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으로 떠나는 여행
일 시 : 원기 105년 9월 23일
원/불/교/전/포/교/당
인 사 말 씀
금년은 코로나 19라는 감염병의 확산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자재하고 집에 머무르다 보니 갑갑하기도 하고 오래 있으면 우울하기도 하여 번개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하루의 여행이지만 좋은 사람들끼리 같이가는 즐거움도 있고 해설을 들으며 가기에 유익하기도 할 뿐만아니라 자연이 주는 호연지기는 삶에 활력을 넣어주리라 믿습니다.
법회가 끝나면 점심 먹기에 바빠 서로 간 세정이야기며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지 못하는데 이 여행이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어디에 묶이지 않고 서로 의논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하루를 보내는 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마스크를 쓰고 여행을 하여야 하고 식사를 하는 것도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여럿이 가다 보면 서로 특성이 있어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집에서 쉬는 것보다는 불편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경험은 편안함에 못지않은 기쁨이 있습니다.
갑자기 내놓은 교무의 제안을 불평없이 함께해준 교도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시간 되는 대로 번개팅을 하고자 합니다. 많은 대화와 웃음이 넘치는 번개팅이 되기를 원합니다.
원기 105년 9월 23일
주 임 교 무 서 광 덕
◉ 차 례 ◉
Ⅰ 통영개관 4
Ⅱ 이순신공원 6
Ⅲ 청마문학관 12
Ⅳ 동피랑 15
Ⅴ 남망산 18
Ⅵ 세병관 22
Ⅶ 한산도와 이순신 25
Ⅷ 박경리기념관 31
Ⅸ 윤이상기념관 34
Ⅹ 섬투어 39
Ⅺ 백석시인과 통영 42
Ⅻ 기타 46
부록 49
Ⅰ 통영 개관
인구 약 13만명의 도시.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로, 삼도수군통제영은 조선 시대 지금의 해군본부라고 볼 수 있으니 통영시는 당시의 '군항 도시', '군사 도시'였던 셈이다. 기록상으로는 선조 37년 (1604년)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통영이란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였다. 통제영이 자리 잡기 전에는 두룡포라 불렸다고 한다.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동양의 나폴리(또는 한국의 나폴리)로 통영을 표현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으나 김성은 지휘하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수행한 상륙 작전에 의해 탈환되었다. 1953년 거제도 가 거제군으로 다시 분리되어 나갔으며, 1955년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전국적인 도농통합(시군 통폐합) 당시 충무시와 통영군이 다시 통영시로 통합되었다.
통영은 해로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부산에서 여수를 잇는 항로의 중심지였다. 육지부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150여개의 섬이 있다. 한산도를 비롯하여 사량도 욕지도 연화도 비진도 연대도 초봉도 등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으며 국도섬에는 대순진리회 계열인 청우일신회라는 종교단체가 '집단 생활을 하기도 한다. 해안선이 구불구불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므로, 곶과 만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이런 곳을 이용해 간척한 곳도 여기저기 있어서, 원래는 세병관 앞 도로부터 바다였다.
미륵도에는 미륵산이 있다. 높이는 462m로서 통영 내에서는 벽방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미륵산에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가 설치된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통영 행정기관은 배가 있다. 관내에 섬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통학선, 한전에서 운영하는 전력공급선, 통영시청에서 운영하는 행정선과 급수선, 소방서에서 운영하는 구급선, 경찰서에 순찰선 등이 있다.
국제 유일의 업종별 수협 중 하나인 기선권현망수협이 있을 정도로 대부분 멸치조업은 이곳에서 일어난다. 이 외에도 굴수하식수협과 멍게수협, 근해통발수협(장어, 꽃게) 등의 단위수협이 있다.
먹거리로 도다리 쑥국, 우짜면, 빼데기죽도 있으며 굴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굴요리를 계발하고 있다.
도천동에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 있다.
전통예술로는 통영 나전칠기로 알려진 옻칠 예술이 유명하며, 옻칠 예술은 선사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천년 동안 통일신라시대 채화칠기, 고려시대 나전칠기를 통해 계승 발달하였다.
