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가을. 어디야. 진동으로 해두었던 핸드폰이 징- 하고 울린다. 주말을 하루 앞둔 평일에 다급히 학교에 도착한 가을은 연구실을 향해 걸음을 빨리 하느라 핸드폰 확인할 겨를이 없다. 아니, 무슨 공강일날 갑자기 부를 건 또 뭐람. 올해 22살, 한국대학교 건축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가을은 '타의적 인싸', 하지만 '자의적 아싸'를 자처하며 일명 교수님의 귀염둥이의 명단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절대적인 1순위다.
입학식 때부터 가을에 대한 이야기는 자자했다. 입학식 신입생 대표 선서 걔.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예쁘기도 눈에 띌 정도로 참 예뻐서 같은 신입생 1학년은 물론 복학생, 과탑 등 온갖 다양한 남자들의 선망이자 만인의 여자친구로 이름을 알렸고, 다들 그런 가을의 눈에 들기 위해 본인만 모르는 물밑작업이 시작되었다. 본인은 아직도 아싸인 줄 아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가을이 더 유명해지게 된 계기. 지금 문가을 하면 다들 똑같이 입을 모아 하는 소리. 변백현 여자친구 걔.
그럼 변백현 누군데? 가을이 만인의 여자친구였다면 백현은 만인의 남자친구였다. 비슷하면서도 명확히 다른 점이 있다면 가을은 만인의 상상으로 그치는 이상의 여자였다면, 백현은 말 그대로 만인의 것이었다. 무슨 공공재도 아니고. 백현을 짝사랑하는 여자는 많았고 그만큼 백현을 거치지 않는 여자는 드물었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 한 창 때에 여자가 4일에 한 번씩 바뀌었던. 물론 복학 전 이야기지만 지금도 백현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백현은 말 그대로 타고난 다이아수저. 세상에 눈을 뜨고 보니 잘 나가는 집안의 유일무이한 아들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잘난 얼굴까지. 도화살이라도 꼈는지 어디를 가든 안 홀리는 여자는 없었다. 처음엔 귀찮았고 의아했고. 남중을 나와 고등학교를 남녀 공학으로 진학하면서 그러려니. 꼬이는 여자가 많아도 그러려니. 어차피 자신의 재력과 얼굴을 좋아하는 여자들이니 백현도 그러려니 하면서 맞춰준 것 뿐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 타인의 눈으로 보면 타고난 여우였지만. 그것을 알고도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백현을 찾는 사람은 많았다.
그런 백현이 벌써 가을을 만난 지 벌써 2년. 햇수로 따지면 3년째였다. 제일 오래 갔던 여자가 40일이었으니 2년이면 엄청난 거지. 그래서 백현과 가을은 그 명성이 캠퍼스 내에서 꽤 자자했다. 남자동기들 사이에선 백현이 드디어 한 여자에 정착을 한 것이냐 다들 떠들어댔고, 여자동기들은 몇 일이 가든 몇 달이 가든 더 이상 다음 자리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아쉬워했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던 백현이 3년째 굳건히 벽 세우곤 일편단심 가을에게만 집착하며 질척대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으니까.
→가을. 문자 왜 안 봐.
→핸드폰 무음인가.
→데리러 갈게.
→정문이야.
정문이라는 문자를 확인한 가을은 캠퍼스 경사진 언덕을 내려와 그 쨍쨍한 날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 하고 튀어나온 벽돌을 피하지 못해 우당탕 넘어진다. 오른쪽 어깨에 맸던 에코백에서 내용물이 우르르, 왼쪽 손에 꼭 쥐어져있던 핸드폰이 와장창. 급기야 속액정까지 깨졌는지 화면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 씨... 백현이랑 맞춘 건데.. 자신의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애지중지 핸드폰을 먼저 챙긴다.
캠퍼스 한 가운데서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넘어진 가을에게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쏠린다. 안 그래도 건축학과라는 과 특성상 여자보다는 남자의 비율이 훨씬 많았고, 아직 공대 건물을 채 벗어나지 못한 가을은 뒤이어 쏠리는 시선과 쪽팔림에 무릅쓰고 아픈 것도 깨닫지 못한 채 후다닥 일어선다. 사실 가을이 백현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여자친구라는 것은 공공연하게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시선이 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목 중간에서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똑 잘리는 단발 머리는 안 그래도 하얀 피부에 드러난 목선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었고 교수님의 호출에 다급히 백현의 오피스텔을 나와 아무거나 집어입은 백현의 것으로 추정되는 폼이 큰 티셔츠는 살짝 흘러 어깨의 나시끈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여리여리한 몸과는 다르게 볼에는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듯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고, 눈매는 살짝 올라간 고양이상과는 다르게 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영락없는 강아지를 빼다 박았다.
