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지정당시 촬영된 진도개 사진을 게시하는 과정에서
댓글을 통해서 알게된 일본 블로그의 글을 네이버 번역기 Papago를 통해서 읽어 보았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아서 회원님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번역기의 번역에 약간의 가감을 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帝國ノ犬達
神戸実業界の重鎮・「日本のマッチ王」こと瀧川辯三のご長男。さすが資産家だけあって、大正時代にはイギリスからポインターを直輸入しております。 関東大震災で国際港横濱が壊滅した
2017-01-19 21:54:38
진돗개의 역사
명견유행시대에 역사를 가진 순수 조선개 중에서 사납지만 주인에게는 온순하고,
민감한 군용견에도 번견으로도 수렵견에도 백퍼센트인 적용성을 가진, 나무랄 데 없는 진돗개를
반도 동물학의 제일인자 경성대 예과 교수 모리 박사의 손에서 조사 연구한 결과
어떤 우수한 서양견에 맞먹는 세계에 자랑하는 축견계의 왕자라고 칭해야 할 좋은 개라는
소문이 나고 우리 축견계에 센세이션을 야기했던 뉴우스가 생겨났다.
-경성 일보 『 명견 유행 시대 조선의 꽃 등장(1937년)』-
요즘 왠지 전방위로 향해서 실종중인 조선반도 정세. 강 건너 불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이번에는 일본강점기시대의 조선 재래개에 대해서 게재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옛부터 애완 경비·수렵·식육·폐물 처리 등에 개를 이용했으며
중국의 영향도 받고 각지에 여러 품종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명한 것이 진돗개.
뛰어난 자질을 가진 개로서 예로부터 사육되어 왔다고 합니다.
통치 측에 있던 일본에서의 평가는 "순수 일본 개에 준하는 귀중한 토종개와 "
"아무 가치도 없는 똥개이며 일본개에 못 미친다"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래서 그런지, 진돗개의 조사는 1936년 늦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근대는 고대나 중세에 이어 한일 개계의 교류가 활발하던 때였지요.
일본 재래개와 조선 토종개와 중국 토종개와 서양견이
이주자들과 함께 서로의 지역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일본열도 밖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현대 일본견계사에서는
별로 다루지 않는 사실이지만 '근대 일본의 지역'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근대 동북아 일대에는 서양견의 대량 유입이 시작되고 교잡화로 인해 많은 토종 견종이 사라집니다.
일본의 경우 내무성·문부성 등 공적 기관, 일본견보존회·일본견협회를 비롯한 애호단체,
개개의 애견가까지 필사적인 일본견 보호활동을 전개.
몇몇 토종견들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통치하에 있던 사할린, 한반도, 대만의 토종견은 멸종이 위험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한반도에 애견단체가 설립되기 시작한 1922년(동년, 조선산업공진회 축견대회가 개최됩니다)
이후에도 토종견은 외면하고 외국견이 인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쇼와시대에 들어서자(1924년경) '서울케넬구락부', '조선셰퍼드견구락부',
'경성셰퍼드연구회'가 발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견계에서도 일본 셰퍼드 클럽이나
칭다오 셰퍼드 독 클럽이, 훗날 이들을 흡수 합병한 제국 군용견협회,
일본 셰퍼드 견협회 등도 서울 지부를 개설해 한반도 견계도 융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토종견에 관한 움직임은 일절 없었다.
개 사육이 제한되어 있던 것도 아닌데 당초 개 보호 활동은 일본인 주도 상태였습니다.
당시 한반도의 개 등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독부 위생과가 올해 3월 말 현재 조사에 의하면, 총두수 십구만 천백 사십오 마리에 달하고,
함남의 이십이만 삼천 사백오십칠 마리, 경북 이십만 칠천 사백삼십팔 마리가 많은 편으로,
가장 적은 것이 전북의 사만 오천 팔백육십오 마리이다.
종류별로는 포인터2천5백82마리, 세트터천3백50마리, 일본천6백8마리,
테리어2천4백43마리, 불독2백13마리, 기타 6백80마리, 나머지는 조선에서 온 종이다.
