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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장 예수의 십자가 수난 전 ․ 후의 사건들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21장에서 시작하여 본장까지 계속돼 온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에 있었던 사건들을 보도하는 일련기사의 종결부분이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은 구속사(救贖史)의 절정인 십자가 수난을 통한 예수의 구속 사역의 성취를 보도한다. 하나님이 태초 아담의 범죄 이후 세워주신 구속의 법이 이제 본장에 보도된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되어 우리 죄인들이 구원 받기 위한 법적 요구가 충족되게 되었다. 이처럼 구속사의 절정인 십자가 수난(the Crucifixion) 사건 전·후를 보여 주는 본장의 기사를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2절은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당시에 처형권이 없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당시의 로마 총독인 빌라도(the Pilate)에게 이첩시킨 사실을 보도한다. 그리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처형에는 타락한 구약 선민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당시의 세계의 제패자였던 로마 정부가 동참하게 되었다. 이는 사단(the Satan)이 그야말로 모든 동원 수단을 가동시켜 예수를 죽이도록 획책하였음을 보여 준다.
3-10절은 일시의 탐욕과 오판으로 예수를 배반했던 가룟 유다의 비참한 자살 장면의 보도이다. 더욱이 이는 저자 마태가 강조한 대로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다. 이로 볼 때 주의 수난은 우연한 것이거나 아니면 주께서 힘이 없으셔서 졸지에 당한 사건이 아니라 그 세부 진행까지 다 아시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하신 계획된 구속사역이었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한편 가룟 유다의 자살은 유일한 구속주 예수를 부인한 자는 마침내 자신의 양심과 전 우주적 심판으로 영원히 저주받을 수밖에 없음을 예표해 준다.
11-26절은 당시 유대의 로마 총독이던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소극적으로나마 예수를 풀어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부득이 예수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 기사가 보도된다. 구속사의 실체를 바로 깨달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 위에 바로 서지 않는 자는 이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단의 갖은 유혹과 술수에 말려 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는 주님을 반역하는 자의 무리에 가담하게 되고 마침내 저주받는 자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음을 빌라도의 경우가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27-31절은 만왕의 왕이신 주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기 전에 로마의 포악한 병정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시는 장면이다. 이는 우리 추악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제 2위 성자(聖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가지신 겸손과 인내가 그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반증해 주는 장면이다. 실로 구속사는 냉철한 원리 및 준엄한 법과 아울러 놀라운 성부, 성자, 성령의 뜨거운 사랑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32-44절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모독한 범죄를 보도하고 있다. 처형자들은 예수의 죄패(罪牌)에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하였다. 그들은 모르고 이렇게 하였지만 참으로 주님은 참 유대인 곧 하나님이 택한 영적 선민(選民)에게 구속을 주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바로 주님께서 이를 주장하시는 것을 독신이요 반란으로 몰아서 주님을 처형했지만 사실 주님은 훗날 부활 승천하셔서 자신이 참 유대인의 왕이심을 입증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 끝날 자신의 왕권을 전우주적으로 발휘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위에 매달은 죄패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무지와 모독 그리고 사단의 갖은 책략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주권을 보여준다. 한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의 옷을 나누며 주를 조롱하던 자들의 행태는 주의 죽음이 실제로 죄가 있거나 힘이 없어 이 수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하시는 구속 수난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인 동시에 무고한 죽음을 당하는 의인의 죽음을 조롱하는 악한 행위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영적으로는 그 옛날 스스로 타락한 후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한 사단(the Satan)이 이제는 아예 하나님의 아들 자체를 죽이려고 하는 범죄에 동참한 구속사적 범죄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처럼 어리석고 악한 행동은 잠시 후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야말로 구속사적 범죄요 어리석은 도전에 불과 하였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사단은 겨우 여자의 후손 곧 성육신한 예수의 발뒤꿈치를 문 것에 불과했지만 예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머리를 쳐서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할 것이라던 태초의 예언(창 3:15)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세상 끝날 마침내 최종 실현될 것이다. 한편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그 결과 도래할 천국 구원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이들도 그 옛날 예수를 못 박은 유대인들의 행동이 범죄요 어리석은 소행임이 곧 판명되었듯이 세상 끝날 그 어리석음과 악함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다음 45-56절은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위한 수난을 마치시고 마침내 운명하신 사건을 보도한다. 그리고 이에 동반하여 주의 수난이 메시야로서의 구속사역의 성취였음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징조들이 동원되어서, 심지어 예수 처형의 책임자였던 로마 백부장까지도 자신도 모르게 방금 처형된 예수가 신성을 가진 존재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이 보도된다. 결국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의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앞에 위치하여 죄로 오염된 인간과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을 상징하던 지성소 휘장(the Curtain)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차단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의 능동적인 구속사역으로 그 죄가 해결됨으로써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결과로 창조 당시의 원래의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신 구속사적 증표였다. 또한 역으로 그 수많은 양의 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괴리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제거된 것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전 시대의 모든 택한 자들의 구속을 위한 유일하고 영원한 어린 양으로서의 수난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결국 이 임종기사의 보도는 실로 예수의 죽음이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비되고 성취된 메시야로서의 구속사역의 성취로서의 죽음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마지막 단락인 57-66절은 예수의 장례기사와 그의 무덤을 유대 지도자들의 청탁으로 로마 병정들이 경비하게 된 과정을 보도한다. 이는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임종하여 묻히기까지 하신 완전한 죽음임을 보여 준다. 동시에 로마의 병정들이 경비까지 한 것은 다음 장에 나타나듯이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일부 주의 부활을 반대하는 자들의 거짓 소문처럼 주의 부활이 주님의 시신을 다른 곳에 숨겨 두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는 증거 구절이 된다. 어쨌든 예수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 만들려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지도자들의 최후의 발악도 무위로 돌아가고 주님은 부활하셨으며 이를 경비까지 시킨 그들의 소행은 역으로 부활(復活)의 진정성을 확인시켜주는 근거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상의 본장을 결론적으로 요약할 때 우리는 주의 십자가 처형(the Crucifixion)은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정부의 결탁에 의한 무고하고 처절한 수난이었으며 그 처형의 과정은 이미 예언된 말씀대로 진행된 것으로서 당시의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자의 종말처럼 보였으나 실은 택한 죄인을 구하시기 위한 구속사역의 성취로서 오히려 이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참되고 영원한 구주가 되기 위한 구속주로서의 잠시의 희생으로서 오히려 영원한 승리와 평화의 시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상의 개관 이외에도 우리는 실로 구속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주의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 자체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은 이해가 요청되는 바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에 상술하였다.
외울 말씀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가룟 유다의 죽음
3 ○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빌라도의 예수 심문
11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시도
15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매 맞고 조롱당하신 예수
27 ○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32 ○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의 수욕과 십자가 상의 고난 및 임종
45 ○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임종 시에 나타난 기이한 이적과 목격자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의 장사와 파수꾼의 배치
57 ○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66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본문 & 자료 노트
주요 주제-27:1,2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연구자료 참조
인물 연구-27:2 빌라도
본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27:3-10 본서에만 나오는 기사들
다음 도표의 기사들은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다. 여기 기록되어 있는 기사 외에 본서에만 나오는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는 본서 25:1-13 보감을 참조하라.