"가을아 괜찮아?"
"아... 선배 감사해요. 저 괜찮, 아...!"
"무릎 까졌나보다. 과사무실에 후시딘이랑 밴드 있으니까 들렸다 가."
"저 괜찮아요. 금방에 데리러 온 사람 있어서.."
"핸드폰도 깨졌네. 오빠가 핸드폰 빌려줄,"
"가을."
넘어진 가을에게 다가온 같은 과 4학년 선배는, 가을이 알기로 아직까지도 졸업을 하지 못해 몇 년째 4학년에 제자리걸음 중인 올해 28살의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화석이었다. 지랑 내가 몇 살 차이가 나는데 양심이 다 뒈졌나 시발...
속으로 거친 욕을 맹시전하는 가을은 사실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가을이 넘어진 틈을 타서 쏜살같이 달려와서 챙겨주는 척 하며 저를 은밀히 과사무실로 데리고 가려는 꼴을 보니 웃음만 나온다. 정중하게 괜찮다고 하는 사양의 말은 뚝 끊어먹고는 지를 자칭 오빠라고 칭하며 핸드폰까지 빌려준단다. 지 면상에 수없이도 비볐던 핸드폰을 내게 건네면서 수작을 부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시발. 욕만 나온다. 그러다 백현이 나타난 건, 이걸 어떻게 또 거절하나 골머리를 수없이도 앓고 있을 때즈음이었다.
"어, 백현!"
"너 뭐해. 꼴이 이게 대체,"
"나 핸드폰 깨졌어! 너랑 맞춘 건데 진짜 짜증나..."
"다시 사줄게. 병원부터 가자. 응?"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백현을 환하게 맞이한 가을은 백현의 눈앞에 깨진 핸드폰을 들이밀며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해맑게 핸드폰이 깨졌다 말한다.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린 백현이 고개를 아래로 숙이다가, 피가 철철 나는 무릎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가을의 에코백을 대신 가져간다. 그 모습을 이방인이 되어 바라보던 남자가 벙찐 듯 가만히 서있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백현에게 말을 건다. 저 새끼 저거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교수님들이 졸업을 안 시켜주지. 가을이 속으로 욕을 짓씹는다.
"어, 어! 백현아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병원 데려다주려 했지. 애가 갑자기 넘어지길래 나도 놀라서..."
"아, 네."
"혼자 데리고 갈 수 있어? 아니면 니가 가을이 부축하면 내가 가방이라도,"
"야. 좀 꺼져."
"...."
"이리 와 가을아."
누가 보면 깊게 패여서 뼈라도 보이는 줄 알겠네. 백현과 가을 사이에 은근히 끼어드려던 남자를 가만히 내려보던 백현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자꾸 남의 말 씹는 버릇은 어디 개버릇인지. 눈치까지 콤보로 뒤져버린 선배는 시선으로 가을을 은근히 훑어내린다. 결국 살벌한 표정으로 꺼지라며 싸가지 없이 말한 백현은 가을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고 가을은 해맑게 웃으며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속으로 남자를 비웃고는 백현에게 달려간다.
사실 눈앞에 보이는 가을의 상처만 아니었으면 백현이 어떻게든 저 남자를 조져버릴 것을 알기에 약간의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폼이 큰 백현의 옷을 입은 덕에 넘어지면서 드러난 어깨를 부축하는 척 은근히 만져대는 게, 얼굴에 침이라도 뱉을까 했다. 멍청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선배에게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인사를 하는 가을이, 그 모습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현은 가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손으로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손짓으로 재촉한다.
"싸가지 뒤진 백현이, 대박."
"뭐가 대박, 너 바지."
"바지? 내 바지 왜?"
"이상하네."
"뭐가?"
"짧은 바지 다 버렸는데."
"...시발 그게 너였어?!"
