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마음 여유 인생기] 못해 본 직업은 있지만, 안해 본 직업은 없다
전창수
1. 대학교때 했던 일
나의 첫 직업체험은 고등학교 때였다. 친구를 따라 신문배달을 갔었다. 단 하루뿐이었지만 새벽에 신문배달을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아서 걸어서 다녔다. 그리고 아마 고등학생이 신문배달을 해야 할 만큼 일자리가 넘쳐났었을 때일 것이다.
새벽에 나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 때의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지만, 정말 하기 싫었다. 그러나 집에서 하라고 억지로 밀어넣는 바람에 할 수밖에 없었다.
알바를 한다는 이유로 용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바를 하지 않으면 엄마는 울었다. 너무 싫었다. 내가 하는 알바는 초등학교의 교과서를 분류작업한 후, 학교까지 배달해 주는 것이었다. 배달할 때는 용달차가 왔다. 하기 싫었으나, 억지로 해야만 했다. 내가 만약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학 때마다 하는 일이었지만, 가끔은 방학이 되지 않아도 해야만 했다. 대학교 1,2학년 때의 방학은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내졌다.
지금은 허리가 좋지 않다. 무리를 해서 알바를 하는 바람에 나의 대학시절 끝무렵부터 허리가 좋지 않아졌다. 대학교 때는 슈퍼마켓에서 한달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했는데, 계산할 때 포인트를 찍는 일이 너무 느리다는 이유로 나는 물건정리만 한달 정도 한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방위병으로 학군단에서 근무하고 소집을 마친 후, 공장에서 알바를 몇 달간 했다.
하루종일 서서 일했다. 몇 달을 일을 했는데, 그곳을 다니면서 실내운전면허운전연습장에서 연습을 해 가면서 운전면허를 따기도 하였다. 지금도 실내운전면허운전연습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한달간 공장을 문을 닫는다고 해서, 나는 쉬었고, 그 다음에 또 연락이 왔지만, 학교를 다녀야 해서 다니지 못했다.
비록 공장에서 번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내게는 정말 큰 돈이었다. 집에서 조그마한 경차를 폐차시킨다고 해서 내가 타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운전을 했다.
내야 하는 돈이 보험료밖에 없어서 좋았다. 기름값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는 경차였다. 나의 대학교 3, 4학년 시절을 그 차와 함께 보냈다.
2. 나의 본격적인 고생길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 IMF가 터졌다.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나는 알바하느라 지쳐서 공부도 못했고, 따로 취업준비하는 걸 할 틈이 없었다. 대학교 4학년 때 그나마 시간이 되어서 뭔가를 준비했었다면 될까. 그러나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하는 준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음만 급했고, 불안했다. 이제 사회로 나가야 하는데,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서 외로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누군가와 연락이 닿아서 처음 했던 일이, 논술첨삭지도였다. 그러나 논술첨삭지도를 통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였다. 페이를 밀고 밀다 주지 않으려는 출판사 때문에 나는 또다른 방황을 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가 얘기해서 받아내긴 했지만, 또다른 악몽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지만, 그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라 생략한다. 그 어떤 일이 난 후, 나는 편집다자이너가 되었다. 친척 중에 아는 분이 있어서, 편집에 대해서 배우면서, 40만원 월급을 받으면서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때가 2000년도가 다 된 시점이었는데, 40만원은 월급이라기보다는 용돈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너무 적은 돈이었지만, 그냥 다녔다. 그리고 그곳을 1년 넘게 다니다가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낙하산으로 살아가기 싫었다. 후회할 것 같았지만, 낙하산으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월급도 작았다. 서러웠고 내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그곳을 떠났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취업할 곳이 없었다. 현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암담한 현실이었다. 갈 곳이라도 마련해두고 그만둘 걸 하는 후회가 계속 밀려왔다.
그 시절, 나는 어렸을 때부터 꾸어왔던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편집디자이너 일을 그만두면서 꿈꾸었던 일이 카피라이터였다.
카피라이타거 되기 위해 학원을 다녔다. 부모님께서 학원비를 내 주셨다. 그리고 카피라이터가 정말로 되었다. 그러나 한달도 채 되지 않아서 나는 그만두어야 했다. 사장은 나를 부르더니,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삶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카피라이터일하고는 인연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방황을 했다. 영화를 보러 갔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극장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다. 그 분이 어떤 일을 같이 해보자고 하였다. 나는 얘기를 듣고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돈이 없고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였다. 그 분께서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고, 나는 그때부터 배급사의 입회인 일자리를 몇 년 동안 하게 되었다.
그분과는 어떤 일로 인해 연락을 끊었다. 어떤 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어느 순간에 내게도 교만이 자리잡았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을 매정하게 몰아내었다. 주변의 말에 흔들리고, 또 순간적으로 내가 사람을 평가하였다. 그렇게 그분께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입회인 일자리는 몇 년 동안 더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에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회인 일자리는 그만두게 되었다.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2~3년 정도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결국 너무 힘들어서 포기했다. 그리고 상담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상담대학원을 가면, 학비를 내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그러겠다고 했다.