1. 예수가 요셉의 아들로 나심(1:16)
2. 동방박사의 방문(2:1-12)
3. 애굽으로의 피난(2:13-15)
4. 헤롯의 유아 살해 사건(2:16-18)
5. 예수의 나사렛 귀환(2:19-23)
6. 세례요한의 바리새인 책망 기사(3:7)
7. 산상수훈(5-7장)
8. 두 소경을 치료하심(9:27-31)
9.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9:32,33)
10. 그리스도의 초대(11:28-30)
11. 예루살렘에서 병인 치유(14:14)
12. 물 위를 걷는 베드로(14:28-31)
13. 고기에게서 나온 세금(17:27)
14. 바리새인들에 대한 공개적 책망(23장)
15. 예수를 판 금액(26:15)
16. 은 30의 반환(27:3-10)
17. 빌라도 부인의 꿈(27:19)
18. 성도들의 부활(27:52)
19. 무덤을 지킨 로마 군병(27:64)
20. 예수 부활시의 지진(28:2)
21. 군병들 매수 기사(28:11-15)
22. 예수의 지상 명령(28:18-20)
주요 주제-27:1-66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의 이해
사실 이 문제에 앞서 우리는 이보다 더 폭넓은 주제인 주님의 성육신 수난을 통한 구속의 필연성을 다룰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를 굳이 성육신하게 하시고 또 주님 자신은 흠도, 죄도 없는 절대 순결한 분으로서 택한 죄인을 위하여 희생하사 수난을 당하여 죽게 하시고 이를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방식으로만 인간을 구원하시는 섭리, 곧 구속의 설리의 필연성내지는 원리에 대해 다를 필요가 있다. 이는 막 10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면서도 태초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리 자범죄로 오열되어 스스로는 정결케 될 능력을 절대 상실한 인간을 위하여서는 구속의 법이 필요하고 또 구속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의 자격을 가진 분은 당신밖에 없으셨으므로 본래 제 2의 하나님이셨던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필연성이 있었다는 점은 전제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면 구속사역을 성취시키는 방법으로 주님은 왜 십자가 수난을 택하였는가? 혹시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예수님은 단지 도덕적으로 교결한 혁명가였으나 정치적으로 실패하여 처형당한 것에 불과한데 후대에 신학적으로 미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등등의 물음이 그것이다.
이런 류의 물음 곧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진정 죄인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하는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이순간도 세상불신자들은 물론 주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기독인 (基督人)을 자칭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예시야로서 구속의 법을 성취하기 위한 축음이 아니라 도덕적 이상주의자 또는 정치 혁명가의 죽음으로 규정하기 때문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록 왜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이 있을수도 있는데도 굳이십자가 처형으로 주님의 구속사역을 성취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님의 십자가 수난이 구속사역의 성취를 위한 희생 대속의 죽음이었음은 다음의 사실들의 분석을 통하여 충분히 확인될 수 있다.
1. 구약 예언의 능동적 성취로서의 예수의 십자가 수난
먼저 십자가 수난은 그저 우연한 사건이거나 아니면 주께서 힘이 없으셔서 또는 이를 몰랐다가 순식간에 당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십자가 처형 전후의 세세한 과정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으며 그 예언들은 주의 십자가 수난 과정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었다(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참조). 심지어 예수 자신이 십자가 수난 전에 이를 전 4회(마 16:21; 20:19; 26:2)에 걸쳐서 나아가 그 수난 이후의 부활까지도 직접 예언하셨었다. 어느 한 사건이 있기 전에 그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고 또 그것이 후에 그대로 성취되면 우리는 그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가진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예언을 준 당사자는 역사를 초월한 예지를 가진 존재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이처럼 구약과 주님 자신의 예언의 성취로 십자가 수난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결국 그 수난 사건은 하나님에 의하여 태초부터 계획된 신적 사건이며 또한 예수님은 실로 무력하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이를 미리 아시고도 스스로 당하신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결국 예수 자신이 밝힌대로 십자가 수난 사건은 죄인을 위한 구속 희생 사역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2. 구속 원리 성취의 공의와 결정적 증거로서의 십자가 수난
십자가는 이미 로마 제국 이전부터 사형수에게 가해진 최고의 형벌이었다. 십자가형에 의하면 죄수는 단숨에 죽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극심한 고통과 모욕을 겪으며 서서히 죽는다. 한편 구약에서도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최고의 저주와 형벌을 가하는 방법이었다(눅 23장 자료노트 참조). 따라서 주님께서 구속 수난을 십자가형으로 당하신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대신하기 위하여 최고의 형을 당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 옛날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과 맺은 선악과의 언약을 어겼을 때 절대자로서 당신이 세운 법도 지키고 인간에게 그 죄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시면서도 인간 자체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자 곧 못난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예수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구속의 법을 세웠었다. 그런데 이제 주께서 구속을 위한 희생을 가장 처절한 십자가수난을 통해 성취시킨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의 엄정성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주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크신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동시에 깨닫게 해준다. 즉 주님은 구속 희생을 위하여 최고의 수난인 십자가 형을 당하심으로써 구속의 법에 담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다.
3.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산되는 계기로서의 십자가 수난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것은 로마 식민 정부였으나 근본적으로 그 동기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니라 구약선민이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부의 무지한 유대 민중들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 계시의 일부 내용만을 민족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곡해한 유대교의 오류에 빠져서 모든 구약의 언약과 예언의 성취로 오사 새 언약을 세우신 주님과 주가 주신 신약 복음을 거부하고 주를 종교적 이단자로 몰아 처형했다. 한편 로마 식민정부는 예수를 성가신 소정치 집단의 지도자으로 간주하여 그의 처형에 동조하고 말았다. 따라서 주의 축음은 표면적으로는 그야말로 실패한 종교 개혁자 또는 정치 혁명가의 죽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의 수난 뒤에 이어진 사건들, 주의 역사적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들의 약속대로 성취될 세상 종말의 심판과 천국의 개시 등 일련의 사건을 열두에 두지 않은 속단이다.
주의 죽음은 이미 태초부터 계획된 일련의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의 성취과정이었지 결코 그 종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인의 예수 배척으로 인한 주의 죽음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복음의 이방인에로의 확산을 돕는 계기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부패한 로마 정부도 끝내는 부활한 예수를 믿는 초대성도들의 신앙의 힘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즉 후대의 역사를 살펴볼 때 로마제국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는 처형하였으나 더욱 멀리 확산되는 주님의 복음의 힘 앞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볼때 주님의 십자가 수난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던 사단이 그 옛날 아담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게 한 것처럼 어리석은 인간들을 사주하여 하나님께 도전한 사건으로서 이미 태초부터 예언된 바 주님의 발뒤꿈치를 문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당장에는 주님이 실패하고 죽는 것처럼 보였으나 부활하여 이를 이기고 오히려 주의 복음이 더욱 확산된 반면 사단은 마침내 패하여 심판받게 되는 자리까지 몰고 가셔서 그 역시 태초에 예언된 대로 주께서 사단의 머리를 치셨기 때문이다(창 3:15)
이상을 종합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이 혹자의 오해처럼 단순한 일부지역의 정치,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구속사역의 성취로서의 수난이었음을 결론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인물연구-27:3-5, 가룟 유다
마 26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27:9,10 예수를 중심한 성경의 통일성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이즈' 참조
삽화-27:19, 재판석
당시 예루살렘의 로마 총독 관저 앞에 마련된 재판석도 이와 같은 것일 것으로 추측된다.
지도-27:32 구레네의 위치
원어 연구-27:39,41,44 모욕하다, 희롱하다, 욕하다
'모욕하다', '희롱하다', '욕하다'의 이 세 단어는 십자가상에서 수난 당하신 예수에 대한 인간들의 불의한 태도를 잘 묘사하고 있다.
