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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17:6과 18:1;19:1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오직 '여호와'한 분 뿐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인것은 지도자들의 통솔하에 각 지파 간을 연결하는 연락 조직에 의해 된 것이지만, 본서 기자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을 부각시키므로써 여호와의 통치권 을 강조하고있는 것이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은 가나안 최북단의 성읍이고(18:29) 브엘세바는 최남단의 성읍이다(창21:31). 따라서 본절과 같은 표현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삼상3:20;삼하3:10;24:2;대상21:2;대하30:5).한편 '단'(Dan)의 본명은 '라이스'(Laish)이다. 그런데 단 지파가 이곳을 정복한 후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으로 개칭하였다((18:29). 따라서 본장에 나오는 사건은적어도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사건 보다는 이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길르앗 땅 - 이것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상대적인 것으로서 요단 동편의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3 주석을 참조하라. 미스바 - '망대'(watchtower)이라 뜻을 가진 이 지명이 가리키는 곳은 두 곳이다.한 곳은 길르앗 땅의 미스바이고(10:17;11:11,29,34), 다른 한 곳은 베냐민 지파 변방에 위치한 미스바이다(수18:26).10:17주석 참조. 본절의 미스바는 물론 후자이며 기브아 북쪽 7.5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 이곳은 '네비 삼월'(Nebi-Samwil)로 불리우고 있다. 한편 혹자는 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는가에 대하여 답하기를 미스바에적당한 예배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Goslinga).그러나 카일(Keil)은 실로의 성막(수18:1;삼상4:3,4)이 그곳으로 옮겨진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있다.어쨌든 이후로 미스바는 국가적 총회 장소로 자주 나타나는데 사무엘시대에도 그러했고(삼상7:5-12,16),왕조 시대 말기(왕하25:23)나 마카비 시대에 도 이곳에서 전체 회중의 총회가 열렸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모은 또 다른 이유는 미스바가기브아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에게 크게 위협을 가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
본절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인 본질적이 이유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즉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재판하고 응징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모든 지파의 어른들 - 여기서 '어른들'에 해당되는 원어 '피노트'는'모퉁이돌'(corner stones)이란 뜻이다. 이는 비유적으로 '지도자들', 또는 군사적인의미에서의 '장'(chief)들을 가리킨다(삼상14:38;사19:13). 따라서 여기서 어른들은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로서 40만의 보병들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을 수 행했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Hervey, Mattew Henry).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 이처럼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모인 군사의 수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출애굽시 장정의 수가 60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민26:51) 실로 엄청난 것이다. 또한, 훗날 사울이 암몬과 싸우기위해 군사를모집 하였을 때 그 수가 33만이었던 것만 보더라도(삼상11:8) 여기에 모인 수는 이스라엘 장정 전체가 다 모인 수임을 알 수 있다.
=====20:3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 이것은 베냐민 자손들이 기브아 비류들의 사건(19:22-26)을 이제 듣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미스바에서 총회가 열렸다는 사실을이제 들었다는 뜻이다. 앞서 레위인이 베냐민 지파에게도 시신한 덩이를 보냈을 터이니(19:29), 그들은 이미 사건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Keil & Delizsch,Lange). 그러나 각 지파들이 총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베냐민 지파들이 총회를가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베냐민 지파에게는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은이제서야 총회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방안을 그들 나름대로 연구하였을 것이다. 한편13절에 나타난 베냐민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 이때 베냐민 사람들은 그 총회에 대해강경히 대처하기로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 총회는 기브아 비류들의 사건에 대해 신중히 대처하기위하여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전체회중 앞에서 다시 한번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레위사람으로 하여금 자초지종을 말하게 했다.
=====20:4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 본절에서 7절까지에 기록된 레위인의 보고(報告)에서 이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실제로 노린 것은 그의 목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대신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하지 않았다(19:25). 여기서 은근히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레위인의 교활함을 발견하게 된다.
=====20:5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 이처럼 본문에 나타난 레위인의 이야기의 초점은 오직 기브아 사람들이 '그의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하였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오직 기브아 사라들이 '그의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하였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도록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특히 여기서 '욕보여서'( , 인누)는 강조형 능동태 동사로서 '여성을 무지막지하게 능욕하다'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말 역시 청중들의 분노를 끊어오르게 하기에 더욱 충분하였을 것이다.
=====20:6
이는...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 여기서 이 레위인은 자신이 첩의 시체를 쪼개어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게 된 이유를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시체를 각뜬 자시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부 기브아 비류들의 행위를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악행인 양 과장하여, 이것이 전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범죄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국가적 대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이 과장된 레위인의 보고 속에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사적(私的)인 분노를 민족적인 분노로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0:7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 여기서 이 레위인이 요구한 것은 레 18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음란죄에 대한 형벌이다. 만일 이레위인의 말대로 기브아 사람들 전체가그러한 범죄를 행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 지파에서 끊쳐져야 할 것이다(레18:29).
