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감탄해 마지 않는 그런 거창한 사진을 촬영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내 사진들이 고궁 후원을 거니는 가벼운 산책길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고,
커피를 마시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네프킨 종이에 가볍게 적어보는 메모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잊고 살아왔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열쇠였으면 좋겠고
시간의 반추 속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먹는 가벼운 내일의 다짐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라면 혼자라서 부담없이 편하고
둘이라면 둘이라서 의지가 되고 따뜻한,
목적지 없이 의기투합하여 떠나는 가벼운 여행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 후 기억의 서랍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그림엽서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배우면 배울수록 거창한 그 무엇에 대한 허상을 버리게 됩니다.
거창한 것들에는 딱 거창한 그 만큼의 과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사진을 통하여서까지 자신을 과장하고 꾸미고 싶지 않기 떄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사진이 나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기를 갈구하기 보다는
사진이 내 자신에게 자신을 돌아보게해주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산책하듯이 촬영한 고궁 창덕궁의 가을 모습들입니다.
아직까지는 다소 과장이 섞여있는 사진들,
완벽한 환골탈태를 바란다는 것조차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창덕궁 후원의 산책길은 마음을 비우고 몇번이고 다시 걸어보고 싶은 그런 길입니다.
밝음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컬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완벽한 구성보다는 느낌에 더 충실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버려지지 않은 그런 욕심들을 천천히 비워가야겠지요..
아마도 제가 고궁 사진들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과장들이 잘 먹혀들지 않는
욕심을 버리는 법을 가르치는 그런 고궁 자체의 특성때문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궁은 평범하지만 충실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담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입니다.
또한 고궁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에게만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미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미쳐 보지 못한, 발견되지 아름다움을, 남들이 잘 바라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는 시선이라는 것을
고궁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469E37545E4EA00E)
돈화문을 들어서자 마자 회화나무가 있는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벽사의 의미가 있다는 이 회화나무들은 궁궐이나 향교같은곳 입구에 심어졌다 합니다.
수수한 단청배경으로 만나는 회화나무는 제게 마음의 잡귀들을 말끔히 씯어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사물들을 대하라 가르칩니다.
창덕궁에 올 떄면 이곳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마음을 정리합니다.
오늘 따라 아침햇살이 참 곱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2E5C37545E4EA12C)
금천교를 건너기 전 당당하고 늠름한 느티나무를 만납니다.
궁궐의 나무들은 세월이 주는 무게감 때문일까요? 일종의 권위와 품격이 느껴집니다.
느티나무와 소나무 멀리 지붕뒤의 은행나무까지 하나같이 묵직함이 베어나옵니다.
오래된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몇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궁궐의 나무들은 시간여행을 안내하는 솜씨좋고 친절한 가이드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2F1437545E4EA22B)
후원을 들어서기전 보춘정의 가을풍경이 먼저 마중을 나옵니다.
왕세자들이 학문을 수련하던 곳이라는 이 곳 성정각의 보춘정은 주변풍경을 둘러보기 딱인 그런 곳인듯 합니다.
봄을 알린다하여 보춘정(報春停)이라 하는 이곳엔 봄에 매화가 피어 봄을 알려준다 합니다.
층층 높이를 달리하는 기와들의 아름다운 연속과 그 사이 우뚝 솟은 보춘정의 모습엔 자연을 끌어앉는 전통건축의 생각이 묻어나며
그 기상 또한 남다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3FAC37545E4EA218)
애련정의 가을 모습입니다.
빛이 살짝 거칠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어진 빛과 컬러에 감사하는 법부터 배워야 될 것 같습니다.
빛에 대한 욕심, 컬러에 대한 욕심이 주어진 풍경을 음미하기보다는 사진적인 것에 빠져 피사체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기에 앞서 아름다움을 먼저 보아야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사진가들은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야겠다는 집착때문에 쉽게 촬영을 포기하거나
주어진 빛과 컬러를 과장하게 됩니다.