먼저 39절의 '모욕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블라스페메오'( )이다. 이 용어는 '방해하다', '해를 끼치다'라는 뜻의 동사 '블랍토'( )와 '말하다', '증언하다'라는 뜻의 동사 '페미'( )가 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본 의미는 '다른 사람에 대해 해 끼치는 말을 하다'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동사는 주로 '훼방하다'(막 3:28; 계 13:6), '비방하다'(고전 4:13; 벧전 4:4)로 번역되었다. 이 외에 이 단어는 '경멸하는 말로써 하나님이나 신성한 것에게 돌려져야 할 경외심의 부족을 의도적으로 나타내 보이다'라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이런 경우에 이 단어는 '참람하다'(마 9:3)로 번역된다. 무지한 군중들은 십자가 위의 예수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에게 불경스러운 욕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희롱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파이조'( )는 '파이조'( )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파이조'는 '소년' 혹은 '노예'를 의미하는 '파이스'( )에서 유래하였으므로 '파이조'의 일차적인 의미는(소년처럼) '뛰놀다'이다(고전 10:7). 그러므로 '엠파이조'는 '소년이나 천한 노예들처럼 천박하게 장난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애가 장난하듯이 비하하여 대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욕하다'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오네이디조'( )는 70인 역본(LXX)에서 히브리어 '하라프'( )의 역어로 '(욕설 따위로)나무라다', ‘비방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비방을 받기에 마땅한 강도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예수(벧전 1:19)를 감히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갖은 신성모독을 겪으셨고, 유치한 장난의 대상이 되셨으며, 죄 없이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그 모든 수욕(羞辱)을 참으셨다. 이 얼마나 크신 사랑인가!
지리 배경-27:33, 골고다.
막 15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27:45-50 십자가 수난의 시각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이즈' 참조
도표-27:55,56 예수를 섬긴 여인들
예수 당시 여인들은 사회적으로 크게 경시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게 된 여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록 남성들처럼 적극적이고 크게 주님을 섬기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의 주위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음을 성경은 보도하고 있다. 이는 영적으로 누구나 자신의 힘과 환경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주님께서 그 결과가 아니라 그 동기와 과정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제 예수를 섬겼던 여인들을 도표로 알아보자.
1. 주의 모친 마리아(마 1:18-25)
2.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마 27:56)
3. 살로메(막 15:40; 16:1)
4. 막달라 마리아(막 16:9)
5. 구사의 아내 요안나(눅 8:3)
6. 수산나(눅 8:3)
7. 가난한 과부(눅 21:1-4)
8. 마르다와 마리아(요 11:1)
도표-27:57-61 예수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예수 시리이즈' 참조
도표-27:27-44 예수의 수난에 대한 성경의 묘사
1. 주먹으로 맞으심(마 26:67)
2. 침 뱉음을 받으심(마 26:67)
3. 재판 받으심(마 27:11-26)
4. 동족에게 버림받으심(마 27:25,26)
5. 채찍질 당하심(마 27:26)
6. 옷 벗김을 당하심(마 27:28)
7. 머리를 맞으심(마 27:30)
8. 희롱 당하심(마 27:31)
9. 십자가에 박히심(마 27:35)
10. 옷을 제비 뽑히심(마 27:35)
11. 눈이 가리워지심(눅 22:64)
12. 손으로 맞으심(요 18:22)
풍습-27:27-50 로마 시대의 십자가형
눅 23장 자료노트 참조
풍습-27:59,60 히브리인들의 무덤의 형태
왕하 13장 자료노트 참조
27:1-10 가룟 유다의 자살
본문은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가롯 유다의 자살 사건은 산헤드린이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처형하기로 결의하고(마 26:57-68) 합법적인 사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이송한 니산월 13일 아침에 있었다(1,2절).
그런데 본문은 가룟 유다의 자살이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판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3-5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전혀 죄가 없으셨으나 불의한 자들의 악한 궤계로 잡히셨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특별히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은 본서의 독특한 기록인데 마태가 이러한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을 산헤드린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기사(1,2절)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기사(11-26절) 사이에 언급한 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사형 결정이 허위와 조작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가룟 유다의 자살은 전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마 26:69-75) 장면과 대비를 이루는 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진실로 회개하지 못하고 또다시 중대한 죄를 범한 가롯 유다의 어리석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편 가룟 유다는 죽기 전에 예수를 팔고 받은 은 삼십을 성전에 던져 넣음으로써 자신의 죄책을 벗어나고자 했는데(5절) 대제사장들은 이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이는 슥 11:13의 예언의 성취였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아무리 자신의 죄악을 후회하더라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사죄의 은총을 간구하지 않으면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뒤늦게나마 가룟 유다가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자괴(自愧)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저 인간적인 후회에 머물고 말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설혹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무지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수 없는 죄악이라 할지라도 오직 참된 회개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신다(요일 1:9).
② 어떤 이유에서든지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이다. 만약 가룟 유다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악을 참회하기 원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보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택해야만 옳았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결코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어떠한 명목으로도 경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대상이다. 오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분이시다.
27:1 새벽에. - 니산월 13일 아침이다. 즉 공회의 정식회의는 낮에 모여야 정당성을 부여받으므로 이들은 해가 떠오를 때를 기다렸다가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 것이다(마 26:57 주석 참조).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 예수님을 죽일 죄목도 없었지만 겨우 찾아낸 불경 죄목(마 26:65) 역시 로마 총독 앞에서는 예수를 고소하기에 불충분한 죄목이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를 고소할 만한 정치적 죄목을 찾기 위해 의논했을 것이다.
27:2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 유대의 최고 의결 기구이자 재판 기구였던 산헤드린은 사형 결정권은 있었으나 그 집행은 로마 정부에 있었다.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수를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 준 것이다. 한편 빌라도의 정식 이름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이며, 당시 그의 직책은 로마의 유대 파견 '총독'(에피트로포스)이었다. 이 빌라도는 유대 지방의 제 6대 총독이며 디베료(Tiberius)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그의 치하에서 10년 동안(A.D. 26-36년) 재임했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본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27:3 때에. - 마태가 내용을 전환할 때 자주 사용하는 시간 부사이다. 여기서 '때'란 아마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확정한 직후일 것이다.
그의 정죄됨을 보고. - 이 구절을 볼 때 가룟 유다는 예수의 재판 과정을 다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스로 뉘우쳐. - 여기서 '뉘우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멜레데이스'( )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행동에 대해 뉘우치는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마음과 삶의 전적인 변화를 뜻하는 '회개'(메타노에인)와는 구별된다. 즉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라 단지 스승을 팔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는 정도에서 머무른 것이다. 뉘우치는 것은 분명 회개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삶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뉘우침은 회개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여튼 가룟 유다가 스스로 뉘우쳤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자기 스승을 팖으로써 자기 스승이 사형을 당하리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거나 물욕에 눈이 어두워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혹자들은 유다가 돈을 탐했다기보다는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 배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Liverals). 그러나 이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바 만일 그렇다면 유다는 끝까지 그 기대를 단념하지 않았을 것이며 후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가 선을 위해 악을 행했다는 이러한 주장들은 역설이다. 아무튼 유다의 동기는 주님의 말씀대로(마 26:24) 불경한 동기였으며, 주님이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기록된 예언의 성취이다.
은 삼십을…도로 갖다 주며. -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자신의 범죄의 증거인 은 삼십(마 26:15)을 되돌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그의 행위는 이미 그와 상관없이 진행되어 갔고 그 죄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27:4 내가…죄를 범하였도다. - 이 고백의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범죄하고 있는 자들의 우두머리들에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영적 '회개'가 아닌 양심의 '가책'에서 기인한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죄한 피. - '피'란 본래 '생명'과 동일한 용어이다(레 17:4). 따라서 이는 '무죄한 생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 '무죄한 피를 판 죄를 네 스스로 당하라'라는 뜻으로, 냉혹한 결별의 선언이다. 즉 배신자 유다는 예수를 죽이는데 공모자요, 동료였던 자들에게 뼈아픈 배신을 당한 것이다.