=====20: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장 일치로 베냐민 지파를 징벌할 것을 가결했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쿰'은 성전(聖戰)의 출전이나 어떤 직무나 의무 수행에 있어서의 예비적 동작을 가리킨다(신17:8:수3:16:왕상8:20).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결연한 행위는 한 지파의범죄를 징벌하기 위한 심판적 태도라고 볼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심판적직무 수행을 마칠 때까지 결단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겠다고 결의했다.
=====20:9
제비 뽑아서 그들을 치되 -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위하여 제비 뽑았는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기브아를 치는 대는 전체 보병 40만(2절)이 다 동원 될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가운데 1/10 을 제비 뽑아 기브아를 치게 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군량미를 준비케 하거나 사상자가 생길 때 병력을 보충케 하였다는 견해가있다(Hervey, Cassel, Wycliffe, Mattdw, Henry). 둘째, 여기서 제비 뽑은 이유는 가나안을 정복할 때와 같이 기브아를 정복했을 때 각 지파가 그 땅을 나누어 취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가 있다(Keil, Goslinga). 그러나 본절 이후에 나타난 제비 뽑은 결과를 보면 땅분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후자의 견해는 옳지 않다.한편 70인역은 본절과 관련, '제비 뽑아서'와 '그들을 치되'사이에 '우리가 올라가리이다'라는 말이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Pulpit Commentaty). 그러므로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 뽑은 것은 기브아 땅의 분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브아를 칠 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0:10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취하고 - 앞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미정복지를 정복하러 올라갈 때에는 자기에게 분배된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 지파별로 올라갔다(1장). 그런데 본절에서는 기브아 비류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지파가 공동르로 각 지파중에서 사분의 일씩 선발하여 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온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사람들의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혼연일치 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한 열 한 지파의 궐기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신13:5;17:7;19:19). 그러나 그들은 형제 지파를매몰차게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통절히 느껴야 했고,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민족 현실을 두고서 회개해야 했다. 오늘날도, 교회와사회에 내재해 있는 여러 문제들을 보고 의분을 느끼고 비판하는 자는 많지만 그러한문제들을 곧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부터 개혁시키고자'하는 진정한개혁자는 그리 많지 않다(마7:3-5).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네발라'는 '무분별하다', '어리석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마틴노드(MartinNoth)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을 표현할 때 쓰는 전문적 용어로 보았다(삼상 25:2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 비류들이 저지른 윤간 행위(19:25)를하나님의 법을 어긴 심각한 범죄 행위로 보고, 기브아 비류들을 징계하려 했음을 알수있다. 사실 각종 성 범죄는 인간의 영혼과 그기본 인격을 파괴하시는 죄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중차대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레 18:1-5 강해, '성경에 나타난 성범죄의 이해' 참조
=====20:11
하나같이 합심하여 - 8-11절에 대한 본서 기자의 주석이다. 본서 기자는 본 사건을다루면서 이전의 사사기 시대 동안에는 볼 수 없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감과 협동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래로 이와 같은 일체감을 보여준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지파간에 반목이나 비협동적인 모습이 자주나타나있다(5:17;12:1). 따라서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그 집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단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단합은 대항해야 할 공동의 적이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뚜렸할 수록더욱 강하게 요청되는 법이다. 이와 관련,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중의하나로서 우리는 교파 간의 분열 혹은 동일 교파 내의 또 다른 분열을 들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이간시켜 소원(疏遠)해지도록 하는 것사단의 주 임무임을 고려하건대(창3:1-5;갈5:20), 우리에게 있어 교회의 '하나됨'은그 무엇보다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엡4:4-6). 물론 이러한 일치 운동이 자칫하면 맹목적 획일 주의로 흐르거나 변질된 복음을 낳게 할 위험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의 일치를위한 탐구와 노력은 다각적인 안목에서 부단히 전개되어야 한다.
=====20:12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 여기서 '온 지파'라고 한 것은 아마 베냐민지파에 속한 '온 가족들'을 가리키는것 같다. 이처럼 '가족'을 '지파'라고 기록한것은 베냐민 지파 내에서도 여러 가족들이 개별로 가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민26:38-41)으로 보인다(Goslinga).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의 온가족들에게이같이 공식적인 전갈을 보낸 것은 베냐민지파 중에서 한 가족이라도 회개하고 구원을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Cundall). 이로볼때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는 처음부터 베냐민 모든 지파를 36-48절에 나타난 바와같이 완전히 진멸할 작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있다.
