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말레꼰에서 바라본 모로요쇄 둥대
아아바나 말레꼰 해변
아바나 대극장
혁명 광장 앞 체게바라
카리브해의 낭만 - 쿠바
최근 미국과 국교 정상화를 발표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쿠바는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1492년 이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정복자들에 의해 혹독한 억압의 역사를 경험한 한반도 반 정도 면적을 가진 나라로 스페인어가 공용으로 사용되고, 천백만 명 정도 인구 중 85% 정도가 가톨릭을 믿는다.
섬 전체가 열대성 기후로 기온 변화가 심하지 않은 대신 우기(5-10월)와 건기(11-4월)로 크게 구별된다. 당연히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우리나라 겨울에 해당하는 12월부터다. 카리브해를 마주한 남쪽은 무덥고 햇볕이 강렬하지만 대서양을 바라보는 북쪽은 비교적 서늘하고 날씨 변덕이 심한 편이다.
강대국에 의해 점령된 나라들 대부분이 그렇듯 스페인에게 정복된 쿠바도 약탈과 탄압, 저항과 학살로 이어지는 잔혹한 시기를 거치게 된다. 1812년 일어난 대규모 흑인 반란은 독립을 요구하는 1,2차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미국의 개입으로 쿠바는 파리 평화조약에 따라 독립을 얻게 되지만 주체와 형식의 변화뿐, 사실상 미국, 특히 경제 기능은 미국 자본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자본과 부패한 독재 정권의 유착은 필연적으로 이에 저항하는 세력을 길러내게 되고 결국 1959년 1월, 대다수 농민과 도시 중간 계층의 지지에 힘입어 대정부 게릴라전을 이어오던 공산주의자 피델 까스트로가 바띠스따의 장기 독재를 타도하고 혁명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저항과 혁명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체 게바라가 등장하게 된다.
천식에 시달리면서도 시가를 좋아했던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다. 의학을 공부하던 체는 졸업하기 전 오토바이를 이용한 남미 일주 여행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게 되고 혁명 투사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카스뜨로와 함께 쿠바에서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벌린 끝에 산타 끌라라 전투를 성곡적으로 이끌어 성공한 혁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혁명에 성공한 후 잠시 쿠바 정부 제2인자로 활동하던 체는 새로운 혁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떠난다. 그리고 1967년 10월, 미국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힌 후 총살형을 당한다. 체의 나이 39세. 지금 체의 시신은 산따 끌라라 체 게바라 기념관 추모관에 다른 혁명 동지들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까스뜨로 정권은 대지주 토지와 미국계 기업 자산을 몰수하고 미국 회사들을 국유화하며 미국과 대립하다 결국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한다. 경제봉쇄와 다른 남미 국가들과 관계 단절로 쿠바 경제와 서민들 삶의 수준은 열악하지만 공정한 교육과 의료 복지는 성공적이라고 한다. 특히 의료 수준이 높아 남미 국가나 심지어 미국에서도 젊은이들이 유학을 오기도 한다.
미국에 의한 경제 봉쇄로 쿠바에는 5,6십 년 된 올드카들이 많다. 여행객들은 매연과 소음이 요란한 오픈카를 타고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며 거리를 달리는 색다를 경험에 환호하기도 한다. 또한 쿠바는 모두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소출 감소로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쿠바는 우리나라에서 거리나 무척 먼 나라다. 거리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그렇다. 사회주의 체제 국가라 선뜻 발을 딛지 못하게 움츠러들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척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다. 살사와 재즈, 질 좋은 시가로 연상되는(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쿠바 선수들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쿠바, 다음부터는 그들 일상과 모습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참고 및 인용 :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핵심 중남미(R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