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일본 도시샤 대학 유학 시절의 흔적을 찾아서
- 디아스포라의 삶과 문학
문학평론가 최현아
1. 들어가며
알랙산더 푸쉬킨은 “문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본 고는 그동안 출판 금지되었던 해금(解禁)문학 작품을 썼던 정지용을 다룰 것이다. 특히, 정지용의 일본 도시샤 유학시절의 작품을 통하여, 그의 작품이 되는 문학적인 배경, 특징,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시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 중 한 명인, 정지용은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월북 작가로 취급당하여, 정지용의 작품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지용의 시작품과 산문에 관한 연구는 해금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지용은 1923년 4월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한 후, 1926년 4월에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하여 1929년 6월까지 6년 2개월 동안 교토에 생활하면서 초기 모더니즘과 종교적인 시를 발표하였다.
후쿠오카 대학교의 구마키 쓰토무 교수는 정지용이 《동지샤대학예과학생회지 (同志社大學豫科學生會誌)》와 동인지《자유시인(自由詩人)》에 일본어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조사 발표했는데, 이런 사실은 김동희씨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정지용은 이미 1927년 일본 근대 시 동인지《근대풍경(近代風景)》(北京白秋 주간)에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30 여 편의 시와 산문을 일본어로 발표했다. 정지용은 유학생 잡지 《학조》를 비롯하여 국내의《조선지광》에 국문을 발표해 일본어와 한국어를 활용한 이중 언어적 글쓰기 방식을 실험하였다.
2014년 7월 5일 일본 니가타현립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식민지 조선의 문학·문화가 구마키 쓰토무에 의해 정지용의 일본어 시와 산문 목록이 소개됨에 따라, 정지용의 일본어 작품에 대한 중요성은 주목받게 되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정지용은 1920년대 후반 『조선지광』과 1930년『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33년 문학단체인‘구인회’에 가담하여 계급 문학에 반대했고, ‘순수예술’을 내세우면서 모더니즘적 경향의 문학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디아스포라 문학은 민족 국가의 영토를 벗어나 이주국에 거주하는 이주자, 망명, 난민, 이주 노동자, 민족 공동체, 문화적 차이 등 디아스포라의 삶이나 정체성을 다룬 학문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정지용의 본격적인 시 창작은 일본 도시샤 대학교 유학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정지용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민족적·언어적 ·문화적 갈등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는데, 이것은 디아스포라의 특징에 속하는 것으로, 그렇다면 정지용의 도시샤 대학의 유학 시절에 행했던 시·수필 창작활동은 디아스포라 문학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2. 정지용의 일본 도시샤 대학 유학 시절 동안 디아스포라의 삶의 특징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국가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될 때 언어와 문화의 이질성으로 인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언어는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정지용이 일본 유학 당시에 경험했던 언어를 이중으로 사용함으로써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따랐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지용은 시나 수필을 창작할 때 일본어와 조선어 그리고 외래어를 사용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의 길을 걸었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정지용은 「카페· 프란스」시에서 디아스포라가 겪게 되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주변인의 모습 및 도시적 풍경을 일본어와 조선어 그리고 외래어를 사용하여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정지용에게 있어서 공간의 중요성과 역할은 크다. 김동희는 「정지용과 ‘교토’라는 장소」에 관한 논문에서, 정지용이 교토에서 생활하면서 창작한 텍스트와 당시의 사진과 지도를 통해 교토라는 장소와 정지용 문학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그에 의하면, 일본 도시샤 대학 시절 교토라는 장소는 정지용의 작품에서 문학적 표상 공간으로 내면화되었고, 교토에서 발표된 작품들은 공간의 감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교토라는 공간은 근대의 문화와 문물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정지용이‘모더니스트’로 불릴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공간임에 틀림이 없다.
디아스포라의 언어의 이중성에 관한 문제 이외에 디아스포라의 다른 특징은 식민지 시대에 타국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창작한 「鄕愁」와「바다」그리고 압천(鴨川) 관련 시는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시절에 디아스포라로서 문화적인 경험을‘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또한 이런 것들로 수반되는 고향에서 분리와 상실감 및 그리움을 시나 산문으로 재현한 것이다.