=====20:13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기브아의 비류들을 징벌하여 이스라엘이 도덕적 순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해 달라고요청한다.이러한 요청은 신13:12-16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한 것으로, 그 율법에는 가증한 일을 행한성읍만을 징벌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자기 지파 내에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치 않았다. 아마도 이는 그들이 미스바에 모인 40만대군을 보고서 분개하였거나(2절), 아니면 지파적 자존심과 배타심에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 여기서 '제하다'에 해당하는 '바아르'는 '불로 소멸시키다','없애다'는 뜻이다. 이는 곧 불로 태워 없애듯 이스라엘가운데서 죄악을 철저히 근절시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기브아 비류들의 범죄는 십계명 중 6,7,10 계명을 범한 것으로, 사형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출29:13,14,17;레20:13;신22:22). 만일 그 죄인들의 행위가 묵과되면 율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내부의 죄악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을 시에는 공동체 전체에대해 하나님의 질책이 불가피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레18:26-28). 베냐민 자손이... 듣지 아니하고 - 완악해진 인간의 마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들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부추기기까지 한다(롬1:32).
=====20:14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 수 18:21-28에 따르면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모두26개 였다. 그리고 각 성읍들은 한 가족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기브아 -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니다.19:12 주석 참조.
=====20:15,16
본절에서는 기므아 성읍에 모인 베냐민 지파의 군사들의 수효를 기록하고 있다. 기브아 외의 다른 성읍에서 모인 병력은 26,000명이고 기브아 성읍의 병력은 700명이다.이 수효는 26,700명이다. 이 수효는 광야에서의 1차 계수 때 35,400명(민1:36,37), 2차 계수 때 45,600명(26:41)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줄어든 수이다. 택한 칠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 여기서 따로 700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기브아성읍의 군대가 가장 막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Cassel). 한편 이들700명은 모두왼손잡이로서 물매를 사용하는데 명수였다. 이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냐민'이라는 지파 명을 고려해 볼 때 매우 아이러니컬(ironical)하다. 사실 대상12:2에따르면 이들은 왼손 뿐만 아니라 오른 손도 잘 쓰는 양손잡이들이었으며 싸움에 있어서 매우 용맹했다. 사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약 15배에 가까운 이스라엘 연맹군에대항하여 과감히 전쟁을 일으킨 것은 타고난 그들의 용맹성에 기인한 것으로, 이미 야곱의 예언에도 나타나 있다(창49:27).
물매 - 조그만 가죽이나 천 따위로 만들어 그 속에 돌이나 자갈을 끼운후에 휘들러던질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의 일종이다. 일개 목동에 불과하였던 다윗이 이 물매로써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죽인 일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삼상17:49).
=====20:17
이스라엘 사람의...수는 사십만 명이니 - 이 수효는 이미 2절에서 언급했었다. 한편 본절에서는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사람중 칼을 빼는 자의 수효가 40만명이라고 했는데 21:9에 따르면 여기에는 길르앗 야베스의 군대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아무튼 광야에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할 때 1차는 601,730명이었던(민26:51)것과 비교해 볼 때 길르앗야베스 사람들 이외의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배경이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내전(內戰)의 심각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증거해 준다.
=====20:18
벧엘에 올라가서 -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기 전에 누가 먼저베냐민 지파와 싸울 것인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다. 이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아직도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여호와 신앙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압제하에 시달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3:8, 9;4:1-3;6:7)도 그나마 이처럼 여호와 신앙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벧엘'의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집'이다. 따라서 라틴 벌겟(Vulgate)역과 KJV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벧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갔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집'을 표현할 때는 '벧하엘로힘'으로 기록하며 '벧엘'은 항상 지명을 나타낸다(Pulpit Conmmentary).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간 곳은 실로가 아니라문자 그대로 벧엘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아마 이들이 벧엘로 간 것은 실로보다 벧엘이 기브아에서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벧엘에는산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거리상으로 벧엘은 실로와 기브아의 중간 지점에위치해 있고 벧엘에서 기브아까지는 약 15km 정도이다. 아무튼 이스라엘 역사상 벧엘이 종교적 구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25, 26절;삼상 10:3;왕상12:28-13:5;왕하 2:3). 물론 과거에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처음 제단을 쌓았고(창 12:8) 야곱이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를 보기도 했지만(창 28:10-22)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을 뿐이다.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 전쟁 전에 하나님께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있어서 관례적인 것이다(1:1). 즉 그들은 대적과 싸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시는 방법대로 수행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이다.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참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족속과 동일한 대적으로 취급하였을 뿐 한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한 형제의 범죄에 대해 진정한 회개를 기대하기 보다는 마치 이방인과 싸우는 것처럼 승리만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베냐민과의 첫번째 전쟁에서 크게 패하게 된 것(19-23절)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다가 먼저일지니라 -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질문에 대하여 이같이 답변하신 것은분명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유다 지파의 지도자적 위치(창 49:8) 때문이었을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 주석을 참조하라.