-조선의 축견수(1934년)에서-
일본현지의 축견 행정에 따른 축견과 들개의 구분은 식민지하에서도 동일하다.
식용, 모피용으로 간주된 것은 들개나 사육을 포기한 애완동물로 이들은
'일반인의 애완견 매입'과 '들개 구제'를 통해 조달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마구잡이로 개를 잡아먹었다는 식으로 왜곡하지만
애완동물은 행정 당국이 등록한 애완동물이기도 합니다.
한반도에는 뛰어난 사냥개 훈련 기술이 전해져
일본인 헌터도 그들을 핸들러와 개 보이로 고용했고 셰퍼드와 포인터는 소중하게 사육되었습니다
반면 토종견은 방치돼 있었습니다.
홀대 받는 이들을 재평가해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1928년에 일본에서 시작된 일본견 보존 운동을 참고로
한반도에서도 보호를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리 박사는 예정하여 반도 남단 다도해 여행중 전남 진도에 순조선산 양견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 섬에 가서 약 2주간 머물며 실험 연구결과 이 섬에서 나는 진돗개야말로
모리교수가 여러 해 찾아다니며 얻지 못했던 '순수동아 계통의 개'이며,
일본의 명견 아키타견 정도의 크기로 동일한 계통으로 보인다.
현재는 식용으로 취급되고 있는 처량함에, 동 박사는 한시도 신속하게 이를 구제,
군견, 번견, 엽견으로서 세계 최량견인 진가를 발휘하게 하려고 귀경하자마자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해 내지의 아키타견, 토사견과 마찬가지로
보존지정견으로 하기 위해 목하 당국과 교섭중이다.
-경성일보(1937년)-
한반도 토착견 보호 차원에서 조선총독부가 진돗개와 풍산개를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한 것은 1938년이다.
아키타견, 기슈견, 4국견, 홋카이도견, 카이젠견, 시바견, 에쓰노견에 이어
진돗개도 멸종 위기를 모면한 것입니다.
하지만 전년에 진돗개 천연기념물 지정 계획이 보도되자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으로 반출해 두면, 천연기념물 지정 후에 고가로 전매할 수 있다」.
진돗개는 야욕에 눈이 먼 일본인 애완견 상인에게 사들여져
보호 개시 시점에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덧붙여서 전시체제 하에서도 일본견 붐은 계속되고 있어
'일본견이라는 이름이 붙는 개라면 무엇이든 팔린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귀가 쫑긋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하고 번견으로, 군용견으로 나무랄 데 없는
순조선산 명견 '진돗개'가 경성대예과 모리 박사에 의해 발견되어
애견가 사이에 센세이시션을 일으킨 것은 이미 알려진 대로이나,
그 후 진도에는 조선은 물론,
도쿄, 오사카, 멀리는 동북지방의 애견가나 애견클럽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쓸쓸한 진도에 때아닌 번화가 와서, 명견 "진돗개"는 불티나게 팔려가고,
그 중에는 악질의 상인도 섞여 대량 매점을 하여, 부당한 이윤을 올리려고 책동하고 있는 것도 있고,
이대로 방치하면 진돗개는 금시에 멸종위기에 봉착하므로,
모리 교수는 문 진돗개군수 앞으로 진돗개 보존 차원에서
헐값 매수와 대량 매점을 금지한 원액(原額)과 통첩을 보내면서 진돗개 보존의 SOS를 발송했다
-경성일보 <진돗개에 벌써 SOS(1937년)>에서-
자, 일본으로 반출된 진돗개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신기한 것은 당시의 애완 동물상 카탈로그에 진도개가 기재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상품이 아니면 상품을 양산하기 위한 소재로 이용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 개 부활을 목적으로 한 양심적인 브리더와 별도로
일부 악덕 업자는 "위장 일본견"로 일본개와 중국개(차우 차우)을 왕성하게 교배하고 있었습니다.