27:5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 여기서 '성소'(나오스)에 대해서는 그것이 성전 구내라는 견해와(Bleek),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라는(Weiss, Carr)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후설을 택하고 있다. 즉 양심의 가책을 받은 유다는 어떻게든 죄악의 무거운 짐을 벗어보고자 율법의 규례도 무시한 채 성소에까지 들어가 은 삼십이 든 돈주머니를 던져 넣은 것이다.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가룟 유다는 성전을 떠나 어디론가 미친듯이 달려가 살인자라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메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유다는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 죽었다고 한다(행 1:18). 이것은 아마도 목을 맨 후 떨어져 어디에 부딪혔거나 수레바퀴에 치어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하튼 유다는 '제 곳으로 갔다'(행 1:25). 참조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다윗을 배반한 아히도벨도 목매어 죽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삼하 17:23).
27:6 피값. - 사람을 팔아 살인한 대가로 얻은 돈, 즉 '예수의 피'(4절)를 팔아 얻은 돈이라는 뜻이다.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 신 23:18에 근거한 말이다. 즉 제사장들은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못한다는 율법의 규례에 따라 그들의 헌금을 돌려주거나 혹은 사회적 자선으로 운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결정한 것은 결국 그들의 행위가 옳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무죄한 피로 자신들의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었다(Bengel), 한편 여기서 '성전고'(고르바나스)는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을 보관하는 곳이었다(막 7:11).
27:7 토기장이의 밭. -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 힌놈의 골짜기 언덕에 위치했으며 '악한 회의의 언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웠다고 한다(WIliams). 이곳은 아마도 토기장들이 점토를 파다가 점토가 바닥이 나자 폐지(廢地)한 곳일 것으로 여겨진다 (Grotius). 사실 폐지가 아니라면 은 삼십으로 살만한 땅은 없다. 어쨌든 이것으로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슥 11:12,13).
나그네의 묘지. - 여기서 '나그네'는 이방인 개종자나 타지방에 사는 유대인을 의미할 것이다(Car, Bruce).
27:8 오늘날까지. - 이 말의 직접적 의미는 유다의 죽음으로부터 본서가 기록된 그 때까지로, 이는 유다의 자살과 본서가 기록된 시점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유다의 자살 사건은 A.D. 30년에 있었고, 본서는 적어도 A.D. 50년 이후 A.D.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을 보다 참조하라.
피밭. - 아람어로 '아겔다마'로 '피의 땅'이라는 뜻인데, 이와 같이 불린 이유에 대해서 행 1:19은 유다의 피가 거기에 흘려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가룟 유다는 토기장이의 밭에서 자살했거나 아니면 그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본절에서 토기장이의 밭이 '피밭'으로 불린 근본 이유는 예수의 피 값으로 샀기 때문이다.
27:9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 예레미야서에 토기장이 비유가 나오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는 예레미야가 아니라 슥 11:12,13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이 '스가랴'를 '예레미야'로 표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① '예레미야'란 이름을 후대의 사본 기자들이 삽입했다. ② 렘 18:3 또는 렘 32:8-14의 인용이다(Lange). ③ 예레미야서는 히브리 원전의 예언서를 대표한다. 따라서 스가랴를 예레미야라 했다(Lightfoot). ④ 저자는 슥 11:12,13과 예레미야의 단편들(렘 18:2-12; 19:1-5; 32:8-14)을 막연한 기억에 의존해 종합하여 인용했다(Meyer, Zahn, Bruce, Johnson). 이 가운데 ①은 시리아 역에는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빠져 있으나 다른 믿을 만한 사본에는 삽입되어 있어 의문점이 남으며, ②는 근거가 희박하고, ③은 예언서의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서이므로 타당성이 적다. 따라서 ④번의 견해가 가장 받아들일 만한 견해이다.
27:10 주께서 내게 명한 바와 같으니라. - 스가랴 11:13에 기록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27:11-26 빌라도의 예수 심문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사전 각본에 따라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적용하여 이미 사형을 결의했다(마 26:66). 하지만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비록 산헤드린 공회라 할지라도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이송시켜 합법적인 사형 선고를 받아내려 하였다(1,2절). 본문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빌라도에게 이송된 예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심문을 당하셨는데(11-14,15-26절), 첫 심문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다(11-14절). 때문에 그는 유대인의 명절 때 죄수를 특별 사면하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놓아주고자 했다(15절). 그래서 무리들로 하여금 바라바라고 하는 죄수와 예수 중 양자택일을 하도록 했는데(16,17절), 오히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았던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었다(20-23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개인적 호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즉 빌라도는 누구보다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지닌 음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지만(18절), 구태여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과 극단적인 갈등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으며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군중들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폭동을 우려하여(24절),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만 것이다(26절). 한편 본문 나타 군중 돌변한 모습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모습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모습으로(마 21:8,9), 변절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빌라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이다. 먼저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시키도록 내어 주면서도 유대 관습을 흉내내어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은 예수의 처형과는 무관한 것처럼 가장했다(24절).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자신이 무죄를 강조한다 해도 그가 예수의 무죄하심을 알고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주었다는 것은 공의를 집행해야 할 자로서 엄청난 죄악을 범한 것이 분명하다. 즉 그는 모든 불의한 자의 대표로 예수의 처형에 관여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무죄 결백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인 책임자로 규정되어 2,00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 저주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유대인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예수를 죽인 책임을 자신과 자손들이 떠 맡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25절). 이는 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역한 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바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A.D. 70년 예루살렘 멸망당시 110만이라는 엄청난 수가 학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무려 600만이라는 가히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수가 학살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불의와 거짓에 대해서는 단호히 배격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②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임을 깨닫고 자신의 권력을 일신상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진리를 드러내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③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불의의 값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27: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 2절에서 연속되는 내용이다. 즉 잠시 가룟 유다의 죽음이 삽입된 후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혔다(마 26:64). 그러나 총독 빌라도는 '왕'이냐는 정치적 용어로 묻고 있다. 아마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밝힌 자백은 종교적인 진술로서 로마법에는 저촉되지 않을 것이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빌라도에게 고소한 것 같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등식이 항상 성립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라는 말 대신에 정치적 용어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로 예수를 고소함으로써 총독을 자극하고자 한 것이다. 하여간 당시 로마 정부는 반란자나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자에게는 민감했으므로 이런 고소는 그럴듯하게 먹혀들어 갔을 것이며, 예수를 처형하기에 충분한 구실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네 말이 옳도다. - '네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쉬 레게이스)는 뜻으로 강한 긍정을 나타낸다. 이제까지 예수께서 스스로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적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요(마 2:2), 온 인류와 우주의 왕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로서의 왕임을 긍정하셨다. 그러나 빌라도가 의미하는 왕과 예수께서 의미하는 왕의 개념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전혀 상이한 개념이다(요 18:34-37). 즉 예수님의 왕의 개념은 창조주요 구세주로서의 왕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27:12 고소를 당하되. - 눅 23:2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고소한 내용은 반란 음모죄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는지라. - 예수께서는 항상 거짓 고소에는 침묵하셨다(마 26:62,63; 요 19:9). 그리고 핵심적인 사실만 대답하셨다. 이는 의로운 피고의 초연한 자세이자 사 53:7의 성취라 할 수 있다.
27:13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 사 53장의 고난 받는 종처럼 묵묵히 아무 변론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께 빌라도는 자신에 대해 변론을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알맹이 없이 무수히 빗발쳐 오는 유대인들의 고소는 빌라도에게 조차 가증스러워 보였고,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리한 무엇을 제공하려 했던 것 같다.
27: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 제물이 되시기로 결심한 주님은 일언반구의 변론도 하지 않으셨다. 즉 주님은 빌라도의 일말의 호의도 마다하고(행 3:13), 묵묵히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대속 제물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간직하셨던 것이다.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빌라도는 자신이 보기에 무죄한 것 같고, 인품이 있어 보이는 예수께서 죽음을 앞에 두고도 동요함 없이, 일언반구 변론조차 하지 않자 매우 이상히 여겼다. 사실 포악하고 교활하며 자기이익에는 천하 누구보다도 눈을 밝혔던 이 로마인에게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기이히 보였던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한편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내어 재심을 요구한 사실이 나타난다(눅 23:6-13).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27:15 명절을 당하면. - 여기서의 명절은 분명히 유월절이다.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 -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이 전통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다만 바벨론 기원설, 마카비 시대 또는 그 이전 기원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로마의 식민 정책, 유대인의 고유 풍속설이 있다. 하지만 그 여러 기원설들이 어찌 됐든지 간에 당시 유대 총독들은 유월절에 많은 죄수 중 백성들이 요구하는 죄수 한 사람을 풀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Moule).