=====20:19,20
나가서 항오를 벌이고 - 여기서 '항오를 벌이고'에 해당되는 원어 '와야아르쿠'는 '병력을 배치하다'라는 뜻의 '아라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가장자리를 향하여 선 전투 대형을 가리킨다(Cassel). 그런데 이와 같이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투 대형을 취할 때에는 반드시 병력의 수효나 전투력에있어서 상대편보다 막강히 우세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연맹군은 베냐민 지파의병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나 분명한 작전도 없이 무턱대고 베냐민 군을 포위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그것은 아마 전체 지파를 통솔할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교만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21
기브아에서 나와서...엎드러뜨렸으나 - 부주의하고 오만했던 이스라엘 연맹군은 기브아 용사들이 매복해 있는줄도 모르고 무작정 기브아 성읍을 포위하려다가 이처럼 베냐민군대의 갑작스런 공격에 큰 참패를 당하고 병력 22,000명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연맹군이 패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크게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연맹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기는 하지만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다(19:1-21:25). 즉 그들은동족 상잔의 엄청난 비극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회개했어야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 대해 일방적으로 심판관으로서의 자세만을 취하는 교만과 우(愚)를 범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2) 베냐민 군사들은그 전쟁에 패하는 것이 곧 멸망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강한 위기 의식 속에서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반면에 연맹군은 수효만 믿고 방심하였거나, 막상 싸움에힘하여서는 서로 타지파의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빼는 소극적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20:22,23
혹자는 23절과 22절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고대 히브리어 사본들은 모두 본문과 동일한 순서로 두 절을 배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근거가없다(Goslinga). 한편 22절의 '첫날 항오를 벌였던 곳에 다시 항오를 벌였다'는 기록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묻기 이전에(23절) 싸움부터 먼저 벌인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제로 처음 전쟁이 끝 난후(19-21절) 다음날에도 연거푸 전쟁을 수행했다고 해석하는 주석가도 있다(Cassel). 그러나22절은 이스라엘이 재차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전투 형태만 다시 갖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나서 이스라엘은 실제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울며 다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스스로 용기를 내어 -즉 어떻게 해서든 첫날의 패배를 만회해 보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굳게 다져 먹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들은 아직까지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후 전투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24,25절).
=====20:24,25
다시 이스라엘 자손...땅에 엎드러뜨렸으니 - 이처럼 본절은 두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흘린 눈물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패배로 인하여 여호와를 원망하는 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한번의 패배를 통해서도 바른 자각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와 범죄를 반복한 것이다. 21절 주석 참조.
=====20:26
거듭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자손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패인을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교만하고 완악했던 모습들을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는 병력의 수효만을 믿고 하나의 요식(要式)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모든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즉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상들을 직시하고,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시 119:71;히 5:8).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지혜와 위로로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시 107:9;약 2:5). 벧엘에 이르러 - 18절 주석 참조. 저물도록 금식하고 - 첫번째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에앞서 '스스로 항오를 벌였다'(22절). 반면에 이번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즉 그들이 또다시 힘으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려고 했다면 힘을 쇠잔케 하는 금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회개를 위해 금식한 경우가 많이있으며(삼상 7:6;욜 2:13;행 9:9),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 금식한 예도여러 번 있다(출 34:28;욜 1:14). 에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번제와 화목제 - '번제'(Burnt Offerings)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원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그리고 '화목제'(Peace Offerings)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한편 이 두 제사는 모두 예배자가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20:27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하여 사사 시대에이미 실로의 성막이 영구히 벧엘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 18:1;삼상1:3;2:14;3:21;4:3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당시 블레셋 사람들에게빼앗길 때까지 실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베냐민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실로에서 벧엘로 옮긴 것임이 분명하다(Hengstenberg, Keil & Delitzsch, Lange). 한편 그들이 언제 하나님의 법궤을 그곳에옮겼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두 번의 전쟁 패배 이후에 실로에서 벧엘로옮겨온 듯하다(Hengstenberg).
=====20:28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 본 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Phinehas)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다(출 6:25).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다(민 25:7). 때문에 그가 제사장으로 지낼 때는 사사 시대 초기임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발생 연대 역시 사사 시대 초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 세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증하는 이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2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화목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함으로 드려진다. 그러므로 본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승리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20:29
군사를 매복하니라 - 이스라엘 연맹군들은 두 번의 패배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현명하게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사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는 저들이더 이상 베냐민 지파를 앝보는 것과 같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한 증거이다.이는 마치 과거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략할 때 사전 준비를 갖춘 것과 흡사하다(수8:4).