백현의 옆에서 열심히 절뚝거리던 가을은 대뜸 제 짧은 바지를 능지처참해서 버렸다는 백현에 순식간에 빡쳐 소리를 버럭 내지른다.
"너 되게 별종이다. 남자들 이런 거 안 좋아해?"
"남자들 누구."
"아니 좀 이렇게 다리 드러나는 바지 싫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딴 걸 입어."
"니 앞에서만 입어라 뭐 그런거야?"
"아니. 내 앞에서는 그냥 입지말고."
"...와!"
대박 짜증나!
응. 난 사랑해.
짜증나 변백현!
사랑한다고 가을아.
/
주말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난 백현은 제일 먼저 냉장고를 열어 가을에게 먹일 것이 있는지 확인한다. 공강이었지만 교수님과 면담하고 깨진 무릎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백현과 같이 도착한 가을은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잠을 보충해야 한다면서. 잠이 든 가을의 바지를 벗기고선 윗옷도 잠옷으로 갈아입혀주고 나서야 씻고 나온 백현은 그대로 가을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이른 저녁부터 잠을 자서 그런지, 일찍 눈이 떠진 백현은 냉장고에 별다를 먹을 게 없는 것을 확인하곤 얼굴을 쓸어내린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아직까지 잠에 빠져 일어날 생각조차 안하는 가을을 보면서 괜히 머리 속에 짗궂은 생각들로 가득찬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예민하던 성격의 백현은 유난히 가을 앞에서만 무장해제가 된다.
귀여워. 괴롭히고 싶다. 허벅지 한 번만 깨물고 싶다. 자고 있는 가을을 보며 온갖 상상을 하다가 똑 잘린 단발머리로 눈길이 향한다. 사실 가을은 자연갈색머리에 긴 생머리였는데. 태생부터 멜라닌 색소가 부족하게 태어나서 머리도 갈색머리, 눈동자도 밝은 갈색, 피부도 유난히 하얀 편이었다. 그런 가을이 불과 1주일 전 자신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머리를 똑 잘라 흑발로 염색을 해 온것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백현은 다 좋았다. 아니, 그냥 가을이 좋았다.
전은 조금 더 청순한 느낌의 여리하고 원피스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였다면 단발로 자른 가을은 웃을 때마다 방긋 올라오는 젖살이 더 귀여웠고 안 그래도 개구장이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더 개구져 보였다. 또 흑발로 염색한 머리는 가을의 흰 피부를 더 부각시켜 놓았다. 처음 머리를 그렇게 바꾸고 온 가을을 보자마자 백현은 생각했다.
목이 잘 보이네. 더 하얗다. 씹어먹고 싶어. 자국 새기면 더 잘보이겠다.
물론 가을은 백현의 머릿속을 당연히 몰랐고, 알았다면 쇼파 쿠션으로 백현의 머리를 진작에 내리쳤겠지.
아무튼. 눈앞에 달라진 가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백현은 상상만 하던 게 정신 차려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을의 안쪽 팔을 정성스레 빨고 있었다. 백현은 가을의 팔 안쪽살과 볼살을 아주 좋아했다. 말랑말랑. 귀여워. 그렇게 가을을 괴롭히고 있다고 자각한 후에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쪽, 쪼옥. 팔부터 어깨를 지나 목선까지 백현의 입술이 도착했음에도 가을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에 아주 푹 빠져들었구나, 우리 가을이. 점심 지나고 일어나겠네. 저녁에 뭐해야 가을이가 좋아할까. 백현은 눈을 뜨고 감는 그 모든 순간까지 온통 가을의 생각 뿐이었다.
"가을아."
"...."
"가을."
"...."
옆에서 가을을 괴롭히던 백현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12시가 훌쩍 지난 오후 4시였고, 자신의 옆에선 아직도 깨지 않은 가을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거의 12시간을 자려고 하네. 아직 아가라 그런가. 실없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던 백현은 뒤척이기 시작한 가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가을아, 가을. 일어나. 응?
"....몇 시.."
"4시."
"...뭐?!"
"일어났어?"
"어떡해! 왜 지금 깨워! 주말 첫날인데 벌써 반이 날라갔어.."
"응, 얼른 씻자."
"아 짜증나, 변백혀언!"
"아 맞다. 가을아 장 보러 나가야 해. 냉장고 비었더라."