전혁림(1916년 1월 21일 ~ 2010년 5월 25일)은 유치진,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와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해 문예 활동을 했고 "가장 통영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투영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통영의 문화와 예술을 실천해왔다. 전혁림미술관은 전혁림 화백의 개인 미술관이다.
통영 미륵산에 설치된 통영케이블카는 한국에서 유일한 2선(bi-cable) 자동순환식 곤돌라 방식으로 스위스의 최신기술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그 길이도 1975m로 국내 일반관광객용 케이블카 중에서는 가장 길다. 2017년 2월에는 스카이라인 루지가 개장됐다. 이는 뉴질랜드(2곳), 캐나다(2곳), 싱가포르(1곳) 이후에 세계에서 6번째로 개장되었다.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서 2002년 부터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는 21세기 들어서 통영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잡았고 2010년부터는 경남국제음악콩쿠르에서 이름이 바뀐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가 개최되고 있다.
Ⅱ. 이순신 공원
1. 공원개요
이순신공원은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을
이룬 이순신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며,
통영시 정량동 망일봉 기슭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다.
이순신공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중앙에
한산도와 거북등대, 한산대첩비가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미륵산이 왼쪽으로는 거제도가 보인다.
※ 김종대판사의 재판이야기 – 박정희대통령이 관광호텔에서 저기에 나무가 없다고 하자 시에서 아열대식물원을 만들면 저 땅을 주겠다 공고, 많은 돈을 들여 노력했으나 30%정도 밖에 살지 않아 시에서 회수, 재판으로 연결
2.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인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싸움이다.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싸움의 하나였다.
* 이이가 십만 군대를 길러야 한다며 '십만 양병설'을 주장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무유(撫諭)하도록 하였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분파(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이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정유재란)
※ 임진왜란 일지
* 전쟁 발발 1592년 1월 14일
* 왜군 서울 도착 1592년 5월 2일
* 정유재란 1597년 1월 15일
* 명랑해전 1597년 9월 목포와 진도사이 바다
* 도요도미 병사 1598년 8월 18일
*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여수와 남해사이 바다
* 전쟁종료 1598년
* 명군 철수 1599년 9월
3. 한산대첩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6월 10일(양력 7월 18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서진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으며,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데 왜선이 머무르고 있었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6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군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도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과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적선 73척
아선 55척
격침 47척, 나포 12척, 패잔선 14척(도주)
※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이순신장군, 영국의 넬슨제독과 함께 세계 3대 해군제독(提督)으로 불린다. "일본이 도자기나 만드는 야만국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긴 것을 보고서야 문명국임을 알게 되었다" 라는 영국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일본 역사상 최고최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 전쟁으로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으며, 일본 역사 10대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어떤 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 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자, "나와 넬슨 제독의 비교는 가능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격에 안 맞는다"며 "군신(軍神)으로 존경받을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뿐"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순신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세계적인 전쟁 영웅 도고제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 군선 비교
판옥선은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평저선은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물속에 잠기는 홀수가 깊지 않고 뱃머리를 돌릴 때 선회반경이 작아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암초가 많은 우리나라 남해안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한국 지형에 적합한 군선이라 할 수 있다.
판옥선은‘판옥’ 구조이다. 판옥선은 갑판 위에 상장갑판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면 전투원은 상장갑판 위에, 격군 같은 비전투원은 상하갑판 사이에 위치하여 비전투원은 공격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상장갑판 위에는 좌우편에 갑판 위의 전투원을 보호할 여장을 설치한 것이다.
선체길이가 약 28~34m 로 추정된다.