27:16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 - '바라바'(Barabbas)라는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인데, 이것을 '랍비의 아들'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일부 사본에 의하면 그는 우연하게도 '예수 바라바'라는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과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마태는 '예수바라바'와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고 명칭한 것으로 보인다(17절). 어쨌든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바라바는 유명한 반란자로 소요와 살인죄를 범한 것으로 나타난다(눅 23:19).
27:17 저희. - 여기서의 '저희'에는 예수님을 모해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포함된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였기 때문이다(막 15:11).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고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는지 백성들에게 물었다. 그는 아마도 양자택일을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그 양자 중 하나를 잔인하고 포악한 자인 바라 바로 내세움으로써 내심 예수를 놓아 주려고 의도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무리가 바라바를 원할리가 없다고 판단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는 당시 많은 사람에게 선한 선생으로 인식되었고, 바라바는 살인자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 주려 의도했다는 것은 다음 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27:18 이는 저가…이더라. - 이는 빌라도가 예수께는 전혀 죄가 없음과 예수는 단지 유대 교권주의 자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 고소당해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았다는 말이다. 정치의 권모술수와 그 이면을 누구보다도 잘 읽을 줄 아는 빌라도는 이 사건의 배경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저의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27: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 요한은 이 자리가 박석이라는 돌로 만든 재판 단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요 19:13). 빌라도는 어느 권위자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석에서 판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아내. - 외경 니고데모 복음서 2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클라(Claudia Procla)였으며, 유대교에 귀의하였고, 그리스도의 숨은 제자였다고 한다.
저 옳은 사람. - 거룩한 선지자나 메시야에게 사용되는 유대인의 관용어로, 이는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를 메시야나 적어도 거룩한 선지자로 알았음을 의미한다.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 그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빌라도의 아내는 '꿈'을 통해 불길한 징조를 예감했다. 한편 꿈을 강조하는 것은 마태복음의 한 특징이며(마 1:20; 2:13,19,22), 구약에서도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이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여자의 직관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마태는 이 사건을 유일하게 기록하여 삽입시킴으로써 예수님의 무죄를 강조하고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상을 더욱 표출시키고 있다.
27:20 무리를 권하여. -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충동질하였다. 역사를 보아도 사악한 위정자들은 항상 선동정치를 적절히 이용한다. 그리고 어리석고 줏대 없는 무리는 거기에 맥없이 끌려 다닌다.
바라바는 달라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 이 구절 속에서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백성의 설득을 위하여 바삐 뛰어 다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아무튼 그들은 '악한 자를 풀게하고 선한 자를 죽이자'라고 선동하고 있다. 기득권에 눈이 어두워 선악을 분별치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역사의 현장이다.
27:21 둘 중에 누구를…원하느냐. - 17절에 이어 다시 한 번 빌라도가 백성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 대한 악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예수를 살리려는 적극성도 없었다. 무죄인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위치를 염려해 선을 선이라 하지 않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그의 야비한 태도로 말미암아 빌라도는 손을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악한 모습은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그리스도인의입에 회자되고 있다.
27:22 그러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 빌라도는 아직도 예수를 놓아주고 싶다는 약간의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라바가 석방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 따라서 그는 지금 예수에게는 어떤 벌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백성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려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24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십자가 형은 로마가 가장 악독한 죄인에게 가하는 형벌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로마시대의 십자가 형'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러한 형벌에 처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형벌을 요청하는 군중들은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이었고 그 배후에는 사악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다(20절). 추측하건대 이 무리 속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를 읊었던(마 21:90)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악은 줏대 없고 어리석은 자들 속에 기생하는 법이다.
27:23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예수에게서 십자가 형에 처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의 반문이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빌라도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를 태형을 가하여 놓아 주겠다고 말했다(눅 23:22). 즉 빌라도는 지금까지도 예수를 어떻게든 놓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기회주의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백성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예수를 놓아 줄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은 못되었다.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 피를 원하는 흥분한 군중들의 함성은 우유부단한 빌라도의 태도에 힘입어 더욱 높아져 갔다. 빌라도의 기회주의적 양심은 군중들을 압도하거나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군중들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27:24 아무 효험도 없이. - 예수를 극형에 처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효험이 없음을 빌라도는 느꼈다. 결국 그는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나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타이'( )는 현재 시제로 '일어나고 있는'의 뜻이다. 이것은 군중의 동태가 막 민란을 일으킬 듯한 기세로 움직이고 있는 급박한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즉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악화시킬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아 그 예방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않되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손을 씻으며. - 신 21:6과 시 26:6을 보면 어떤 사람이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은 무관하다는 상징으로 손을 씻었다. 이처럼 빌라도도 자신이 예수를 죽이는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고 그 죄를 군중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은 것이다. 빌라도는 아마도 몇 년 동안의 유대 통치 과정에서 유대의 관습을 익혔던 것 같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 '예수의 죽음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본에는 본절의 '사람'이 '의인'으로 기록되어 있다(시내, 레기우스사본).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의로운 사람'인줄 알면서도 악인들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손 씻는 행위 하나로 공의를 수행해야 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죄악을 범한 것이다.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빌라도는 손 씻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죄책을 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하나님의 법에 의해 단죄되고 말았다.
27:25 백성이 다…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 본문의 기자는 '다'라는 용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인 죄가 유대 민족의 죄인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더욱 대담하게 자신들의 죄를 자랑이나 하듯이 자손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하여튼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의 대가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돌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그대로 성취되어 유대인들은 A.D.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인한 끔찍한 학살과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600만 명이 살해당하는 민족적 참변을 겪어야만 했다.
27:26 이에…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드디어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최종 결정권자가 되는 순간이다. 사실 빌라도는 특별하게 악한 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예수를 놓아 주기를 염원했던 자이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적인 그의 성격과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백성에게 굴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편 십자가에 달 죄인을 십자가에 달기 전에 채찍질하는 것은 로마 형벌의 한 관례였는데 이때 사용되었던 채찍은 끝이 갈라진 단단한 가죽으로 그 갈라진 끝에는 납이 달려 있어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이 채찍 형벌로만 죽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형 결정이 아직 나기도 전에 채찍질을 당하셨다(요 19:1-5). 따라서 판결이 끝난 후에 가하는 이 채찍 형은 생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7:27-31 조롱받으시는 예수
본문은 빌라도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11-26절)께서 로마 군병들의 손에 넘겨져 엄청난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께 왕들만이 입었던 홍포를 입히고(28절) 가시 면류관을 씌웠으며 홀(勞) 대신에 갈대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왕께 경배하는 흉내를 내었다(29절). 그런가 하면 그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돌아가며 예수의 머리를 쳤다(3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일체의 조롱과 멸시를 묵묵히 참고 견디셨다. 실로 만왕의 왕이시요 천지 만물의 주재자이신 성자 하나님은 인류 대속 사역을 위해 세상의 일개 군병들의 모욕까지도 참으신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사 3:3에 예언된 메시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할 것이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예수께서는 비록 그것이 조롱이라 할지라도 로마 군병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부터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를 받으신 것이다. 이것은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께 대한 경배(마 2:11)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는 분명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 앞에 경배할 때'(시 22:27)를 맞이하실 것에 대한전조였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께서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시며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의 발로였다(사 53:4,5). 따라서 성도들은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늘 생각하며 감사할 뿐 아니라 이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요 12:28).