"오늘은 아무것도 못하겠네. 우울하다.. 잠만 잤어... 누구는 깨우지도 않고 옆에서..."
"머리 감기 귀찮으면 모자 쓰고 나갈까?"
"...응."
아, 귀여워. 일어나자마자 잠투정을 부리는 가을에게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달래준다. 자신의 허리에 다리를 감싸 매달린 가을을 가볍게 들어올린 백현이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욕실의 문을 열면서 가을의 칫솔을 대신 물려준다. 얼굴에서 뚝뚝 흐르는 물기를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주면서 가을의 온 얼굴에 쪽쪽 버드키스를 날리던 백현은 그만하라는 가을의 칭얼거림에 그제야 멈추고 욕실을 나선다.
오늘 밖에 날씨가... 32도. 많이 덥네. 백현은 동시에 실내온도를 확인한다. 24도. 가을이 냉방병 걸리겠다. 에어컨을 제습 모드로 바꾸고 26도까지 온도를 올린 백현이 가을의 신발을 신겨주며 아직도 비몽사몽한 가을을 이끌고 B2층 주차장에 도착했다. 백현이 차를 주차하는 전용 칸에는 아우디 RS Q8 검은색 차량이 반짝거리며 서 있다. 조수석 문을 열어 가을을 앉히고 운전석으로 돌아온 백현은 곧장 에어컨을 킨 후 혹시 모를 것에 대비해 뒷자석에 팔을 뻗어 가을이 좋아하는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담요를 가을의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으응... 백현아.."
"추워? 에어컨 끌까?"
"아니, 아니.. 지금 완전 잠이 쏟아질랑 말랑 해."
"조금 더 자. 마트 도착하면 깨워줄게."
네비게이션에 마트를 찍은 백현은 예상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가을의 시트를 눞혀주었다. 혹시라도 잠이 든 가을이 도중에 깰까 틈틈히 백미러로 가을의 상태를 확인하며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왼손으로는 핸들을, 오른손으로 가을의 손에 깍지를 껴 운전을 한다. 20분 가량을 달려 마트에 도착한 백현은 가을을 깨우려다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며 10분 정도 구경하고 그 후에 정신을 차린다. 가을의 말랑한 볼을 쿡쿡 찌르며 깨우기 시작한다.
"가을."
"...어어."
"마트."
"..어어."
"다 왔는데."
"...어어. 어?!"
가을은 장보는 것을 좋아했다. 백현 혼자 마트에 가서 장을 봐와도 됐었지만, 굳이 가을을 깨어 데려온 이유 중에도 있었다. 저 혼자 장을 보러 갔다가 오면 혹시라도 그 사이 잠에 깨어있을 가을이 삐져있을 수도 있고 사실은 무엇보다 백현 자신이 가을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백현! 요즘 스테비아 방울토마토가 그렇게 유명하대! 사실 진아 집에 가서 몰래 하나 먹었는데 존나 달아."
"가을아."
"응?"
"존나가 뭐야."
"아, 백현아. 내 말에 토달지 마."
백현은 종알종알 참새같은 입을 움직이는 가을을 보다 문득 튀어나온 비속어에 아주 잠깐 미간이 구겨졌다가 금세 가을의 말을 정정해준다. 가을은 그런 백현을 굉장히 별로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그럼에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아무튼 저게 진짜 얼마나 다냐면 먹는데 아랫턱이 막 아린 거 알아? 완전 완전 달아! 아 근데 백현이는 단 거 싫어하지?"
"하나 사줄까?"
"백현아 너 진짜 대박. 근데 우리 뭐 사러 온 거야?"
"냉장고가 많이 비어서. 이것저것."
"빵냄새 대박. 우리 카레고로케도 하나 사가자!"
사실 가을은 먹는 것을 굉장히 아주 좋아한다. 이미 방울토마토가 들어간 카트를 백현에게 맡겨놓고 휙 저 멀리 빵코너에서 저를 재촉하는 가을을 보며 천천히 다가간 백현이 한마디 한다.
"가을아, 빵집을 하나 사 줄까?"