승선인원은 125명 가량
* 여장 (女牆) ~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
이순신 동상
1952년 4월 13일 진해에
1953년 6월에 통영에
1968년 4월 27일 광화문 건립
※ 必死卽生(필사즉생) 必生卽死(필생즉사)
이 명구(名句)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명량해전(울돌목해전)에 나가기 하루 전 전 장병에게 전투태세를 잡기 위해 배수진(背水陣)을 치면서 한 말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 허실편에도 유사한 말이 나온다. 장군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탐독하고 전략에도 활용하였다. (탑에 새겨진 글씨)
Ⅲ. 청마 문학관
1. 개관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 (靑馬 柳致環: 1908~1967)의 문학정신을 보존,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2월 1,220평의 부지에 문학관(전시관)과 생가(본채, 아래채)를 복원, 망일봉 기슭에 개관하였다. 전시관(51평)에는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편과 생명 추구의 시작을 감상하고 작품의 변천,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작품 세계'편, 청마가 사용하던 유품들과 청마 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편, '시 감상코너'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마의 유품 100여 점과 각종 문헌 자료 350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2.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 대표시로는 '깃발'.'그리움'.'일월' 등이 있다.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 출신.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의 동생이다.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문예월간(文藝月刊)』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그리움」·「일월」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쳐 온갖 고생을 맛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 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絶島)」·「수(首)」·「절명지(絶命地)」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하였고, 6·25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 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보병과 더불어』는 이 무렵의 시집이다. 1953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다.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2000년 2월에는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청령일기(蜻蛉日記)』·『청마시집』·『제9시집』·『유치환선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미루나무와 남풍』·『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다.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3.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이야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오면 민망하고 아니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목소리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유치환의 편지 5,000통
부인께 질투나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니
– 청마를 보고 반하지 않는 여자가 있으면 여자도 아니다.
4. 유치환의 생가
유치환의 아버지가 거제도 둔덕 사람
돈을 벌기 위해 당시 도시였던 통영으로 나왔고
약방에서 일하다 그 집 딸과 결혼 (데릴사위)
청마의 집은 어디인가?
둔덕에 청마기념관이 있다.
5. 청마와 정지용
통영 미륵산에 세워진 정지용 시비는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정지용 시인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정지용 문학비'는 1950년 정지용 시인이 통영을 방문했을 때, 서정주 등과 함께 1930년대 생명파 시를 주도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안내를 받아 미륵산 등 통영 곳곳을 돌아본 후 느낌을 쓴 '통영 1'부터 '통영 6'까지 연작 기행문 중 '통영 5'의 일부를 새긴 것이다. 신선대에 세워진 정지용 문학비가 특별한 또하나의 이유는 통영 사람이 아닌 외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워진 문학비라는 것.
여기에는 생명파 시인 유치환, '꽃'의 시인 김춘수, 대하소설 토지를 쓴 소설가 박경리, 국제적인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에 이르기까지 '예향'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통영에서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통영5」
정지용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더욱이 한산섬을 중심으로 하여
한려수도 일대의 충무공 대소 전첩기를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기록해야 할 만치
문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미륵도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를
다시 읽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
이것은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라고 보여진다.
차라리 여기에서 흐르는 동서지류가 한려수도는 커니와
남해 전체의 수역을 이룬 것 같다.
Ⅳ. 동피랑
1. 개관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다. 통영 시가지 동쪽에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의 바위 피랑지대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옛 통영성의 동포루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푸른 통영21 추진협의회는 2007년 10월 도시재생의 색다른 시선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이라는 사업을 시행했다. 이는 통영시가 동포루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하자,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사업이었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그림들과 강구안 바다 풍경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통영시의 명소가 되었다. 2008민관포럼 최우수상, 2008전국 마을 만들기 대회 우수상 등을 받았다.
2. 고지도
통영에는 고지도가 많다 – 통제영에 화원이 배치
통영은 크고 미륵도는 작다 – 아는 곳을 크게 그린다.
