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성지가 안고 있는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 신부의 묘소이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져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배론에서 약 70km 정도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 묻혔다가 5개월가량 지난 후 11월 초 배론 신학당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옹기 굽는 일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이 본관인 남인(南人) 명문 출신의 황사영(黃嗣永)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나와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그해 8월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비단 위에 빼곡히 적었다. 황사영은 백서(帛書) 안에 사진의 체험과 신자들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박해의 과정과 순교자들의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을 담았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 또한 체포되어 대역무도 죄인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능지처참의 극형을 당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형되었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경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파기 ·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게 봉정했다. 현재 백서 원본은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 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고, 실물 크기의 동판과 필사본은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배론 성지가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신앙 유산은 1855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이다. 깊은 산골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년)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신부 두 명이 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폐쇄되고 말았다. 배론 신학당은 1978년 복원된 후 2001년 3월 2일 배론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된 후 2003년 재복원되었다.
원주교구>배론 성지 - 가톨릭정보 - 가톨릭굿뉴스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