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고상안(高尙顔)이란 분이 자신의 문집에 남긴 글이다.
총화(叢話)라는 제목으로 남긴 글중에서 인물품평이란 소제목으로 기록한 내용인 데,
전란중에 이충무공과 함께 일하면서 충무공의 주변에서 활약한 장수들에 대한 인물
평을 기록한 흥미로운 내용이다.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발간도서 중에서 고상안 선생 문집인 태촌집에서 인용
하였고, 번역은 조면희 선생의 저서 "우리 옛글 백가지"에서 인용하였다.
[人物品評/ 인물들에 대한 평가] - 고상안
李世勣簡選偏裨。必擇其狀貌豐厚者曰。(이세적간선편비。필택기상모후자왈)
薄命之人。不可與成功名。(박명지인。불가여성공명) 裴行儉曰。士當先器識而後文藝。
(배행검왈。사당선기식이후문예) 誠哉言乎。(성재언호)
옛날 당나라 장수 이세적은 부하 장수를 뽑을 때에 반드시 그 겉모양이 풍족한 사람을
가렸는 데, 이유인 즉 "겉보기에 박명한 사람은 공명을 함께 이룰 수 없다" 고 말하였다.
또한 역시 당나라 사람 배행검도 "사람은 반드시 그릇됨을 먼저 보고 그 사람의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하였는 데, 이 말은 진실로 그럴듯 하다.
甲午春。余以三嘉知縣。冒忝舟師試官。(갑오춘。여이삼가지현。모첨주사시관)
時李某爲統制使。元均爲嶺南右水使。(시이모위통제사。원균위영남우수사)
李億祺爲湖南右水使。具思稷爲湖西水使。(이억기위호남우수사。구사직위호서수사)
갑오년 (1594년, 선조 27년)에 내가 삼가현의 현령으로 있을 때에, 舟師(주사, 수군)를
뽑는 시험에 시험관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李某(이모 : 이순신)는 통제사였고, 원균은
영남우수사, 이억기는 호남우수사였으며, 구사직은 호서(충청)수사였다.
留連半月。察其爲人。(유연반월。찰기위인)
則元水使麤厲無謀。又失衆心。(직원수사추려무모。우실중심)
李水使浮虛不實。神不守舍。(이수사부허부실。신불수사)
異日或戰破。或短折。(이일혹전파。혹단절)
惟具水使稍沈靜。至今無恙。壽福兼全。(유구수사초침정。지금무양。수복겸전)
이분들과 함께 보름 정도 있는 동안에 그들의 사람됨을 관찰하였다.
원수사(원균)는 성격이 거친데다가 지모가 적고 또 여러사람에게 인심을 못얻었으며,
이수사(이억기)는 과장되어 실속이 모자라므로 늘 정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러더니
훗날에 한 사람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 한 사람은 일찍 죽었다. 오직 구수사(구사직)
만이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잘 있으니, 壽(수)와 福(복)을 겸한 장수라고 하겠다.
統制則以同年之故。同處累日。(통제직이동년지고。동처누일)
其言論術智。固是撥亂之才。(기언론술지。고시발란지재)
而容不豐厚。相又褰唇。(이용불풍후。상우건순)
私心以爲非福將也。(사심이위비복장야)
그리고 나와 동갑인 이순신 통제사와 함께 여러 날을 생활해 보았는데, 말솜씨나 지혜로
보아 참으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질을 가졌다. 그러나 그 용모가 풍부하지 못하고, 관상
으로 볼 때에 그 입술이 말려 있어, 내 속 짐작으로 福將(복장/복이 많은 장수)은 되지 못하
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는 데
不幸有拿鞫之命。雖得復用。(불행유나국지명。수득복용)
而纔過朞年。又中飛丸。(이재과기년。우중비환)
不得考終。可勝歎哉。(부득고종。가승탄재)
과연 불행하게도 뒷날 나라에 붙잡혀 가서 문초당하는 형벌을 받았고, 그 뒤에 다시 기용
되었으나 겨우 일년 만에 적군의 탄환을 맞아 쓰러졌으니, 考終命(고종명/천수를 누림)을
하지 못하였음이 한탄스럽다.
雖然。身死之日。規畵軍機。(수연。신사지일。규화군기)
以死統制。走生行長。少雪國恥。(이사통제。주생행장。소설국치)
功紀太常。名流萬古。死而不死也。(공기태상。명류만고。사이불사야)
其視元,李諸輩。豈可同日語哉。(기시원, 이제배。기가동일어재)
그러나 몸은 비록 죽었더라도 軍機(군기/군사상의 기밀)를 잘 이용해, 마치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 버리듯 죽은 통제사가 산 소서행장을 쫓아버려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갚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 통제사의 공은 역사에 길이 빛나고 그의 이름은 만고에 전할 것이니 이는
가히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저 원수사나 이수사 같은 이의 공과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지은이 소개>
고상안(高尙顔 / 1553-1627), 자는 思勿(사물), 호는 泰村(태촌), 본관은 開城(개성)이다.
1576년 회시에 급제 후에 함창현감, 지례현감, 울산판관, 풍기군수 등의 지방관을 많이 역임
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활동하다.
권율 도원수의 명을 받아 삼가현감으로 재임 시 통제영에 나아가, 수군을 모집하는 시험에
시관(試官)으로 참여하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참고사항>
위 본문에 '동년지고(同年之故)' 라는 표현이 있는데, 고상안 선생은 출생 연도로는 충무공에
비해서 8세가 연하(年下)이신 분이다. 다만, 과거급제 연도가 1576년으로 문과와 무과로 나뉘
어서 두분이 각각 급제하였기에 이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