차우 차우와 교배한 일본 개는 자세가 좋아지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일본 개"로 착각한 애견가에게 비싸게 팔린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 피해를 확산한 미카와 잡종개 문제 등 판매된 차우 차우 교잡 개가
전후 개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소동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네요
(각지에 존재하는 "전시를 살아남은 토종 개"의 정체가 사실은
전쟁 전에 반입된 미카와 잡종개의 후손이었다는 희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런"위장 일본견"에 진도개가 이용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수의 조선 토종개가 일본에 유입된 것은 사실입니다.
진돗개 보호 때문에 조직 방어가 출범한 것은 중일 전쟁 후의 일.
애완 동물상의 사들이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1938년에 "진돗개 보존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다음에 따르면 외지의 토종개를 " 넓은 의미의 일본개"로 간주되던 기술도 있네요.
살아있는 화석으로서 발견된 전남 진도 개는 작년에 일본 개 보존회 이사 사이토오 히로시씨의 실지
답사를 하였고, 그 후 모리 박사가 상세하게 이를 조사한 결과, 이는 순수 일본 개로서 그 성질이 매우
예민하고 강력하다는 정평이 나고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고,
진도군에서는 진돗개 보존회를 조직하고 매매는 반드시 보존회의 손을 거쳐야 할 것으로 했지만
최근 섬 밖 쪽에도 그 보존 열도 높아지고 전남에서도 향후 보존을 철저히 한다.
때문에 보존회에 명령 없이 무단매매, 도살, 잡종 교배 등을 엄금하게 되었지만
이 개의 분포 상태는 진도군 진도 면 성내리 동 외리, 남동리, 성동리, 읍내구 지역 전반이며,
순수 번식지는 군 지산 면으로 일컬어지고 현존 약 이백마리를 사육하고 있지만 일본의 기주견과 가장 유사하고,
중형의 일본개와 동류인 일본개에서도 사할린개는 시베리아에서 기타 국내 재래종은 많다.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서 일본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진돗개를 기슈개 기타 일본개라고 말하고도
감별이 못할 정도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문헌은 없겠지만 옛날부터 진도 지역에 살고 있던 사냥꾼들이
멧돼지사냥에 사용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경비견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홋카이도 아이누 개를 닮은 검은 참깨 개(재구)도 있지만
이는 순수의 진돗개가 아닌 잡종이며,
순수한 진돗개는 털색에는 구분이 없고 털은 짧고 서있으며 거칠고 강하다.
-『 진돗개 크게 위력을 떨치다(1938년)』-
그러나 보존회의 노력도 헛되이 진도개 유출을 막지 못했습니다.
1943년에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진돗개가 애완견업자에 의해
섬 밖으로 반출되었다' '진도에 반입된 서양견과의 교잡화가 심각한 상황이다'고
대책을 고심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보호 활동이 막 시작된 1939년에는 텐퍼가 대유행. 다수의 진돗개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당시의 『경성일보』전재 기사에서 (1939년)-
그래도 개인이 소유한 애완견을 군수원피로 헌납해야 했던 전쟁 말기의 일본견계보다는 낫더군요.
보호받아야 할 일본개조차 '이 전쟁 기간에 개를 기르다니 무슨 짓이냐!
모피로 만들어 버려!'라고 인근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던 시절입니다.
사료부족, 주위의 백안시, 미군의 공습을 견뎌낸 애견가의 노력으로 일본견은 전시를 살아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를 계속 기른 선인의 노력을 전후 일본인은 잊고 말았습니다.
진돗개 보호활동도 오늘날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련이 있었겠죠.
한반도가 식민지를 벗어났을 때 토종 견종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진돗개보호법이 제정될 무렵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진돗개는 고난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그 혼란이 한국측의 곡해를 불러내어 끝내는
"일본인들이 진돗개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등 원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일본 측도 트집이다!"그쪽의 애완동물 문화가 미개했기 때문이지!" 등 위세 있게 반론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본은 통치하의 축견 행정조차 성실하게 확립할 수 없는 3류 무능 국가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너무 흥분한 나머지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부메랑의 투척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죠.