=====20:30
제 삼일에...전과 같이 - 이스라엘 연맹군은 군사를 매복한 것을 베냐민 사람들이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날과 같이 항오를 벌였다. 즉 그들은 베냐민 군을기만하기 위하여 지난 번과 다름없는 전투 대형을 갖추었던 것이다. 19, 20 절 주석참조.
=====20:31,32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 본절에 묘사된 전투의 양상은 수 8:3-28에 기록된여호수아의 아이 성 전투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즉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유인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기세 등등하게 기브아 성읍을 떠난 이스라엘 연맹군을추격했던 것이다.
=====20:33
바알다말 - 지명의 뜻은 '종려나무의 주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유명한종려 나무의 산지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 기브아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혹자는 이를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숲'과동일한 장소인 것으로도 추정한다(4:5). 기브아 초장 - 여기서 '초장'에 해당하는 원어 '마아레'는 나무나 풀이없는 황량한 벌판을 가리킨다. 이러한 곳에는 웅덩이가 많기 때문에 복병들이 숨기에적합하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454).
=====20:34
기브아에 이르러 - '기브아(베냐민)의 군대에 대항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베냐민 앞에서 거짓 패주하며 그들을 기브아 성읍으로부터 유인했던 이스라엘군사들이 이제 급히 돌이켜 복병과 더불어 베냐민 군에게 협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 바알 다말에서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29, 33절)이 자기들의 후미를 공격하는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20:35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을 죽였으니 - 베냐민 지파의 전체 군대 수효는 26,700명이었다(15절), 그런데 본절에서 죽은 베냐민 사람이 25,100명이며, 47절에서 죽지않고 도망한 사람이 600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수는 전체 25,700명으로 15절의 수치와차이가 난다.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15절의 수치를 25,700으로 수정하여 번역하고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합리적인 계산에 의한 수정일 뿐 그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1000명을 첫번째 전투나 두번째 전투에서 이미 죽은 자들의 수효로 이해하여야 한다(Goslinga).
=====20:36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 여기서 '깨닫다'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보다'는 뜻으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몸소 체험한 후 비로소 사태를 직시하게 된것을 의미한다.
=====20:37
복병이 급히...쳤음이더라 - 33절의 내용을 보다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매복한 곳으로부터 급하게 쏟아져 나온 복병들은 작전상 후퇴하는 아군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하여 신속하게 기브아 성읍을 공격한 것이다.
=====20:38
큰 연기가 치미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 여기서 '군호를 삼자'에 해당되는 원어는 '크게 하다', '많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라바'의 명령형(헤레브)으로서 연기가 올라올 때에 베냐민 자손을 치는 것을 '크게 하라'는 뜻이다. 한편 70인역(LXX)은 본문의 '헤레브'를 '칼'이란 뜻의 '헤레브'로 오인, '마카이라'로 번역하고 있는데,이는 '칼을 가지고 올라가라'는뜻이다. 따라서 이것도 전후 문맥에 크게 상치되는 번역은 아니다.
=====20:39
본절은 31, 32절과 동일한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앞뒤 문맥과 연관시켜 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31, 32절은 사건의 발생 순서와 전체적인 상황의 진척을 따라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본절은 베냐민 자손이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 속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벨도우(Bertheau)가 36-46절의 내용을 베냐민과 이스라엘 백성의 싸움이 아닌 다른 전투 상황을 삽입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문과 같이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먼저 기록한 뒤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 뒤에 다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는 독특한 역사 기록 방법을 가지고 있다(Keil). 싸우다가 물러가고 - 즉 이스라엘 연맹군이 베냐민 자손을 유인하기 위하여 짐짓패배한 척하며 후퇴한 것을 가리킨다.
=====20:40
베냐민 사람이 사람이 돌아보매 - 여기서 '보매'에 해당하는 원어 '힌네'는 슬픔과 탄식어린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감탄사이다. 이 단어는 36절의 '깨달았으니'에 해당되는 동사 '라아'와 마찬가지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체험한 후 비로소 사태를 직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베냐민 자손이 자기의 패한것을 깨달은 시기는 기브아 성읍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구름 기둥 같은 연기를 보았을때이다(41절).
=====20:41
화가 자기에세 미친 것을 보고 - 베냐민 사람들은 도망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돌이켜 자신들을 공격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하였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화'(라아)는 사나운 짐승(레 26:6)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천사들(시 78:49), 기근(겔 5:16), 질병(신 7:15) 등의 재난을 통해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드는 악한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미치다'(* , 나가)는 말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다다른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타격을 가하다', '압도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아마 이때에서야 비로소 베냐민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줄로 깨달았을 것이다.