입회인을 하면서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돈이 조금 있었다. 그 돈으로 생활하면서 상담대학원 시절까지 보냈다. 그리고 대학원 때 조교를 잠깐 했었다. 조교를 하던 당시, 나는 이것저것 너무 많은 걸 했다. 그리고 또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어서, 병원에 입원할 뻔 했지만, 병원입원은 하지 않고 휴학을 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대학원을 졸업하니, 또 갈 곳이 없었다. 갖고 있던 돈도 거의 다 떨어져갔다. 찾아보니, 영업교사직이 있었다. 지원했다.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조차 쉽지 않았다. 영업실적에 따라 페이를 받는 구조인데, 몇 개월 지나니, 한달 급여로 받을 수 있는 돈이 30여만원이 겨우 되었다.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일을 알아보았다.
어느 교회의 출판사에서 직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절실하게 이력서를 썼고, 면접 역시 절실하게 보았다. 너무너무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교회 출판사의 직원이 되었다.
교회 출판사 일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여기에서 정직원까지 되면, 나는 먹고 사는 데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또 그 일이 닥쳤다. 결국 병원에 또 입원해야만 했다. 두달여를 보냈다. 퇴원하자, 나는 어느 덧 짤려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교회 출판사에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변화에 유유히 스며들 수 없었다. 출판사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오전에 자원봉사를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했다. 점심식사 한끼라도 내게는 정말 큰 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또다시 그 일이 생겼다. 나는 또 입원을 했다. 이번에 꽤 긴 기간을 입원했다.
병원 사회복지사가 퇴원하면 공공기관의 공공일자리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라고 하였다. 자활근로를 할 수 있었다. 약 10여개월 정도 한 것 같다. 공공근로라는 게 있다는 걸, 자활근로하시는 분이 알려주었다. 자활근로가 너무 힘들어서 공공근로를 신청하였다.
공공근로가 될지 안 될지 몰랐다. 그런데, 나는 자활근로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만두고 공공근로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공공근로 직업상담사가 되었다. 내 직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이상했다. 공공근로 직업상담사로 1년여를 일했다. 공공근로는 5개월이나 6개월인데, 두 번이 연속으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공공근로를 쉬어야 했다. 공공근로 하면서 공무원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면서 몇 번 시험을 보았지만, 내게 공무원 시험도 공무원 공부도 너무도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다.
또 공공근로가 되었다. 이번에는 장애인직업재활센터에 배치가 되었다. 직업상담사로 일할 때는 너무도 힘들어서, 장애인직접재활센터에 일하는 것은 힘들지만 힘들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힘든 게 없어서 할 만했다. 비록,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장애인직업재활센터 (발달장애인이 있는),에서 1년 정도 그리고 정신장애인직업재활센터에서 6개월 정도, 또 그 다음에는 뉴딜일자리로 장애인직업재활센터 (발달장애인이 있는)에서 또 1년여 정도를 보냈다.
그리고 쉴 때마다 나를 도와준 건, 실업급여였다. 실업급여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의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업급여는 내게 너무도 소중한 자산이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는 내게 한줄기 희망이었다.
뉴딜일자리가 끝나고 또 실업급여를 받았고, 그 다음에 공공근로를 했다. 그 공공근로가 내가 한 마지막 사회의 일자리였다. 하천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이 공공근로를 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고, 나는 그 이후로 일을 할 수 없었다.
자활근로를 하면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자리도 며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때, 방송사에서 박수 치는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또한, CF엑스트라, 드라마 엑스트라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역시 대학교 때 선거를 위해서 글씨를 써주는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내가 봐서 글자를 뺴도 된다고 해서, 이것저것 많이 뺐더니 중요한 걸 빼먹었다면서 그만 쓰라고 해서, 결국은 알바를 그만두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친구한테 써 달라고 해서, 내가 받은 돈에서 조금 떼어주고 친구에게 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친구를 이용해 먹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솔직히 얼마 받는 거냐고 말하라고 해서 솔직히 말하였고 그렇게 알바는 끝났다. 그 친구는 완근이였고,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내가 미처 얘기하지 못한 내가 했던 일이 더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정말 많은 직업을 가져야 했다. 이력서는 정말 많이 넣었고, 면접도 정말 많이 보러 다녔다. 그렇게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일은 언제나 긴장되고 힘들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다니는 동안 인격수양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느라 급급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시절들에 나는 착하지 않았고, 인품이 좋지 않았고, 인격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서 나의 인품이나 인격을 좋다고 평가받을 만큼 성숙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을. 내 스스로가 인격이나 인품이 좋지 않더라도. 텔레레터상의 나의 인격이나 인품이 어떤지에 대해서. 텔레레터상의 인격이나 인품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나는 사람이고, 실제로 나란 사람은 인격이나 인품이 좋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세월들은 그렇게 훌륭한 세월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들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 구하느라 몹시도 불행했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서 인격이나 인품에 대해서 얘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만, 나는 텔레레터란 능력이 있기에, 텔레레터상으로 인품이나 인격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내가 인격이나 인품에 대해 쓰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나같은 사람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앞날이 캄캄해서 방황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먹고 살 길 찾느라, 그래서 매일매일이 전쟁터인 삶을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나같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