② 성도들은 악인의 핍박을 받을 때 죄 없으신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을 위해 모든 모욕과 조롱까지도 참으신 것을 기억하고 끝까지 참고 인내함으로써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7:27 총독의 군병들이. - 총독은 사형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병정들에게 집행을 명령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이 병정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하며 희롱한다.
관정.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이토리온'( )은 '총독의 저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래 총독의 거주지는 가이사랴에 있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 이곳을 안토니아 성, 헤롯 궁, 장군의 천막, 로마의 지방 관청 등으로 보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안토니아 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Bruce, Williams, Johnson). 이 안토니아 성은 성전 서북 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유대 총독은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위해 부대를 거느리고 이 성에 와서 지내곤 했다.
온 군대. - 여기서 '군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이라'( )는 '군단'을 의미하는데 '영'(마 26:53,54)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보병 부대로 약 60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총독의 관저에 있던 군대를 예수를 놀리고 그것을 구경시키기 위해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군병들을 다 모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27:28 홍포. - 어떤 사람은 이 옷이 빌라도가 입던 옷(Carr), 또는 헤롯이 입던 옷(Elsner)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당시 붉은색 계통의 옷은 왕들만이 입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마 병사들은 지금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홍포를 입혔던 것이다.
27:29 가시 면류관. - 홍포에 어울리게 그들은 왕관도 만들어 주님의 머리에 씌웠다. 이것은 당시의 황제 디베료(Tiberius)가 썼던 빛나는 못들이 달려있는 면류관의 형태를 취해 만들어진 것이었음에 확실하다. 혹자는 이것이 고통을 줄 목적이 없었으므로 연한 가시로 만든 것(Meyer)이라고 하며, 또 다른 혹자는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꺾어 만든 것(Elicott)이라고 주장하나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분명히 팔레스틴 지방에서 손에 넣기 쉬운 흔한 가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시 면류관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워졌으나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 로마 황제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홀(勞) 대신에 병사들은 예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 왕 앞에서 무릎을 품듯이 병사들은 비웃으며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희롱했을 것이다.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아마도 병사들은 그들이 '황제 폐하 만세', '시이저 만세'를 외치듯이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이처럼 고난과 치욕을 받으시는 중에 주님은 그 치욕과 고난을 주는 자들로부터 비록 조롱이라 해도 유대인의 왕의 대접을 받고 있다. 예수께서는 언젠가는 이교도들로부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시 22:27)라는 말씀처럼 경배를 받으실 것인데, 이에 앞서 이가련하고 포악한 이방인들로부터 조롱으로 경배를 받고 계시는 것이다.
27:30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 이제 조롱과 멸시는 가혹한 폭력으로 변했다. 그들은 모욕의 상징인 침을 뱉고, 갈대를 도로 폐앗아 그것으로주님의 머리를 때렸다. 특별히 여기서 '치더라' 의 헬라어 '에튀프톤'( )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때리고 있었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병사들이 돌아가며 번갈아서 주님을 때렸음을 시사한다.
27:31 희롱을 다한 후. - 본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부정 과거형의 시제로 쓰였다. 따라서 본절은 중간에 있었던 일이 어느 정도 생략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사들의 예수께 대한 희롱이 어느 정도 계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병사들은 자신의 기분을 마음껏 풀었을 때에 희롱을 멈추었을 것이다.
도로 그의 옷을 입혀. - 병사들은 왕으로 조롱하려고 입혔던 홍포를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다시 입혔다. 이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 가진 옷(시 22:18; 요 19:23)으로 겉옷과 속옷을 다 포함한다. 대개는 벗기운 채로 십자가 형장까지 끌려갔으나 로마 병정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께 옷을 입혔고 그 일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각은 제 3시, 즉 오늘날의 오전 9시였다(막 15:25), 따라서 이 때는 오전 9시가 되기 이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이기 위한 악인들의 궤계가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형 집행은 성문 밖에서 행해졌다(민 15:35,36; 행 7:58). 히브리서 기자는 성문 밖 사형 집행의 의미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히 13:11,12), 한편 사형 집행은 본래 부 총독의 인솔 하에 전령들이 앞서서 판결문을 낭독하고, 죄수는 자기 형틀을 지고 걸었으며, 죄수 주위에 호위병이 있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행렬의 맨 뒤에서 뒤따랐다. 그러나 예수의 사형 집행 인솔자인 부 총독 릭토르(Lictor)가 예수 사형 집행의 인솔 명령을 거절해 이 때에는 백부장이 인솔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Williams).
27:32-49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본문은 로마 군병들에 의해 희롱당하기를 다하신 예수(27-31절)께서 드디어 골고다로 끌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38절). 즉 만왕의 왕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오히려 강도요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강도와 같이 취급을 받으신 것이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오전 아홉 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막 15:25) 오후 세 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을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45절).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또다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 그리고 심지어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에게 조차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다(39-44절). 실로 예수께서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고통까지 겪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인간들의 모욕이나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나마 성부 하나님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는 영적 고뇌였다(46절). 하지만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바치시기로 결심하신 예수께서는 모든 고난을 친히 감수하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한편 로마 군병들은 예수를 못 박기 전에 그에게 쓴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34절),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는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는데(35절), 이는 시 69:21과 시 22:18예언의 성취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구속사역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 가운데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교훈 받게 된다.
① 성도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마 16:24).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과 더불어 기꺼이 고난을 받고자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롬 8:7).
② 아무리 극심한 환란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할 때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육 간에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지만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심으로 잠시 고난을 겪으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던 것이다.
27:32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 해안 지방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의 위치에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이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막 15:21 주석을 참조하라.
억지로…십자가를 지웠더라. - 여기서 '억지로'란 '징발해서'란 뜻으로 행정적 강제력이 발동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적 체력이 소모된 주님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이 할 수 없이 대신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맡게 된 것은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큰 축복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은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처형되신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길은 오늘날 '비아 돌로롯사'(Via dolorossa), 곧 '고난의 길'이라 불리고 있다.
27:33 골고다. - '해골'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곳에서 처형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견해(Jerome, Harm)와 이 산 모양이 해골같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견해(Bengel, Carr)가 있으나 후자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곳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 '갈보리'는 골고다의 라틴어 음역이다. 한편 골고다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성묘 교회'터라는 견해와 '고든 갈보리'(Gordon's Calvary)라 불리는 곳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골고다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막 15장 자료노트 보다 참조하라.
27:34 쓸개탄 포도주. - 막 15:23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다. 몰약은 향의 일종으로 매우 쓰다. 또 '쓸개'(콜레)는 쓴 맛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던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몰약'이나 '쓸개'는 다같이 '쓰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포도주를 십자가 형을 당하는 자에게 주는 것은 하나의 관례화된 일로 죄수들의 고통을 감소시켜주는 일종의 마취제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쓴 포도주를 맛보시고 이내 그것을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단지 그 맛이 쓰기 때문은 아니었다. 즉 예수께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써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 곧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이루고(마 26:29), 대신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내리신 '잔'(마 20:22; 요18:11)을 회피하지 않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시고자 하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에 굴복하여 포도주를 마시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여 담대하게 맞서신 것이다. 한편 '아니하시더라'라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나타내는 말로, 이는 예수께서 여러 번에 걸쳐 포도주를 마시도록 강요받았음을 시사한다. 즉 이는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라는 시편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27: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비참한 광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재판으로부터 이제까지 진행된 이 사건은 드디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 절정을 향하고 있다. 십자가의 모양에는 +형, T형, X형 등이 있으나 예수님의 경우는 +형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달린 십자가의 머리 위에 죄패가 붙여졌기 때문이다(37절).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 이에 대해서는 요 19:23,24에 상세히 묘사되었다. 따라서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눈 것은 시 22:18의 성취이다. 31절 주석 참조.