/
아, 끝났다. 현재 시각 23시 10분을 넘어가고 있다. 백현은 종강 전 마지막 과제인 레포트를 마무리하면서 피곤한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달밤에 기지개도 켜고 뭉친 목도 풀면서 감겨있던 눈이 어느 한 곳에 멈춰선다. 그곳은 가을이 가만히 누워있을 침실이었다. 레포트 과제 다 끝날때까지 안 잘 거라며 꼭 눈 뜨고 백현을 기다리겠다던 가을이었다. 백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어기적 어기적 가을이 있을 침실로 들어갔다.
"가을."
"...."
넓은 킹사이즈 침대 한가운데서 이불도 안 덮고 쪼그려 새우잠을 자고 있는 가을을 본 백현은 가을의 말려 올라간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배를 쓰다듬으며 가을의 이름을 부른다. 아무런 응답이 없는 가을을 보며 아 잠에 들었구나 확신한 백현이 잠든 가을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자신은 절대 안 잘거라며 꼭 백현을 기다리겠다 말하던 가을을 보면서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것을 속으로 예상하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를 놔두고 넓은 침대에서 혼자 곯아떨어진 가을을 보며 백현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 자신 때문에 잠을 방해받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가을을 만지지 못하는 것은 더 싫었다. 어쩌면 가을이 먼저 잠든 이때가 기회일 수도 있겠다. 백현은 방 안에 딸린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가을의 옆에 몸을 눞혔다. 긴 속눈썹, 오똑한 코, 살짝 벌어진 입술.
가을은 건조한 환경에 많이 약했다. 매일 신경은 자주 쓰지만 습도에 많이 민감한 편이라 조금만 건조해도 코가 자주 막히곤 한다. 주로 밤에 잠잘 때 자주 그러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을은 잘 때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게 습관이다. 가을의 작은 입에서 색색-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가을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백현은 조금씩 몰려오는 잠을 느끼며 끝까지 가을의 얼굴을 뜯어지게 응시했다.
아가들이 그렇게 잠도 많고 잘 때 색색거리던데 우리 가을이는 아직 애기인가 봐. 속으로 혼자 생각한 백현은 가을의 살짝 벌어진 입 틈새로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가을의 호흡으로 인해 밀려오는 따뜻한 숨을 손가락으로 직접 느끼며 이번에는 가을의 혀를 꾸욱 누른다. 어쩜 혀도 이렇게 조그마할까. 키스할 때마다 백현은 매번 느끼지만 가을은 입도 작은 편인데다 혀도 굉장히 조그만했다. 문득 그걸 느낄 때마다 백현은 가을을 더 몰아붙이고 싶어진다.
작은 입으로 호흡이 부족할 때마다 자신을 겨우 떨궈놓곤 헉헉거리며 백현의 이름을 불러올 때, 그럴 때마다 백현은 몰려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잠깐의 상상으로 잠이 달아난 백현은 더더욱 가을을 괴롭히고 싶어졌다. 가을아, 가을아. 가을. 발음하기에도 매끄러운 이름. 부르기만 해도 어감에서 느껴지는 귀여움에 백현은 그 어떠한 미사어구 없이 가을의 이름을 가을, 하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을 눈치 챈 가을도 처음엔 백현아, 아니면 오빠 하고 불러오다가 자기도 모르게 백현 하고 부르는 것이 꼭 자신을 따라하는 것 같아 그게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다. 그렇게 백현은 가을을 구경하다 늦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
월요일이 공강인 백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일어나 가을을 깨웠다. 가을은 월요일부터 오전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백현은 월공강이고 가을은 금공강이기에 가을은 월요일을 매우 아주 싫어했다. 백현의 차에 타서 학교에 가는 그 순간에도 입에 시발, 시발을 달며 주4일제는 언제 실행되는 거냐 불만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백현은 자신의 옆에서 온갖 투정을 쏟아내다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에 한 번, 자신이 아침대신 챙겨준 유산균 음료를 두 손으로 꼭 붙들고 어울리지 않게 험한 말을 하는 가을의 모습에 두 번, 웃음이 터진다.
어쩜 생긴 건 아기 같이 생겨서 말하는 건 무슨 50년 산 욕쟁이 할머니처럼 말을 하는지. 알고 보니 애기 몸에 할머니 영혼이 들어와있는 동자는 아닐까 쓸데없는 상상을 한다.
"백현, 난 월요일이 제일 싫어."
"안타깝네."
