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선도
-고구려의 선도
한겨레 선맥(仙脈)의 전통은 고조선에 이어 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고구려에서는 ‘선인도(仙人道)’라는 이름으로 선도수련( 기공)이 널리 성행하였다. 최삼룡 교수는 특히 고구려, 발해로 이어진 선도의 맥을 신라의 남방계와 구분하여 '북파 선도'라고 부른바 있다.
북파 선도에서는 특히 상무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는 종교적 무사(武士) 계급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교도(敎徒)의 무사단(武士團)을 거느리고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조의선인의 최고 지위인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이 되면 국상(國相)과 같은 지위를 가졌다고 한다. 대장군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조의두대형이었다. 당(唐) 태종(太宗)의 30만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는 일당백의 용맹한 조의선인 부대 3만이 나서서 이를 일시에 격퇴하였다는 유묭한 일화도 있다.
여러 선인 설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선인(仙人)들로는 문박(文朴), 을밀(乙密), 안류(安留), 보덕(普德), 영랑(永郞), 단옥(丹玉), 벽옥(碧玉), 대란(大蘭), 소란(小蘭), 구상(九尙), 무골(武骨), 묵거(黙居), 재사(再思) 등이 많은 분들이 있다. 조선 후기에 발행된 이의백(李宜白)의 <오계집(梧溪集)>에는 고구려 사선녀(四仙女)의 전설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고구려 태조 동명왕(東明王)이 옥저(沃沮)를 멸했을 때 옥저의 왕녀 단옥(丹玉), 벽옥(碧玉)이 있었다. 동명왕이 그녀들을 취(娶)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녀들은 산에 들어가 선도(仙道)를 배웠다.
그 후 한 고구려인이 구월산 대상(臺上)에서 사선녀(四仙女)가 노니는 것을 보았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옥저의 왕녀 단옥, 벽옥이라 하였다. 다른 두 선녀는 기강후(箕康侯)의 여(女) 대란(大蘭), 소란(小蘭)이라 하였다. "
-발해의 선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거느리고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선맥을 계승하여, ‘천신교(天神敎)’라는 이름으로 선도가 널리 성행하였다.
<발해국지(渤海國誌)>에 보면 발해에서 당(唐)의 무종(武宗)에게 비할 바 없이 정교한 보물 궤를 보내왔는데, 그 속에는 선서(仙書)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도교를 깊이 숭상했던 당 무종에게 발해가 보낸 것임에 유념해야 한다. 이는당나라에 비해 훨씬 더 고층차의 선도가 동방에 있음을 발해가 당당히 과시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귀중한 한겨레 선서들 중에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한 권도 없다.
아울러 <발해국지>에는 중국의 장건장(張建章)이란 사람이 발해의 대도(大島)에 와서 발해의 대여선(大女仙)을 만났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또한 발해 사람은 여행 중에 어느 인가(人家)를 찾아가도 주인이 다 먹여 주고는 일전(一錢)도 받지 않을 정도로 인심이 후하였으며, 발해의 남자는 지모와 용기가 뛰어나서 '세 사람(三人)이면 능히 호랑이를 잡았다'고 역시 이 책은 적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발해의 미풍양속과 상무정신 등 한겨레의 전통 선풍(仙風)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