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월산 중계탑, 처음 본 텔레비젼
그게 소풍이었던 것은 아닌 듯하고, 아마도 견학이었을 것이다. 작은 시골 화산면에는 조그만 사건이라도 있으면 면 전체가 들썩였다. 학교앞으로 공사트럭들이 흙먼지 날리면서 몇 달 동안을 요란스럽게 오갔다. 멀쩡하던 무학리 뒷산을 파고 신작로 자갈길을 만들고 산꼭대기 위에 무슨 큰 중계탑을 만든다고 한다.
건설장비가 불비한 그때 그 시절 흙과 시멘트를 실은 차량들이 수시로 마명리와 무학리를 부산하게 오가더니 어느 날 그곳에 간다고 운동장에 모여서 학년별, 반별로 줄을 지어 월호리, 재동을 지나자 저 멀리 대월산 정상에 높이 솟은 중계탑과 중계 접시 3개가 커다랗게 보인다.
사거리 서교를 지나서 무학리 동네 옆으로 난 새로운 산길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군데군대 철조망이 쳐저 있고 ‘안보구역’ 이라는 팻말들이 걸려 있다. 실제로 건진머리 해안가로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일도 있었고 언젠가부터 해안가를 따라서 전투경찰 초소들도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동에 대한 역사는 근동부락 출신들이 많아서 생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동리 출신들은 참 좋은 부락에서 태어난 행운아들이다. 추억도 많고 고향 해변가는 그 어느 곳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곳이다. 관두봉의 위엄에다 그 아래 펼쳐진 해변가, 중학교때 소풍갔을 때는 지금처럼의 느낌이 없었다.
바닷가 딱딱한 바위에서 삐딱하게 앉아서 점심먹던 불편함만 생각나기 때문이다. 해남에서 공룡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관두산 아래 소풍 갔던 장소가 떠올랐던 그런 멋진 장소다. (공룡화석은 황산면 우황리에 있슴)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국민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에 화산면 전체가 들썩거릴 때가 있었다. 관동 방조제 준공이 있던 날이다. 학교를 파하고 동네 친구들이 집으로 가지 않고 관동 ‘축석’ 보러 간다고 한다.
축석(築石)이 뭔 지도 모르려니와 너무 어려서 망설이다가 따라 나섰다. 알다시피 학교에서 곧장 봉저리 집으로 가면 3.5km인데 학교에서 관동까지 4.5km + 4km(관동-봉저리)= 빙 돌아서 거의 10km를, 그것도 한밤중에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어쨌거나 따라 나섰다. 현장에 도착하니 인산인해다. 꽹가리,북소리가 요란했던 것과 어른들이 막걸리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밖에는 기억이 없다.
한밤중이 되어 배는 고프고 집에 오려니 어떻게 든 동네 청년들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불빛이라고는 없는 깜깜한 곳을 어디어디를 지나서 겨우 가좌리쯤 오니까 뒷면 신작로를 만나고 나니 어린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가좌리에는 이모집(김기오.김기상)이 있어서 길이 익숙했다.
한참그런 일이 있는 뒤 시간이 지나서 중학교때 관두산에 소풍 갔을 때가 되어서야 방조제 준공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방조제 전까지는 경섬(경도리)은 말 그대로 섬이었는데 방조제 이후로는 들판 한가운데가 되어버렸고, 앞면 흑석리와 관동은 지척으로 변한다.
다시 무학리 대월산으로 되돌아 가보자.
해남을 ‘땅끝’이라고 부르게 된 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 1988년, 88올림픽을 전후해서 대대적인 관광산업육성과 그 시기가 비슷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해남(海南)이 있고 경남에는 남해(南海)가 있다. 한글이나 한자 뜻 풀이로도 애매하고 설명하기에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할 듯하다. 다만 땅끝이라는 순수 우리말이 지금처럼 정착화 되기 이전까지는 ‘육지의 최남단’ 이라는 표현이 더 일반적이었다.
보통 한반도 4극점이라고 했을 때 북(온성), 남(마라도) 동(독도),서(신의주)를 가리키는데 섬지역을 제외한 육지만을 놓고 봤을 때 송호리는 육지의 최남단인 것이다. 방송전파와 중계에 관한 분야는 잘 알지 못한다.
요즈음에는 인공위성이 발달해서 그럴 필요가 없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제주도에 방송을 보내는데 무주 덕유산 중계탑과 광주 무등산 중계탑에 이어서 송호리(지금의 탕끝전망대)가 최적지 같았을 법한데 무슨 연유로 무학리 대월산이 선정이 되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 시골에서는 큰 구경거리이고 기념이 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어찌해서 중계소 안에까지 개방이 되었다. 마을에 전기도 없던 시절 마명리 사람들은 신천지에 사는 듯 부러웠던 시절, 처음으로 텔레비전이라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신기하고도 경이롭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때마침 메르데카배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회택,정강지,이세연,김정남등 이광재 아나운서의 현장중계와 함께 경기 중계화면을 보여주었다.
화산중학교 맨땅 축구만 보다가 축구공에 지남철이 붙어 있듯이 패스를 잘하는 걸 보니 집에 돌아오는 내내 길에서 친구들과 들떠 있었던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뒤에서 올라오는 순서를 위해서 생애 최고의 구경거리를 잠깐으로 접어야 했으니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고, 그 아쉬움에 이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녹화화면이 아니었을까, 살짝 의심이 가지만 그만큼 내가 세태에 닳아버렸구나 해야 편하겠다.
대월산 중계탑과 아주 유사한 일이 봉저리에서도 있을 뻔했다. 마을에 비행장 활주로를 만든다고 한동안 떠들썩했던 기억이다. 지금도 그게 실제로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기는 한데 그런 꿈 같은 사건이 그것도 몇 달간 지속이 된 일이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 어딘 가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좀 더 알고 싶다. 너무나 오래된 일이고 나이가 어려서 어디에서부터 사실인지는 가물하기는 하지만 겨울 한철 동안 마을에는 군용차량들이 여러 대가 상주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코쟁이 미군들도 보았고, 각종 측량기계들을 메고서 뒷산인 덤범산에서부터 용덕리 마을 입구까지 이리제고 저리 찍고를 하면서 수도 없이 오르내리락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활주로가 되고 누구네 밭은 나라에서 공출 받아가니 씨앗을 뿌리지 말라는 둥 그 때 당시에는 마을이 산전벽해처럼 변해버릴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로 밖에서 들어오신 아버지의 그날 그날의 보고회(?)에 귀가 쫑긋쫑긋했다.
어린 마음에 날마다 집앞에 차들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던 시절에 하늘을 나는 비행장이 동네에 들어온다는 사실은 누구래도 붕붕 뜰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푸른 가을 하늘에 제트여객기가 가물가물 금성산 상공을 통해서 제주도를 오갔다. 광주-제주 노선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필경 김포-제주 항로가 우리 마을 상공이었겠 다는 생각이다.
나중에야 더 정확하게 알았지만 제주 출장을 매월 갈 때면 비행기 위에서 고향마을을 내려다 볼 기회가 많아서 고천암이 보이면 우리집을 찾는데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군용비상활주로는 대월산 중계소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일이 였지만 봄이 되고 농사철이 되니 안개처럼 소리소식이 없이 철수해버린 일이 있었다.
대월산 중계소보다도 7~8년전의 일이고 필자가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한 시기였으니
1965년 정도에 고향 마을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답니다.’
202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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