27: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 이것은 죄수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죄수를 구해내려는 시도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27:37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 막 15:26에는 '유대인의 왕', 눅 23:38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요 19:19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요한의 기록이 실제 전문(全文)일 것이다. 또 요한에 의하면 이 말은 히브리, 로마, 헬라 세 나라말로 적혀 있었다(요. 19:20). 이 세 나라의 특색을 상기해 보면 주님은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인 견지에서 왕이었다는 것을 그 죄패가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유대인의 왕'이란 이상한 죄목이 주님이 '왕'이시란 사실을(마 2:2) 역설적으로 역사 속에서 실제로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27:38 강도 둘. - 외경 도마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왼쪽에 달린 강도의 이름은 '게스타이'였고, 우편에 달린 강도의 이름은 '데스마이'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바라바의 일당이었다는 추측이 있으나(Carr)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예수께서 강도들 사이에서 못 박히신 것은 사 53:12의 성취라 할 수 있다.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 본절에서부터 44절까지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참관했던 자들의 조롱이다. 특별히 여기서 '머리를 흔드는 것'은 멸시와 조롱의 표현이다(시 109:25). 이러한 참관자들의 예수께 대한 멸시는 시 22:7의 성취이다.
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이 비난은 마 26:61의 반복으로 스데반 정죄 시에도 다시 언급된다(행 6:14). 예수님은 온 인류를 대속하시는 자신의 몸이 성전이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으나 이 비난자들은 그 위대한 진리를 모르고 오히려 조롱거리로 삼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 앞에 '아하'라는 탄식어가 붙어 있어 그 비난의 강도를 더해 주고 있다(막 15:29).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비난자들은 마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마 4:6). 이는 마귀가 끝까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여기 인간들의 구원관에 중대한 과오가 있다. 영혼은 죽어 썩어 가는 데도 사람들은 육체의 안녕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를 중요시하고 이적을 숭앙하는 자들의 가치관이 여기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7:41 그와 같이. - 군중들과 동일하게 산헤드린 공회의 우두머리들도 예수를 향해 똑같은 비난을 퍼부었다.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대제사장 이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행한 수없이 많은 이적들을 듣고 보았을 것이다. 즉 그들은 이것을 빗대어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말 그대로였다. 주님은 남을 구원키 위해 자신을 버리셨던 것이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 '이스라엘의 왕'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보다 보다 함축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이는 '네가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지 않겠는가?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어 주겠다'라는 투의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27: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 본절은 시 22:8의 성취이다. 즉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무심코 예수를 비난하기 위해 조롱하는 말로 이 말을 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다.
27:44 함께 …못 박힌 강도들도. - 그리스도에 대한 조롱은 군병들을 필두로(27-31절), 무리들(39절). 유대 교권주의자들(41절)에서, 이제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에게까지 이어졌다(막 15장 자료노트, '사람들에 의한 예수의 고통'을 참조), 그들은 아마도 무리들의 비난이 예수께 쏟아지자 상대적으로 우월감에 빠져 덩달아 예수를 비난한 듯하다(Robertson). 한편 눅 23:39-43에 의하면 한쪽 강도는 회개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강도들은 한쪽 강도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Angustine).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처음에는 두 강도가 모두 예수를 비난했으나 예수의 거룩하심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인내하심을 보고 감동하여 한편 강도가 회개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7:45 제 육시로부터…구시까지. - 오늘날의 시각으로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오전 9시였으므로(막 15:25), 그 고난의 시간은 6시간 동안이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여기서 온 땅은 지구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유대 땅'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여간 태양 빛의 세기가 가장 강렬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유대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함의 징조라 할 수 있다(출 10:21-23; 암 8:9,10; 벧후 3:10-12). 한편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현상에 대해서는 자연적 현상으로 해석하려는 일부 시도가 있으나 모두 그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막 15:33 주석을 참조하라.
27:46 크게 소리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예수께서는 인성적 생명의 마지막 힘을 다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절규하셨다. 여기서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원문에 보면 마태는 이 절규의 글귀를 히브리음 '엘리'( )로 기록하였으며, 마가는 이것을 아람어 음 '엘로이'( )로 기록하였다(막 15:34).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마가가 예수의 본래 말씀을 기록한 반면, 마태는 유대인 독자를 위하여 히브리 음으로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Williams, Allen). 그리고 '라마사박다니'는 아람어로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막 15:34).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 구속의 대 사명을 위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을 받아야 하는 고통을 겪으셔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보응과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셔야만 하기까지 한 우리 죄의 심각성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본절은 시 22:1의 성취로, 예수의 가상 칠언(架上七言) 가운데 네 번째 말씀이다. 가상칠언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개론, 예수 시리즈 부분 가운데 '예수의 십자가 수난 시각'을 참조하라.
27:47 어떤 이들이… 엘리야를 부른다. - 여기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엘리야를 알았으나 '엘로이'를 '엘리야'로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보아 헬라계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크다(Clarke, Bruce). 엘리야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로(왕 2:9-12) 유대인들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가 다시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인가라고 물었다(요 1:21). 이처럼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말관에 엘리야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외침을 이러한 시각에서 듣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27:48 한 사람이… 신 포도주를 … 마시우거늘. - 요 19:28에서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이 발생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하는 예수께 인정을 베풀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행위를 예수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엘리야가 구원하러 오는가 보자는 악한 의도로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해석은 다음절의 내용과 대치되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어쨌든 이 사건 또한 시 69:21 예언의 성취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해융'은 일종의 스폰지와 같은 것으로 많은 액체를 빨아들일 수 있는 물건이다.
27:49 가만 두어라…구원하나 보자. - 예수께 신포도주를 마시우게 하는 사람에 대해 다른 구경꾼들이 말리고 있다. 여기서 '가만 두어라'는 '물러섰거라', '조용히 해라'는 일종의 명령조의 말로 쓸데없는 짓은 집어 치워라'는 의미이다.
27:50-56 예수의 운명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모욕을 받으시던 예수(32-49절)께서 운명하신 것과 관련된 기록이다. 예수께서는 제삼 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막 11:25) 제 구 시(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46,50절). 따라서 그가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신 시간은 6시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모두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를 가리켜 일명 '가상칠언'(袈上七言)이라 부른다. 이에 대해서는 요 19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몇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①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51절), ②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이 일어난 것이었다(52절).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먼저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하나가 이루어져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시사한다(히 10:19,20). 이와 관련해서는 막 15장 자료노트, '찢어진 성전 휘장'을 보다 참조하라. 특별히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일어난 사건은 장차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표한다(고전 15:51-53).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성도들을 지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아마도 가상 칠언의 제 6언(요 19:30), 제 7언(눅 23:46)을 지칭할 것이다.
영혼이 떠나시다. - 문자적으로 '영혼을 내어 놓으셨다'는 뜻으로, 이는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셨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요 19장 자료노트, '그리스도의 죽음의 10대 특징'을 보다 참조하라.
27:51 성소 휘장이…찢어져 둘이 되고. - 여기서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일년 중 대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날에 단 한 차례 열렸다(출 26:33). 그 크기는 길이가 약 12.5m, 폭 1.8m이며, 주름이 72주름, 두께는 성인의 손바닥 두께 정도였으며, 매우 귀한 재료를 썼다. 어쨌든 이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던 불완전했던 구약의 제사가 끝나고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벧전 2:9)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히 10:19,20). 한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막 15장 자료 노트, '찢어진 성전 휘장'을 보다 참조하라.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지성소뿐만 아니라 성소 밖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함이 일어났다. 이 기록은 본서에서만 보이는데 실제로 이때의 지진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적지 않다(Josephus, Cyril, Africaus).