정지용은 1923년부터 1927년까지 개신교 신앙을 소극적으로 수용하다가 개종하여 1928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한국의 모더니즘 시를 연구했던 문덕수에 의하면, 정지용은 한 때 카톨릭시즘을 바탕으로「태양」,「하늘」등에 관련된 신앙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종교시를 썼다. 정지용은 도시샤 대학의 유학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카톨릭 청년』의 편집에 간여하며 종교적인 시를 남겼다. 정지용에게 있어서 종교는 일본 유학 시절뿐만 아니라 고향에 돌아와서도 종교시를 썼을 만큼 그의 삶에 있어서 종교가 삶과 문학에 주는 영향력은 컸다.
3. 정지용의 디아스포라 문학의 특징
정지용은 1926년 6월 『학조(學潮)』에 발표한「카페· 프란스」를 발표하면서 조선 문단에 알렸는데,「카페· 프란스」는 이미 1925년 11월 『同志社大學予學生令誌』에 〈カフシエ― ·フランス〉라는 제목으로 먼저 발표했고, 이후 1926년 12월 『近代風景』에 〈かつふえ·ふらんす〉으로 발표한 것이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파슈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늑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빛 두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롯(앵무)서방! 굿 이브닝!”
“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 구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카페· 프란스」전문
식민지 유학생들에게 교토라는 장소는 낯선 생활공간이자 근대 도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김동희에 의하면, 정지용은 「카페· 프란스」를 유학 3년 차에 발표했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사에서 카페는 근대 일본을 논할 때 근대성의 상징으로 간주 될 정도로 특별한 공간이었다.
정지용은 「카페· 프란스」에서 ‘이놈은 루바슈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등 ‘놈’으로서의 타자가 등장하는데, 루바슈카는 러시아풍의 남성 의상을 의미한다. “오오 패롯(앵무)서방! 굿 이브닝!”은 카페의 여급이 카페에 들어서는 시적 화자를 포함한 손님들에게 던지는 인사말로 “패롯 서방”은 손님 중 한 사람에게 여급이 붙여놓은 별명 또는 카페의 앵무새로 볼 수 있다. ‘울금향 아가씨’은 카페 여급의 별명이자 카페의 일본인 여급을 지칭할 때 쓰인다.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및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라는 시적 표현은 낯선 타국에 와서 사회적 약자로서 인종차별을 겪는 화자의 모습이다.‘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 먼트에 흐늑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는 정지용의 이국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정지용은 「카페· 프란스」를 일본어로 처음 발표하였다. 우리는 정지용이“오오 패롯( 앵무) 서방! 굿 이브닝!”과“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등 「카페· 프란스」에서 조선어와 일본어뿐만 아니라 외래어를 사용하여 시를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지용이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1910년대의 영국·미국에서 전개된 반(反)낭만주의 시운동인 이미지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민족 국가의 영토를 벗어나‘바깥’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창작한 작품이자, 시비에 새겨진 「鴨川」의 내용을 보면, 정지용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잘 나타내었다.
압천 십 리 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여뀌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떴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십 리 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압천」전문
정지용에게 있어서 압천(鴨川)은 자연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이자, 고향의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다. 인용된 시에서 역귀 또는 여뀌풀은 여름철에 피는 꽃이다. 정지용은 어느 날 여름 저녁에 압천을 바라보며, ‘날마다 님 보내기’, ‘찬 사람의 마음’, ‘홀어멈 울음 울고’, ‘나그네의 시름의 시어’를 보면, 정지용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및 이국 생활에서의 외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6연에서 시어 ‘수박 냄새’와 ‘오랑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시에서 ‘시각성’을 강조하는 게 특징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시의 본질을 소리가 아닌 이미지에서 찾았다. 정지용은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20세기 서구 문학 ·예술상의 한 경향인 감각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수박 냄새는 품어온다’에서는‘후각적’표현과 오렌지라는 외래어‘오량쥬’의 표현은 정지용이 영문학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정지용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는 다른 한 편의 시는 「향수」이다. 정지용의「향수」는 1927년 『조선지광』65호에 발표된 시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 ㅅ 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별
알 수 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전문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은 정지용의 예리하고 섬세한 언어적 감각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해설피’는 충청지역에서 저녁 무렵 햇볕이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의미한다. 정지용은‘얼룩백이 황소’,‘금빛’, ‘울음을 우는’이라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향수」는 가락도 지니고 있고, 내용 구성상의 일관성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연의 끝마다 나오는 ‘고향을…… 곳’으로,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반복어구 사용은 리듬과 가락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송기한은 「향수」에서 반복 어구의 사용은 독자에게 심리적 조화감을 심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정서를 일깨워주는 강조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정지용의 고향은 바로“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풀섶 이슬에 함추른 휘적시는 곳/ 아내가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이삭을 줍던 곳/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이 있는 곳이 바로 정지용의 고향에 대한 정서들을 감각적으로 일깨워 주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향수」는 정지용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정지용이 모더니스트로서의 특징이 잘 느껴지는 시이다.