버선발처럼 날렵하고 어여쁜 애련정 처마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과장속에 잊혀지거나 매몰되어 집니다.
단풍에 둘러쌓인 애련정의 차분하면서도 농익은 가을 분위기는 때로는 컬러라는 이름으로 간과되어 지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의미없는 인증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미적 인식이 선행되지 않는 수많은 인증들, 넘쳐나는 이미지들의 홍수속에서
정체불명의 맹목만을 목도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기에 앞서 빛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 피사체를 온전히 바라보는 일,
그래서 필립 퍼키스는 그의 저서 <사진강의 노토>의 시작을 '바라보기' 연습으로 시작합니다.
"섣부르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은유나 상징으로 나아가지 마라,
온전히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라"
필립 퍼키스의 조언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바라보기는 사진의 그 출발점 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3EDA37545E4EA318)
사진가는 빛의 연금술사임에 틀림없지만, 너무 빛만 바라보아서도 안됩니다.
시간을 바라보고, 의미를 바라보고, 느낌을 잡아내야 합니다.
그 의미와 느낌에 따라 빛은 다른 용도로 , 또는 다른 종류의 빛들이 사용되어지는 것이겠지요.
모든 풍경에 어울리는 그런 빛은 없습니다.
장소마다 필요로 하는 빛이 다 다른 것이라면, 주어진 빛에 감사하며 그 빛에 맞는 장소를 촬영하면 될것을
구지 불평하거나 조바심낼 필요가 없습니다.
애련정의 가을이 깊기만 합니다,
거친 직사광보다 부드러운 확산광의 소프트한 느낌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주어진 이 빛의 한계에 순응합니다.. 애련정이 저의 또 다른 방문을 기다린다는 의미겠지요.
장소가 다시 찾아오라고 요구할 때는 분명 다르게 보여줄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훗날을 기약하는 법을 이제 조금씩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31437545E4EA413)
다시 애련지 건너편으로 가 불로문 앞에서서 기오현의 가을풍경을 바라봅니다.
이곳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문에 가을풍경이 더하니 약간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생명의 순환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불로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숙명적인 욕심일테지요.
장생의 의미로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 만든 석공의 노고와 기예도
자연의 순환앞에 실로 무상해집니다.
고궁촬영이란 생각해보면 너무도 단순합니다.
적절한 위치를 찾아 적절한 화각을 사용하는것, 사실 고궁뿐만아리나 모든 사진들의 프레임의 구성의 기본이 되는 부분입니다.
원칙은 간단하지만 적절한 위치를 찾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일은 아닙니다.
석문(불로문)이 만들어 낸 프레임속에 건너편 문을 집어넣은 이 위치가 불로문의 풍경을 담기에는 가장 적절한 위치입니다.
아니 가장 적절한 위치라 생각해 봅니다. 그래야만이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석문이라는 이 불로문의 특성을 대비를 통해 드러내 보일 수 있겠지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25268837545E4EA437)
이제 애련정에서 반월지로 발길을 돌립니다.
오전 단 몇분만 허락되는 하이라이트같은 빛이 반월지의 단풍을 물들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 골구루 비쳐주는 빛은 왠지 헤퍼보입니다. 주제만을 강조해 주는 빛 저는 그런 빛을 좋은 빛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운좋게 이런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관람정이 위치한 반월지는 후원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영역입니다.
존덕정,관람정, 승재정등 수개의 정자들과 곡선의 연못이 단풍과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연못과 정자과 함께하는 전통정원의 종합선물세트같은 곳입니다.
이 연못은 반월지라고 불리기도 하고,, 한반도모양을 닮았다하여 반도지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음양의 원리에 따라 주로 네모난형태의 연못이 많은 전통연못과는 달리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제시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논란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논란의 진위여부를 떠나 단풍과 함께하는 반월지의 풍경이 그윽하기만 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99139545E4EA72C)
관람정 맞은편 언덕, 우거진 수목들 사이에 자리잡은 승재정은 원림속 정자의 아름다움을 가득 간직하고 있습니다.