"뭐? 뭐라고? 안타까워? 너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너는 공강이 월요일이라 현대인들의 마음에 이해를 하지 못할 뿐이지. 너도 다음학기에 시간표를 아~주 개떡같이 말아먹으면 나와 같은 기분이 될 꺼야."
"월요일은 가을이가 좋다고 하던데."
"그러면 조금 안타깝긴 하네."
"조금 안타까워?"
"응. 근데 난 받아줄 마음 없다고 전해줘."
"귀엽네."
...으! 가을은 귀엽다는 말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다기 보단.. 자신을 향해 귀엽다는 말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백현은 귀엽다, 귀엽다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매일 생각했다. 귀엽다고 말로 표현하는 게 2정도라면 속으로 생각하는 건 200정도. 학교에 다다를수록 가을은 점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백현은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가을을 계속 어르고 달랠 뿐이다.
"가을."
"백현아. 대리출석 좀 부탁해."
"오늘 수업 마치면 가을이가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자."
"...어떤 거?"
"가을이가 생각해놔."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나?"
"응. 수업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갈게."
가을을 달래기에 성공한 백현은 공대 건물 앞까지 가을을 데려다주고 가을이 건물 안으로 확실히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난 후에 걸음을 돌렸다. 그때, 미처 앞을 보지 못한 남학생 하나가 백현의 어깨에 부딪쳤고, 남자의 지갑이 툭 떨어진다. 백현은 금세 눈을 흉흉하게 바꾸곤, 남자는 연신 죄송하다며 떨어진 지갑을 줍고 공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백현도 다시 걸음을 돌려 걸어가려는 찰나, 바닥에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확인한다. 남자의 지갑에서 빠져나와 미처 줍지 못한 남자의 카드였다. 아, 귀찮게 됐네. 생각하던 백현은 카드를 챙겨 자신의 안주머니 안에 넣었다. 분실신고라도 해야 하나.
지금 시간이 10시니까 1시 전에 오면 되겠네. 가을이 월요일을 특히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 바로 연강이었다. 10시부터 12시. 12시부터 1시. 그럴 때마다 가을은 또 욕을 읊조리곤 했다. 시발, 필수교양 개 같은 거.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가을의 모습에 백현은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도 애매했고 근처에서 친구인 김종인이 알바한다고 했던 카페에 들어가서 시간을 뻐기기로 결정했다.
종인은 백현과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종인과 백현은 같은 남중을 나왔고 같은 남녀공학 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백현과 투탑으로 인기가 제일 많았다. 끼리끼리라고 하지 않던가. 주위에서는 백현 못지 않게 종인도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평소에 잘 웃지 않던 백현이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종인보다 백현을 더 무서워했다. 둘은 성격도 워낙에 정반대였다. 매사에 관심없고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아 얉은 연애를 대다수 경험한 백현과 달리, 종인은 의외로 순정파였다. 종인은 깊고 은은한 연애를 오래했다. 그래서 중학교때 한 번, 고등학교 때 한 번. 그리고 신입생 때 만난 동기를 20살 때부터 지금까지 총 5년을 만나고 있다.
사실 백현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 명인 종인은 백현이 평생 여자를 갈아치울거라 생각했다. 저 새끼, 저래서 결혼은 할 수 있나. 종인의 여자친구이자 백현의 동기이기도 했던 아윤도 혀를 쯧쯧 찼다. 너를 데려갈 여자는 아마 천사이고 보살일 거라고.
그리고 실제로 백현이 가을을 만나서 7개월 뒤쯤에서야 연애소식을 알았던 종인은 매우 경악했다. 백현이 연애한다는 소식? 그건 대학 와서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도 더 들어서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 여자와 7개월을 넘겼다는 소식에 자지러져 바로 자신의 여자친구인 아윤에게 연락을 했다. 아윤은 그런 가을을 아주 좋아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망아지같은 아이가 변백현 저 새끼한테 옭매여서.
백현은 그런 아윤을 한 대 칠수는 없어 종인의 뒤통수를 한대 갈기며 여자친구 관리 잘하라고 했다. 그때 종인은 욱해서 너나 잘하라고 하려 했지만 눈앞에 똘망똘망 눈을 뜨고 있는 가을을 보며 뭐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알바하는 종인의 카페에서 가성비 최고인 아아메 한잔 시켜놓고 구석에서 시간을 뻐팅기기 시작했다. 종인은 그런 백현을 보고 저 새끼 도움도 안 될 거면서 또 지랄이네, 속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미동도 않던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카운터로 걸어오더니 초코쿠키와 라즈베리 쿠키 두 개를 주문한다.