27:52 무덤들이 열리며. - 51절의 지진으로 인해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굴러 열리게 된 것을 의미한다. 당시 팔레스틴의 무덤들은 자연 동굴이나 파낸 동굴에 시체를 안치하고 둥근 돌로 막아두었다(요 11:38). 하여간 지진으로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에 대해 종지부를 찍은 표시였다(Alford)고 할 수 있다.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 본서의 독특한 기록으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한편 이 사건은 명백히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 대한 징표이다.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 여기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성도들을 부활시키신 것(58절)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 자신의 부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전 15:23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전자의 해석은 성경의 통일성에 모순된다. 따라서 본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는 것이 옳다(Calvin, Bengel, Bruce). 그렇다면 마태는 52절의 성도들의 부활을 예수님의 부활 이전으로 당겨서 기록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아마도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이곳에 미래의 사건을 앞당겨 기록했다고 보여진다.
거룩한 성. - 마 4:5에서와 같이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 이 백부장은 예수의 십자가 형 집행을 맡았던 책임자였다(31절 주석 참조). 마가복음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자가 백부장 한 사람만 이야기되고 있으나(막 15:39) 본서에서는 여러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의 별명이다. 그러나 원문의 본절에는 관사가 없다. 때문에 학자들은 백부장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이 고백을 당시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이 황제, 사제, 군사적 천재 등을 신의 아들로 부른 것과 같은 정도의 고백일 것이라고 추정한다(Meyer). 눅 23:47에 의하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백부장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이셨음을 증거하고자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Alford, Watson, Lenski). 하여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의 입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의 무죄하심을 보여 줌과 아울러 이방 선교의 청신호가 된다 할 것이다.
27:55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 -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증인들이다. 즉 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다 도망친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를 버리지 아니하고 예수의 처형 장소까지 따라와 예수의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그 일에 생생한 증거자들이 된 것이다.
27:56 그 중에. - 주님을 따르던 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될 만한 경건했던 여인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이 여인들에 대해서는 막 15:40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복음서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바 이들에 대해서는 눅 23:49 주석을 참조하라.
27:57-66 예수의 장례
예수의 운명을 언급했던 전 단락(50-56절)에 이어 본문은 예수의 장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신 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예수의 시체를 치워 줄 것을 빌라도에게 요구했다(요 19:31). 그리하여 예수님의 해가 지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려지게 되었는데, 정작 그 장례는 가족이나 제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인물에 의해 거행되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예수를 죽이고자 한 공회의 결의에 반대한 자였다(눅 24:50,51).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게 예수를 따르던 자였으나 이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린 제자들 대신에 예수님의 장례를 치룸으로써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57-60절).
한편 예수님의 장례가 치루어지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이 조작해낼까 두려워하여 무덤을 인봉(印封)하고 파수꾼을 세우는 조치를 취했다(62-66절).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을 입증해 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마 28:1-5).
한편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① 성도들은 평안을 누릴 때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에게 치명적 위해(危害)가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예수님의 추종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공개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방지하거나 부인하기 위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취한 모든 조처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듯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감추려는 사단과 그 추종 세력의 그 어떠한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27:57 저물었을 때에. - 금요일이 저물고 막 안식일이 시작되려는 때다. 로마의 관습에 의하면 십자가상의 시체는 며칠씩 짐승의 밥이 되도록 두었으나, 유대의 관습으로는 밤을 세울 수 없었다(신 21:22,23). 더욱이 이제 곧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죄인의 시체를 속히 장사지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요 19:31-37에 상세히 묘사되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아리마대 부자 요셉…예수의 제자라. -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 예수에 대한 공회의 결의에 반대한 자였다(눅 23:50,51). 이 사람은 부자였고 '의로운 사람' 으로 주님의 제자들도 그를 자기들과 같이 예수의 제자라고 부를 정도로 신앙이 좋았다. 아마도 사 53:9의 예언은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씀일 것이다. 한편 아리마대는 일반적으로 사무엘의 고향인 에브라임산지 라마다임 소빔(삼상 1:1)으로 알려져 있다(Alford, Carr).
27:58 빌라도에게 가서. - 지금까지는 은밀하게 예수를 좇던 아리마대 요셉(요 19:38)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보고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고는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막 15:43) 로마법의 관례대로 사형수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실로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다 할 수 있다.
예수의 시체를 달라. - 유대인으로서 또한 공회 의원으로서 그는 율법을 준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장사지내도록 이끌었다. 그는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요구하였고, 다른 사악한 공회 의원들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았다.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 로마법에 의하면 사형수를 십자가에 그대로 두었으나, 그 시체를 장례지내겠다는 청원이 있으면 허락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던 빌라도는(눅 23:14) 순순히 시체를 내어 주었을 것이다.
27:59 정한 세마포로 싸서. - 세마포는 아마로 만든 질 좋고 깨끗한 천으로 당시 부유한 자들이 옷을 맞들어 입던 천이었다. 요셉은 이 세마포를 내고 니고데모는 향품을 내어(요 19:39) 갈갈이 찢기워졌을 주님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정돈하여 동행했던 자원자들과 함께 장례를 치루었을 것이다.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 - 팔레스틴 지방은 바위를 파 굴을 만들고 그 안에 시체를 안치한다. 여기서 새 무덤이란 아직 시체를 넣지 않은 무덤이란 뜻으로 다른 시체가 없었으므로 오직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되며, 또 주의 몸이 썩지 않는 안치소로 적합한 장소(행 2:27)였다. 요한에 의하면 이 무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 골고다 언덕에 위치했다(요 19:41).
큰 돌을…놓고 가니. - 마태만이 큰 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준비한 것 같다. 이 '큰 돌'은 무덤의 대문으로 '골랄'(golal)이라 불렀다.
27:6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56절)를 지칭한다. 이들은 애달픈 마음으로 주님의 무덤을 향해 앉아 주님을 지켰다. 참으로 주님을 끝까지 지켜 본 사람들은 당시 유대에서는 천대받던 이러한 여인들이었다.
27:62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 - 이날은 니산월 14일, 즉 안식일인 동시에 유대인의 명절 중 가장 으뜸가는 명절인 유월절이었다. '예비일'은 유월절의 전날을 가리킨다.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 예수를 죽인 다음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날이 유월절이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빌라도 총독의 관저에 모여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어떤 모의가 있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27:63 저 유혹하던 자. -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성도들의 입장과 인류적 견지에서는 구세주였지만, 제도적 기득권 내에 있는 자들에게는 유혹하는 자로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잊고 다 도망갔는데 이들은 주님의 부활의 말씀(마 12:40; 16:21; 17:23; 20:19)을 기억하고 그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미움은 사랑보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격언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27:64 분부하여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 유대인들은 총독의 허락 없이는 독자적 행동이 불가능했으므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병력으로 무덤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여기서 '사흘까지'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는 평소에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했던 까닭에 만일 사흘이 지나도록 그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위선자요, 사기꾼으로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만에 하나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도둑질하여 갈까하여 무덤을 사흘 동안 지키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 63절에 사용된 '유혹'(플라네)과 같은 용어로 그러한 사기극이 더 기승을 부릴까 염려된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악한 자들의 예감 또한 예리하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기독교는 온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사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27:65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을 직설법이 아닌 현재 명령법으로 본다. 직설법으로 보면 글자 그대로 해석이 가능하나 유대인들에게는 군대가 없었으므로 모순된다. 그래서 이를 명령법으로 보아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너희가) 지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Bengel, Carr, Johnson).
27:66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 무덤을 인봉하는 작업은 먼저 무덤의 입구를 큰 돌로 막은 다음 그 돌을 밧줄로 매어 무덤과 연한 후 밧줄의 중앙 및 양 끝을 흙이나 밀랍으로 칠해 그 위에 인을 찍었다. 따라서 무덤에 조그마한 이상만 있어도 즉시 발각되고 만다. 하지만 추악한 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은 결코 막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들의 행위는 예수의 부활을 확증해 주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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