『정지용 전집 시1』에서는 정지용이 ‘바다’를 소재로 쓴 연작시가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 바다는 특별하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의 농가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충북 옥천에는 건물도 없는 넓은 들판이 전부였다. 따라서 정지용이 일본 유학길에 현해탄을 처음 건널 때 바다에 대하여 경이로움 및 낯선 타국에 대한 기대감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정우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현해탄은 일본 제국과 조선을 연결하는 항로이자, 계몽의 장소, 문명의 세계로 비약하기 위한 관문이기도 했다. 정지용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유학 생활을 통해 근대 문명과 제국-고향, 타자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며 자기의 세계를 확장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정우택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나지익 한 하늘은 白金 빛으로 빛나고/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바람에 뺨마다 고운 피가 고이고/(중략)/그대 치마는 부끄러운
듯 나부끼고.//그대는 바람보고 꾸짖는구료.//별안간 뛰여들삼아도 설마 죽을라구요./
빠나나 껍질로 바다를 놀려대노니,//젊은 마음 꼬이는 구비도는 물굽이/둘이 함께
굽어보며 가비얍게 웃노니.//
「甲板우」부문
인용된 작품은 정지용이 1927년 『문예시대』2호에 발표한 작품으로 ‘바다’를 소재로 한 첫 번째 작품이다. 정지용이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시기로, 본인이 밝혀놓은 시작 메모를 보면, 1926년 현해탄을 오가는 선상 위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용된 시를 보면, 정지용 시의 가장 큰 특색인 이미지즘이 보인다.‘물결’을 “유리판처럼 부서지며”그리고 “화려한 짐승처럼”등 직유법을 사용하여 물결을 유리판처럼, 항해하는 배의 모습을 짐승으로 표현하였다.
정지용의 감각적인 이미지즘의 특징이 잘 표현된 다른 ‘바다’시를 보자.
바다는 뿔뿔이
달아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힌 발톱에 찢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희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는 蓮닢인양 옴으라들고……펴고……
-「바다2」전문
인용된 작품에서 정지용은‘푸른 도마뱀떼처럼’직유법을 사용하여 바다를 표현하였다. 그의 시에서는 ‘찰찰 넘치도록’이나 ‘돌돌 굴르도록’처럼 상태의 동작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와 동사를 사용하여 사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오·오·오·오·오·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연달어서 몰아 온다.//간 밤
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 오늘 아침 바다는 /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 바다1 전문」
「 바다 1」에서 정지용은 “오·오·오·오·오·”라는 반복 어구로 청각을 이용하여 바다를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위에서 인용된 정지용의 바다와 관련된 몇 편의 시를 보았는데, 정지용은 주로 감각적인 표현과 직유법 및 형용사나 동사의 용언을 활용하여 바다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었다.
정지용의 산문 「鴨川上流(上)(下)」는 1948년에 발행한『芝溶文學讀本』( 서울박문출판사)에 수록된, 도시샤 유학 시절에 대한 회상기이다. 정지용의 산문「鴨川上流(上)」에서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으로 간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의 삶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노는 날이면 우리들의 산보 터로 아주 호젓하고 좋은 곳이었다. 거기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팔수(八漱)라고 이르는 비예산 바로 밑에 널리어 있는 마을이 있는데 그 근처가 지금은 어찌 되
었는지 모르나 그때쯤만 해도 거기가 하천 공사가 벌어지고 비예산 케이블카가 놓이는 때라 조
선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이 쓰였던 것이다.
이른 봄철부터 일철이 되고 보면 일판이 흥성스러워졌다. 석공일은 몇몇 중국 사람들이 맡아
하고 그 대신 일공(日工)값도 그 사람들이 훨썩 비쌌고 평(坪)뜨기 흙 져 나르기 목도질 같은
일은 모두 조선 토공들이 맡아 하였지만 삯전이 매우 헐하였다는 것이다.