통영성 – 석성과 토성으로 이루어 짐
세병관 서포루 북포루가 보임
* 욕쟁이 할머니 바리스타
* 통영 사투리 소개
* 올라가는 길에 강구안이 보임
* 피랑이라는 말 – 벼랑
* 날개에서 사진
3. 포루 [砲樓]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포를 설치하고 쏠 수 있도록 만든 구축물
장대(將臺) ~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 보, 둔, 수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
각루 ~ 물을 넣은 항아리에 구멍을 뚫어 물이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게 하여, 고이는 물의 양이나 줄어드는 물의 양을 헤아려 시각을 알게 하는 시계
1) 동포루
2) 서포루
3) 북포루
Ⅴ 남망산
1. 개관
충무공원이라고도 하며 벚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높이 80m의 남망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공원으로 남동쪽으로 거북등대와 한산도 해갑도 죽도 등의 한려수도의 절경을 바라보며 또한 산꼭대기에는 1953년 6월에 세워진 이충무공의 동상이 서 있고 공원 기슭에는 조선시대에 1년에 2번 한산무과(閑山武科)의 과거(科擧)를 보았다는 열무정의 활터와 나전칠기공예의 기술을 연마시키는 전수회관이 있다.
2. 청마 유치환 시비
깃 발
유치환(柳致環)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이상을 향해 동경의 끈을 놓지 않는 깃발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모순성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노스텔지어 ~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유의어 향수(鄕愁), 망향(望鄕)
3. 초정 김상옥 시비
봉선화
김상옥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보고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은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 선생은 일제 암흑기인 1920년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다. 1936년 조연현과 함께 시지(詩誌) <맥>의 동인을 지냈고,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조 <봉선화>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을 받았으며, 1941년에 동아일보 등에 시, 시조, 동요가 당선되기도 했다.
초정 선생이 시·서·화에 두루 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범인들은 시, 시조, 동시 중 어느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기도 지난(至難)한 노릇이지만 초정 선생은 시의 전 장르는 물론 서(書)와 화(畵)에 이르기까지 능하여 공히 대가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이런 예술적 재능과 성과는 실로 고금 천지간에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초정 선생의 재능은 거기서 갇히지 않고 도자기와 전각(篆刻) 분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안목을 갖추었으니 실로 전인미답의 경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김용주 화비
작품의 주제는 선구적인 그의 행적을 상징하는 빛, 그리고 미술계의 힘을 추동하는 톱니바퀴 형태가 결합된 형태다.
빛의 톱니바퀴처럼 통영과 한국의 문화를 견인하는 강력한 동력으로써 과거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진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화가 김용주는 1910년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났으며 인동도호부사를 역임한 통영 만석꾼 김진현의 증손자이다. 어릴적에 아버지 김홍수를 여위고 할머니 고도선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맏손자로 자랐다. 1926년 통영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카와바타 미술학부 양화부에서 수학하고 동 대학 인체연구실에서 6년을 더 수학하고 1940년 귀국하였다. 동경 유학시절 어려운 유학생을 불러 같이 숙식했으며 유치환, 유치진, 이중섭도 그당시에 만났다
※ 유치환 동상 터
5. 김춘수 시비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6. 남망산 조각공원
세계 10개국 유명조각가 15명의 작품으로 1997년에 조성된 남망산 조각공원은 5,000여 평의 부지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개성있는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7. 열무정
한산정이라는 활터가 있는데, 그 빼어난 절경에 모두 감탄한다. 과녁은 바다 건너에 있다. 한산정이 위치한 곳에 바다로 삐죽 뻗어나간 곶의 끝에 있기 때문에 무겁과 설자리 사이로 바다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왜적과 싸우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무과를 치렀다.
112대 수군통제사였던 구선행이 1753년에 남망산에 남송정(南松亭)을 세웠다. 해방과 더불어 활쏘기 역시 살아났는데, 도천동에 해운정(海雲亭), 그리고 한산섬에 한산정이 각기 되살아났다. 1962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이름을 열무정이라고 고쳤다.
Ⅵ 세병관
1. 통제영지
통제영(統制營)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 수군을 지휘·통괄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영을 말하며, 삼도 수군 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지금의 통영시 관내에 통제영을 짓기 시작한 것은 1603년이다. 제6대 수군통제사 이경준이 이곳에 터를 닦기 시작했고 1604년 9월 9일에 임금의 윤허를 받아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듬해인 1605년 7월 14일,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 세병관을 창건하고 차례로 통제영 관아를 지었다.