승재정 아래쪽으로 자리잡은 붉디 붉은 이 단풍은 반월지 가을풍경의 주인공 같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16939545E4EA822)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관람정에 내려가 반도지를 바라봅니다.
역광으로 반짝이는 반도지의 가을 풍경은 창덕궁 후원 가을풍경의 백미라 할만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사진에서 빛은 장소에 따라 그 가치를 달리합니다. 애련정에서는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빛이 거칠게만 느껴진다면
이곳 반월지에서는 강한 빛만이 그 역광의 아름다움을 가장 빛나게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사진에서 빛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0EDE39545E4EA804)
반월지의 아름다운 역광을 부채모양의 특이한 형태를 가진 관람정의 프레임으로 담아봅니다.
누각의 프레임은 옛사람의 시각을 재현해 줍니다.
가을날 관람정에 앉아 있으면 바로 이런 장면이 보인다는 이야기겠지요..
이런 풍광앞에 앉아 있으면 시 한수 정도는 뚝딱~~ 만들어질 듯도 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6C8939545E4EA92A)
옥류천 농산정에서 가을 프레임을 담아보기도 합니다.
문만 열면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 건물의 내부로 들어오는듯한,, 자연을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이고 포용하는 이러한 특징은
한국 고건축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중 하나입니다.
농산정에서 친경례(왕이 친히 밭을 가는 행사로 농사를 기본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의식)를 마치면 이곳 농산정에서 음식을 준비하였다 합니다.
옥류천이 본궁과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죠.
![](https://t1.daumcdn.net/cfile/cafe/26130239545E4EA901)
다시 옥류천에서 소담스러운 오솔길을 따라 연경당으로 내려옵니다.
애련정 위쪽으로 위치한 연경당은 주로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라 합니다. 연회를 열었던 곳 치고는 그 소박함에 놀라게 됩니다.
화려한 단청이 없는 백골집(단청으로 장식하지 않은 집)에 가깝습니다.
미루어 생각해보면 화려한 단청보다는 이런 백골집이라서 더욱 자연이 돋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조상님들의 속내가 살짝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마침 연경당에 드리운 단풍도 화려한 색이 아닌 소박한 색인 동시에 건물의 톤과 어울리는 톤이어서 이 장면을 담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건물은 화려한대로 소박한 건물은 소박한대로 그 멋과 맛이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6DF439545E4EAA28)
연경당을 나와 다시 가을로 가득한 애련지의 풍경을 담습니다.
강한 빛이 떨어지며 아침과는 다르게 애련지의 단풍반영이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답게 물듭니다.
사진은 회화적 아름다움에 있어 그림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림처럼 또한 구도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사진은 현실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디테일만큼은 그림은 절대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세밀함과 정밀함을 자랑하며 그것이 사진만의 강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사진의 회화적 표현을 즐겨하기 보다는 디테일의 강점을 살리는 사실적표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위의 장면은 회화적표현이라기 보다는 반영의 사실적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8E839545E4EAA0B)
오전 내내 후원을 산책하였는데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미련을 못내 떨처내지 못하고 애련지에서 연경당쪽을 바라보며 다시 가을 풍경을 담습니다.
이제 1년이 지나야만 다시 볼 수 있는 풍경이 되겠군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240D8B39545E4EAB06)
후원 자유관람을 마치고 창덕궁을 나와 북촌가는길에서 다시 창덕궁을 바라봅니다.
가지런한 돌담위로 아름다운 창덕궁의 가을이 파란 하늘아래 미련처럼 펼쳐집니다.
2014년 가을 창덕궁의 가을은 쉽게 잊혀지지 않은채 기억의 서랍속에 몇장의 그림엽서로 차곡차곡 쌓여갈듯 합니다.
우연/이석기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