수백 명씩 모이어 설레는 일판에 합비 때위 노동복들은 입었지만 동이어 맨 수건 틈으로 나른
대는 상투는 그대로 달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鴨川上流(上)」부문
정지용의 「鴨川上流(上)」에서 인용한 산문을 통해 우리는 비예산(比叡山) 케이블카 공사장에 동원인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은 노동을 하고도, 중국 사람들이 훨씬 비싼 삯전을 받는 것에 비하여 헐값의 삯전을 받는 인종차별 및 비참한 삶을 살았음을 정지용의 산문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고향을 떠나, 특히 가족과 떨어져 낯선 타국에서 홀로 살고 있다면 외로움과 그리움은 크다. 정지용이 외로움과 그리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종교에 의지한 것으로 보인다.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중 죄를 들으신 신부는
거룩한 산파처럼 나의 영혼을 가르시라.
성모 취결례 미사 때 쓰고 남은 황촉불!
담 머리에 숙인 해바라기꽃과 함께
다른 세상의 태양을 사모하며 돌으라.
영원한 나그넷길 노자로 오시는
성주 예수의 쓰신 원광!
나의 영혼에 칠색의 무지개를 심으시라.
나의 평생이요 나중인 괴롬!
사랑의 백금 도가니에 불이 되라.
달고 달으신 성모의 이름 부르기에
나의 입술을 타게 하라.
-「임종」전문
위 인용문은 『카톨릭청년』4호(1933·9), 68∼69쪽의 내용으로,『정지용 시집』에 실린 것이다. “나의 죄를 들으신 신부”, “성모 취결례 미사 때 쓰고 남은 황촉불”이라는 문장으로 보아 정지용이 천주교인임을 알 수 있다. ‘나의 평생이요 나중인 괴롬’,‘나의 평생이요’의 시적 표현과 조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종교시를 지속적으로 썼던 것을 보면, 정지용에게 있어서 종교가 문학에 끼친 영향력은 컸다.
4. 나가며
정지용이 일본 도시샤 대학 유학 시절에 썼던 시와 산문을 중심으로, 정지용의 일본 도시샤 대학 유학 시절의 디아스포라의 삶과 문학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정지용의 시 창작활동은 주로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정지용은 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경험하게 되는‘타자성’과 고향 상실의 아픔 및 언어의 이중성의 문제점을 경험하고, 이를 자기만의 문체로 독특하게 나타내었다. 정지용은 유학 시절에 유학생 잡지『학조』,『조선지광』에 일본어로 시 창작을 하고, 국문으로 다시 발표해 일본어와 한국어를 통한 이중 언어적 글쓰기 방식을 사용하여 언어의 이중성의 문제를 극복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했던 정지용은 시에서 외래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시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조선어, 일본어, 외래어의 융합은 정지용의 독특한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에게 있어서‘공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근대 문물을 쉽게 수용하고, 경험할 수 있는‘교토’라는 공간 그리고 일본과 식민지 조선을 연결하는 제국의 항로인 현해탄과 압천은 정지용의 실존적. 육체적 체험의 장이자 자신의 공동체적 자아와 개성적 자아를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정지용에게 있어서‘바다’라는 공간은 연작시를 쓸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지용의 ‘바다’연작시에서 감각적이고 다양한 직유법의 표현은 탁월하다. 특히 정지용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주관적인 정서와 감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잘 표현하여, 모더니즘과 이미지즘을 탄생시켰다.
정지용의 「鴨川上流(上)」에는 조선인들이 비예산(比叡山) 케이블카 공사장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일하고, 품삯을 받는 과정에서 디아스포라의 인종적 차별을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정지용은 또한 「압천」과 「향수」에서 고향 상실에 대한 그리움을 그렸다. 「향수」에서 전통적인 정서에 알맞은 율조 언어의 재창조, 후렴구 반복을 통한 음악적인 가락의 미를 창조하고, 예리하고 섬세한 언어적 감각의 활용은 정지용 문학의 특징이다.
정지용은 일본 도시샤 대학 시절에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종교에 관한 시를 많이 썼을 정도로 카톨릭의 문학에 대한 영향력은 컸다.
도시샤 대학의 일본 유학 기간의 정지용의 삶과 창작활동은 1930년대의 이미지즘 또는 모더니즘의 토대가 되었다. 정지용은 유학에 돌아온 후에는 국내 문단 활동에도 주력을 다 했다. 당시 시인들은 정지용의 시를 모방하여 썼을 만큼 정지용의 문학의 영향력은 컸다. 이렇게 볼 때, 정지용의 도시샤 유학시절 창작활동은 시문학사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