1678년 윤천뢰 제57대 수군통제사 때 영문 주위의 산능선을 따라 높이 약 4.6m, 둘레 약 3.6km,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 후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개의 대문과 2개의 암문 그리고 3개의 포루 등이 있었고, 세병관을 비롯하여 100여 개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
통제영은 1895년(고종 32)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300년간 그대로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중심 건물인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헐려 사라졌다. 성곽과 관아는 대부분 헐리고 통영성 일부와 세병관이 남아 있었다.
삼도 수군의 본영이었던 통제영은 복원 및 보전을 위해 1998년 2월 20일 사적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유적지 정화, 호국정신 계승을 위해 운주당 · 경무당 · 내아 · 병고, 백화당과 12공방, 중영(中營) · 중영 내아(中營內衙) 등의 건물이 복원되고 있다.
2. 세병관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은 경상남도 통영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2002년 10월 14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었다.
세병관은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1604년(선조 37년) 완공한 조선 삼도수군 통제영 본영(三道水軍 統制營 本營)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慶想, 全羅, 忠淸) 수군을 총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 2벌대로 쌓아 비교적 낮은 편이며 기단 윗면에는 전돌을 깔았고 큼직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는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5칸이다.
한때 통영초등학교로 사용되면서 건물 내부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우물마루 보다 약 45cm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고 그 위로 홍살을 세워 공간의 위계를 분리하였다.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이미 국보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므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승격·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3. 벅수
토지대장군이라고 적혀 있는 통영 문화동 벅수 중요민속자료 제 7호
벅수(장수)는 나무나 돌의 상부에 신장상이나 귀면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 신장명이나 이정을 새긴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해안지방에 널리 분포되고 있다.
돌벅수는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한 비보 장승으로서 동남방이 허다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광무 10년(1906년) 세병관 입구에 벅수계를 만들어 세웠다.
* 裨補 -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산맥이 약하거나 뭔가 허하다고 판정되어 보강하다
3. 운주당 (運籌堂)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도‘운주당’이라는 서재를 즐겨 사용했고 그곳에서 부하 병사,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즐겼다고 한다.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 (同論畫計).”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 (百爾籌策).”
“밤낮으로 의논하고 약속했다 (日夜謀約).”
4. 12공방
통제영은 군수 물품이 필요했다. 창·칼만 아니라 통제사가 쓰면 부채도 군수 물품이었다. 조정의 물품 진상 요구도 계속됐다. 옻칠·자개·목기·대발 따위로 이름난 십이공방(十二工房)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십이공방이라 해도 공방이 열두 개는 아니었다. '아리랑 열두 고개', '열두 번도 더했다' 따위에서 보듯 '꽤 많다'는 뜻으로 숫자 '십이'를 붙였다. 300년가량 이어진 십이공방은 통영이 빼어난 예향(藝鄕)이 된 원인 가운데 하나다.
5. 주전소
통제영에서의 주전은 영조 18년(1742년)에 화폐주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영조 29년(1753년)까지 주전한 기록이 있으며, 출토된 상평통보는 영조 29년에 주전된 중형전 임.
Ⅶ 한산도와 이순신
1. 개관
한산도는 610세대 정도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 한산도에 설치되었고, 이 일대의 한산대첩을 이루었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최고봉인 망산은 해발 293m로 임진왜란 당시 망루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으로 이곳에 제승당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2. 이순신장군의 시
1) 청구영언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2) 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 (수국추광모) 바다에 가을 빛 저무는데
驚寒鴈陣高 (경한안진고) 찬바람에 놀라 기러기는 높이 나네
憂心輾轉夜 (우심전전야) 시름겨워 잠 못 드는 밤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새벽달만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3) <陣中吟>(진중음)
誓海漁龍動(서해어룡동) 바다에 호국충성을 서약하니
어룡조차 감동해 꿈틀거리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태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다 알아 차리더라
4) 충무공의 장검에 새겨진 글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장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벌벌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구나.