「근대 일본」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근대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찮은 끼리 싸움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사료 하나 펴보지 않고 소중한 자국 축견사조차 '개의 역사 따위 인터넷 검색으로 족하다'고
착각하는 건방진 태도는 한일 양국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
거기에서 좋은 부분은 숨기고 나쁜 부분은 들추기 위해
역사 왜곡을 저지르는 것까지가 약속한 듯 하다.
"한반도를 근대화시켜줬다"는 등 일본측을 배려하고 싶다면
그 책무로 일본측이 근대 조선견계사를 편찬해야겠지요?
일본측을 비난하기 전에 한국측의 이론 무장으로 한반도 견계사 편찬을 해야겠지요?
진돗개를 서로 논하고 있는 가운데 제대로 일차 사료를 조사한 사람은 있습니까?
우리도 계속 관찰해 왔지만 토종견 현황을 조사한 모리 다메조 교수,
미미하게 남아 있던 진돗개와 풍산개를 보호 지정한 조선총독부로
이어가려는 일본 측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
한국측도 진돗개의 과거를 일제 비판의 소재로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한일 개논쟁이 유치한 매도전으로 빠져든 것은 양국 공통의 토대가 되는
한반도 견계사의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고, 개 지식이 없는
국사님의 대량참전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것도 근대 일본견계를 흑역사 취급해 온 왈레왈레 애견가의 책임입니다만.
모든 것을 일본 탓으로 돌리는 한국 측의 오만한 태도. 거기에 반론할 수 있는 기초 교양도 없고,
논점 맞추기로 개고기 식사의 야유로 시종하는 일본측의 공부하지 않고 유치한 사고 회로.
한일 쌍방이 안 되기 때문에 이 개싸움은 계속 될 것입니다.
싸움의 재료만 원할 뿐, 개의 역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 사람들.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개를 도구 취급하는 무리가 많아서 질립니다.
개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그들에게 일본개나 진돗개를 논할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개블로그와는 관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東京オリンピックに向けた野犬対策 昭和12年|記事一覧|アイリッシュ・ウルフハウンドの日本史
2017-01-19 21:54:38
テーマ:日本と東洋の犬種
<img alt="" contenteditable="inherit" height="582" src="https://stat.ameba.jp/user_images/20170119/21/wa500/37/6d/j/o0526087413849299423.jpg?caw=800" width="350" class="PhotoSwipeImage" data-entry-id="10333394800" data-image-id="13849299423" data-image-order="1">
最近なんだか全方位へ向けて迷走中の朝鮮半島情勢。対岸の火事を遠巻きに眺めつつ、今回は日本統治時代の朝鮮在来犬について取り上げます。
朝鮮半島では古くから愛玩・警備・狩猟・食肉・廃物処理などに犬を利用しており、中国の影響も受けて各地に様々な品種がいました。