=====20:42
몸을 돌이켜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 여기서 말하는 광야 길이란 수 16:1에 나오는기브아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력 부대는 기브아 서편에 있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는 동쪽 광야 길로 도망하는 것이 살아날 가망성이 컸다. 특히, 그리하여 요단 계곡에 이르기만 하면 숨을 수 있는 굴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Goslinga).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서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베냐민각 성읍에서 모인 베냐민 사람들(14, 15절)로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죽였다고 해석한다(Keil, Cassel). 반면 또 다른 주석가는 본절의 '각 성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단수로 수정하여 이는 기브아 성읍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여기서 '각 성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분명히 복수이며, 거기에서 나온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겨 놓은 복병들(29, 33, 37절)을 의미한다(Goslinga).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의 '각 성읍에서 나온자를'은 '각 성읍에서 나온 자가'로, 목적격 조사를 주격 조사로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진멸하니라 - 이것은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사와 숨어있던 복병들이 포위한 가운데서 베냐민 사람을 진멸하였음을 가리킨다. 43, 44절은 이에 대한 상황을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20:43,44
기브아 앞 동편 - 분명치는 않으나 기브아 북동쪽 약 6km 지점에 있는 게바(Geba)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본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훗날 레위 지파에게 기업으로 양도된 곳이다(수 21:17).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 베냐민 사람들은 간신히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기브아앞 동편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하던 그곳이 바로 그들의 무덤이되고 말았으니, 이때에 죽은 베냐민 용사는 모두 18,000명이었다. 한편 '그 쉬는 곳'에 해당하는 원어 '누하'가 70인역에서는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 '노바'(Nova)로 번역되어 있다. 한편 대상 8:2에 베냐민의 넷째 아들 '노하'(Nohah)가 나오는데, 이 지명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Cundall).
=====20:45
림몬 바위 - 림몬(Rimmon)은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11km 정도 떨어진, 벧엘과요단 계곡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바위가 많은 산지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의'람문'(Rammun)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 이곳은 18,000명의 베냐민 용사들이 죽은 곳으로 추정되는 게바(43, 44절)에서도 약 2.4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아니한 곳이다. 한편림몬 바위에는 6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동굴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가던 도중에 7천명이 죽고 이 곳에 피한 사람은 겨우 6백명에 지나지 않았다(47절). 그 동굴은해발 757m의 언덕에 위치한 것으로, 오늘날 고고학적 탐사 결과 그곳에는 식수(食水)를 공급할 샘도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돔 - 이곳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림몬 바위 가까운 곳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20:46
모두 이만 오천이니 - 35절에는 25,100명으로 본절보다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약 100명 정도 기록상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이미 앞에서 정확한 수를 밝혔기 때문에 다시 정확히 언급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2) 36-46절의 기록은 정확한 자료 소개 보다는 베냐민 자손의 멸망에 초점을 맞춘 기록이기 때문이다.
=====20:47
육백 명이...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21:13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백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당신의 언약을 잊지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 것이었다(창 35:12;49:28;출 24:4;민 1:5-15;수4:3, 4; 마 19:28;약 1:1;계 7:4). 만일 당시에 베냐민 지파가 전멸되었다면 오늘날우리는 그 지파의 후손인 사도 바울(롬 11:1)의 이름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48
이스라엘 사람이...돌아와서 -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색출해 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선 그곳에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같이 베냐민 거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냐민 각 성읍이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에 곱하여 몇 배로 거둔 셈이 되었다.
앞서 레위인의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19:29, 30)이미스바에서 총회로 모이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레위인으로부터 사건의 종말을 보고받은 그들은 기브아를 칠 것을 결의한다(1-11절). 이 회의에선 세부적인 지침이 함께 가결되었는데 다음 네 가지이다.
