 된다!
후닥닥닥!
2층을 지나 3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뛰어 올랐다. 만세, 만세, 만
만세! 드디어, 드디어 박현주를!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4층에 도착한 그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나서
비상구 문을 통과했다. 안에는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저쪽 끝에는,
끝에는, 유리로 된 문에…… 서양 투자금융! 그 안에 상담창구가 보
이고, 창구에 서 있는 직원들이 보이고, 고객 두어 사람이 보이고,
보이고, 보이고, 보이고…….
박현주 씨!
하마터면 그렇게 외칠 번 했지만 겨우 참고 허겁지겁 걸어가 그 유
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잔잔한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디엔가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예, 왔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소리에 대꾸를 하며 그는 창구 앞으로 다가섰
다. 그를 발견한 여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헉!
첫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큐피드를 경악하게 했다. 으으, 저,
저런 외모를 가졌을 줄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비록 뚱뚱하고, 조금 낡았고, 또한 얼굴도 전혀 볼품이
없었지만,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었다. 자신이쏜 화살을
맞은 큐피드는 이미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 어떤 여자도 박현
주를 대신해서 그에게 사랑을 줄 수도, 또한 받을 수도 없었다. 아무
리 더 예쁜 여자도, 아무리 더 늘씬한 글래머라도 그녀를 대신할 수
는 없었다. 비록 끔찍할 정도로 못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저, 박현주 씨?"
큐피드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어 겨우 목소리를 내밀어
그녀 이름을 불렀다.
"예?"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큐피드는 상 위에 놓인 돼지머리를
연상했다. 아니면 영화<이티>에서 본 그 기막힌 외계인의 얼굴을.
하지만 그러한 얼굴조차도 그에게는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휴우! 겨우 찾았네요. 박현주 씨를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박현주 씨요?"
여직원이 입술을 오므렸다.
"예. 박현주 씨 아닌가요?"
"예. 아닌데요."
악!
이럴 수가……. 큐피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번 했다. 절망은 빠
르게 닥쳐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머나먼 길을, 사랑을 찾기 위
해 그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비바람 눈보라를 헤치면서 이 머나먼 타
국 땅까지 찾아왔건만……. 아니, 이건 과장이 너무 심했나?
"저, 그런데 무슨 일로 박현주 씨를 찾죠?"
여직원은 큐피드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고 나서 물었다.
"예?"
"박현주 씨와 어떤 관계냐고요."
"아, 저, 저, 그, 그건…… 서로…… 친구…… 사이……."
큐피드가 우물쭈물대는 동안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지켜보던 여
직원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박현주 씨는 지금 쉬고 있거든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예?"
곧 여직원은 수화기를 들고 번호판을 두드렸다.
"박현주 씨가 아니라고요?"
큐피드가 물었지만 그녀는 수화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녀가 입을 열었다.
"아, 현주니? 웬 손님이 널 찾으신다. 빨리 나와 봐라."
엥? 그런가?
이런 멍청이, 이런 멍청이! 큐피드는 마음 속에서 수십 번도 더 자
신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렇지! 이런 멍청이. 금융회사에 여직원
이 어디 한둘이냐? 그런데, 진짜 박현주는? 그는먹이를 놓친 개처럼
광기가 가득 서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저, 저기 안쪽
에, 안쪽에 있는 사무실에…….
조용하게 흐르던 음악이 서서히 끝나고 있었다. 갑자기 주변에 적
막감이 찾아왔다. 큐피드로서는 매우 어색한 순간이었다. 이 어색한
순간을, 어떻게…….
짠, 짠, 짠, 짜자잔…….
갑자기 실내의 공기를 진동하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이 흘러나
오기 시작했다. 큐피드의 눈이 놀랄 만큼 휘둥그레졌다. 어디선가 많
이 듣던 곡…… 맞아, 이, 이 곡은, 파워 오브 러브……. 그래, 텔리
비전 프로 에서 나오던…….
그때였다.
안쪽에 사무실로 통하는 문에서 한 여직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의
아한 표정을 얼굴에 가득 담은 채로.
오오, 세상에……!