* 이순신 장군이 3년 8개월동안 한산도에 본영으로 정하고 수군 훈련
* 박정희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 성역화 하다
* 한산대첩비 – 준공식을 못 보시고, 박근혜대통령도 못오고
박정희대통령의 친필 – 입구, 사당
문에 걸린 글씨 – 도지사의 글씨
3. 제승당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제11호) 안에 있는 건물 이름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唐浦海戰)을 승리한 뒤,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적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하였던 곳이며 집무실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운주당(運籌堂) 터다.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1740년(영조 16)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하면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영당인 충무사(忠武祠)를 비롯해 유허비·기념비·귀선각(龜船閣)·한산정(閑山亭)·대첩문(大捷門) 등이 있으며, 1976년 성역화 작업으로 정비되었다.
4. 한산대첩비
임진왜란 때 충무공께서 적선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그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버리는 대승첩 장면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정부에서는 이 역사적인 대승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서기 1978년부터 서기 1979년까지에 국비 1억 5천 5백만원을 투입하여 한산 앞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문어포 산정에 거북선을 대좌로한 높이 20m의 한산대첩기념비를 건립하였다.
5. 한산도의 지명들
개미목 - 왜군이 도망갈 수로를 파기 위해 개미처럼 달라 붙던 곳
비추리 - 전함을 만들던 곳
대섬(상죽도, 하죽도) - 화살을 만들던 대밭이 있던 곳
돛단여 - 전함을 가장하여 의병(疑兵) 전술을 쓰던 곳
두억개 - 왜적의 머리를 수없이 썰던 곳
망골(망산) - 바다에 있는 적의 동정을 살피던 곳
매왜치 - 왜군의 시체를 매장하던 곳
멜개 - 군수품 하치장이 있던 곳
문어개 - 도망치던 왜군이 현지 주민들에게 도망칠 길을 묻던 곳
야소 - 군수창고가 있던 곳
염개 - 소금을 굽던 곳
옷바위 - 군복을 마련하던 곳
진두 - 현재 한산면의 중심지로 진을 치던 곳
진터골 - 뭍에 올라 전투훈련을 하던 곳
창동 - 군량 창고가 있던 곳
해갑도 - 이순신 장군이 승전 후, 갑옷을 벗고 쉬던 곳
용초 - 쇠를 만들고 채굴하던 곳
숯덩이골 - 숯 등의 연료를 조달하던 곳
독안바위 - 질그릇을 만들던 곳
못개 - 식수를 마련하던 곳
6. 이순신의 백의종군
1597년(선조 30) 조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그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 명하였다.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이후 우의정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고, 3일 한양을 떠나 6월 4일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 도원수부 초입까지 걸어 내려갔다.
원균(元均)이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명량대첩으로 해상권을 회복했다.
7. 12척의 배
1592년 1월 1일. 무려 6등급을 뛰어넘어 "전라좌수영 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 요새 말로 대위계급에서 별 두개 소장으로 초특급에 파격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과 “경상 우수영 원균" 그리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여기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내려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인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렸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문무백관들 모두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선조임금을 압박하고,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으로 진급을 시키는 데도 크게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공은 공 사는 사"라고 하며 의견에 반대를 못 했으니 당시 이순신의 역적누명 상황이 어떻했겠는가.
당시에 영의정 겸 도체찰사(국가비상사태직무총사령관)인 “오리 이원익"이 거듭되는 선조임금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를 말한다.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을 못하옵니다"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형을 모면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명령을 받았다.
동년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하면서 원균이 대패하고,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선조는 궤멸 직전의 수군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자 이순신은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리지요. 선조는 궤멸 직전의 수군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을 내린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7월 18일에 원균의 칠천량패전(漆川梁敗戰)을 알게 된다. 22일에는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로부터 전황을 들었으며, 8월 3일에는 선전관 양호(梁護)로부터 교유서(敎諭書)를 받고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복귀한다. 이어 곧바로 구례, 옥과를 거쳐 7일에는 순천에 당도한 후 낙안을 거쳐 보성에 도착하여 8월 9일 부터 16일에 걸쳐 수군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은 칠천량패전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를 거쳐 전라도로 피신했던 자로, 그 후 다시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지휘 아래에 있다가 신병을 핑계로 도망치다 권율(權慄)에 붙잡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