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 인쇄소를 다니던 아빠는 퇴직금을 싹싹 털고 은행 빚까지 내어 고덕동 주택가에 치킨 집을 개업했다.
엄마 아빠는 오전 일찍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밤 12시가 다돼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가게와 집의 거리가 100미터 남짓 짧았기에 엄마는 수시로 집과 가게를 오가며 우리를 보살폈지만, 여섯 살 동생과 서로 의지하며 잠들어야 했던 그 밤들은 몹시 슬프고 무서웠다. 우리 자매는,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몇 번씩 확인하고 LA아리랑(당시 밤 9시쯤 매일 방영되던 시트콤)을 크게 틀어 놓은 채, 방마다 불을 환히 켜놓은 뒤에야 겨우 잠 들 수 있었다.
치킨 집을 개업한지 한 달 좀 지났을 무렵, 일 년 중 손꼽히는 대목인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30년 전엔 지금처럼 외식메뉴가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자나 치킨을 배달시켜 먹으며 가족끼리 휴일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당시 ‘어린이 날’과 ‘크리스마스’는 치킨 집 전화기에 불나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은 1년 중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엄마는 쉴 새 없이 닭 튀겨냈고, 아빠는 헬멧을 벗을 새도 없이 바쁘게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녔다. 그런 날에 엄마는, 짜장면을 배달시켜주거나 국밥을 포장해 다가 후루룩 말아 먹이고, 내 품에 오예스와 봉지과자를 잔뜩 사다가 안겨주고 나서 다시 가게로 서둘러 나갔다.
반짝이는 트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따스하고 포근한 집안 공기.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어 쿠킹호일로 끝을 감싼 뒤 아이의 손에 쥐어주며 웃는 부모들. 하나같이 우리가족과는 먼, 여느 집 크리스마스의 풍경이었다.
“엄마, 오늘은 몇 마리 팔았어?”
잠이 들었다가도, 차가운 바람과 기름 냄새를 가득 품고 들어오는 엄마의 기척에 졸린 눈을 비비며 묻는 우리들.
8000원짜리 통닭을 40마리, 50마리씩 팔고 집으로 돌아온 날엔 엄마의 목소리에 흥이 묻어있었고 나도 내 동생도 다시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어린 우리 자매의 밤은 두렵고 무서웠지만, 장사가 잘 되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그 정도의 공포쯤은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게 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홉 살과 여섯 살이었다.
치킨 집 딸들의 두 번째 크리스마스 날. 밤 12시가 다돼서야 돌아온 엄마 아빠가 갑자기 우리를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밤늦게까지 문을 연 돼지 갈비 집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노릇하게 구워낸 고기를 잠이 덜 깬 우리 입속에 쏙 넣어 주던 날.
반은 꿈속, 반은 현실 속에서 맛본 그 돼지갈비는 참 달콤했고 맛있었고 부드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는 내 동생을 등에 업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 딸이 잘 되라고 행복하라고…….”
그의 애창곡, ‘아빠의 청춘’이었다.
다섯 살 딸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하면서 그때를 생각했다.
치킨을 튀겨내며 엄마가 보았을, 부모와 함께 외식하러 나온 내 또래 아이들의 미소. 배달을 하며 아빠가 느꼈을 어느 집의 따스하고 포근한 공기...
그 날 엄마가 내 품 가득 안겨주고 갔던 봉지 과자들과 늦은 밤 억지로 깨워 입에 넣어줬던 돼지갈비, 그리고 겨울 공기를 가득 머금은 아빠의 등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엄마 아빠의 마음이었음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 간다.
크리스마스 무렵 썼는데 이제서야 올리네요.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
첫댓글 저도 그런 추억의 아빠 노래가 있죠. '울고넘는 박달재' ...^^
잠이 덜 깬 눈썹달이 고기를 씹는 모습이 상상되네요