特に有名なのが珍島犬。優れた資質を持つ犬として、古くから大切にされてきたそうです。
統治側であった日本での評価は「純日本犬に匹敵する、貴重な在来犬である」「なんの価値も無い駄犬。和犬には及ばない」と二分されていました。それゆえか、珍島犬の調査は昭和12年と遅めのスタートになっています。
近代は、古代や中世に続いて日韓犬界の交流が活発化した時代でした。日本在来犬と朝鮮在来犬と中国在来犬と洋犬が、入植者と共に互いの地域を行き来していたのです。
日本列島しか視野に入らない現代日本犬界史ではあまり取り上げられない事実ですが、「近代日本のエリア」を地図で俯瞰すれば当然のことなんですよね。
近代の北東アジア一帯には洋犬の大量流入が始まり、交雑化によって多くの在来犬種が姿を消します。
日本の場合は内務省・文部省といった公的機関、日本犬保存会・日本犬協会をはじめとする愛好団体、それに個々の愛犬家までが必死の和犬保護活動を展開。幾つかの地犬がギリギリセーフで生き延び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しかし、統治下にあった南樺太、朝鮮半島、台湾の在来犬はノーガード状態が続きます。
朝鮮半島に愛犬団体が設立され始めた大正11年(同年、朝鮮産業共進会畜犬大会が開催されます)以降も在来犬は顧みられず、舶来の洋犬が人気の中心となっていました。
昭和に入ると「ソウル・ケネル倶樂部」「朝鮮シェパード犬倶樂部」「京城シェパード研究會」が発足。更には内地犬界からも日本シェパード倶楽部や青島シェパードドッグ倶楽部が、後年にはそれらを吸収合併した帝国軍用犬協会、更に日本シェパード犬協会などもソウル支部を開設し、朝鮮半島犬界も隆盛を極めます。
しかし相も変わらず、在来犬に関する動きは一切ナシ。犬の飼育が制限されていた訳でもないのに、在來犬保護活動は日本人主導の状態でした。
当時における朝鮮半島の畜犬登録内容は下記のとおり。
内地の畜犬行政による「畜犬」と「野犬」の区分は、統治下においても同じこと。
食肉・毛皮用と見做されたのは野良犬や飼育放棄されたペットであり、これらは「一般からの廢犬買い上げ」と「野犬駆除」によって調達されていました。「朝鮮半島では手当たり次第に犬を食べていた」などと歪曲する向きもありますが、ペットは行政当局が登録した愛玩動物です。
朝鮮半島には優れた猟犬訓練技術が伝わっていたため、日本人ハンターも彼らをハンドラーや犬ボーイとして雇用。シェパードやポインターは大切に飼育されていました。
その一方で、朝鮮在来犬は放置状態が続きます。
粗末に扱われる彼らを再評価し、何とか救わねば。昭和3年に内地でスタートした日本犬保存運動を参考に、朝鮮半島でも保護に向けた動きが始まりました。
朝鮮半島土着犬保護の目的で、朝鮮総督府が珍島犬と豊山犬を「朝鮮宝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第53号」に指定したのは昭和13年のこと。
秋田犬、紀州犬、四國犬、北海道犬、甲斐犬、柴犬、越の犬に続き、珍島犬も絶滅の危機を免れたのです。
しかし前年に珍島犬の天然記念物指定計画が報じられると、これがアダとなりました。
「今のうちに内地へ移入しておけば、天然記念物指定後に高値で転売できる」。珍島犬は慾に目がくらんだ日本人ペット商に買い漁られ、保護開始の時点で激減してしまったのです。
※ちなみに戦時体制下でも日本犬ブームは続いており、「日本犬と名のつく犬なら何でも売れる」という状況にありました。
さて、内地へ持ち去られた珍島犬たちはどうなったのでしょうか?
不思議なことに、当時のペット商カタログに珍島犬が記載されることは稀でした。ならば、一体どこへ消え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
商品でなければ、商品を量産するための素材として用いら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
日本犬復活を目的とした良心的なブリーダーとは別に、一部の悪徳業者は「偽装和犬」として日本犬と中国犬(チャウチャウ)を盛んに交配していました。
チャウチャウと交配した日本犬は姿勢が良くなるため、「これぞ純粋な日本犬」と勘違いした愛犬家へ高値で売れるという利点があったのです。