이미 음악에 취해버린 큐피드는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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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라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저, 모르세요? 저는…….>
<혹시 영업하러 온 거면 돌아가 주세요.>
<아, 아닙니다. 저는…….>
<사실 요즘은 어려워요. IMF 시대라서 아무것도 구입할 수가 없어
요. 아시잖아요. 그리고 빨리 들어가 봐야 돼요. 괜히 요즘 같은 때
오랜 시간 자리 비웠다가 잘려요.>
<아, 전 영업사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래 얘기할 것도 아닙니
다.>
뭔가 작은 것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큐피드의 눈이 무심코 그
물체를 따라갔다. 배드민턴에서 사용하는 셔틀콕이 저만치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통통 튀었다. 곧 여자 하나가 그것을 주우러 쫓아
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따사로운 햇볕을 즐
기고 있었다. 이제다른 해보다 빨리 봄이 찾아온 데다가, 또한 오늘
은 토요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의도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부터 롤러스케이트, 그리고 배드민턴
등등…….
잠자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생각은 다시 한 시간 전의
금융회사 직원 휴게실로 돌아갔다.
<그럼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박현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다는
생각에 큐피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현주 씨를 사, 사…….>
<사, 뭐요?>
<사랑합니다.>
<예에?>
현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입도 크게 벌어졌다. 마치 그 모습
이 코끼리를 처음 본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이 아저씨 봐.>
현주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전 정말 심각합니다. 믿어 주세요.>
<아니, 도대체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현주는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물었다.
<저 모르세요? 큐피드라고 하는데요.>
<큐피드요?>
<예, 어제 오후에 피시 통신에서 만났잖아요.>
<어제 오후에요? 언제요?>
<아, 제가 그랬잖아요. 현주 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예에?>
<저 있잖아요. 제 이름이 기억 안 나세요? 아이디는 구 피트였고
요.>
<구 피트요? 첨 들어 보는데요?>
<아, 그러니까, 구, 숫자로 구요. 그리고 피트! 에프, 이, 이, 티.
즉 구 피트요. 나인 피트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제 아이디죠. 원래 큐피드로 하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먼저 다
써 버렸더라고요. 대문자 소문자 다 이미 등록되어 있고, 대문자 씨
에 소문자를 쓰려 해도 이미 다 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구 피트라
고 했죠, 뭐.>
<까르르르…….>
현주가 너무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사랑합니다.>
<저, 이보세요, 큐피드 씨?>
<예, 현주 씨.>
그녀가 다정스레 부르자 큐피드는 고개를 바짝 앞으로 내밀었다.
<사실 전 그런 적 없어요. 어제 오후엔 대화실 들어가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예?>
큐피드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냥 밤늦게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요?>
<어, 그럼 어제 오후엔…….>
<아, 알았다!>
현주가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말했다. 큐피드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그녀에게 주목했다.
<그 아이디 아마 제 친구가 썼을 거에요.>
맙소사!
<예?>
<예. 미국에 유학 간 고등학교 동창인데, 가끔 한국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 인터넷을 타고 들어 오거든요.>
미국? 맙소사!
<그때 말머리에 써니라고 안 써 있었죠?>
<예. 그런 것 같은데요.>
<그거 봐요. 전 항상 써니라는 말머리를 붙이거든요.>
써니? 맞아! 밤 늦게 들어갔을 땐 그런 말머리가 붙어 있었어.
<아, 그래도…….>
<예?>
<어쨌거나 전 현주 님을 죽도록 사랑합니다.>
<어머, 이 아저씨가…….>
<제발, 현주 씨. 저의 사랑은 하늘보다 더 높…….>
<그만 두세요. 전 일하러 가 봐야 돼요.>
<어, 어, 혀, 현주 씨?>
휴우!
더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그녀 마음을 돌이킬, 아니 그녀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이 없
는 것이다. 당연하지. 생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면 어떤 여자가 안 질릴까.
하지만, 그래도!
그는 무의식 중에 가방을 더듬었다. 그랬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것
은 오직 가방, 아니, 가방 안에 들어있는 비장의 무기, 바로 화살이
었다.
핑핑핑…….
"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얼굴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
주 심하진 않았지만.
"아으……."
겨우 몸을 일으켜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색의…….
"아저씨, 죄송합니다!"
한 소년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큐피드는 그것을 집어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플라스틱 재질에 기
역 자 형태로 꺾어진 놀이기구. 부머랭이었다.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그거, 돌려주세요."
소년은 풀이 죽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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