(1) 기브아의 비류들을 징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8절), (2) 전체 백성 중 10분의 1을 군사로 모집하여 그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토록 할 것(10절), (3) 딸을 베냐민 자손의 아내로 주지 아니할 것(21:1), (4) 하나님의 총회에 나오지 아니한 지파를 멸할 것(21:5) 등이다. 그리고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의 성읍을 공격하기전, 베냐민 지파에게 비류들을 넘겨달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나 지파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군사를 일으키니 내전(內戰)은 불자피 해진다(12-16절). 자세히 묻고 기브아 성읍을 치기로 결의하는 장면이 나온다(1-11절). 그리고 공격을 하기 전에 비류드을 넘겨달라고 최후 통첩을 보내었으나 베냐민 지파가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군사들을 모아 이스라엘 연맹군에게 먼저 전쟁을 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12-16절) 그리고 다음으로 두번째 부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슷적인 엄청난 우세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연일 연패하는 장면이 가록되어 있다(17-25절). 본서 기자는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패배원인이 무엇인가를 암시해 줌으로써 전체의 주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세번째 부분에서는 연일 연패하던 이스라엘 연맹군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화목제를 드림으로(26-28절) 베냐민 지파에게 크게 승리하는 장면이 다루어져 있다(29-48절). 이때 림몬 바위에 숨은 600명 이외에는 모든 베냐민 사람들이 죽임당하였는바 자칫 잘못하면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지도 모를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다(21장). 아무튼 이러한 본장은 당시의 혼란스런 이스라엘 시대상을 반증해 주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직까지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고 지파간의 유대가 분명한 사사시대 초기에 이미 이스라엘에는 심각한 도덕적 붕괴 조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반증하는 대표적인 예로 대제사장 비느하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미 모세 시대부터 활동했던 사람으로서(출 6:25) 숱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으나 본장을 보면 한낱 허수아비 제사장에 불과했었음을 알 수 있다(27, 28절). 즉 본서 2:7에는 "백성이...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대제사장 비느하스 시대에 이미 이스라엘 중에 망령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큰 일(2:7)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그의 무책임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의 행악에 대해 범민족적인 분노를 나타내었으나(10, 11절) 그들 모두가 그 같은 죄악에 대하여 공동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미스비야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의 총회에서 다루어진 내용을 살펴보면 한번도 기브아의 범죄를 우리의 범죄로 다루지 않고 그들의(베냐민) 범죄로 다루고 있다(6, 9, 10,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이 재판관이나 된 양 베냐민 지파를 향하여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이 어쩜이뇨...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12, 13절)고 거만하게 선포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전민족적 회개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형제를 정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행악이 전민족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기 보다는 그것을 통한 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1. 미스바 총회의 결의(20:1-16)
앞서 레위인의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20:29, 30)이 미스바에서 총회로 모이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레위인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그들은 기브아를 칠 것을 결의한다(1-11절). 이 회의에선 세부적인 지침이 함께 가결되었는데 다음 네 가지이다.
(1) 기브아의 비류들을 징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8절), (2) 전체 백성 중 10분의 1을 군사로 모집하여 그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도록 할 것(10절), (3)딸을 베냐민 자손의 아내로 아니할 것(21:1), (4) 하나님의 총회에 나오지 아니한 지파를 멸할 것(21:5)든이다. 그리고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 성읍을 공격하기 전, 베냐민 지파에게 비류들을 넘겨달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나 베냐민 지파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군사를 일으키니 내전(內戰)은 불가피해진다(12-16절).
한편 이상과 같은 사항들을 살펴볼 때 이스라엘 연맹군은 처음부터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멸할 생각은 생각은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는 21:3에서 그들이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라고 탄식한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형제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타인의 죄에 대해 지나치게 분노하고 스스로 심판관인 양 기브아 사람을 함부로 정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동족 지파를 거의 전멸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제 이와 관련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실수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총회는 단지 레위인 한 사람의 증언만을 듣고 한 지파를 징계하기로 결정하는 중차대한 실수를 범했다. 즉 그들은 레위인의 보고를 신중히 사실(査實)해 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에 대해 문제 해결의 여지나 회개의 요유조차 주지 않은 채 기브아 성읍을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어떤 죄를 심판함에 있어서 반드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요구하고 있다(마 18:16),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선적으로 징계하기 이전에 조용히 권고하여 회개토록 힘써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요일 5:16, 17).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총회는 한 지파의 구원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은 총회에 베냐민 지파가 고의적으로 이스라엘 총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베냐민 지파에 사전(事前) 통고없이 40만의 군대를 미스바에 집결시키므로서 베냐민 지파를 분개케 했고(1-3절) 이로써 베냐민 지파로 하여금 회개하기 보다는 대적하여 싸우도록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기브아 성읍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베냐민 지파 자체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했다.