"단 거 싫어하는 변백현이 웬일이래?"
"가을이꺼야."
"가을이? 아 오늘 월요일이지. 가을이 수업 언제 끝나지?"
"네가 가을이를 왜 궁금해 하는데."
"...미친놈."
"어. 안물어봤고."
"진짜 싸가지 뒤진 새끼."
그때 별안간 백현이 픽 웃음을 터트린다. 그에 종인은 흠칫하며 입꼬리가 올라간 백현의 모습을 보며 잠시 진지하게 생각에 빠졌다. 얘 갑자기 왜 웃지. 설마 나를... 종인이 경악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백현은 가만히 있다 이내 고개를 숙이곤 입까지 벌려 실소를 터트리면서 웃기 시작한다. 그에 자신의 팔로 엑스자를 만들어 상체를 가린 종인에, 고개를 올린 백현이 그 꼴을 보고는 뭐하냐는 의미로 종인을 한심하게 쳐다본다.
"너.. 너! 왜 그렇게 웃니! 설마 나를...!"
"저번주 금요일에 가을이 데리러 학교에 갔는데,"
"...."
"내가 짜증난다고."
"보는 눈이 정확하네 가을이가."
"그 조그만 입으로 종알종알."
"...."
"입술 빨고 싶다."
미친새끼, 변태 아니야 저거! 가을이한테 빨리 도망가라고 해야... 경악을 넘어서 극혐에 다다른 종인이 이 순간에도 제 눈앞에 벌써 가을을 상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두 눈깔의 백현을 보며 고민한다. 쟤 지금 무슨 생각을..
"아 1시 거의 다 됐네."
"가을이 1시에 끝나나봐?"
"나 친구랑 싸우는 취미 없,"
"어 시발. 나도 너 개싫어. 그냥 내가 잊을게 빨리 가."
급기야 종인은 백현을 내쫓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카페를 나서다 뒤를 돌아 다시 종인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야 근데."
"뭐."
"이거 너무 달더라."
"너 단거 안먹잖아."
"이거 먹은 가을이 입이 너무 달아."
"응 다음엔 더블초코로 넣어주기 전에 빨리 꺼져."
끝까지 폭탄을 뿌리고 가는 백현을 보며 종인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진짜 가을이가 위험한 게 맞는 것 같다고. 저 새끼 지금 무슨 연애를 하고 있는 거지.
백현은 그런 종인을 뒤로 하고 진짜 카페를 나와 이미 주차된 차를 지나쳐 공대 건물 앞까지 슬슬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대 건물은 제일 위에 있어서 정문부터 천천히 걸어가면 족히 30분은 걸리는 거리라 백현은 더욱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혹시라도 일찍 끝난 가을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급히 온 백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을아, 잘 지냈어?"
"...어? 정한이? 너 김정한 맞아?"
"응.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응 그러게. 너가.. 우리 학교였나?"
"아.. 아니. 나 사실 편입했어."
"편입?"
그래, 가을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긴 했다. 백현이 빨리 오지 않았다면 가을이 이 땡볕에서 자신을 기다렸겠지.
"응. 오랜만에 너 잘 지내나 보고 싶어서."
"...나?"
"몰랐어?"
"..대체, 뭘..."
백현이 빨리 오지 않았다면 눈앞에 이 어이없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나 고등학교 때, 내 첫사랑이었는데."
"...."
김정한. 백현은 순간 아까 오전에 자신과 부딪쳐 카드를 떨어트리고간 남자를 기억해낸다. 카드에 적혀있는 영문의 이름도...
"가을이 너."
"...."
"보고 싶어서 편입했어."
그래, 그 이름이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어?"
"아마.. 있을걸?"
"하긴,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
"일단 내가 널 오래 봤으니까."
"...."
문득 남자의 첫사랑은 평생 간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백현은 주머니 속 카드를 힘주어 부실듯이 꽉 쥐어왔다.
첫댓글 아니 실화인가요 제가 지금 가을이랑 백현이 다시 보는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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