全国各地へ被害を拡散した三河雑犬問題など、販売されまくったチャウチャウ交雑犬が戦後犬界にまで影響を及ぼす大騒動へ発展したケースもありますね(各地に存在する「戦時を生き延びた地犬」の正体が、実は戦前に持ち込まれた三河雑犬の子孫だったという悲喜劇が演じられました)。
この手の「偽装和犬」に珍島犬が利用されたかどうかは不明ですが、相当数の朝鮮在来犬が日本へ移入されていたことは事実です。
珍島犬保護のため、組織防衛がスタートしたのは日中開戦後のこと。ペット商の買い漁りに対抗するため、昭和13年に「珍島犬保存會」が設立されたのです。
下記によると、外地の在来犬が「広義の日本犬」と見做されていた記述もありますね。
しかし保存会の努力も空しく、珍島犬の流出は阻止できませんでした。昭和18年の朝鮮総督府資料でも、「天然記念物指定した筈の珍島犬が、ペット業者によって島外へ持ち出されている」「珍島に持ち込まれた洋犬との交雑化が深刻な状況である」と、対策に苦慮する様子が記されています。
更に、保護活動がスタートしたばかりの昭和14年にはジステンパーが大流行。多数の珍島犬が犠牲となりました。
当時の『京城日報』転載記事より(昭和14年)
それでも、個人所有のペットを軍需原皮として献納させられた戦争末期の内地犬界よりはマシでした。保護されるべき日本犬ですら「この戦時下に犬を飼うとは何事か!毛皮にしてしまえ!」と近隣住民から非難された時代です。
飼料不足、周囲の白眼視、米軍の空襲に耐えた愛犬家の努力により、日本犬は戦時を生き延びます。そのような状況下で犬を飼い続けた先人の努力を、戦後の日本人は忘れてしまいました。
珍島犬の保護活動も、現代では伺い知る事のできない試練があったのでしょう。
朝鮮半島が植民地支配を脱したとき、各地の在来犬種は大きな打撃を受けていました。 珍島犬保護法が制定された頃には朝鮮戦争が勃発し……と、珍島犬は苦難の歴史を歩んできたのです。
その混乱が韓国側の曲解を招き、果ては「日本人が珍島犬を滅ぼそうとした」などという暴論が飛び出す始末。
日本側も「言いがかりだ!そっちのペット文化が未開だったからだろ!」などと威勢よく反論しているのですが、ソレは「日本は統治下の畜犬行政すらマトモに確立できないボンクラ三流無能国家であった」と主張しているのと同じなんですよね。興奮のあまり、相手を攻撃しているつもりがブーメランの投擲になっていることに気付かないのでしょう。
「近代日本」の概念を理解せずに近代史を語るから、くだらぬ同士討ちをやらかすのです。
一次史料すら繙かず、大切な自国の畜犬史すら「犬の歴史なんかネット検索で充分」と勘違いする横柄な態度は、日韓両国ともに共通しています。そこから都合の良い部分をつまみ食いし、アジテーションのために歴史歪曲をやらかすまでがお約束。
「朝鮮半島を近代化させてやった」などと統治側を気取りたければ、その責務として日本側が近代朝鮮犬界史を編纂すべきでしょう?
日本側を非難する前に、韓国側の理論武装として朝鮮半島犬界史の編纂をすべきでしょう?
珍島犬をアレコレ論じている中で、きちんと一次史料を調べた人はいるんですか?
我もずっと観察して来ましたが、在来犬の現況を調査した森為三教授、僅かに残されていた珍島犬と豊山犬を保護指定した朝鮮総督府に続こうとする日本側の動きは皆無。
韓国側も、珍島犬の過去を日帝批判のネタ扱いしている体たらくです。
日韓イヌ論争が幼稚な罵倒合戦へ陥ったのは、両国共通の土台となる朝鮮半島犬界史のテキストが存在せず、犬の知識ゼロの国士様大量参戦を許しているからです。
ソレもコレも、近代日本犬界を黒歴史扱いしてきたワレワレ愛犬家の責任なんですけどね。
全てを日本のせいにする韓国側の傲慢な態度。それに反論できる基礎教養もなく、論点ずらしで犬肉食の揶揄に終始する日本側の不勉強かつ幼稚な思考回路。日韓双方がダメダメなので、このドッグファイトは延々と続くのでしょう。
ケンカの材料が欲しいだけで、犬の歴史なんかどうでもいいんですよあの人たち。
日本人も韓国人も、犬を道具扱いする連中が多くて辟易します。犬への愛情が欠けた彼らに、日本犬や珍島犬を論じる資格はないのです。
犬のブログとしては関わり合いたくも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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