한편 이스라엘 연맹군이 일방적으로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려 한 것(1-11절)이나 베냐민 자체내의 악한 세력들을 비호하려고 한 것(12-16절)은 당시 지파간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으므로 반영해 준다. 이는 동일한 조상에게서 비롯된 혈연 공동체일 뿐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결속된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견지해야 할 자세가 아님은 두말 할 나위없다. 바로 여기에 전민족이 회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둘 다 미처 이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2. 이스라엘 연맹군의 패배(20:17-28)
드디어 싸움에 나선 이스라엘 연맹군이 숫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연일 연패하는 장면이다(17-25절). 그리하여 온 백성이 가족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의 제단을 쌓는 장면이다(26-28절). 이처럼 베냐민의 26,700(15절) 보다 무려 15베에 달하는 엄청난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연맹군이 패한 원인으로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이스라엘 연맹군이 베냐민 지파를 형제로 여기지 않고 마치 이방인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하고 여호와께 물었을 때 그들은 마치 1:1에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형제의 죄에 대해 아파하며 함께 통분히 여기는 그라스도인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브아 사람들을 징벌하심으로 그들을 회개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연맹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결코 이방인처럼 영원히 심판치 않으시며 다만 징계하심으로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의 죄에 대해서 용서와 사랑으로 권면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 연맹군이 전쟁에 임하기 전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제단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브아 비류들이 극악한 죄를 범한 것(19:22-26)에 대하여 연대 의식과 공동 책임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저들을 그 같은 죄와 전혀 상관 없는양 자신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에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연전 연패(蓮戰蓮敗)를 통한 경고를 주셨다.
(3) 베냐민 지파의 막강한 전투력도 이스라엘 연맹군의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즉 베냐민 사람들은 언청난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패배는 곧 멸망이라는 위기 의식 속에서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용맹함이 뛰어났기에(16절) 초반에는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이 연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 회개하고 '모든 해결책이 오직 여호와께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승리의 응답을 받는다(26-28절). 이와 같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겸허한 마음을 지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위로가 주어지는 법이다(시 107:9 ; 약 2:5).
3. 연맹군의 승리와 그 결과(20:29-48)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승리의 확신을 얻은 이스라엘 연맹군(26-28절)이 마침내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고 승리하는 장면이다. 이전에 보여 주던 양상과는 달리 이스라엘 연맹군은 숫적인 우세에 자만하지 않고 신중하게 베냐민과 접견했으며 마치 여호수아의 아이 성 함락 때와 유사한 전술(수 8:3-28)을 폄으로써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29-45절). 그 결과 베냐민 사람 2만 5촌 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베냐민의 온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백성들이 불타고 칼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 중에는 단지 6백명만이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숨어 살아났다(46-48절).
이런 엄청난 전쟁 피해는 기브아의 죄악을 징벌하겠다던 촤초의 의도와는 너무나 벗어난 것이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기브아의 사람들을 징벌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연맹군에게 승리를 허락하시긴 했지만(28절) 이스라엘 연맹군은 지나치게 승리에 집착한 결과 자기 동족을 진멸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베냐민 지파도 자체내의 악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지파적 자존심과 배타심에 젖어 과도한 전쟁을 벌인 결과 이렇게 비참한 참상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는 사도 바울의 언설은 참으로 절실한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연맹군이 싸움의 참 대상을 바로 파악했더라면 이러한 참상은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는 베냐민 지파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이상의 결과 이스라엘 열 두지파 중에 하나인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위기가 도래하였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붕괴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이스라엘 연맹군은 크게 후회하며 시급한 해결책을 꾀하였는데 이는 곧 다음 장의 내용을 이룬다. 결국 이러한 본문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 어떠한 개인이나 인간 집단도 죄 문제의 해결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인간의 죄를 판단하시고 징계하실 분은 여호와이시니 우리에게 있어선 다음과 같은 자세가 요구될 뿐이다. 첫째,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치 아니하는 경계의 자세이다(엡 4:25-27). 둘째,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이를 정죄하기에 앞서 권면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자세이다(살전 5:14).
화해의 원리 - 본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총회로 모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기브아 비류들의 죄악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회의를 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어야만 했다. 즉 미스바 총회는 기브아의 죄를 성토(聲討)하는 데 골몰하지 않고 회개와 화목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전심 전력해야 했다. 이것이 본장 전체 배경에 깔려 있는 핵심으로써 화해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사사기는 시작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2:1). 그러나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사사기서 전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으며 계속해서 불화(不和)를 조장시켜 왔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본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강권적으로 이스라엘을 깨우치사 저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게 함으로써 다시금 양자간에 화해의 장(場)을 마련하고 계신다(26절).
이처럼 인간의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강권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진노와 심판의 자리에서 도저히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제물로 삼으시사 인간을 당신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이다(롬 5:8-10 ; 고후 5:9 ; 골 1:20-22). 사실 이스라엘의 범죄 - 하나님의 징계 - 이스라엘의 회개 -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거듭된 악순환의 역사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이 끝내 멸망당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화해의 장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리하여 다시금 화해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는 나머지 인간과 인간, 공동체와 개인 간의 모든 불화도 자연히 해결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해한 새로운 자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역꾼이니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롬 8:28). 따라서 혹 우리 가운데 문제가 발생하거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없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대개 십중 팔구는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없을 터이니 그러한 때엔 시급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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